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회> 해파랑길 24코스를 걷다보면(with 땡볕)

기린
2023-08-06 06:27
352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양생을 위한 담론을 생산하고 생업도 마련하는 기회를 잡아

소속을 인문약방 팀으로 옮겨 일리치 약국 정규직이 되었다.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에 도전중이다.

 

 

 

  7월 30일 토요일 아침, 후포는 햇빛 쨍쨍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낮 최고 기온 32도에 체감 온도는 34도 라고 했다. 후포 한마음 광장에서 시작하는 해파랑길 24코스를 걷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아침 아홉시, 온 몸으로 쏟아지는 햇빛의 열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십 분쯤 걸어 등기산 공원 초입에서 가지 말까 잠깐 망설였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얼굴 전체를 가린 모자에 팔토시까지 했더니 순식간에 땀범벅이 된데다 발걸음도 무거웠다. 망설임을 떨쳐내기 위해 한 호흡 깊이 들이마시고 공원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서서 걷기를 시작했다.

 

 

 

내 기억의 바다

 

  해파랑길은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강원 고성 통일전망대에 이르는 동해안의 해변길로 총 750㎞에 이르는 길인데 2016년 5월에 정식 개통하였다. 그중 울진 구간인 24코스는 후포항 한마음 광장에서 출발해서 기성터미널까지 18.2km 구간이다. 후포는 내가 태어난 곳이자 지금도 어머님이 고향집에 살고 계시고, 스무 살에 수도권으로 상경한 이후 명절이나 대부분의 여름휴가를 보내는 곳이기도 하다. 2년 전 해파랑길에 대해 알게 된 후 고향에 내려올 때 마다 영덕 구간과 울진 구간을 찾아서 걷곤 했다.

 

 

 

  그 중에서 24코스는 내가 어린 시절부터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지도에서는 직선으로 단조롭게 그어진 해안선으로 보이지만, 내 눈 앞에 펼쳐진 바닷가 파도는 거셌고 바다 위로 융기한 삐죽 삐죽한 바위들이 곳곳에 드러나 있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내 기억의 바다는 위험하고 한 여름에도 깊은 수심 때문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었다. 유난한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어느 집 아버지가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했다든가, 해수욕을 하러 갔다가 파도에 휩쓸려갔다는 누구 집 자식의 이야기도 가끔 들려오는 그런 곳이었다.

 

 

 

변한 것들

 

 

   내가 고향을 떠난 후 바다의 주변은 점점 변해갔다. 해안을 따라 도로가 개통되고 항구에 배가 안전하게 접안할 수 있도록 바다 가운데 방파제가 건설되었다. 파도가 치면서 실어 나르는 모래들로 예전에는 없었던 모래사장이 형성되기도 했다. 어느 해인가는 해수욕장이 개장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해수욕장과 관련 부대시설이 들어서고 여름 한 철 피서객들이 제법 북적였다. 등대가 있던 등기산이 정비되어 탁 트인 바다를 볼 수 있는 전망대에, 최근에는 바다 한가운데로 걸어가 볼 수 있는 스카이워크도 생겼다.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바다 주변을 메우고 깎고 뭔가 짓는 일들이 계속되고 있다.

 

 

 

 

   후포항은 교통이 불편했던 1960년대까지 만선으로 돌아온 어선들이 부근에 팔고 남은 생선들이 많아 누구라도 가져가게 할 정도로 인심이 후했다고 한다. 거기서 후포(厚浦)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지금은 날로 어획량이 줄어 경제 사정이 별로 좋지 않은가 하면, 뱃일을 하겠다는 사람도 계속 줄어서 몇 년 사이 이주 노동자들이 속속 진입하고 있다고 한다. 24코스를 따라 거일-직산-구산-기성으로 이어지는 해안을 따라 옹기종기 형성된 마을에 집들이 많이 낡아 보였다. 빈집도 많았다. 도시 집중화와 맞물려 쇠락해가는 지방의 변화가 점점 더 빨라지는 것 같다.

 

 

변하지 않은 것들

 

 

   24코스는 내내 바다를 따라 걸을 수 있다. 바다 옆으로 도로가 나면서 주변의 모습은 달라졌지만 동해의 푸른 빛 바다와 파도 소리, 갈매기들이 드나드는 터전은 그대로였다. 그늘 한 점 들지 않는 길을 걷자니 땀방울이 맺혔지만 주르륵 흘러내리기 전에 말랐다. 햇빛으로 뜨거워진 몸을 동해의 푸른 바람에 말려가며 걷는 맛이었다. 팔토시로 가린 손목을 경계로 해서 손등이 점점 구리빛으로 달구어졌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한결 같았을 태양과 바다와 내가 합체가 되는 것 같았다. 언젠가는 사라질 나와 달리 늘 뜨겁게 빛나고 늘 푸르게 파도치며 살아가는 존재의 위엄이 흘러 넘쳤다.

 

 

 

   월송정은 관동팔경의 하나로 24코스의 삼분의 일 지점 무렵에 위치해 있다. 고려 시대 왜구의 침입을 살피는 망루로 세워진 것을, 조선 중기에 정자로 중건된 곳이라고 한다. 월송정 주변은 푸른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정자에 올라 보면 앞으로 흰 모래사장과 푸른 바다로 이어지는 풍광이 시야에 들어왔다. 월송정에서 내려오는데 다정히 손을 잡고 오르는 연인을 지나쳤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월송정은 울진에 있는 남고와 후포고 여학생들의 미팅장소였다. 미팅이 있던 일요일을 보낸 월요일 아침이면, 누구와 누가 사귀게 되었다는 소문이 교실에 퍼지곤 했다. 정자 주변 소나무 숲에서 한 쌍씩 짝을 지어 제법 숙덕거렸겠다. 졸업 때까지 나에게는 한 번도 기회가 없었던 미팅임에도 불구하고, 그 기억이 반짝 떠올랐다.

 

 

 

 

걷다가 마주친 즐거움

 

 

  24코스의 삼분의 이 지점을 통과할 즈음에는 바다에서 떨어진 산중턱으로 길이 나 있었다. 산에 가려서 바람도 불지 않는 길을 헉헉거리며 올라가고 있는데, 한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힘겹게 페달을 밟으며 내 옆을 지나쳤다. 내내 쌩쌩 달리는 자동차만 나를 지나쳤는데, 이 땡볕에 마침 지나가는 차도 없는 경사진 도로를 함께 통과하는 순간이었다. 단 한 번 짧은 스침임에도 불구하고, 혼자가 아니라는 기쁨에 하마터면 소리칠 뻔 했다. 반가워요! 그 기분을 살려 저만치 멀어지는 뒤통수를 향해 빙그레 웃음을 날렸다.

 

 

 

 

   해안선을 따라 융기한 암석 주변에서 허리를 숙이고 뭔가를 잡는 사람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누군가 따다가 말리려고 널어놓은 청각도 보였다. 몇 년 사이 동해안에서 거의 사라졌다는 오징어 서너 마리를 바다 바람에 널어놓은 건조대도 지났다. 그 풍경들을 지나가면서 파도와 모래만이 아니라 뭔가 잡을 수 있는 그래서 오랜 동안 우리를 먹여 살린 바다를 만날 수 있었다. 고향집 근처에 바다에서도 여름이면 백합을 캐서 삶고 부치고 구워서 먹곤 했다. 24코스의 종점 기성버스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마음은 이미 바다 속에 들어가 조개를 캐고 있었다. 3만보에 다섯 시간 내내 땡볕을 걷고 난 참이었는데도 바다로 들어갈 마음이라니, 바다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것들로 나를 부르는 곳이다. 

 

댓글 6
  • 2023-08-07 09:47

    바다 가고 싶다!!!

  • 2023-08-07 14:16

    오징어가 잡히긴 하나보네요. 줄지어 널려있는 모습이 정겹군요. ^^ 근데 뙤약볕 아래 5시간 걷기는 좀 걱정됩니다! 이제 몸도 생각해 가면서~

  • 2023-08-07 22:32

    잔잔한 남해바다만 보고 자란 저에게 동해바다는 처음 봤을 때 참 무섭게 느껴졌는데,
    기린의 바다에는 짭조롬한 이야기가 함께 있네요.

  • 2023-08-11 09:52

    7월 초 속초와 고성으로 짧은 여름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고성의 송지호 주변에도 해파랑길이 있더라고요. 포레스트 기린샘께 몇번 들었던 길이어서 나름 친근했습니다. 다음엔 또 어떤 길을 소개해주시며 같이 걷자 이야기를 건네실지 궁금하네요^^

  • 2023-08-12 07:25

    처음 나타난 지도를 보고 저 길을 다 걸었어?하고 놀랄뻔~ㅋㅋ
    바닷가 나란히 서있는 갈매기(맞죠?) 사진 너무 신기해서 다운받았어요.

    해파랑길 걸어보고 싶어요. 저도 반가워요 소리치는 마음 갖고 싶어요 ㅎㅎ
    언제 같이 걷는 기회를 주세요^^

  • 2023-08-15 08:57

    기린샘은 지금도 귀엽지만 중고딩시절엔 더 귀여웠을것 같지 말입니다.ㅎㅎ

    귀여움 플러스....
    땡볕을 걷겠다고 나서는 모습은 패기와 호기가 넘치는군요. ㅎㅎ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나와 당신의 책임   10년 전,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쓰인 멋진 슬로건들을 생각하고 있자면, 만든 이를 찾아가 박수를 쳐 주고 싶어지곤 한다.전기를 소비하는 곳에는 책임이 있다. 전기를 생산하고 송전하는 곳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다. 그 책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슬로건이 있었다 .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또,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였던 송전탑 반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데에 기여했던 슬로건도 있다.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   누군가가 당사자이고, 누군가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규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에너지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말이다. 이 슬로건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운이 좋게도 끝없이 확장되는 사회 운동을 경험했다. 설령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밀양이 아니더라도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밀양은 졌다. 높이 100m짜리 송전탑은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다. 밭일을 할 때도, 병원을 가기 위해 마을 길을 걸을 때도, 캄캄한 밤 안방 창문에서도 쇳덩어리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낮 쇳덩어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저 철탑에는 핵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흐른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아도, 마주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송전탑에는 돈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을 공동체의 상처가 묻어 있다. 38만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사람을 짓밟았던 폭력의 상처, 함께 싸우다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 2014년, 2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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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어진
2024.05.10 | 조회 168
일상명상
덕밍 아웃, 그 후   지난 글에서 호기롭게 덕밍 아웃을 했지만 명상에 빠져든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던 것은 아니다. 명상에 빠진 것은 결과지 이유는 아니니까. 하여 명상이 처음부터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친구와 같다고 했지만 정작 누군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면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그냥 좋으니까 좋았다는 식의 동어 반복을 되풀이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언가에 꽂힐 때 그 이유를 다 알아서는 아닌 것 같다. 우연히 어떤 것에 마음이 불꽃처럼 호응할 때 그저 속절없이 빠져드는 게 아닐까. 처음엔 빠져든 이유를 잘 모르는 터라 경우에 따라 ‘입덕 부정기’를 겪기도 하면서 말이다. 대개는 빠져든 다음에야 그 이유를, 스스로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발견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이유 덕분에 다시 그 대상을 더 깊이 애정하게 되는, 다이내믹한 순환이야말로 덕질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지.     나도 명상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른바 덕질의 묘미를 맛보고 있다. 명상이 뭔지도 모르고 매달리듯 빠져들었다가 이제야 차츰 명상이 뭔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명상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들에, 그렇거나 많이 휘둘리고 있는 줄 몰랐다. 그 때문에 명상을 통해 처음 경험했던 침묵과 평온이 그토록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는지도. 만약 명상이 아니었다면 일 년 365일, 꺼지지 않는 텔레비전처럼 소란스런 정신적 수다 때문에 괴롭다는 걸 영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그 순전한 무지에서 벗어난 순간, 마치 세상의 비밀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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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
2024.05.09 | 조회 155
K장녀_돌봄을 말하다
          언젠가 엄마의 구술 생애사를 써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엄마의 삶을 기록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엄마의 삶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녀딸이 인터뷰를 시작하긴 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진행을 못해서 좀 아쉽다. 이렇게 빨리 엄마가 기억을 잃고 이야기를 못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산업화세대 워킹맘   10년 전쯤 아버지가 대장암 재발로 병원에 오래 입원해 계실 때 엄마는 병원간호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혈관이 잘 안 나오는 아버지에게 혈관 주사를 놓으려면 꽤나 힘이 들었는데 엄마가 곧잘 혈관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1935년생인 엄마는 간호사이자 조산사였다. 엄마가 간호사 면허번호를 말하면(0000번 대) 간호사들(면허번호 000000번 대)은 깜짝 놀라며 ‘선배님’이라 불렀다. 엄마는 은근히 그걸 즐기는 듯했다.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하던 엄마는 결혼하면서 그만두었고, 시골학교 교사인 아빠의 고향에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걸 도왔다고 했다.   엄마는 의대에 가고 싶었다. 중학생 때 친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들어오셨는데 엄마가 의대 가는 걸 반대해서 간호학교에 갔다. 동생인 삼촌 두 분은 의사다. 엄마 세대, 즉 산업화 세대에 많은 딸들은 아들들을 위해서 진학을 포기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남동생을 위해 희생한 누나들. 엄마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딸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의대에 갈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 또래는 대부분 형제가 4~5명 정도 된다. 유독 우리집은 형제가 오빠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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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2024.05.07 | 조회 303
기린의 걷다보면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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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4.05.06 | 조회 176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 2편           동물의 의례   초코는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고 햇볕을 쬐다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왼쪽 뒷다리는 굽어 있었고 굽은 다리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는 다친 다리를 허공에 들고 걸었다.   초코는 골절된 다리로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초코를 치료하기 위해 포획틀을 설치했지만, 초코 대신 엉뚱한 고양이가 들어왔다. 봉봉오리님은 포획틀에 갖힌 초코의 단짝 고양이 카레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속 터지는 희극'이라고 했다. 『지구에 살 자격』에는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재개발구역에서 돌봄하는 것이 무조건 슬플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마냥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재개발구역이 조금 이상한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다. 나는 그곳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를 돌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내염을 오래 앓아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카레의 곁에는 늘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초코가 있다. 둘은 추운 날 하나의 겨울 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몸이 관통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던 8개월의 오잉이는, 피를 흘리며 몸을 숨겼던 일주일 간의 시간 동안, 혀가 닿지 않는 그의 상처를 핥아준 형제들이 있었다. 『지구에 살 자격』, 145쪽   밥그릇...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 2편           동물의 의례   초코는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고 햇볕을 쬐다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왼쪽 뒷다리는 굽어 있었고 굽은 다리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는 다친 다리를 허공에 들고 걸었다.   초코는 골절된 다리로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초코를 치료하기 위해 포획틀을 설치했지만, 초코 대신 엉뚱한 고양이가 들어왔다. 봉봉오리님은 포획틀에 갖힌 초코의 단짝 고양이 카레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속 터지는 희극'이라고 했다. 『지구에 살 자격』에는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재개발구역에서 돌봄하는 것이 무조건 슬플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마냥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재개발구역이 조금 이상한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다. 나는 그곳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를 돌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내염을 오래 앓아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카레의 곁에는 늘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초코가 있다. 둘은 추운 날 하나의 겨울 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몸이 관통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던 8개월의 오잉이는, 피를 흘리며 몸을 숨겼던 일주일 간의 시간 동안, 혀가 닿지 않는 그의 상처를 핥아준 형제들이 있었다. 『지구에 살 자격』, 145쪽   밥그릇...
경덕
2024.05.01 | 조회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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