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부와 나단

현민
2023-08-18 07:24
491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두부와 나단

 

 

 

아래의 쓰여진 이야기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시하며, 화자를 나나라는 인물로 칭한다.

 

 

두부

 

두부는 나나가 이 곳에서 만나 알게 된 유일한 한국 사람이다. 과거에 어디 하나 엮인 데 없이 말이다. 작년 겨울, 두부는 한국에 가는 동안 방을 맡길 사람을 찾고 있었다. 집이 없던 나나는 우연히 두부의 방을 보러 가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더 길게 지낼 수 있는 곳을 찾아 단기임대는 무산되었지만, 나나는 두부를 놓칠 수가 없었다. 한번 만났지만, 이 맑은 얼굴의 여자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새해를 핑계 삼아 떡국을 먹자고 두부를 집으로 초대하며 인연은 이어지게 되었다.

 

두부를 볼 때마다 그에겐 어딘가 단단한 마디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고생하여 결국엔 이뤄 본 사람. 착하지만 아무에게도 질 것 같지 않은 사람의 느낌. 두부는 독일에서 고생만 했는지 나나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경험을 한다며 눈이 휘어지게 웃었다.

두부에게는 애인이 있다. 나나보다도 어린 두부가 10살 연상의 사람을 만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의아했다. 머리 속에서 빠르게 나이 많은 남자에 대한 편견이 스쳤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두부는 그를 곧 독일에 데려왔다. 한두 번 만난 뒤로 각자 삶이 바빠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나나는 그들에게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 두부는 미안하다고, 애인과 함께 만날 수는 없을 거라고 답했다. 자세한 건 만나서 이야기 해주겠다고.

 

장거리 연애를 하던 둘은 1년간 함께 살 계획이었다. 애인은 한국에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왔으며 영어도, 독일어도 익숙하지 않았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타지에서, 전공 특성상 바쁜 두부와 분리되지 않는 공간을 공유하며 느낄만한 감정을 느낀 것 같았다. 그들은 사소한 걸로 싸우기 시작했고 그것이 격해져 애인은 결국 한국행 티켓을 샀다고 했다. 두부에게는 타지에서의 시간이 견뎌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두부는 버림받는 기분이 들었을 테다. 자신에게 이곳에서의 시간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다 아는 사람이 떠난다는 일은 큰 절망이었을 테다.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모욕했고, 그가 떠난다고 했을 때 스스로 목에 칼까지 대게 되더라 하는 두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나의 마음은 빠르게 아파왔다.

 

나나는 그럼 이제 둘이 헤어지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부는 예상과는 다른 전개로 나아갔다. 그는 평온한 얼굴로 한 달 뒤 학기가 끝나면 한국에 돌아가는데, 그때 애인과 다시 이야기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나나는 조금 숙연해졌다. 평소라면 당장 헤어지라는 말을 했겠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나나는 상처를 받음에도 남아있게 되는 사랑이 무엇인지 상상해보았다. 상처 앞에서 신중한 사람이 신기했다. 그건 두려움으로부터 온 것일까, 용기로부터 온 것일까? 두려워하다가도 용기가 나고, 용기가 나다가도 두려울 만큼 소중한 관계란 건 무엇일까? 두부는 곧이어 그와의 관계로부터 경험한 것들도 말해주었다. 부모에게 사랑받는 것보다 더, 부모로부터 사랑받는 것처럼 사랑받았다고. 문득 나나는 우리가 어떨 때 우정을 사랑과 구분해 말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강하게 섥혀버린 관계 속의 두부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푸르게 느껴졌다.

 

 

 

나단

 

나나는 나단을 2월에 처음 만났다. 그들은 데이팅 앱으로 브로콜리와 선인장 중에 무엇이 더 좋은지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의 식물을 교환하기로 했다. 처음 만난 날 나나는 약속을 잊고 맨 손으로 도착했다. 나단은 코트 주머니 안에서 작은 다육이를 꺼내 보였다. 추운 겨울날 사람이 붐벼 겨우 도착한 세 번째 바에서 그들은 겨우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나나가 나단을 만나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그와 연락한 시간 동안 나나에게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묻지 않아서였다. 나단의 얼굴도, 나나의 얼굴도 그들이 외국인일 가능성을 다분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은 바가 문을 닫을 때쯤에야 서로에게 물었다. 아, 그래서 너 어디서 왔어?

 

아르헨티나에서 온 나단의 모국어는 스페인어다. 가끔 나나는 그 애가 못 알아들을 걸 알면서도 한국어로 말했다. 나단은 나나로부터 배운 몇 개의 한국어 표현들로 신기하게 알맞은 대답을 했다. 아니, 응, 안돼, 진짜, 좋아. 가끔은 배운 말들을 혼합시켜 자연스러운 답을 만들어 나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진짜 좋아 혹은 존나 싫어 같은.

나나는 그와 이야기하다 대화가 끊겨 침묵이 이어져도 어색함을 느끼지 않았다. 한참 뒤에 나단이 그의 입으로 너와의 침묵은 채워야만 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나단은 정말 낯선 타인이었다. 나와 한평생 다른 곳에서 자라 온 사람에게 스스로가 느끼는 세상의 이상함이나 아름다움을 설명하기란 어려웠다. 나단은 장황해지는 나나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 우정이라고도 연애라고도 규정하기 힘든 관계였다. 그래서 소중한 기분이 자꾸 들었다. 처음 만났던 겨울엔 몇 겹의 옷을 껴입었어야 했는데, 시간은 잘 가 어느새 티셔츠 한 장도 벗어내고 싶은 뜨거운 여름이 되었다. 그 사이에 나단의 생일이 있었고, 심통이 나 오래 보지 않았던 시간도 있었다. 어쨌거나 서로를 만나고 있었다. 나나는 눈물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시간은 나나를 나단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나나의 집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파티를 했다. 할 때마다 새로운 드라마들이 생겨나는 파티였다. 나나는 나단을 초대했다. 파티는 늘 그렇듯 요란했다. 부엌에서는 팝송이 틀어졌고, 지하에서는 테크노가 흘러나왔다. 이번엔 여자를 걸고 싸우는 사람이나 너무 취한 사람 때문에 앰뷸런스를 부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집안 구석구석에서는 새로운 기묘한 이야기들이 시작되었다. 나나는 처음 보는 사람들 속을 헤집고 놀았다. 부엌에서 술을 마시다 정원에 나가 사람들과 이야기를 했고, 지하로 내려가 테크노에 시간을 잊고 밤늦게까지 춤을 췄다.

파티 다음 날 아침은 전날의 연장선이다. 느즈막히 일어난 사람들은 정원에 둘러 앉아 아침을 먹으며 파티에서 서로 어떤 걸 보았는지 나누며 웃고 떠든다. 그러던 중 나나의 집 사람 중 한명이 나나에게 말을 꺼냈다. 나나, 나단이 다른 사람과 키스하는 걸 봤어. 그가 네 애인이 아니더래도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이 곳은 네 파티였어. 걔는 너를 존중하지 않았어. 걔는 쓰레기야. 친구들은 나나를 너무 아껴서 나단을 헐뜯었다. 그냥 차단해버려. 다신 이야기도 하지마. 그 애는 너를 만날 자격 없어. 나나는 정말 모든 게 그런 것만 같았다.

 

갑자기 나나는 나단이 낯선 타인처럼 느껴졌다. 나나는 나단에게 문자를 보냈다. 사람들이 파티에서 네가 누군가와 키스하는걸 봤더더라. 기억하니? 나단은 답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아니야. 내가 너를 존중하지 않는 행동을 한다면 나에게도 기분이 좋지 않을거야. 하지만 나도 어느 순간엔 너무 취해서 확실하다고 말할 수는 없어. 내가 네 입장이어도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아. 그것에 대해선 미안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답장이었다. 나나는 기억 못하면 맞는 거 아니냐며 화 내버릴 수도, 모르겠다니 어쩌겠어 하며 넘어갈수도 없었다.

 

감당하기 힘든 감정들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만나서 이야기하기로 했다. 나나와 나단은 날씨가 좋은 날 다시 만나 강가에 앉았다. 서로에게 이 일이 어떤 사건이었는지 이야기를 하고 들어주었다. 나단을 만나기 전에는 화가 나면서도 쿨한 척하고 싶었고 내가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에 대해서도 변명하고 싶었다. 눈을 마주치기 어려워 잔디 사이로 시선을 두니 클로버가 보였다. 나나는 클로버는 스페인어로 어떻게 말하냐고 물어보다가 나단에게 스페인어권 사람들이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어떻게 서로의 출신지를 알아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 듣고 있었고, 어느새 그 애의 곱슬머리 사이에 클로버를 꽂아주고 있었다. 몸이 기우는 대로 행동하고 나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이었다. 아무 일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무엇에도 상관이 없어졌다. 나나는 나단과 함께 잔디 위에 누웠다. 잎사귀들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나단은 말했다. 나 지금을 즐기고 있어.

 

나나는 종종 너무나도 자주 바뀌는 자신에 멀미가 났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일은 나나의 마음 속에 자꾸만 예외를 만들게 했다. 누군가를 용서해버리고 사랑할 마음이 유난히 많은 아이였다. 하지만 상처받는 일은 늘 낯설었다. 사랑은 기대와 상처를 잘 불러 일으키는 것 같았다. 어떤 사람들은 기대하는 마음이 상처받게 한다고 말했다. 그러니 기대하지 말라고. 본질을 궤 뚫는 말이지만 기대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건 존재할 것 같으면서도 본 적이 없었다. 나나는 어느 순간 깨닫는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엔 상처받는 마음이 계속 따를 거라고.

그렇다면 계속 기대하자. 계속 상처받자.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사는 게 더 힘드니까. 나나는 또 다시  마음이 열릴 것만 같았다.

 

댓글 4
  • 2023-08-18 22:05

    기대하자, 계속 상처받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상처'는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이 드네. 모르니까 상처인데, 알게 된다면 그건 어떤 양상의 상처가 되는 것인지 궁금해지기도 하고. 나나의 이야기가 또 궁금해진다.

  • 2023-08-19 18:55

    아, 왠지 슬프면서도 싱그러운 느낌이 듭니다.

  • 2023-08-21 17:46

    쿨하긴 어려운.. 사랑은 자신도 낯설어지는 경험인 것 같아요~ 나나에게 세잎 클로버를 주고 싶네요~~ ☘️

  • 2023-09-07 01:22

    깊은 사랑에는 많은 경우 깊은 상처가 따르는 것 같아요🐟
    상처에 계속 아파하고 슬퍼하면서도
    기꺼이 사랑을 무릅쓰는 모든 이들에게 뜨거운 박수!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나와 당신의 책임   10년 전,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쓰인 멋진 슬로건들을 생각하고 있자면, 만든 이를 찾아가 박수를 쳐 주고 싶어지곤 한다.전기를 소비하는 곳에는 책임이 있다. 전기를 생산하고 송전하는 곳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다. 그 책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슬로건이 있었다 .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또,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였던 송전탑 반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데에 기여했던 슬로건도 있다.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   누군가가 당사자이고, 누군가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규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에너지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말이다. 이 슬로건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운이 좋게도 끝없이 확장되는 사회 운동을 경험했다. 설령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밀양이 아니더라도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밀양은 졌다. 높이 100m짜리 송전탑은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다. 밭일을 할 때도, 병원을 가기 위해 마을 길을 걸을 때도, 캄캄한 밤 안방 창문에서도 쇳덩어리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낮 쇳덩어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저 철탑에는 핵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흐른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아도, 마주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송전탑에는 돈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을 공동체의 상처가 묻어 있다. 38만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사람을 짓밟았던 폭력의 상처, 함께 싸우다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 2014년, 2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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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어진
2024.05.10 | 조회 149
일상명상
덕밍 아웃, 그 후   지난 글에서 호기롭게 덕밍 아웃을 했지만 명상에 빠져든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던 것은 아니다. 명상에 빠진 것은 결과지 이유는 아니니까. 하여 명상이 처음부터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친구와 같다고 했지만 정작 누군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면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그냥 좋으니까 좋았다는 식의 동어 반복을 되풀이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언가에 꽂힐 때 그 이유를 다 알아서는 아닌 것 같다. 우연히 어떤 것에 마음이 불꽃처럼 호응할 때 그저 속절없이 빠져드는 게 아닐까. 처음엔 빠져든 이유를 잘 모르는 터라 경우에 따라 ‘입덕 부정기’를 겪기도 하면서 말이다. 대개는 빠져든 다음에야 그 이유를, 스스로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발견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이유 덕분에 다시 그 대상을 더 깊이 애정하게 되는, 다이내믹한 순환이야말로 덕질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지.     나도 명상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른바 덕질의 묘미를 맛보고 있다. 명상이 뭔지도 모르고 매달리듯 빠져들었다가 이제야 차츰 명상이 뭔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명상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들에, 그렇거나 많이 휘둘리고 있는 줄 몰랐다. 그 때문에 명상을 통해 처음 경험했던 침묵과 평온이 그토록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는지도. 만약 명상이 아니었다면 일 년 365일, 꺼지지 않는 텔레비전처럼 소란스런 정신적 수다 때문에 괴롭다는 걸 영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그 순전한 무지에서 벗어난 순간, 마치 세상의 비밀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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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
2024.05.09 | 조회 136
K장녀_돌봄을 말하다
          언젠가 엄마의 구술 생애사를 써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엄마의 삶을 기록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엄마의 삶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녀딸이 인터뷰를 시작하긴 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진행을 못해서 좀 아쉽다. 이렇게 빨리 엄마가 기억을 잃고 이야기를 못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산업화세대 워킹맘   10년 전쯤 아버지가 대장암 재발로 병원에 오래 입원해 계실 때 엄마는 병원간호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혈관이 잘 안 나오는 아버지에게 혈관 주사를 놓으려면 꽤나 힘이 들었는데 엄마가 곧잘 혈관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1935년생인 엄마는 간호사이자 조산사였다. 엄마가 간호사 면허번호를 말하면(0000번 대) 간호사들(면허번호 000000번 대)은 깜짝 놀라며 ‘선배님’이라 불렀다. 엄마는 은근히 그걸 즐기는 듯했다.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하던 엄마는 결혼하면서 그만두었고, 시골학교 교사인 아빠의 고향에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걸 도왔다고 했다.   엄마는 의대에 가고 싶었다. 중학생 때 친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들어오셨는데 엄마가 의대 가는 걸 반대해서 간호학교에 갔다. 동생인 삼촌 두 분은 의사다. 엄마 세대, 즉 산업화 세대에 많은 딸들은 아들들을 위해서 진학을 포기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남동생을 위해 희생한 누나들. 엄마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딸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의대에 갈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 또래는 대부분 형제가 4~5명 정도 된다. 유독 우리집은 형제가 오빠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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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2024.05.07 | 조회 262
기린의 걷다보면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기린
2024.05.06 | 조회 162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 2편           동물의 의례   초코는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고 햇볕을 쬐다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왼쪽 뒷다리는 굽어 있었고 굽은 다리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는 다친 다리를 허공에 들고 걸었다.   초코는 골절된 다리로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초코를 치료하기 위해 포획틀을 설치했지만, 초코 대신 엉뚱한 고양이가 들어왔다. 봉봉오리님은 포획틀에 갖힌 초코의 단짝 고양이 카레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속 터지는 희극'이라고 했다. 『지구에 살 자격』에는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재개발구역에서 돌봄하는 것이 무조건 슬플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마냥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재개발구역이 조금 이상한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다. 나는 그곳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를 돌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내염을 오래 앓아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카레의 곁에는 늘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초코가 있다. 둘은 추운 날 하나의 겨울 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몸이 관통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던 8개월의 오잉이는, 피를 흘리며 몸을 숨겼던 일주일 간의 시간 동안, 혀가 닿지 않는 그의 상처를 핥아준 형제들이 있었다. 『지구에 살 자격』, 145쪽   밥그릇...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 2편           동물의 의례   초코는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고 햇볕을 쬐다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왼쪽 뒷다리는 굽어 있었고 굽은 다리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는 다친 다리를 허공에 들고 걸었다.   초코는 골절된 다리로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초코를 치료하기 위해 포획틀을 설치했지만, 초코 대신 엉뚱한 고양이가 들어왔다. 봉봉오리님은 포획틀에 갖힌 초코의 단짝 고양이 카레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속 터지는 희극'이라고 했다. 『지구에 살 자격』에는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재개발구역에서 돌봄하는 것이 무조건 슬플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마냥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재개발구역이 조금 이상한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다. 나는 그곳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를 돌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내염을 오래 앓아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카레의 곁에는 늘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초코가 있다. 둘은 추운 날 하나의 겨울 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몸이 관통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던 8개월의 오잉이는, 피를 흘리며 몸을 숨겼던 일주일 간의 시간 동안, 혀가 닿지 않는 그의 상처를 핥아준 형제들이 있었다. 『지구에 살 자격』, 145쪽   밥그릇...
경덕
2024.05.01 | 조회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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