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지지 않으려고 쓴다

꿈틀이
2023-09-16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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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행복’이라는 단어 조차도 잘 모를 때,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라는 생각을 가진 대상이 있었다. 우리집 근처의 작은 울타리가 세상의 전부였던 나에게 초등학교 입학 후 만난 한 친구가 가진 모든 것은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름도 예뻤던 지영이라는 그 아이의 부모님은 학교 근처의 “ oo상회”, 지금으로 치자면 제법 큰 마트를 운영했다. 준비물이 있는 날이면 “oo상회”는 문전성시를 이루고, 학생들부터 동네 사람들 모두가 그 집에서 판매하는 물품의 절대적 수요자였다. 학용품, 공산품, 반찬재료들, 심지어 간단한 의류까지, 없는 것이 없었던 그 친구의 집은 내가 생각하기엔 유토피아, 천국 같았다. 물론 장사와 가사일을 모두 도맡아하던 친구의 어머니의 노고에 대해서, 동네 한량이었던 그녀의 아버지에 대해서 뒤늦게 생각한 바는 있었지만, 나는 그녀가 제일 행복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또래 중 유일하게 피아노를 소유하고, 그 악기를 다룰 줄 알았던 친구, 철이 들자 공부도 잘했고 키도 크도 예뻤고 인기도 많았던 그 아이. 나는 그녀처럼 살아보는게 꿈이었다. 하지만 중학교 몇학년 때인가.. 그녀와 제법 가깝게 지냈던 나는 그 친구의 은밀한 비밀에 대해 알아버렸다. 아버지에게 맞아서 온몸에 멍이 들었다는 고백을 들었고 성숙한 외모 때문에 동네 남자 선배와 어른에게 몇 번의 성추행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내가 어떤 말을 해주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녀도 좀 불행하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녀의 불행을 들었다고 해서 ‘행복’의 대상을 찾고 있던 내 마음이 변한 건 아니었다. 나는 줄곧 나는 소유하지 않았지만 누군가는 가지고 있는 환경과 정서적 안녕에 대해서 선망했고 부러워했다. 나도 행복열차의 한 칸을 차지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야 했고 목적지가 어딘지 모르지만 달려야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낳은 아이들도 질주하는 행복의 속도에 탑승시키기 위해 일종의 히스테리를 부리기도 했다.

 

‘행복열차’에서 과감하게 하차하게 된 것은 막스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문예출판사>을 읽고 한 편의 에세이를 완성하고 난 후였다. 당시 중학생이던 딸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나는 감정적으로 심각한 상태였다. 학교 공부는 물론이고 학원숙제도 하지 않고, 서투른 얼굴 화장을 하며 내 속을 긁어 놓던 딸아이는 딴 세상에서 온 사람 같았다. 그녀는 나름 학교 친구들과의 문제로 힘들고 불안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나는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은 딸아이를 다그치는데 급급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딸을 보면 막연히 불안하고 화가 났던 것 같다.

막스베버는 책에서 ‘구원’ 받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이 직업의 소명의식과 맞물리면서 축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미덕이 아니라 규범으로 자리잡은 과정을 설명하였다. 사실 이 정신은 자본주의의 생산력을 추동하는 중요한 촉매제이다. 멈춰있지 않고 무언가를 계속 생산하여 이윤을 추구하는 시스템과 나의 불안은 닮은 꼴로 질주하고 있었다. 나는 시간을 아끼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선’이라고 생각했었고 그렇지 않은 딸은 선을 행하지 않는 존재로 규정했다. 행복하고 안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계산방식. 충분한 축적과 성실한 삶은 머지 않은 미래에 안전지대를 확보하기 위한 ‘선’한 투자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행복’은 저 멀리 내가 가지지 못한 그 무엇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국의 칼뱅주의자들이 막연한 ‘구원’의 대가로 시간을 아끼고 돈을 벌고 축적해야 된다는 믿음을 소비하던 방식과 닮은 꼴이었다.

이후 나는 더 이상 딸아이를 닦달하지 않았고 그녀를 바라보던 프리즘을 치워버렸다. 얼마나 많은 가능성과 다양성을 담고 있는 존재인지 보려고 했고 인정하려 했다. 세상이 규정한 ‘행복’을 좇는 대신, 현실의 그녀와 나의 사랑에 대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된다는 사실도 알았다. 물론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같은 행복을 찾고 있는 타인의 시선을 견뎌내야 할 용기와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단단한 껍질 대신 투명하고 온전한 우리 자신을 갖기 위해서는 좀 춥고, 좀 더운 환경을 버텨내야 한다는 것을.

 

요즘 <나의 해방일지> 드라마를 다시 보고 있다. 8회부터 본방송을 보고 끝낸 터라 앞부분의 이야기가 궁금하기도하고 드라마 속 대사가 주는 위안과, 남주인공의 멋있음을 다시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염미정은 구씨에게 자신을 추앙하라고 하고 자신도 구씨를 추앙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면 둘다 변해있을 거라고. 이 소리를 전해들은 염미정의 친구 현아는 “ 그 남자 정상 아니지? 미정이가 한 사람 살릴려고 하네” 라는 말을 던진다. 나는 이 드라마가 ‘충만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회와 그 사회 구성원들이 견고하게 쌓아올린 지렛대에 적합한 인간이 되기 위해 무던히 애썼지만 결국 좌절과 우울만 남게 되는 자신들. 개인들. 행복하고 싶지만 행복은 잡히지 않는 사람들. 염미정은 그 행복 카테고리를 완전히 바꿔버리는 삶을 선택한다. 아니 차라리 그 ‘행복’에서 해방되고 싶다고 선언한다. 아무 껍질도 없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눈앞에 있는 구씨 자체를 추앙하기로 한다. 그것은 한사람을 살리는 일이면서. 한사람을 살린 자신은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이것은 서로에게 마찬가지의 일이었다. 너무 많이 소비되어 닿고 낡아빠진 ‘행복’ 대신 ‘충만함’을 선택한 구씨와 염미정은 어두운 과거의 시궁창 같은 삶에서, 단단한 ‘행복리그’의 패배자의 그늘로부터 각각 해방되어간다.

나는 ‘행복’을 내 인생에서 중요하지 않은 가치로 생각한 지 오래다. (딸과의 투쟁이후부터) 물론 행복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다. 어쩌면 행복하지 않아도 된다는 선언이 더 적절한지도 모르겠다. 염미정이 ‘행복’을 상대를 위한 온전한 ‘충만함’으로 대체하듯이 나도 세속적인 ‘행복’에 지지 않으려 애쓰겠다고 감히 말해본다. 그것은 ‘나는 행복하지 않다’라는 말을 쓸 수 있는 용기이며, 말해지지 않았던 분노를 해부하고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다.

 

“ 행복의 추구와 쾌락은 앎의 추구와 현실을 결코 이길 수 없다. 눈가리고 아웅하기가 비판 정신을,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성찰을 이길 수 없다.<중략> 이 행복 산업은 삶을 구성하는 조건들을 파악하는 능력을 교란하고 흐려놓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능력을 부적절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삶을 혁신하는 도덕적 목표로 남아야 하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정의와 앎이다” <249쪽>

 

<해피 크라시>의 결론을 옮겨 놓으며, 이 문장을 꼭 한번 쓰고 싶다. 정희진의 ‘나는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대신 “나는 행복에 지지 않으려고 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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