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 마더, 해피님

루틴
2023-07-31 20:46
382

 

 

 

 

 

임수(壬) 루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대학원에서 10년을 세포만 쳐다보며 지냈다.

졸업 후 방황하다가 문탁에서 정화(丁) 무사와 사주명리를 만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요즘이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나 역시 궁금하다.

 

마더, 해피님

 

4년째 도시락 싸기가 가능해?

 

   점심시간이 되면 자리에 앉아 도시락을 주섬주섬 꺼낸다. 아침에 지은 잡곡밥에 3첩 반상을 먹고 참외로 입가심을 한다. 완벽한 점심식사다. 코로나 이후 유지하고 있는 루틴이다. 사먹는 밥은 소화가 잘 되질 않아서 코로나 유행이 지나간 지금도 계속 도시락을 싼다. 오늘은 유독 고추장아찌가 맛있다. 이 고추장아찌는 집에서 손수 양념을 무쳐 만든 것이다. 당연히 주 5일 근무를 하는 음식 솜씨 없는 임수는 만들려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 반찬이다. 여기서 잠깐, 우리 집 업무 분장(정화와 임수의 좌충우돌 가족-되기 3회 참고)을 잠시 복습해보자면 음식 만들거나 반찬 정리, 냉장고 관리는 임수 담당이다. 어쩌다가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을 땄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화는 요리를 잘 못한다. 아니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신 청소를 잘한다. 그렇다면 누가 고추장아찌를 만들었을까? 4년 가까이 도시락 루틴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정화 어머니덕분이다.

 

< 4년 가까이 싸가는 도시락, 3첩반상과 과일 후식 >

 

   음식 담당을 맡고 있지만 임수의 요리 실력은 늘지 않고 있다. 바쁜 주중 저녁에는 시간 상 음식을 만들 수 없다. 냉장고에 있는 밑반찬을 꺼내 먹거나, 외식을 한다. 정임합목 양생하우스 오픈 초기에는 음식을 곧잘 해먹었다. 유튜브에서 레시피를 검색하고 따라 만든 음식의 맛도 충분히 훌륭했다. 하지만 2년이 지나면서 음식 만들기도 시들해졌다. 그나마 주말에는 가끔 간단한 단품요리를 만들었으나 이마저도 주말에 세미나를 하게 되면서 뒷전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먹을 복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숙성된 연어회, 새우버터구이, 소불고기, 돼지갈비, 김치찜, 감자탕 등 외식보다 더 맛있는 특선 요리들을 집에서 종종 즐겼다. 입 짧은 정화 때문에 못내 아쉬워 하셨던 정화의 어머니께서는 배가 큰 임수를 딸로 들이면서 정화 혼자 먹일 때 보다 더 다양한 음식을 양껏 해 먹이신다(하하).

 

 

병화 일간 어머니와의 충()

 

   우리는 한 달 반이나 두 달에 한 번 1시간 거리에 있는 본가에 김치와 밑반찬을 가지러 다녀온다. 정해진 월례행사이다. 그날은 낮부터 배불리 먹는 날이다. 정화의 어머니는 우리가 오기 일주일 전부터 반찬 준비를 하신다. 알뜰하신 어머니는 일일 세일 품목에 맞춰 장을 보시고 며칠에 걸쳐 재료준비를 하신다. 우리가 본가에 가는 날 하루 이틀 전부터 음식을 만들기 시작하신다. 바로 먹일 음식은 당일 아침부터 따끈하게 준비하신다. 아니 이렇게 먹을 복이 넘치는데 “감사히 먹겠습니다” 삼세번을 외쳐도 모자랄 판에 임수는 종종 반찬을 가지러 가는 것을 귀찮아한다. 이유인즉, 작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전 국민의 절반이 코로나에 걸렸던 시기, 정화 아버지께서도 코로나에 걸리셨고, 지병이 있으신 정화 어머니는 일주일동안 우리 집으로 피신하셨다. 종종 놀러 오시긴 했었지만 이렇게 오랜 기간 머무신 건 처음이었다. 임수는 “당연히 우리 집으로 모셔야지” 하며 흔쾌히 승낙했고 그렇게 정화 어머니와 일주일간 동거를 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프로 살림러이시다. 문틈 사이에 있는 먼지도 송곳을 이용하여 기어코 청소를 하시는 분이다. 정임합목 양생하우스에 오시는 날이면 우리는 긴급 비상 청소에 들어간다. 보통은 눈에 딱 띄는 대표적인 몇 가지 사항만 해결하면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다. 특히 렌지 후드 청소를 중요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음식 조리 담당인 임수는 속성으로 특정 부위 청소에 집중한다. 정화 어머니의 칭찬 랠리가 이어진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어머니는 기왕 이렇게 된거 온김에 딸들을 해먹이겠다고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짧게 머무는 동안에는 보이지 않았던 하우스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오래된 반찬이 담긴 통, 만족스럽지 못한 식기 도구 상태, 냉장고에 묻어있는 각종 흔적들, 화장실 슬리퍼의 물때 등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적사항이 나왔다. 여기서 잠깐! 정화 어머니는 병화 일간이시다. 그래서인지 앞에서 할 말을 다하신다. 그러니 뒤끝도 없으시다. 우리 하우스의 면면은 병화의 태양아래서 훤히 드러났고, 그야말로 탈탈 털렸다.

 

   근데 참 신기한 것이 정화는 이 상황을 별 반응 없이 흘려보내는 반면에 임수는 초긴장이었다. 지적사항에는 정화의 담당업무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말이다. 임수도 분명 학창시절에 엄마의 잔소리를 꾸준히 들어서 익숙할 만도 했다. 하지만 친구 엄마에게 잔소리를 들으니 대략 난감했다. 사실 친구 엄마가 내 방에 들어와서 잔소리를 하는 경우는 상상하기 힘든 일 아닌가. 난생 처음 마주한 상황에 임수는 적잖게 당황했다. 병화와 임수의 충돌이었다.

 

   대부분 엄마의 잔소리는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친구 엄마의 잔소리도 마찬가지다. 단, 차이가 있다면 그 사실을 알면서도 엄마에게는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보통, 비겁이 많은 아이들의 단골멘트)”라고 되받아칠 수 있는 반면, 친구 엄마에게는 “네..알겠습니다(재성이 없는 사람들의 단답형 대답)”가 거의 유일한, 최선의 답이다. 임수는 부글부글 짜증이 났다.

 

   사주 상 비겁이 과다하고 재성이 약한 임수에게는 집이란 공간은 편히 쉴 수 있는 중요한 곳이다. 이런 공간에서 벌어진 불편한 상황을 재치있게 넘기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그나마 심리적 거리가 가까웠던 정화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게 화근이 되어서 임수와 정화는 다퉜다. 정화는 어른들 하는 말씀은 다 옳긴 하지만, 일일이 맘에는 담아두지 말라고 했고, 병화 일간 어머니에게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며 대표로 화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정화는 임수의 어정쩡한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임수는 자신을 이해해줄 누군가가 필요했고 시집살이로 고생했던 친구(이 친구도 임수)와 간만에 통화를 오래했다. 신기하게도 지금의 임수 상황을 가장 잘 이해해 주는 건 그 친구였다. 친구의 결혼 이후 라이프 스타일이 달라서 소원해졌던 그 친구와 간만에 대동단결하여 얘기를 나누고 나니 묘하게 동질감을 느꼈다. 친구는 “결혼을 안 해도 똑같네”라며 재미있어 했고, 임수 역시 이 상황이 그리 특별해보이지 않았다. 그 친구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라고 조언해줬다. 사주명리에서도 본인과 시어머니와의 관계를 일하는 관계인 재성(財星)으로 해석한다. 보통 여자는 남편을 관성(官星)으로 보기 때문에 그를 생해주는 재성(財星)이 시어머니를 뜻한다. 정임합목 양생하우스는 ‘정상’ 가족의 형태가 아니라서 같이 사는 상대(정화)를 타자의 영역인 관성(官星) 또는 친구사이인 비겁(比劫)의 영역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정화 어머니는 임수에게 관성(官星)을 생해주는 재성(財星), 즉 시어머니일수도 있고, 또는 비겁(比劫)을 생해주는 인성(印星), 즉, 어머니일수도 있다는 말이다.

 

 

< 사주명리, 육친관계>

 

   ‘일’처럼 대하라는 친구의 말은 무슨 뜻일까? 일처럼 영혼 없이 처리하라는 뜻이 아닐 것이다(요즘 일을 영혼 없이 하는 경우가 많아서 오해할 수 있다^^;;). 일을 할 때는 다양한 접근법이 중요하다. 목적지에 이르는 길은 여럿이다. 한 가지 길만 고수할 필요는 없다. 사주 명리에서는 일, 결과물(돈), 사람 관계를 같은 속성의 부류로 본다. 다양한 관점을 가진 사람들과 관계 속에서 일이 성사되고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한 가지 의견만 고수한다면 자신의 영역을 빠져나오지 못한 채 혼자만의 축제를 즐길 승산이 크다.

 

가족이 되어 간다는 것은..

 

   하우스가 탈탈 털렸던 사건 이후 혼자 속으로 꽁해있던 임수는 다음 반찬을 가지러 가는 날,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정화 혼자 보내려고 했지만, 마음에 걸렸다. 이렇게 맛있는 반찬을 고생 없이 날름 먹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고쳐 먹었다. 다시 뵙게 된 병화 일간 어머니는 꽁한 임수와 다르게 너무나 밝으셨다. 그날도 생일이 얼마 남지 않은 임수를 위해 한상 거하게 차려주셨다. 돌아가는 길에 “우리 미잠이 잘 가~~”하시면서 임수를 크게 품으셨다.(미잠이는 병화 일간 어머니가 임수에게 지어주신 애칭이다. ‘잠’을 많이 잔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밝고 유머감각이 넘치는 어머니 애칭은 ‘해피님’이다. “해피님~ 감사해요~”라며 화답하고 돌아왔다.

 

   임수는 병화 일간 어머니의 훤히 들춰내는 화끈한 성격에 부딪혔고 그 화끈한 성격 덕분에 언제 그랬냐는 듯 풀렸다. 어머니(인성)와 시어머니(재성) 자리 어디쯤에 있는 정화 어머니와 함께 지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선택해서 만난 정화와도 티격태격 인데 정화에 연결된 가족들과의 관계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도 극과 극은 통하는 것일까? 아니면 같은 양간이라서 통하는 것일까? 음간인 정화와 달리 병화일간 어머니는 임수와 비슷한 면이 많았다. 요란한 행동력, 우렁찬 목소리, 밖에 나가서 체면 챙기기(둘 다 일간 아래 글자가 체면을 소중히 생각하는 관성(官星)임), 음간 정화 놀리기 등등. 시간이 지날수록 병화일간 어머니와 함께 하는 재미를 알아간다. 이렇게 서서히 정화의 가족들과도 가족이 되어간다.

 

 <책, 가족의 가족>

댓글 7
  • 2023-08-01 10:06

    엄마도 아니고 시어머니도 아닌 친구의 엄마! 가족의 가족이 가족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읽으니 즐겁네요.
    이 글을 읽으며 문탁 친구들 엄마들이 떠올라 괜히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해피님이 루틴과 무사에게 오랫동안 맛난 음식 많이 해주실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2023-08-01 11:28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 이거 나의 단골멘트인데 ㅋㅋㅋㅋㅋ
    그래도 아직 어머님이 그렇게 챙겨주신다니… 인성 발달한 무사 맞네요~
    ‘여자 둘의 살이’엔 이런 뜻밖의 관계가 생기네요. 관전잼이 있군요 ^^

  • 2023-08-01 12:24

    해피님의 정체를 이제 알게 됐네!! 임수와 정화는 힘들겠지만,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 2023-08-01 15:39

    ㅋㅋㅋ 친구 어머니의 잔소리라... 내 어머니의 잔소리와 잔뜩 기싸움하는 나로서는 루틴의 곤란함이 팍팍 느껴짐요 ㅋㅋㅋ

  • 2023-08-02 18:51

    해피님은 오늘도 여지없이 한소리 하셨습니다.
    “고집 고만 부리고 늬들 에어컨 좀 사그라.”
    못이기는척 말 잘 듣고 싶은 날씨네요ㅎㅎ

    • 2023-08-04 13:02

      해피님의 한소리에 '좋아요' 버튼 꾸욱 입니다^^

  • 2023-08-10 16:52

    엄마와 딸들은 어디서나 비슷비슷...ㅎㅎ
    친구엄마와도 비슷?! ㅋ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나와 당신의 책임   10년 전,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쓰인 멋진 슬로건들을 생각하고 있자면, 만든 이를 찾아가 박수를 쳐 주고 싶어지곤 한다.전기를 소비하는 곳에는 책임이 있다. 전기를 생산하고 송전하는 곳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다. 그 책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슬로건이 있었다 .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또,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였던 송전탑 반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데에 기여했던 슬로건도 있다.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   누군가가 당사자이고, 누군가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규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에너지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말이다. 이 슬로건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운이 좋게도 끝없이 확장되는 사회 운동을 경험했다. 설령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밀양이 아니더라도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밀양은 졌다. 높이 100m짜리 송전탑은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다. 밭일을 할 때도, 병원을 가기 위해 마을 길을 걸을 때도, 캄캄한 밤 안방 창문에서도 쇳덩어리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낮 쇳덩어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저 철탑에는 핵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흐른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아도, 마주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송전탑에는 돈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을 공동체의 상처가 묻어 있다. 38만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사람을 짓밟았던 폭력의 상처, 함께 싸우다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 2014년, 2차...
나와 당신의 책임   10년 전,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쓰인 멋진 슬로건들을 생각하고 있자면, 만든 이를 찾아가 박수를 쳐 주고 싶어지곤 한다.전기를 소비하는 곳에는 책임이 있다. 전기를 생산하고 송전하는 곳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다. 그 책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슬로건이 있었다 .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또,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였던 송전탑 반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데에 기여했던 슬로건도 있다.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   누군가가 당사자이고, 누군가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규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에너지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말이다. 이 슬로건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운이 좋게도 끝없이 확장되는 사회 운동을 경험했다. 설령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밀양이 아니더라도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밀양은 졌다. 높이 100m짜리 송전탑은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다. 밭일을 할 때도, 병원을 가기 위해 마을 길을 걸을 때도, 캄캄한 밤 안방 창문에서도 쇳덩어리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낮 쇳덩어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저 철탑에는 핵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흐른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아도, 마주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송전탑에는 돈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을 공동체의 상처가 묻어 있다. 38만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사람을 짓밟았던 폭력의 상처, 함께 싸우다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 2014년, 2차...
남어진
2024.05.10 | 조회 108
일상명상
덕밍 아웃, 그 후   지난 글에서 호기롭게 덕밍 아웃을 했지만 명상에 빠져든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던 것은 아니다. 명상에 빠진 것은 결과지 이유는 아니니까. 하여 명상이 처음부터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친구와 같다고 했지만 정작 누군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면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그냥 좋으니까 좋았다는 식의 동어 반복을 되풀이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언가에 꽂힐 때 그 이유를 다 알아서는 아닌 것 같다. 우연히 어떤 것에 마음이 불꽃처럼 호응할 때 그저 속절없이 빠져드는 게 아닐까. 처음엔 빠져든 이유를 잘 모르는 터라 경우에 따라 ‘입덕 부정기’를 겪기도 하면서 말이다. 대개는 빠져든 다음에야 그 이유를, 스스로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발견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이유 덕분에 다시 그 대상을 더 깊이 애정하게 되는, 다이내믹한 순환이야말로 덕질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지.     나도 명상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른바 덕질의 묘미를 맛보고 있다. 명상이 뭔지도 모르고 매달리듯 빠져들었다가 이제야 차츰 명상이 뭔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명상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들에, 그렇거나 많이 휘둘리고 있는 줄 몰랐다. 그 때문에 명상을 통해 처음 경험했던 침묵과 평온이 그토록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는지도. 만약 명상이 아니었다면 일 년 365일, 꺼지지 않는 텔레비전처럼 소란스런 정신적 수다 때문에 괴롭다는 걸 영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그 순전한 무지에서 벗어난 순간, 마치 세상의 비밀을 다...
덕밍 아웃, 그 후   지난 글에서 호기롭게 덕밍 아웃을 했지만 명상에 빠져든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던 것은 아니다. 명상에 빠진 것은 결과지 이유는 아니니까. 하여 명상이 처음부터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친구와 같다고 했지만 정작 누군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면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그냥 좋으니까 좋았다는 식의 동어 반복을 되풀이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언가에 꽂힐 때 그 이유를 다 알아서는 아닌 것 같다. 우연히 어떤 것에 마음이 불꽃처럼 호응할 때 그저 속절없이 빠져드는 게 아닐까. 처음엔 빠져든 이유를 잘 모르는 터라 경우에 따라 ‘입덕 부정기’를 겪기도 하면서 말이다. 대개는 빠져든 다음에야 그 이유를, 스스로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발견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이유 덕분에 다시 그 대상을 더 깊이 애정하게 되는, 다이내믹한 순환이야말로 덕질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지.     나도 명상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른바 덕질의 묘미를 맛보고 있다. 명상이 뭔지도 모르고 매달리듯 빠져들었다가 이제야 차츰 명상이 뭔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명상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들에, 그렇거나 많이 휘둘리고 있는 줄 몰랐다. 그 때문에 명상을 통해 처음 경험했던 침묵과 평온이 그토록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는지도. 만약 명상이 아니었다면 일 년 365일, 꺼지지 않는 텔레비전처럼 소란스런 정신적 수다 때문에 괴롭다는 걸 영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그 순전한 무지에서 벗어난 순간, 마치 세상의 비밀을 다...
오영
2024.05.09 | 조회 100
K장녀_돌봄을 말하다
          언젠가 엄마의 구술 생애사를 써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엄마의 삶을 기록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엄마의 삶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녀딸이 인터뷰를 시작하긴 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진행을 못해서 좀 아쉽다. 이렇게 빨리 엄마가 기억을 잃고 이야기를 못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산업화세대 워킹맘   10년 전쯤 아버지가 대장암 재발로 병원에 오래 입원해 계실 때 엄마는 병원간호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혈관이 잘 안 나오는 아버지에게 혈관 주사를 놓으려면 꽤나 힘이 들었는데 엄마가 곧잘 혈관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1935년생인 엄마는 간호사이자 조산사였다. 엄마가 간호사 면허번호를 말하면(0000번 대) 간호사들(면허번호 000000번 대)은 깜짝 놀라며 ‘선배님’이라 불렀다. 엄마는 은근히 그걸 즐기는 듯했다.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하던 엄마는 결혼하면서 그만두었고, 시골학교 교사인 아빠의 고향에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걸 도왔다고 했다.   엄마는 의대에 가고 싶었다. 중학생 때 친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들어오셨는데 엄마가 의대 가는 걸 반대해서 간호학교에 갔다. 동생인 삼촌 두 분은 의사다. 엄마 세대, 즉 산업화 세대에 많은 딸들은 아들들을 위해서 진학을 포기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남동생을 위해 희생한 누나들. 엄마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딸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의대에 갈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 또래는 대부분 형제가 4~5명 정도 된다. 유독 우리집은 형제가 오빠와...
          언젠가 엄마의 구술 생애사를 써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엄마의 삶을 기록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엄마의 삶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녀딸이 인터뷰를 시작하긴 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진행을 못해서 좀 아쉽다. 이렇게 빨리 엄마가 기억을 잃고 이야기를 못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산업화세대 워킹맘   10년 전쯤 아버지가 대장암 재발로 병원에 오래 입원해 계실 때 엄마는 병원간호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혈관이 잘 안 나오는 아버지에게 혈관 주사를 놓으려면 꽤나 힘이 들었는데 엄마가 곧잘 혈관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1935년생인 엄마는 간호사이자 조산사였다. 엄마가 간호사 면허번호를 말하면(0000번 대) 간호사들(면허번호 000000번 대)은 깜짝 놀라며 ‘선배님’이라 불렀다. 엄마는 은근히 그걸 즐기는 듯했다.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하던 엄마는 결혼하면서 그만두었고, 시골학교 교사인 아빠의 고향에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걸 도왔다고 했다.   엄마는 의대에 가고 싶었다. 중학생 때 친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들어오셨는데 엄마가 의대 가는 걸 반대해서 간호학교에 갔다. 동생인 삼촌 두 분은 의사다. 엄마 세대, 즉 산업화 세대에 많은 딸들은 아들들을 위해서 진학을 포기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남동생을 위해 희생한 누나들. 엄마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딸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의대에 갈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 또래는 대부분 형제가 4~5명 정도 된다. 유독 우리집은 형제가 오빠와...
인디언
2024.05.07 | 조회 243
기린의 걷다보면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기린
2024.05.06 | 조회 156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 2편           동물의 의례   초코는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고 햇볕을 쬐다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왼쪽 뒷다리는 굽어 있었고 굽은 다리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는 다친 다리를 허공에 들고 걸었다.   초코는 골절된 다리로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초코를 치료하기 위해 포획틀을 설치했지만, 초코 대신 엉뚱한 고양이가 들어왔다. 봉봉오리님은 포획틀에 갖힌 초코의 단짝 고양이 카레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속 터지는 희극'이라고 했다. 『지구에 살 자격』에는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재개발구역에서 돌봄하는 것이 무조건 슬플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마냥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재개발구역이 조금 이상한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다. 나는 그곳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를 돌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내염을 오래 앓아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카레의 곁에는 늘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초코가 있다. 둘은 추운 날 하나의 겨울 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몸이 관통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던 8개월의 오잉이는, 피를 흘리며 몸을 숨겼던 일주일 간의 시간 동안, 혀가 닿지 않는 그의 상처를 핥아준 형제들이 있었다. 『지구에 살 자격』, 145쪽   밥그릇...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 2편           동물의 의례   초코는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고 햇볕을 쬐다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왼쪽 뒷다리는 굽어 있었고 굽은 다리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는 다친 다리를 허공에 들고 걸었다.   초코는 골절된 다리로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초코를 치료하기 위해 포획틀을 설치했지만, 초코 대신 엉뚱한 고양이가 들어왔다. 봉봉오리님은 포획틀에 갖힌 초코의 단짝 고양이 카레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속 터지는 희극'이라고 했다. 『지구에 살 자격』에는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재개발구역에서 돌봄하는 것이 무조건 슬플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마냥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재개발구역이 조금 이상한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다. 나는 그곳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를 돌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내염을 오래 앓아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카레의 곁에는 늘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초코가 있다. 둘은 추운 날 하나의 겨울 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몸이 관통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던 8개월의 오잉이는, 피를 흘리며 몸을 숨겼던 일주일 간의 시간 동안, 혀가 닿지 않는 그의 상처를 핥아준 형제들이 있었다. 『지구에 살 자격』, 145쪽   밥그릇...
경덕
2024.05.01 | 조회 226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