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 마더, 해피님
루틴
2023-07-31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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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壬) 루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대학원에서 10년을 세포만 쳐다보며 지냈다.
졸업 후 방황하다가 문탁에서 정화(丁) 무사와 사주명리를 만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요즘이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나 역시 궁금하다.
마더, 해피님
4년째 도시락 싸기가 가능해?
점심시간이 되면 자리에 앉아 도시락을 주섬주섬 꺼낸다. 아침에 지은 잡곡밥에 3첩 반상을 먹고 참외로 입가심을 한다. 완벽한 점심식사다. 코로나 이후 유지하고 있는 루틴이다. 사먹는 밥은 소화가 잘 되질 않아서 코로나 유행이 지나간 지금도 계속 도시락을 싼다. 오늘은 유독 고추장아찌가 맛있다. 이 고추장아찌는 집에서 손수 양념을 무쳐 만든 것이다. 당연히 주 5일 근무를 하는 음식 솜씨 없는 임수는 만들려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 반찬이다. 여기서 잠깐, 우리 집 업무 분장(정화와 임수의 좌충우돌 가족-되기 3회 참고)을 잠시 복습해보자면 음식 만들거나 반찬 정리, 냉장고 관리는 임수 담당이다. 어쩌다가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을 땄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화는 요리를 잘 못한다. 아니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신 청소를 잘한다. 그렇다면 누가 고추장아찌를 만들었을까? 4년 가까이 도시락 루틴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정화 어머니덕분이다.
< 4년 가까이 싸가는 도시락, 3첩반상과 과일 후식 >
음식 담당을 맡고 있지만 임수의 요리 실력은 늘지 않고 있다. 바쁜 주중 저녁에는 시간 상 음식을 만들 수 없다. 냉장고에 있는 밑반찬을 꺼내 먹거나, 외식을 한다. 정임합목 양생하우스 오픈 초기에는 음식을 곧잘 해먹었다. 유튜브에서 레시피를 검색하고 따라 만든 음식의 맛도 충분히 훌륭했다. 하지만 2년이 지나면서 음식 만들기도 시들해졌다. 그나마 주말에는 가끔 간단한 단품요리를 만들었으나 이마저도 주말에 세미나를 하게 되면서 뒷전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먹을 복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숙성된 연어회, 새우버터구이, 소불고기, 돼지갈비, 김치찜, 감자탕 등 외식보다 더 맛있는 특선 요리들을 집에서 종종 즐겼다. 입 짧은 정화 때문에 못내 아쉬워 하셨던 정화의 어머니께서는 배가 큰 임수를 딸로 들이면서 정화 혼자 먹일 때 보다 더 다양한 음식을 양껏 해 먹이신다(하하).
병화 일간 어머니와의 충(沖)
우리는 한 달 반이나 두 달에 한 번 1시간 거리에 있는 본가에 김치와 밑반찬을 가지러 다녀온다. 정해진 월례행사이다. 그날은 낮부터 배불리 먹는 날이다. 정화의 어머니는 우리가 오기 일주일 전부터 반찬 준비를 하신다. 알뜰하신 어머니는 일일 세일 품목에 맞춰 장을 보시고 며칠에 걸쳐 재료준비를 하신다. 우리가 본가에 가는 날 하루 이틀 전부터 음식을 만들기 시작하신다. 바로 먹일 음식은 당일 아침부터 따끈하게 준비하신다. 아니 이렇게 먹을 복이 넘치는데 “감사히 먹겠습니다” 삼세번을 외쳐도 모자랄 판에 임수는 종종 반찬을 가지러 가는 것을 귀찮아한다. 이유인즉, 작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전 국민의 절반이 코로나에 걸렸던 시기, 정화 아버지께서도 코로나에 걸리셨고, 지병이 있으신 정화 어머니는 일주일동안 우리 집으로 피신하셨다. 종종 놀러 오시긴 했었지만 이렇게 오랜 기간 머무신 건 처음이었다. 임수는 “당연히 우리 집으로 모셔야지” 하며 흔쾌히 승낙했고 그렇게 정화 어머니와 일주일간 동거를 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프로 살림러이시다. 문틈 사이에 있는 먼지도 송곳을 이용하여 기어코 청소를 하시는 분이다. 정임합목 양생하우스에 오시는 날이면 우리는 긴급 비상 청소에 들어간다. 보통은 눈에 딱 띄는 대표적인 몇 가지 사항만 해결하면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다. 특히 렌지 후드 청소를 중요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음식 조리 담당인 임수는 속성으로 특정 부위 청소에 집중한다. 정화 어머니의 칭찬 랠리가 이어진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어머니는 기왕 이렇게 된거 온김에 딸들을 해먹이겠다고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짧게 머무는 동안에는 보이지 않았던 하우스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오래된 반찬이 담긴 통, 만족스럽지 못한 식기 도구 상태, 냉장고에 묻어있는 각종 흔적들, 화장실 슬리퍼의 물때 등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적사항이 나왔다. 여기서 잠깐! 정화 어머니는 병화 일간이시다. 그래서인지 앞에서 할 말을 다하신다. 그러니 뒤끝도 없으시다. 우리 하우스의 면면은 병화의 태양아래서 훤히 드러났고, 그야말로 탈탈 털렸다.
근데 참 신기한 것이 정화는 이 상황을 별 반응 없이 흘려보내는 반면에 임수는 초긴장이었다. 지적사항에는 정화의 담당업무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말이다. 임수도 분명 학창시절에 엄마의 잔소리를 꾸준히 들어서 익숙할 만도 했다. 하지만 친구 엄마에게 잔소리를 들으니 대략 난감했다. 사실 친구 엄마가 내 방에 들어와서 잔소리를 하는 경우는 상상하기 힘든 일 아닌가. 난생 처음 마주한 상황에 임수는 적잖게 당황했다. 병화와 임수의 충돌이었다.
대부분 엄마의 잔소리는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친구 엄마의 잔소리도 마찬가지다. 단, 차이가 있다면 그 사실을 알면서도 엄마에게는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보통, 비겁이 많은 아이들의 단골멘트)”라고 되받아칠 수 있는 반면, 친구 엄마에게는 “네..알겠습니다(재성이 없는 사람들의 단답형 대답)”가 거의 유일한, 최선의 답이다. 임수는 부글부글 짜증이 났다.
사주 상 비겁이 과다하고 재성이 약한 임수에게는 집이란 공간은 편히 쉴 수 있는 중요한 곳이다. 이런 공간에서 벌어진 불편한 상황을 재치있게 넘기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그나마 심리적 거리가 가까웠던 정화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게 화근이 되어서 임수와 정화는 다퉜다. 정화는 어른들 하는 말씀은 다 옳긴 하지만, 일일이 맘에는 담아두지 말라고 했고, 병화 일간 어머니에게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며 대표로 화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정화는 임수의 어정쩡한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임수는 자신을 이해해줄 누군가가 필요했고 시집살이로 고생했던 친구(이 친구도 임수)와 간만에 통화를 오래했다. 신기하게도 지금의 임수 상황을 가장 잘 이해해 주는 건 그 친구였다. 친구의 결혼 이후 라이프 스타일이 달라서 소원해졌던 그 친구와 간만에 대동단결하여 얘기를 나누고 나니 묘하게 동질감을 느꼈다. 친구는 “결혼을 안 해도 똑같네”라며 재미있어 했고, 임수 역시 이 상황이 그리 특별해보이지 않았다. 그 친구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라고 조언해줬다. 사주명리에서도 본인과 시어머니와의 관계를 일하는 관계인 재성(財星)으로 해석한다. 보통 여자는 남편을 관성(官星)으로 보기 때문에 그를 생해주는 재성(財星)이 시어머니를 뜻한다. 정임합목 양생하우스는 ‘정상’ 가족의 형태가 아니라서 같이 사는 상대(정화)를 타자의 영역인 관성(官星) 또는 친구사이인 비겁(比劫)의 영역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정화 어머니는 임수에게 관성(官星)을 생해주는 재성(財星), 즉 시어머니일수도 있고, 또는 비겁(比劫)을 생해주는 인성(印星), 즉, 어머니일수도 있다는 말이다.
< 사주명리, 육친관계>
‘일’처럼 대하라는 친구의 말은 무슨 뜻일까? 일처럼 영혼 없이 처리하라는 뜻이 아닐 것이다(요즘 일을 영혼 없이 하는 경우가 많아서 오해할 수 있다^^;;). 일을 할 때는 다양한 접근법이 중요하다. 목적지에 이르는 길은 여럿이다. 한 가지 길만 고수할 필요는 없다. 사주 명리에서는 일, 결과물(돈), 사람 관계를 같은 속성의 부류로 본다. 다양한 관점을 가진 사람들과 관계 속에서 일이 성사되고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한 가지 의견만 고수한다면 자신의 영역을 빠져나오지 못한 채 혼자만의 축제를 즐길 승산이 크다.
가족이 되어 간다는 것은..
하우스가 탈탈 털렸던 사건 이후 혼자 속으로 꽁해있던 임수는 다음 반찬을 가지러 가는 날,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정화 혼자 보내려고 했지만, 마음에 걸렸다. 이렇게 맛있는 반찬을 고생 없이 날름 먹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고쳐 먹었다. 다시 뵙게 된 병화 일간 어머니는 꽁한 임수와 다르게 너무나 밝으셨다. 그날도 생일이 얼마 남지 않은 임수를 위해 한상 거하게 차려주셨다. 돌아가는 길에 “우리 미잠이 잘 가~~”하시면서 임수를 크게 품으셨다.(미잠이는 병화 일간 어머니가 임수에게 지어주신 애칭이다. ‘잠’을 많이 잔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밝고 유머감각이 넘치는 어머니 애칭은 ‘해피님’이다. “해피님~ 감사해요~”라며 화답하고 돌아왔다.
임수는 병화 일간 어머니의 훤히 들춰내는 화끈한 성격에 부딪혔고 그 화끈한 성격 덕분에 언제 그랬냐는 듯 풀렸다. 어머니(인성)와 시어머니(재성) 자리 어디쯤에 있는 정화 어머니와 함께 지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선택해서 만난 정화와도 티격태격 인데 정화에 연결된 가족들과의 관계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도 극과 극은 통하는 것일까? 아니면 같은 양간이라서 통하는 것일까? 음간인 정화와 달리 병화일간 어머니는 임수와 비슷한 면이 많았다. 요란한 행동력, 우렁찬 목소리, 밖에 나가서 체면 챙기기(둘 다 일간 아래 글자가 체면을 소중히 생각하는 관성(官星)임), 음간 정화 놀리기 등등. 시간이 지날수록 병화일간 어머니와 함께 하는 재미를 알아간다. 이렇게 서서히 정화의 가족들과도 가족이 되어간다.
<책, 가족의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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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도 아니고 시어머니도 아닌 친구의 엄마! 가족의 가족이 가족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읽으니 즐겁네요.
이 글을 읽으며 문탁 친구들 엄마들이 떠올라 괜히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해피님이 루틴과 무사에게 오랫동안 맛난 음식 많이 해주실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 이거 나의 단골멘트인데 ㅋㅋㅋㅋㅋ
그래도 아직 어머님이 그렇게 챙겨주신다니… 인성 발달한 무사 맞네요~
‘여자 둘의 살이’엔 이런 뜻밖의 관계가 생기네요. 관전잼이 있군요 ^^
해피님의 정체를 이제 알게 됐네!! 임수와 정화는 힘들겠지만,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ㅋㅋㅋ 친구 어머니의 잔소리라... 내 어머니의 잔소리와 잔뜩 기싸움하는 나로서는 루틴의 곤란함이 팍팍 느껴짐요 ㅋㅋㅋ
해피님은 오늘도 여지없이 한소리 하셨습니다.
“고집 고만 부리고 늬들 에어컨 좀 사그라.”
못이기는척 말 잘 듣고 싶은 날씨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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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딸들은 어디서나 비슷비슷...ㅎㅎ
친구엄마와도 비슷?!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