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흡혈귀가 나타났다!

경덕
2023-07-22 00:01
371

 

 

 

 

경덕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2022. 7~).

난잡한 공부가 체질이라 여러 세미나와 워크숍을 유랑한다.

올해 문탁네트워크에서 주역, 불교, 돌봄을 키워드로 공부한다.

 
 
 
흡혈귀가 나타났다!
 
 
낮은 자세
 
"내일 아침돌봄 때 잔디 배 안쪽 상처를 가볍게 소독해주실 수 있을까요? 상태가 어떤지 사진으로 찍어 공유 부탁드립니다."
 
전날 올라온 무모 님의 지시 사항을 읽으며 아침 돌봄을 갔다. '상처를 소독하려면 잔디가 잘 누워줘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새벽이생추어리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날 따라 잔디는 활기가 넘쳤고 돌봄이 끝날 때까지 드러누울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봄 기운이 넘실대는 5월이었다. 잔디는 여기 저기 올라오는 풀을 뜯거나 부드러운 흙을 코로 탐색하며 봄내음을 맡느라 분주했다.
 
잔디가 눕지 않으니, 내가 누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잔디가 움직이지 않는 틈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 잔디가 멈추는 순간 가까이 다가가 몸을 납짝 엎드려 배에 소독약을 뿌렸다. 잔디는 자신이 내키지 않을 때 자기 몸을 누가 만지거나 몸에 차가운 액체를 뿌리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그럴 때 잔디는 몸을 부르르 떨고 꾸웅 꾸웅 소리를 내며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드러낸다. 특히 식사 중에 어딜 만지거나 약을 바르려고 하면 코로 음식을 마구 헤집고 그릇을 퍽퍽 친다. 그러다 밥그릇이 엎어져 음식을 전부 쏟을 때도 있다. (근데 그런 반응은 너무 당연하잖아? 밥 먹을 때 누구라도 건드리면 짜증나잖아?) 어쨌든 전달 받은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나는 약을 뿌렸고 잔디는 싫은 소리를 내며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나는 잔디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기회를 엿보다가 여러 번 소독약을 뿌렸다. 
 
소독을 충분히 해준 후에는 사진을 찍어야 했다. 처음에는 휴대폰만 배 밑으로 낮게 깔고 사진을 찍었지만, 찍을 때마다 초점이 맞지 않거나 엉뚱한 부위가 찍혔다. 할 수 없이 나는 완전히 누운 자세로 얼굴을 땅에 바짝 붙여 프레임과 초점을 맞추어야 했다. 그리고 잔디의 피부 상태가 잘 보이는 사진을 골라 무사히 일지에 업로드했다.
 
2023년 5월 11일 돌봄 일지
- 잔디 배에 소독약 뿌려주었어요. 누울 생각이 없어보여서 제가 누워서 사진을 찍어야 했어요! 피부가 군데 군데 빨갛게 올라왔어요.
 
댓)
무모 : 잔디 배 사진 보니 경덕님 자세가 상상되었어요. 수고 많으셨어요!
경덕 : 오늘 돌봄, 가장 낮은 자세로 임했습니다!
 
 
 
 
치유제, 진흙과 황토
 
새벽이와 잔디도 아플 때가 있다. 피부에 상처가 나고 염증이 생기면 연고를 바르거나 약을 복용한다. 다리가 접질리거나 발에 이상이 생기면 다리를 절룩인다. 상태가 호전되지 않으면 주사를 맞을 때도 있다. 그리고 컨디션이 안 좋으면 집 안에만 머무르기도 한다.
 
새벽이와 잔디는 특히 피부가 취약하다. 돼지의 피부는 많은 것들로부터 위협을 받는다. 자외선으로부터, 온갖 벌레들로부터, 부러진 나뭇가지나 땅 속에 묻혀 있는 날카로운 것들로부터. 돼지의 피부가 원래부터 취약한 건 아니었다. 돼지의 연약한 피부는 축산업에 의해 강제 개변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새벽이의 연분홍빛 피부는 축산업에 의해 강제 개변된 결과로, 그가 인간에 의해 얻은 장애 중 하나다. (...) 축산업은 이들의 털을 벗겨 먹기 쉽게 혹은 동물들을 통제하기 쉽게 몸에서 털을 없애고 색을 빼는 등 강제적 변형을 가했다. (...) 본래 돼지는 갈색과 검은색의 짙은 빛 털이 수북하게 자라난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46쪽
 
"새벽이는 인간의 동물산업으로부터 '장애화'된 몸으로 태어나,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할 수 없게 되었다. 축산업은 새벽이의 피부가 스스로 멜라닌을 생성할 수 없도록 피부를 품종개변했다." 같은 책, 48쪽
 
활동가들은 새벽이와 잔디의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치료와 예방에 힘쓰고 있다. 피부 질환을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진흙을 바르는 것이다. 돼지는 땀샘이 거의 없어서 더운 날씨에는 체온 조절이 어렵다. 그런데 진흙은 햇빛을 차단하여 돼지의 체온을 낮춰준다. 또 자외선이나 벌레로부터 피부를 보호해주고 피부 질환을 예방하며 예민한 피부를 진정시키는 효과도 있다. 그래서 햇볕이 뜨겁고 벌레가 들끓는 여름에는 새벽이와 잔디의 마당에 진흙 목욕탕을 만들어준다. 이전에는 '길 가다 재수 없이 밟는 축축한 흙탕물', '머드 축제에서나 볼 수 있는 이벤트 재료' 정도로만 진흙을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진흙은 돼지의 피부를 케어하는 천연 치유제, 자외선 차단제, 쿨러의 역할로 먼저 떠오른다. 황토빛 진흙이 새벽이와 잔디의 피부에 듬뿍 묻어 있는 모습을 보면 훨씬 야생적이고 굳세게 느껴지기도 한다.
 
 
근데 진흙 목욕탕을 만들어주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새벽이와 잔디의 몸이 전부 잠길 만큼 목욕탕이 크지 않아 등이나 머리와 가까운 부위는 진흙이 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땐 활동가가 직접 황토를 발라주어야 한다. 황토를 바르기 전에 새벽이에게 양해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잔디는 예민하게 반응하더라도 덩치가 작아서  크게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지만, 새벽이는 친밀한 사람에게만 곁을 내어 주고, 오래된 활동가도 새벽이가 무심코 하는 행동에 다칠 수 있어(날카로운 엄니에 긁히거나, 돌진하는 새벽이와 충돌하는 경우)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귀 뒷부분은 자외선에 취약하고 피부암이 생기기 쉬운 곳이라 썬크림을 발라주어야 하는데, 얼굴과 가까울수록 새벽이가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
 
h 활동가는 일지에 이렇게 남겼다.
 
- 새벽이가 누워있을 때 새벽이 공간에 들어가서 황토 뿌려줬는데 싫어하는 게 느껴졌어요. 머리 근처로 갈수록 싫어하는 표현을 했는데 황토를 뿌려야 건강에 더 좋으니까... 미안했지만 천천히 뿌렸어요. 그러다가 새벽이가 일어나려고 하자 저는 후다닥 도망갔는데, 다 도망치고 뒤를 돌아보니 새벽이는 다 일어나지도 않고 앉아서 저를 보고 있었어요.. ㅋㅋ 스스로 좀 웃기기도 하고 철망 없이 새벽에게 그정도로 가까이 간 건 처음이어서 신기하기도 했어요!
 
y 활동가는 화끈한 방법을 쓰기도 한다.
 
- 새벽이 황토를 발라줄 때 역시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머리쪽을 많이 발라주고 싶어서 이번에도 새벽이 집 지붕 위에 올라가서 머리 위에 황토물을 부었어요…새벽이에겐 미안하지만.. 이사갈 생추어리를 설계할 때 황토를 발라주는 등 새벽이 가까이에서 해야 하는 돌봄을 위한 공간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흡혈귀가 나타났다!
 
또 여름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새벽이와 잔디의 피부를 노리는 존재들이 있다. 바로 파리와 등에이다. 등에 중에서도 동물의 몸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는 종류의 등에가 있다. 왕소등에와 북방등에는 큰턱과 작은턱이 칼날모양을 이루어 숙주동물의 피부와 혈관을 자를 수 있는 무서운 흡혈 곤충이다. 등에가 머물다 간 피부에는 상처가 남고, 상처에는 금새 파리들이 달라붙는다. 파리는 상처에 세균을 옮기고, 상처에 알을 낳을 수도 있다. 활동가들이 피부에 붙어 있는 파리와 등에를 보는 즉시 쫓아내도 그 녀석들은 금방 다시 새벽이와 잔디의 피부에 들러붙는다. 등에와 파리를 쫓기 위해 새벽이와 잔디의 피부에 벌레 기피제를 뿌리고, 상처가 난 피부에는 연고를 바른다. 하지만 이 때에도 새벽이에게 바로 다가갈 수 없는 경우에는 새벽이 눈치를 살펴야 한다. 그렇게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서 민첩하고 대담하게 행동하기도 한다.
 
- 새벽이는 파리가 배에 많이 붙어 있었는데, 용기가 안 나서 들어가지 못했어요. (j 활동가)
 
- 둘 모두 약을 발랐어요! 새벽이는 누워있는 상태에서 왼쪽 배 전체적으로 발랐고 엉덩이는 바르니까 다리 움찔하길래 혹시 일어날까봐 제일 큰 상처에만 좀 발랐어요. 잔디 배는 새벽이에 비해 상태가 좋아보였고 군데군데 좀 빨간데만 발랐어요. 근데 턱 쪽도 좀 빨개서 약 발랐어요. (d 활동가)
 
- 잔디가 따온 풀을 먹는 동안에 후다닥 발라줬어요. 풀을 먹을 때 약을 발라서 예민해진 탓에 저에게 몸통 박치기를 했는데 바지에 잔디 코 자국이 찍혀서 웃겼어요. (b 활동가)
 
- 배에 소독약을 뿌리긴 했어요. 굉장히 싫어했지만 고루고루 뿌려줬습니다. 정중히 사과했어요. (h 활동가)
 
새벽이의 피부를 케어하는 돌봄은 난이도가 꽤 높다. 새벽이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하고 손으로 직접 새벽이를 만져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새벽이가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라도 스스로 내킬 때와 내키지 않을 때가 있다. 새벽이도 마음이 여유로울 때 누군가의 손길을 잘 수용하기 때문에 활동가들은 매번 새벽이 눈치를 살피며 새벽이의 몸과 마음이 느긋해지길 기다린다. 
 
 
 
벌레와, 함께 살 수 있을까?
 
어느 날 이런 공지가 올라왔다. 
 
- 잔디 안방, 새벽 안방에 파리끈끈이를 설치했어요. 지난 돌봄모임에서도 나눴지만, 파리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벌레물린 상처에 파리가 꼬이면 심각한 염증으로 이어질 수 있어요. 몇 년 동안 소극적인 대처로 기피제를 뿌려보았지만 큰 효과는 없었어요. 새벽이 잔디 건강을 지키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자 합니다. 곧 전기파리채도 시도해볼 예정이에요. 벌레와의 공존에 대한 고민은 현재진행형이니 불편한 마음이나 더 좋은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 등 자유롭게 나누어요.
 
활동가들은 새벽이와 잔디를 돌본다. 그리고 새벽이와 잔디를 위협하는 벌레들을 퇴치한다. '벌레와의 공존에 대한 고민'은 인간중심주의, 종차별주의에 대한 고민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불편한 마음'이나 '더 좋은 방법'에 대한 나눔은 어떤 사유와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우리는 '보호' 너머의 '돌봄'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고민을 나누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인간, 비인간 동료들과 계속 함께하는 것 또한 그 자체로, '돌봄'의 일환일 수 있을까?
댓글 3
  • 2023-07-23 07:45

    사람의 고기로 만들기 위해 품종을 개변하는 과정에서 파리, 모기, 등에에도 취약하고
    심지어 자외선도 견딜 수 없는 피부를 갖게 되었다니..
    새벽이와 잔디의 피난처인 생추어리야말로 '원죄'를 끊임없이 떠올리게 하는 장소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에 약을 발라주고 사진을 찍기 위해 땅바닥에 누워 애쓰는 경덕님을 상상하니 웃음이 나옵니다.ㅎㅎ 고생하셨어요!!

  • 2023-07-26 22:32

    우리도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가차없이 항생제나 항바이러스제를 이용해서 죽이잖아요! 무구할 수만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린 늘 윤리를 생각해야 하는 거겠죠?
    돼지가 품종이 개량(?)되어서 분홍색 피부를 갖게 되었다니요 …ㅠㅠ

  • 2023-07-27 10:53

    활동가들의 모습이 상상되는 일지들이 재밌네요. 마냥 재밌을 수 만은 없지만요.
    마당에 풀을 뽑으면서 가끔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데, 왜 이건 살리고 이건 뽑는건지 모르겠다...
    벌레와의 공존은...음... 쉽지 않네요...

K장녀_돌봄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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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2024.05.27 | 조회 177
아스퍼거는 귀여워
  그 날은 평범한 오후였다. 감자가 한 50일쯤이었을까. 분유 냄새가 폴폴 나는 뽀시래기 시절, 남편은 출근하고 나는 감자랑 하루 종일 붙어있으면서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거실 소파 위에 앉아 다리 위에 아이를 끼워놓고는,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배부른 아이는 나른하게 누워있고, 모처럼의 평화로운 분위기. 그때 감자는 내 눈을 정확하게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등줄기부터 짜르르 행복감이 느껴졌다. “아…. 이게 행복이구나” 감자를 낳고 밤낮으로 잠도 못 자고, 회복이 늦어서 제대로 앉지도 서지도 못했던 나날들이었다. 내 배에서 나왔지만, 처음에는 실감이 안 났고, 나중에는 정신이 없었고, 씻지도 먹지도 못해 사랑스러움을 느낄 새도 없었다. 하지만 그 날 처음 눈이 서로 딱 마주친 그때. 나는 속절없이 사랑에 빠졌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존재라니. 그날부터 감자 입덕기가 시작되었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생각한다. “호옥시... 우리 아이가 천재?” 누구나 에겐 판단력을 상실하고, 자신의 아이만 보이는 시절이 있었더랬다. 첫 뒤집기가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다 싶다. 태어나서 한 줌밖에 안 되어 보이는 아이가, 조금씩 자라고, 꼬물거리고, 울고, 웃었다. 그때는 손가락만 쥐었다 펴도 대단해 보인다. 그런 아이가 뒤집기라니!! 혼자서 뒤집다니!! 놀랄 노자가 아닐 수가 없다. “우리가 아이가 뒤집었어요.” 동네방네 플래카드라도 붙이고 싶은 심정.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1~2개월이 뭐라고, 인터넷에는 질문들이 가득하다. ‘6개월이 지났는데…. 우리 아이 왜 뒤집기를 안 할까요’부터 ‘6개월인데 벌써 일어나 앉았어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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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
2024.05.25 | 조회 191
가마솥의 59년생 서른살
     동창회 모임은 딱 한군데 나간다. 고등학교 3학년 반모임이다. 사회에 첫발을 디딜 즈음에 시작한 모임이니 얼추 한 사십년은 되었다. 모이면 하등 의미없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눈다. 학교 다닐 때 성적, 물론 충격적인 점수를 받았던 수학점수 등으로 이야기를 출발해서 세계 평화를 논하고 손주들 자라는 이야기가 나오면 마무리 시간이 된다. 요즘은 내게 은퇴후 생활에 대해서 묻는 친구들이 더러 있다. 10여년 전 고기리 우리집에 놀러 온 친구들은 내가 단독주택에서 살고 있고 또 평창 집을 가꾸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은퇴를 앞두었거나 은퇴한 지 서너 해가 되었는데, 미리 생각했던 전원주택 혹은 텃밭정도 가꾸는 시골살이를 이런 저런 이유로 실행하지 못하고 꿈만 꾸고 있는 녀석들이다. 한 녀석이 대뜸 목소리 톤을 높인다. “니들, 농사 지어봤냐? 니들처럼 시골 출신이면서 공부 잘 해서 손에 흙 묻히지 않은 놈들이 꼭 귀농한다고 설치더라. 난 농사라면 징글징글해서 때려 죽여도 안한다. 그 돈으로 그냥 사먹는 게 훨씬 싸다!” 녀석 참, 성질 급한 것은 여전하다. 내가 겪은 경험을 그에게 이야기했다.        내가 회사 대리 시절에 직속 과장이었던 선배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당시 사장은 좀 괴팍한 사람이었는데, 학벌도 좋고 인품도 바른 그 선배를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심하게 대했다. 임원회의 때마다 업무 성과를 핑계로 그 선배에게 이야기하는 톤은 옆자리의 우리들도 견디기 어려운 모욕적인 언사를 쏟아 내곤 하였다. 급기야 그 선배가 원형 탈모 증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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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2024.05.25 | 조회 162
현민의 독국유학기
    WG투어 터키편       인터네셔널 WG(독일에서는 셰어하우스를 WG라고 부른다. Wohngemeinschaft의 줄임말.)에 살다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WG 투어를 하자. 취지는 각자의 나라에 여행을 가자는 것이다. 우리 집은 12명이 함께 사는 특이한 경우라, 대화 때마다 등장하는 각 나라의 정치, 문화, 경제 상황을 다양하게 들을 수 있다. 독일, 터키, 인도, 헝가리, 코스타리카, 이탈리아, 미국 그리고 한국. 가봐야 할 곳이 많은데, 첫 번째로 우리는 터키에 가기로 했다.   독일 사람들은 새벽까지 파티를 한 후 해장 음식으로 되너를 먹는다. 터키 케밥은 독일 길거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데, 그만큼 터키 사람들은 80년대 이후 독일에 넘어와 독일 경제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터키는 유일하게 아시아와 유럽 동시에 면이 맞닿아 있는 국가다. 종교나 역사, 문화 면에서 유럽의 국가들과는 다른 갈래를 가지고 있지만, 유럽 곳곳에 퍼져있는 터키계 노동자들로 인해 굉장히 익숙하다. 2시간 비행이면 도착하고, 독일보다는 싼 물가이기 때문에 비교적 여행하기 만만하다. 나의 플랫 메이트 베이자는 터키의 수도 앙카라 출신으로 독일의 은행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그 애의 주도로 우리는 이스탄불로 향했다.   첫날 밤 공항에서는 호주인 아셔가 여행 비자가 없는 걸 입국장에서 알아버려 그 애를 한참 기다려야 했다. 한국에서 온 나, EU시민권이 있는 니키와 T 그리고 터키인인 베이자는 특별한 비자가 없이도 통과할 수 있었다. 아샤는 공항에서 50유로를 내 비자를 받고 한참 뒤에야 나왔다. 그게 모자랐는지 공항에서부터...
    WG투어 터키편       인터네셔널 WG(독일에서는 셰어하우스를 WG라고 부른다. Wohngemeinschaft의 줄임말.)에 살다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WG 투어를 하자. 취지는 각자의 나라에 여행을 가자는 것이다. 우리 집은 12명이 함께 사는 특이한 경우라, 대화 때마다 등장하는 각 나라의 정치, 문화, 경제 상황을 다양하게 들을 수 있다. 독일, 터키, 인도, 헝가리, 코스타리카, 이탈리아, 미국 그리고 한국. 가봐야 할 곳이 많은데, 첫 번째로 우리는 터키에 가기로 했다.   독일 사람들은 새벽까지 파티를 한 후 해장 음식으로 되너를 먹는다. 터키 케밥은 독일 길거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데, 그만큼 터키 사람들은 80년대 이후 독일에 넘어와 독일 경제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터키는 유일하게 아시아와 유럽 동시에 면이 맞닿아 있는 국가다. 종교나 역사, 문화 면에서 유럽의 국가들과는 다른 갈래를 가지고 있지만, 유럽 곳곳에 퍼져있는 터키계 노동자들로 인해 굉장히 익숙하다. 2시간 비행이면 도착하고, 독일보다는 싼 물가이기 때문에 비교적 여행하기 만만하다. 나의 플랫 메이트 베이자는 터키의 수도 앙카라 출신으로 독일의 은행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그 애의 주도로 우리는 이스탄불로 향했다.   첫날 밤 공항에서는 호주인 아셔가 여행 비자가 없는 걸 입국장에서 알아버려 그 애를 한참 기다려야 했다. 한국에서 온 나, EU시민권이 있는 니키와 T 그리고 터키인인 베이자는 특별한 비자가 없이도 통과할 수 있었다. 아샤는 공항에서 50유로를 내 비자를 받고 한참 뒤에야 나왔다. 그게 모자랐는지 공항에서부터...
현민
2024.05.24 | 조회 146
윤경이는 마을활동가
      지난 4월 13일과 14일 낮 최고 기온이 27.3℃와 29.4℃였다. 아직은 이른 봄인데, 기온은 한여름이다. 작년보다도 더 빠르게 더워지는 것 같고, 무엇보다 햇빛의 강도가 작년과 또 다르게 더 강렬했다. (올해는 새로운 패턴이 생긴 것도 같다. 너무 일찍 더워졌다가 또 급하게 온도가 내려가 평년보다 더 쌀쌀해진 느낌이다) 그런 햇빛을 받으며 걷고 있는 나는 겁이 났다. 정말 지구가 불타오르는 것 아닐까 해서다.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아이들이 엄청 더워서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인다. 괜스레 미안해지고 안쓰러웠다. 기후변화가 시작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고, 이제 기후위기라고 한다. 이런 지구를 물려주는 어른으로서 나는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번 어린이날 행사에 참여하며 느낀 점을 정리하며 또다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본다.         친구야 노~올자     2024년 5월 5일 제102회 어린이날, 우리 동네에서는 제17회 금천어린이큰잔치 ‘친구야 노~올자’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는 2007년부터 시작된 마을 행사이다. 우리구는 1995년 구로구에서 분구된 후 ‘금천구’라는 정체성을 찾는데 시간이 좀 걸린 것 같다. 그래서 어린이날 행사도 한동안 없었다. 우리 동네 어린이들은 신도림 가로공원에서 열리는 어린이날 행사까지 다녀와야 했단다. 그런 상황을 보고 ‘나서는 어른들’이 있었다. 우리 동네 어린이들도 우리 동네에서 놀게 하자고. 그런 어른들의 제안으로 2007년 처음 금천구에도 어린이날 행사가 생긴 것이다. 전교조, 노동조합, 청년회, 진보정당 등 지역의 여러 단체가 첫 행사를 준비했다. 처음 열린 행사에서는 이주노동자와...
      지난 4월 13일과 14일 낮 최고 기온이 27.3℃와 29.4℃였다. 아직은 이른 봄인데, 기온은 한여름이다. 작년보다도 더 빠르게 더워지는 것 같고, 무엇보다 햇빛의 강도가 작년과 또 다르게 더 강렬했다. (올해는 새로운 패턴이 생긴 것도 같다. 너무 일찍 더워졌다가 또 급하게 온도가 내려가 평년보다 더 쌀쌀해진 느낌이다) 그런 햇빛을 받으며 걷고 있는 나는 겁이 났다. 정말 지구가 불타오르는 것 아닐까 해서다.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아이들이 엄청 더워서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인다. 괜스레 미안해지고 안쓰러웠다. 기후변화가 시작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고, 이제 기후위기라고 한다. 이런 지구를 물려주는 어른으로서 나는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번 어린이날 행사에 참여하며 느낀 점을 정리하며 또다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본다.         친구야 노~올자     2024년 5월 5일 제102회 어린이날, 우리 동네에서는 제17회 금천어린이큰잔치 ‘친구야 노~올자’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는 2007년부터 시작된 마을 행사이다. 우리구는 1995년 구로구에서 분구된 후 ‘금천구’라는 정체성을 찾는데 시간이 좀 걸린 것 같다. 그래서 어린이날 행사도 한동안 없었다. 우리 동네 어린이들은 신도림 가로공원에서 열리는 어린이날 행사까지 다녀와야 했단다. 그런 상황을 보고 ‘나서는 어른들’이 있었다. 우리 동네 어린이들도 우리 동네에서 놀게 하자고. 그런 어른들의 제안으로 2007년 처음 금천구에도 어린이날 행사가 생긴 것이다. 전교조, 노동조합, 청년회, 진보정당 등 지역의 여러 단체가 첫 행사를 준비했다. 처음 열린 행사에서는 이주노동자와...
김윤경~단순삶
2024.05.20 | 조회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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