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2 최종에세이 초고
나의 아버지의 뿌리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 난 난파선을 탐색하러 내려왔다/ 단어들이 목적이다/단어들이 지도이다/ 난 이미 행해진 파괴의 정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보물들을 보러왔다/<중략> 내가 찾으러 왔던 것/ 그것은 잔해이지 잔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자체일뿐 그것을 둘러싼 신화가 아니다” <우리 죽은자들이 깨어날 때-난파선속으로 잠수하기 p6>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 <난파선 속으로 잠수하기>는 그녀의 작품 활동의 주된 목적이 무엇인지 밝히는 일종의 선언문과 같은 것이다. 1960년대 서구 가부장제 사회를 ‘난파선’으로 명명하며 위험한 심해에 들어가 그녀가 응시하고자 한 ‘잔해’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시 속의 자아는 불편한 잠수복을 입고 산소마스크를 달고 내려가 퍼런색에서 검은색으로 변한 바다 속으로 몸을 옯겨 놓는다. 그곳에는 중력이 없고 산소가 없다. 그러므로 위험하다. 권력이 없고 너와 내가 없다. 그러므로 자유롭다. 스트레스를 아직도 가슴에 품고 있는 익사자의 시체, 고장난 나침반, 물먹은 일지. 그곳에서는 이 모두가 그녀 자신이며, 우리이다. 여기에서 길어올린 ‘나’,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레즈비언이며 가부장제에 부역한 이혼녀이고 세 아이의 엄마였던 미국여성 시인인 그녀의 글속에서 자유롭게 횡단하고 있다. 그녀의 에세이 <뿌리에서 갈라지다>와 <피,빵 그리고 시>에서는 자신을 절대 손에서 놓치지 않으면서 세계를 향해 문을 열어 제치는 그녀의 소심함과 용기가 그대로 담겨져 있다. 특히, 유대인이면서 미국 주류 사회의 토큰이 되고자 했던 그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수치스럽지만 꼭 써야만 하는 의무감으로 표현된다. “내가 유대인인 것은 기독교인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까” <p288> 그녀의 회고적 이야기에 담긴 유대인 아버지에 대한 ‘잔해응시’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한 여성으로 삶을 통과하고 있는 ‘나’에게도 어떤 영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나의 아버지(피)와 연결된 ‘빵’ 그리고 앞으로의 이야기에 대해서.
1) 나의 아버지
거제도의 아름다운 작은 항구 마을에 터전을 마련한 나의 아버지. 나는 그에게서 힘이 넘치는 젊은 남자의 그것을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내 눈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되기 전의 조금 늙은 남자. 그 정도가 맞을 듯하다. 표면적으로 그는 무능력하고 교육받지 못했으며 술에 자주 취해 있었다. 동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그가 영향력이 있거나 존재감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생활력 있고 똑부러진 어머니는 아버지를 답답해 하면서도 가정의 가장으로 인정하고 대접해주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바다가 주는 풍부한 자원과 물질은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는냐에 따라 부를 축적하거나 생계의 수단으로 삼기 충분했다. 항구 마을에서 배를 소유하고 있음은 부자라는 소리이고 그 집의 아버지가 뱃일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면 밥 먹고 살기 문제 없다는 뜻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이 둘다 해당이 되지 않았다. 고작해야 농사를 짓는 일이 전부였다. 태생적으로 허약 체질이었던 아버지는 배멀미로 바닷일은 그의 수단이 되어주지 못했다. 고작해야 농사를 짓는 일이 전부였다. 그 마을에서 남자, 어른 , 뱃사람에게 주어지던 권력이 아버지에겐 없었다. 이런 조건을 모두 갖추고 거기에 물려 받은 재산까지 많았던 큰아버지에게 아버지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 같았다. 이유도 없이 우리집에 불쑥 나타나 아버지를 폭력으로 다스리기도 하고 물건을 때려부수기도 했다. 나는 큰아버지의 그 야만성보다 당하고만 있는 아버지가 정말 싫었다. 분노, 억울함, 복수의 감정등을 어린 나에게 심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버지의 그 내면에 또아리고 있었을 루저의 감정을, 참아낼 수 밖에 없었을 것 같은 억압의 감정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세상은 60년대~80년대는 돈이 권력이 되어 우리의 삶으로 조금씩 침범해 오던 시기였다. 같이 못먹고 못살던 시대는 이미 막을 내리고 돈을 만들어내어 자식을 공부시키고 좋은 것을 사서 입히고 먹여야 되는 시기였다. 유교사회의 남성중심 문화는 ‘돈’이라는 막강한 권력과 맞물리면서 그 위세를 더 심하게 떨쳤다. 아버지는 그 과도기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기도 하다.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이 없던 아버지는 주류인 큰아버지로부터의 핍박을 내면화 했을 것이고 그 계급의 맨 아래, 여성의 그것과도 비슷한 곳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작은 어촌 마을의 남자 권력 계급에서 주류가 되지 못한 아버지는 평생을 술을 벗삼아 삶을 살아낸 이름 없는 남자였다.
2)나의 세계 그리고 빵
나는 아버지의 그것을 어릴적부터 심하게 부정하며 성장했다. 나 또한 억눌림, 기가죽음, 자신 없음을 되물려 받아 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고 그들 사이에서 경쟁력이 있음을 조금씩 알아챌 수 있었다. 절대로 아버지처럼 루저가 되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더 아버지를 나의 인생에서 단절시키고자 했고 그의 인생에 대해 질문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아버지의 무능력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에이드리언 리치는 자신의 아버지가 유대인이면서 유대인을 부정하는 미국사회의 성공한 사람이 되고자 했던 모순에 반항이나 하듯 동유럽 출신 유대인과 결혼했다. 적어도 그녀가 선택한 남자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반유대사회의 외로운 ‘토큰’으로 표류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유대인 정체성과 동화정책 두 가지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p307> 하지만 그곳 유대인 속에서도 계급이 존재함을 알아차리고 모성과 유대인의 특성에 대해 분간하기 어려운 혼란을 겪게 된다. 반유대 정서에서 성장한 그녀가 유대인 정체성을 대상화하며 겪은 혼란 또한 그녀를 힘들게 했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보여준 남성상을 부정하기 위해 루저아님, 돈버는 능력, 주류남성의 그것을 확대경으로 보아왔다. 확대경 속의 조건과 맞는 남자과 결혼을 선택했고 뿌리 깊은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서 주류에 가까운 곳에 맞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성의 권력을 통해 ‘나’의 자리를 올려 놓고 싶었고 아버지의 뿌리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가부장제 사회에서 나는 여전히 비주류 인간이며 그곳에서 하류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시부모에게 허리를 굽신거리고 남편의 아침밥을 거부감없이 차려 대며 임신과 출산, 육아를 오로지 나의 몸으로만 버텨야만 했다. 때론 참는 것이 미덕인 양 부조리한 상황에서도 ‘나의 자아’를 심하게 부정했다. 남성중심의 계급사회에서 하류였던 남자, 아버지의 그것과 별 다른 것 없이 나의 위치는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확대경은 사물을 왜곡할 수 있고 확대경 밖의 사물은 지나치게 왜소화될 수 있으면 전체 세계는 흔들릴 수 있다.
“ 한쪽 현실을 바라보는 사이 또 다른 현실이 흔들리며 흩어질 것이다” p<316> 에이드리언 리치는 여러 가지 정체성으로 엮여 있는 자신의 이름(백인,유대인, 중산층, 페미니스트,레즈비언, 기혼자,반유대주의자)들을 호명하며 이것들을 모두 통합할 수 있는 말은 없다고 말한다. 그녀는 강제적인 역사와 사회의 보편적 질서와 아버지가 강요한 반유대 정서가 자신의 의식에 영향을 끼쳤음을 인정하고 이것으로 인해 빈칸이 자신 안에 존재함을 알아차린다. “이것은 자신에게도 사회에도 위험한 일이라고.”<p316>
나의 빈 칸은 비주류, 무능력, 하류,=가난과 불행이라는 도식이 만들어준 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이것들은 아버지의 어진 성품과 가난했지만 공동체적 정서가 살아 숨쉬던 나의 유년 시절을 부정하고 도망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3) 다양한 정체성의 전면개입
“.. 그러나 우리는 상처 입지 않는 사람이 우리를 연결해주길 기다릴 순 없다. 우리가 완벽하게 깨끗하고 정당해질 때까지 발언을 미룰 수가 없다. 순도 100퍼센트는 없으며 우리 생애에 이 과정의 끝도 없다” <p316>
에이드리언 리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가 심해에서 길어올린 진실들, “특권을 누리려면 복종을 바치라고 배운 백인아이, 이성애자 기독교인으로 길러진 레즈비언, 흑인 인권투쟁을 통해 처음으로 억압이 호명되고 분석되는 것을 들었던 여성..”<p317> 이 모든 정체성이 앞으로 그녀 인생에 개입되어야 한다고. 이것이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의미가 되어야 된다고.
정체성의 전면적 개입의 구체성이 어떠한 것인지 쉽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리치가 소개한 엘리자베스 비숍이라는 시인과 작품에 관한 해석에서 약간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비숍은 어릴적에 부모를 상실했고 이민자였으며 레즈비언 여성 시인이었다. 리치의 표현대로라면 당연한 것이 거의 없던 외국인인 비숍이 사회의 동화정책에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거나 소모하도록 강요당하며 부인하거나 회피하는 상태를 국외자성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것이 비숍 시들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사회가 강요하는 개인은 맞춤형 인간으로 스스로 개조되기를 바라지만 비숍처럼 소속이 없었던 이민자의 정체성을 가진 그녀는 동화하려고 할수록 내면의 심한 자기 분열 또는 저항에 부딪쳤을 것이고 이러한 감각은 시를 통해 발현되었다.
아버지를 통해 돈이 없고 권력이 없으면 곧 불행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아이, 남성을 통해 권력을 얻고자 했으나 그것은 남성의 발 아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여성. 결혼제도가 여성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한 여자, 동네 인문학 공동체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여성, 경제적 자립을 위해 다시 몸을 일으켜세운 여자. 여자, 여성의 앞에 호명되어진 ‘나’의 다른 이름들은 리치의 말대로 하나로 통합될 수 없다. 이것 또한 나의 피와 빵이 연결된 각각의 다른 이름들이다. ‘나’ 자신이면서 ‘나 자신이 아니다’. 사회적 개인인 ‘나’는 거기에 맞는 주류적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아버지의 수치심과 루저의 감정을 도망쳐 나왔지만 그럴수록 심한 자기 분열에 흔들릴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하류의 불행만 불행이 아니라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에, 내가 도망쳐나와 발을 담군 그곳에서도 또다른 수치심과 억압의 감정이 도사리고 있었음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그 빈칸의 여백이 알려준 진실 때문에 나는 다른 이름들을 만들고 쌓고 무너뜨리기도 했다.
나는 수도권에 거주하는 중산층의 안정적인 주부로서의 삶을 이미 버렸다. 최저 시급에 가까운 보수를 받는 직업을 과감하게 선택했고 그곳에서 그 보수 만큼만 일을 하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곳에서도 ‘나’를 성찰한다. 관리자에게 우리의 권리를 강조하기도 하고 굳이 그의 눈밖에 나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 애쓰기도 한다. 그리고 일요일은 공동체에 나가서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누군가는 나를 지랄맞다고도 하고 누군가는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 나의 아버지의 뿌리에서 도망쳐 나왔지만 이제는 안다. 나의 아버지의 뿌리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그 뿌리를 안은 채 다양하고 아름다운 나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또한 이것은 위험하고 치열한 일이라는 것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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