<8회> 정임합목 양생하우스 반려식물들을 소개합니다

루틴
2023-10-01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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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壬) 루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대학원에서 10년을 세포만 쳐다보며 지냈다.

졸업 후 방황하다가 문탁에서 정화(丁) 무사와 사주명리를 만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요즘이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나 역시 궁금하다.

 

 

정임합목 양생하우스 반려식물들을 소개합니다

 

 

 

0. 인트로 : 방울토마토 가위질 대환장 파티

 

임수 : 정화야.. 정화야.. 방울토마토가 이상해진 거 같아. 내가 사고 쳤나봐ㅠ

정화 : (자고 있다가) 어? 방울토마토가 왜?

임수 : (핸드폰을 들이밀며) 이렇게 잘라주면 된다고 했는데~ 이상하다. 이리와봐

(방울토마토 앞에 모여) 정화 : 어..어.. 이거 좀 이상한데??

 

  정임합목의 ‘방울토마토 가위질 대환장 파티’ 사건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정화가 밤샘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잠든 휴일 아침, 임수는 베란다에 심은 지 한 달 정도 된 방울토마토 모종의 곁순*을 제거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처음 해보는 작업이라 긴장도 했지만 어느새 과감한 가위질이 이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인터넷에서 봤던 곁순치기와 사뭇 달라보였다. 순간 등짝이 오싹해졌고 큰 사고를 쳤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바로 정화를 깨워서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식물과 그리 친하지 않은 정화도 이상하다는 걸 한 번에 감지했다. 곁순이 아닌 원줄기를 모두 잘라서 외목대 방울토마토를 만든 것이다. 식물분자생물학 학위는 초보 식집사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무용지물이었다.

  관심이 지나쳐서 반려식물들을 무지개 다리로 몰아넣기도 했고, 바쁠 때는 물주는 것조차 버거웠던 식집사 생활이 거의 4년이 되어간다. 꼬맹이 시절부터 청년기, 노년기를 향해가고 있는 식물들과 나이를 알 수 없는 업둥이들, 그리고 인지하지 못했지만 함께 살고 있는 생명체들까지 정임합목 양생하우스 가든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번 연재에서 그 반려식물들과 작은 생명체까지 소개하고 싶다.

 

  (좌) 방울토마토 가지치기 전 (중) 가위질 대환장 파티의 결과물 (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진 시련 이겨내고 성장한 드래곤볼  

 

                                                                곁순* : 식물의 잎 겨드랑이에서 생기는 싹

 

1.  아보카도 씨앗에서 싹을 올리다.

 

   회사 동료 한분이 아보카도 씨를 심는 모습을 보고 호기심에 어릴 적 강낭콩을 키우듯이 먹고 남은 아보카도 씨를 심어보기로 했다. 요즘은 인터넷에 검색하면 키워본 사람들의 친절한 설명글을 볼 수 있 다. 아보카도의 씨앗을 발아시키기 위해서는 입구가 넓은 플라스틱 병과 이쑤시개, 그리고 씨앗만 있으면 된다. 씨앗에 십자가 모양으로 이쑤시개를 꽂고 입구가 넓은 플라스틱 병에 걸쳐놓는다. 씨앗이 반쯤 물에 잠기도록 둔다. 그리고 기다림의 시간이다. 딱딱한 씨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물렁한 물성을 가진 아보카도 씨는 2~3주를 기다리면 새싹이 올라온다고 한다. 2주쯤 되었을까? 새싹보다 먼저 굵은 뿌리가 씨앗의 중앙을 가르고 쭉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새싹이 나기만을 기다리면 되었다.

   기다림의 시간은 초보 식집사에게는 변수의 시간이다. 어느 날 밤, 임수는 불을 끈 채로 거실 창을 닫다가 아보카도가 담긴 플라스틱 병을 쏟았고 아보카도 씨앗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다행히 뿌리는 다치지 않았고 한쪽에 달라 붙어있었다. 기지발휘를 잘하는 정화는 임시 봉합해서 흙에 묻자했다. 일주일 후, 쪼개진 씨앗 각각에서 두 개의 새싹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성장도 번갈아가며 했다. 양분을 서로 나누는 느낌이었다. 초보 식집사의 우연한 실수는 한 개의 씨앗에서 두개의 개체를 얻는 행운으로 이어졌다. 지금은 누구보다도 풍성한 아보카도로 잘 자라고 있는 중이다.

 

                         (좌) 쪼개진 아보카도 씨앗 사이로 자란 아보카도 새싹 (우) 두 줄기로 나뉜 아보카도

 

2. 휘커스 움베르타와 여인초, 정임합목 양생하우스와 함께 성장하다.

 

    2020년 5월쯤 정임합목 양생하우스가 시작됐다. 그 당시 임수네 집에 있던, 어른인 반려식물들 말고 우리의 출발과 함께 할 반려식물을 새롭게 들이고 싶었다. 정화는 대형식물을 좋아하는 편이다. 정화는 트위터에서 본 멋진 대형식물 사진들을 보내왔다. ‘휘커스 움베르타’와 천장을 찌르고 있는 대형 ‘여인초’였다. 큰 대형식물을 처음부터 살 수 도 있었지만 우리의 시작처럼 작은 식물에서 큰 어른 식물로 키워보고 싶었다. 그 길로 화원으로 달려가 어린 휘커스와 여인초를 데리고 왔다. 그 시기쯤 정화는 방울토마토 가위질 대환장 파티사건을 팟캐스트 사연으로 보냈고, 사은품으로 비싼 듀 **숑 토분을  받아왔다. 임수는 여인초를 토분에 예쁘게 옮겨 심었고 그렇게 초보 식집사 생활이 시작됐다.

    휘커스와 여인초는 그 해 여름, 푸른 잎을 연속해서 내며 성장했다. 그리고 겨울, 성장을 멈췄다. 식물입장에서는 당연한 순차였다. 알면서도 성장을 멈춘 식물들이 궁금해졌다. 정화는 기다려보자고 했다. 하지만 임수는 식물들 옆을 계속 서성이다가 메말라 보이는 새순 봉우리를 만지작거렸고, 새순 봉우리가 톡하고 떨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번에도 임수의 과유불급이 문제였다. 새순 봉우리가 잘린 휘커스는 그 다음해 여름이 되어도 새잎을 내지 않았고 그렇게 1년 넘게 성장을 멈췄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해 보였다. 마을 약사이자 식물 전문가인 둥글레샘 집으로 요양을 보냈다. 둥글레 약사님은 새로운 새순 봉우리를 만들기 위해 가지치기를 시도하셨고 이번엔 제대로 된 가위질로 휘커스를 되살렸다. 휘커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성장이 주춤했던 여인초도 영양가 좋은 흙으로 분갈이를 해주자 다시 성장을 하기 시작했다.

    정임합목 양생하우스가 티격태격하면서 서로의 합을 맞춰가는 동안 휘커스와 여인초도 아동기를 지나서 이제는 어엿한 청소년기로 접어들었다. 새로 이사온 보금자리는 해도 잘 들고 판상형 구조라 통풍이 잘 되는 곳이다. 특히, 올 여름에는 퇴직한 정화가 집을 가꾸면서 매일 환기를 하고 계절에 따라 식물들의 위치를 변경시켜주고 잔잔한 관심을 기울여주었더니, 반려식물들도 안정감 속에서 우리와 함께 성장하고 있는 느낌이다. 어떻게 대형식물이 되어갈지 궁금해진다.

 

                            (좌) 휘커스 움베르타와 듀**송 화분에 심긴 여인초 (우) 폭풍 성장 중인 휘커스 움베르타

 

 

3. 오래된 반려식물들을 살피다.

 

   정임합목 하우스에는 연식을 확인 할 수 없는 오래된 반려식물이 두 개체 있다. 임수의 어머니가 예전부터 키우시던 식물이다. 금전수와 산세베리아다. 특이할 게 없는 평범한 종이다. 임수는 어머니의 죽음 후 정신적으로 피폐해졌다. 오로지 본인의 감정에만 빠져 있었고 혼자 생활을 하다 보니 집에 생명체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금전수와 산세베리아를 오래된 가구쯤으로 여겼다. 물을 거의 2년 가까이 주지 않았다. 임수의 생활이 엉망이 되는 동안, 오래된 반려식물의 보금자리는 딱딱하게 굳어져갔고 식물들은 말라갔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돌아봤을 때 커다란 화분에 덩그러니 몇 개의 줄기만이 남아있는 식물들을 발견하였다. 다행히 금전수와 산세베리아는 가뭄에 강한 식물이었고 임수가 모른 채 하는 동안에도 죽지 않고 살아 남아주었다.

   엉망이던 생활을 하나씩 바꾸어가던 시점, 오래된 반려식물이 드디어 눈에 들어왔다. 대대적으로 분갈이를 시도했다. 묵은 흙을 걷어내고 포근한 새 흙으로 갈아줬다. 임수는 마치 자신의 보금자리가 바뀐 것처럼 안정감이 들었다. 다른 생명체를 돌본다는 것은 곧 자신을 돌보는 행위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 다른 누군가와 함께 살 마음의 준비를 하는 단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분갈이 후, 1년이 지나고 드디어 새 줄기가 몇 가닥 올라왔고 2년이 지난 시점에는 거친 생명력을 내뿜으며 폭풍성장을 했다. 임수 어머니의 부재로 인해 생명력을 잃었던 식물들이 다시 생명력 있는 반려식물로 환골탈태를 거듭했다. 그들이 폭풍성장하는 동안에 정임합목 양생하우스가 탄생했고, 우리는 모두 한 가족이 되었다. 3년이 되던 시점인 작년에는 산세베리아가 귀한 꽃을 피웠다. 진한 백합향이 온 집안을 가득 매웠다. 해피님(정화 어머니)은 산세베리아 꽃이 피면 좋은 일이 생긴다 하셨다. 그 무렵 정임합목 양생하우스는 더욱 안정적인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반려식물들과 함께 이사를 했다.

 

          (좌) 분갈이 후 1년이 지난 시점, 금전수 (우) 분갈이 후 3년이 지난 시점, 야성미 넘치는 산세베리아와 금전수

 

4. 유기 식물들, 날아온 버섯 그리고 톡토기

 

    회사에는 관리팀에서 직접 구입한 대형식물들과 직원들이 키우던 작은 식물들이 꽤 있었다. 관리팀은 대형식물들을 사놓기만 하고 관리하지 않았고, 직원들은 키우던 작은 식물들을 버린 채 퇴사를 했다. 다행히 청소하시는 여사님이 식물을 좋아하시는 분이셨고 물도 주고 위치를 옮겨가며 부족한 햇빛도 쬐어주고 때때로 분갈이도 해주셨다. 분갈이를 거듭할수록 자손들이 늘어났고 회사 베란다는 식물들로 가득찼다. 문제는 여사님이 건강상의 이유로 일을 관두셔야했을 때 발생했다. 회사에서는 여사님이 그만두시면 식물들을 모두 처분하겠다고 했다. 여사님은 그동안 공들여 키웠던 아이들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것은 볼 수 없으셨던거 같다. 집으로 데리고 갈 여건도 되지 않으셨기에 새로운 주인이 될 사람을 물색하셨다. 그 중에 한명이 임수였다. 이전에도 임수에게 소개팅을 주선하려 하셨지만 결국엔 남자대신 식물을 중매해주셨다. 결국 콘플랜트(옥수수를 닮았음, 학명:Dracaena fragrans cv. Massangeana) 대형식물 하나와 여러 작은 화분들이 정임합목 가든에 업둥이로 들어왔다.

 

                                                                                유기될 위험에 처했었던 콘플랜트 

 

     정임합목 양생하우스에 업둥이로 들어온 아이들은 유기 식물들뿐만이 아니었다. 가을치고는 많은 비가 내리던 9월 중순쯤, 스킨답서스 화분에 노란색 생명체가 눈에 띄었다. 가까이 가니 강렬한 향에 단번에 버섯임을 알아챘다. 바람에 날아왔거나 아침 산책길에 옷에 묻어서 같이 들어온 모양이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노란각시버섯(Leucocoprinus birnbaumii)이었다. 임수는 포자가 날리면 다른 식물들에게 피해가 될 테니 뽑아 없애야겠다고 말했다. 그에 반해 정화는 너무 귀엽다며 많이 해롭지 않으면 두고 보자고 했다. 검색을 해보니 노란각시버섯은 식물에게 해롭기보다는 식물이 쓸 수 없는 유기물을 쓸 수 있게 바꿔주는 버섯이었다. 다음날, 수줍게 다물고 있던 노란각시버섯이 갓을 펼쳤다. 하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같은 날 저녁이 되어서는 시들해졌고 그 다음날에는 생명력을 잃어갔다. 포자가 퍼지면서 다른 식물에게 피해를 주면 어쩌나했던 임수의 걱정은 기우였다. 건조해지는 가을이었고, 특히 아파트 베란다는 버섯이 자랄 수 있는 습한 환경이 아니었다. 생존 환경이 맞지 않자 버섯은 자연스럽게 자취를 감췄다. 미리 겁에 질려 단칼에 없앨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기다려보길 잘했다 싶었다. 기다리는 삶의 기술을 배우고 있을 것일까?

 

                                                                      스킨답서스와 공생하는 노란각시버섯

 

    이렇게 잠깐 스쳐가는 인연들 말고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 함께 살고 있는 생명체들도 있다. 화분에 물을 줄때면 그 존재감을 알게 되는 벌.레.들. 건드리면 톡하고 튄다하여 ‘톡토기’라 부른다. 너무 작아서 손으로만 쓰윽 건드려도 죽는다. 이 ‘톡토기’는 방치해뒀던 오래된 금전수 화분에서 처음 발견했었다. 그 당시 임수는 자신의 소중한 보금자리에 침범한 벌레를 해충이라고 생각했다. 식물은 물론 인간에게도 해로웠을 살충제를 마구잡이로 뿌려 박멸시켰다. 하지만 이번에 ‘톡토기’를 마주했을 때는 살충제를 꺼내 들지 않았다. 이름이 궁금해졌고 시간을 두고 바라보게 되었다. 함께 해도 무해함을 알았고 오히려 흙을 옥토로 만들어 식물에게 도움을 주는 익충이었다. 반려식물을 키운다는 것은 식물뿐 아니라 뜻하지 않았던 다양한 생명체들과의 공거를 의미한다.

 

   이외에도 다육이, 선인장, 미니염좌, 블랙 벨벳, 버킨, 로즈마리, 애플민트 등등.. 함께 살고 있는 반려 식물들이 많다. 개별적인 사건이지만 반려식물들과 맺었던 시간을 떠올려보니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가 더 깊게 다가온다.

 

                                              허리 아픈줄 모르고 반려식물들을  모아놓고 물을 주는 임수의 등짝

 

p.s.) 예전에 찍었던 반려식물들 사진이 담긴 핸드폰이 망가지면서 살리지 못했다. 그래서 사진이 몇점 없다ㅠㅠ 

 

 

댓글 7
  • 2023-10-02 09:11

    넘 재밌어요
    애들 한명 한명의 히스토리가 살아있어서 읽는 게 즐겁습니다^^

  • 2023-10-02 09:22

    오~ 저는 정임합목의 반려식물들보다 노란각시버섯에 먼저 눈이 갑니다.ㅋㅋㅋ
    정임합목하우스는 정화와 임수만이 아니라 다른 종의 식구들이 들고 나며 서로를 돌보는 집이 되어 가고 있군여..^^

  • 2023-10-02 10:09

    아~ 방울토마토 가위질 대환장파티 이후 눈물을 글썽거리던 임수가 떠올라 아련해지네요~

    그 방울이는요. 2021년 4월 16일(세월호 7주기)에 데려온 노랑방울이었거든요. 그래서 더더욱 속상했답니다. 모진 시련을 견디고 무럭무럭 자라 드래곤볼이 되어준 기특한 노랑이와 그 노랑이를 길러준 햇살과 바람과 물, 응원해주신 샘들, 그리고 무엇보다 곡진히 애쓴 임수에게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 2023-10-02 11:27

    우와~ 식물들이 글케 많았었나? 사연들이 재밌네요~~~ 물주고 있는 임수 옆 홍콩야자! 약국 개업선물로 들어온 걸 가지치기해서 분양한 건데 크게 잘 키웠네요~ ^^

    • 2023-10-02 14:43

      앗~~!! 마자요~ 홍콩야자 엄청 컸어요~ 글마무리를 급하게 하느라 빠뜨렸어요~
      홍콩야자 서운하겠네~!!
      작년겨울이후 더 늘었고 폭풍성장해서도 해서 풍성해졌어요~^^

  • 2023-10-02 17:21

    저는 어제 마구마구 자라버린 화분들의 가지치기를 싹둑하고 났는데 이런 글을 보네요. ㅜㅜ
    남의편은 누가 가을에 가지치기를 하냐며 타박이고.

    맞아요. 식물을 만질때 제일 좋지요...

  • 2023-10-03 21:10

    식구들이 많구만요.
    우리집 못지 않네요 ㅎㅎㅎ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나와 당신의 책임   10년 전,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쓰인 멋진 슬로건들을 생각하고 있자면, 만든 이를 찾아가 박수를 쳐 주고 싶어지곤 한다.전기를 소비하는 곳에는 책임이 있다. 전기를 생산하고 송전하는 곳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다. 그 책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슬로건이 있었다 .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또,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였던 송전탑 반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데에 기여했던 슬로건도 있다.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   누군가가 당사자이고, 누군가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규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에너지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말이다. 이 슬로건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운이 좋게도 끝없이 확장되는 사회 운동을 경험했다. 설령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밀양이 아니더라도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밀양은 졌다. 높이 100m짜리 송전탑은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다. 밭일을 할 때도, 병원을 가기 위해 마을 길을 걸을 때도, 캄캄한 밤 안방 창문에서도 쇳덩어리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낮 쇳덩어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저 철탑에는 핵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흐른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아도, 마주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송전탑에는 돈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을 공동체의 상처가 묻어 있다. 38만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사람을 짓밟았던 폭력의 상처, 함께 싸우다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 2014년, 2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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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어진
2024.05.10 | 조회 161
일상명상
덕밍 아웃, 그 후   지난 글에서 호기롭게 덕밍 아웃을 했지만 명상에 빠져든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던 것은 아니다. 명상에 빠진 것은 결과지 이유는 아니니까. 하여 명상이 처음부터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친구와 같다고 했지만 정작 누군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면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그냥 좋으니까 좋았다는 식의 동어 반복을 되풀이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언가에 꽂힐 때 그 이유를 다 알아서는 아닌 것 같다. 우연히 어떤 것에 마음이 불꽃처럼 호응할 때 그저 속절없이 빠져드는 게 아닐까. 처음엔 빠져든 이유를 잘 모르는 터라 경우에 따라 ‘입덕 부정기’를 겪기도 하면서 말이다. 대개는 빠져든 다음에야 그 이유를, 스스로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발견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이유 덕분에 다시 그 대상을 더 깊이 애정하게 되는, 다이내믹한 순환이야말로 덕질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지.     나도 명상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른바 덕질의 묘미를 맛보고 있다. 명상이 뭔지도 모르고 매달리듯 빠져들었다가 이제야 차츰 명상이 뭔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명상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들에, 그렇거나 많이 휘둘리고 있는 줄 몰랐다. 그 때문에 명상을 통해 처음 경험했던 침묵과 평온이 그토록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는지도. 만약 명상이 아니었다면 일 년 365일, 꺼지지 않는 텔레비전처럼 소란스런 정신적 수다 때문에 괴롭다는 걸 영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그 순전한 무지에서 벗어난 순간, 마치 세상의 비밀을 다...
덕밍 아웃, 그 후   지난 글에서 호기롭게 덕밍 아웃을 했지만 명상에 빠져든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던 것은 아니다. 명상에 빠진 것은 결과지 이유는 아니니까. 하여 명상이 처음부터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친구와 같다고 했지만 정작 누군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면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그냥 좋으니까 좋았다는 식의 동어 반복을 되풀이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언가에 꽂힐 때 그 이유를 다 알아서는 아닌 것 같다. 우연히 어떤 것에 마음이 불꽃처럼 호응할 때 그저 속절없이 빠져드는 게 아닐까. 처음엔 빠져든 이유를 잘 모르는 터라 경우에 따라 ‘입덕 부정기’를 겪기도 하면서 말이다. 대개는 빠져든 다음에야 그 이유를, 스스로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발견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이유 덕분에 다시 그 대상을 더 깊이 애정하게 되는, 다이내믹한 순환이야말로 덕질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지.     나도 명상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른바 덕질의 묘미를 맛보고 있다. 명상이 뭔지도 모르고 매달리듯 빠져들었다가 이제야 차츰 명상이 뭔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명상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들에, 그렇거나 많이 휘둘리고 있는 줄 몰랐다. 그 때문에 명상을 통해 처음 경험했던 침묵과 평온이 그토록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는지도. 만약 명상이 아니었다면 일 년 365일, 꺼지지 않는 텔레비전처럼 소란스런 정신적 수다 때문에 괴롭다는 걸 영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그 순전한 무지에서 벗어난 순간, 마치 세상의 비밀을 다...
오영
2024.05.09 | 조회 146
K장녀_돌봄을 말하다
          언젠가 엄마의 구술 생애사를 써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엄마의 삶을 기록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엄마의 삶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녀딸이 인터뷰를 시작하긴 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진행을 못해서 좀 아쉽다. 이렇게 빨리 엄마가 기억을 잃고 이야기를 못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산업화세대 워킹맘   10년 전쯤 아버지가 대장암 재발로 병원에 오래 입원해 계실 때 엄마는 병원간호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혈관이 잘 안 나오는 아버지에게 혈관 주사를 놓으려면 꽤나 힘이 들었는데 엄마가 곧잘 혈관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1935년생인 엄마는 간호사이자 조산사였다. 엄마가 간호사 면허번호를 말하면(0000번 대) 간호사들(면허번호 000000번 대)은 깜짝 놀라며 ‘선배님’이라 불렀다. 엄마는 은근히 그걸 즐기는 듯했다.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하던 엄마는 결혼하면서 그만두었고, 시골학교 교사인 아빠의 고향에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걸 도왔다고 했다.   엄마는 의대에 가고 싶었다. 중학생 때 친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들어오셨는데 엄마가 의대 가는 걸 반대해서 간호학교에 갔다. 동생인 삼촌 두 분은 의사다. 엄마 세대, 즉 산업화 세대에 많은 딸들은 아들들을 위해서 진학을 포기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남동생을 위해 희생한 누나들. 엄마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딸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의대에 갈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 또래는 대부분 형제가 4~5명 정도 된다. 유독 우리집은 형제가 오빠와...
          언젠가 엄마의 구술 생애사를 써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엄마의 삶을 기록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엄마의 삶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녀딸이 인터뷰를 시작하긴 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진행을 못해서 좀 아쉽다. 이렇게 빨리 엄마가 기억을 잃고 이야기를 못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산업화세대 워킹맘   10년 전쯤 아버지가 대장암 재발로 병원에 오래 입원해 계실 때 엄마는 병원간호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혈관이 잘 안 나오는 아버지에게 혈관 주사를 놓으려면 꽤나 힘이 들었는데 엄마가 곧잘 혈관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1935년생인 엄마는 간호사이자 조산사였다. 엄마가 간호사 면허번호를 말하면(0000번 대) 간호사들(면허번호 000000번 대)은 깜짝 놀라며 ‘선배님’이라 불렀다. 엄마는 은근히 그걸 즐기는 듯했다.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하던 엄마는 결혼하면서 그만두었고, 시골학교 교사인 아빠의 고향에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걸 도왔다고 했다.   엄마는 의대에 가고 싶었다. 중학생 때 친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들어오셨는데 엄마가 의대 가는 걸 반대해서 간호학교에 갔다. 동생인 삼촌 두 분은 의사다. 엄마 세대, 즉 산업화 세대에 많은 딸들은 아들들을 위해서 진학을 포기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남동생을 위해 희생한 누나들. 엄마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딸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의대에 갈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 또래는 대부분 형제가 4~5명 정도 된다. 유독 우리집은 형제가 오빠와...
인디언
2024.05.07 | 조회 290
기린의 걷다보면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기린
2024.05.06 | 조회 173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 2편           동물의 의례   초코는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고 햇볕을 쬐다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왼쪽 뒷다리는 굽어 있었고 굽은 다리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는 다친 다리를 허공에 들고 걸었다.   초코는 골절된 다리로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초코를 치료하기 위해 포획틀을 설치했지만, 초코 대신 엉뚱한 고양이가 들어왔다. 봉봉오리님은 포획틀에 갖힌 초코의 단짝 고양이 카레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속 터지는 희극'이라고 했다. 『지구에 살 자격』에는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재개발구역에서 돌봄하는 것이 무조건 슬플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마냥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재개발구역이 조금 이상한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다. 나는 그곳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를 돌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내염을 오래 앓아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카레의 곁에는 늘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초코가 있다. 둘은 추운 날 하나의 겨울 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몸이 관통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던 8개월의 오잉이는, 피를 흘리며 몸을 숨겼던 일주일 간의 시간 동안, 혀가 닿지 않는 그의 상처를 핥아준 형제들이 있었다. 『지구에 살 자격』, 145쪽   밥그릇...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 2편           동물의 의례   초코는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고 햇볕을 쬐다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왼쪽 뒷다리는 굽어 있었고 굽은 다리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는 다친 다리를 허공에 들고 걸었다.   초코는 골절된 다리로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초코를 치료하기 위해 포획틀을 설치했지만, 초코 대신 엉뚱한 고양이가 들어왔다. 봉봉오리님은 포획틀에 갖힌 초코의 단짝 고양이 카레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속 터지는 희극'이라고 했다. 『지구에 살 자격』에는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재개발구역에서 돌봄하는 것이 무조건 슬플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마냥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재개발구역이 조금 이상한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다. 나는 그곳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를 돌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내염을 오래 앓아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카레의 곁에는 늘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초코가 있다. 둘은 추운 날 하나의 겨울 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몸이 관통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던 8개월의 오잉이는, 피를 흘리며 몸을 숨겼던 일주일 간의 시간 동안, 혀가 닿지 않는 그의 상처를 핥아준 형제들이 있었다. 『지구에 살 자격』, 145쪽   밥그릇...
경덕
2024.05.01 | 조회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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