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내가 나여도 되는 공간

현민
2023-07-17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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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사진에서 누굴까요.

 

 

 

 

 

 

내가 나여도 되는 공간

 

 

종종 외국에 나와 사는 여자애들을 보면 비슷한 분위기를 느낀다. 정처 없는 느낌. 집이 어디인지 모르겠어서 떠도는 사람들의 정처 없음을 그들과 나로부터 느낀다.

 가족은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나와 친구들의 화두였다. 우리는 만나면 처음엔 웃긴 얘기나 좀 하다가 결국 가족사로 가서 울고 싶지만 울지 못할 것 같은 얼굴들로 끝냈다. 자신의 상처를 바탕삼아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우리의 원가족은 집이었는데, 더 이상 돌아갈 곳은 아니었다. 가족 이야기는 모두가 하나같이 기괴해서 웃겼지만 가끔은 어쩔 수 없이 처량할 때도 있었다. 도대체 왜 일어난 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에는 자기 탓을 하기가 가장 쉬웠다. 이제는 그때처럼 가족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게 지겹기 때문이다.

 며칠 전 핸드폰 녹음기에서 한 시간짜리 녹음 기록을 발견했다. 작년 베를린에서 모였던, 아무도 한국에서 살지 않는 친구들과의 대화였다. 우리는 대안가족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다를 수 있을까? 잘 할 수 있을까? 그 대화는 조금 현실적인 느낌으로 끝났다. 원가족에 대한 결핍을 대안가족으로부터 메꿀 수는 없을 거라고. 우리가 기대하는 미래의 안정과 현재의 혼란과 과거의 결핍은 그대로, 서로 뒤섞이지 않고 영원히 너와 함께 살 거야. 어쩌면 살아가면서 그것을 잘 조율하는 법을 배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처 없는 아이들은 필연처럼 비슷한 장소에서 모인다. 예를 들면 퀴어 페스티벌이라던가. 다르게 말하자면, 정상세계에서 이상함을 감지하는 아이들은 이상한 것이 주류가 되는 날에 모인다. 6월은 프라이드 먼스(Pride month)였다. 내가 사는 뮌헨에서는 6월 24일에 CSD 행사를 했다. CSD는 Christopher Street Day의 약자로 독일을 포함한 여러 유럽지역의 퀴어 페스티벌 명칭이다.

우연히 이 날짜에 맞춰 튀빙엔에 사는 지해, 쾰른에 사는 성은이 뮌헨에 오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서울 퀴어 페스티벌이 가장 크지만, 독일에서는 6월과 7월에 걸쳐 거의 모든 도시에서 CSD 행사를 한다. 당일 아침 우리는 룸메이트들에게 CSD에 가는지 물으며 간다고 하면 가서 만나자고, 안 간다고 하면 왜 안가냐고(가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물었다.

 

독일에는 16개 주가 있다.

그 중 뮌헨이 속한 바이에른 주의 지역별 CSD 행사 날짜표

예를 들면 경기도에서만 25개의 지역에서 퀴어퍼레이드가 있는 것이다. 와웅

 

점심을 넉넉히 먹고, 선크림도 두 번씩 바르고, 서로의 머리를 땋아준 뒤 집을 나섰다. 퍼레이드가 어디에서 시작하고 끝나는지는 알았지만, 그 시간에 어디에 있는지는 몰랐다. 타고 가던 트램이 고장 나 내렸는데 저 멀리 형형색색의 사람들이 보였다. 그 엄청난 사람들의 색깔과 몸짓, 노래로 저곳이 우리의 목적지라는 걸 알아차렸다. 순식간에 가슴이 벅찼고 발이 가벼워졌다. 우리 셋은 폴짝폴짝 뛰면서 신호등을 건너 무리에 들어갔다. 야하게 입었을까봐 나시 위에 마지막 자기검열로 걸친 겉옷을 스르륵 벗었다. 그들과 만난 순간부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거리를 걸을 때 아시안이라 익숙히 받는 시선을 느낄 수 없었고, 옷과 화장이 너무 튈까봐 걱정하지 않았고, 더 꾸미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그곳에서 나는 이방인과 외국인과 동양인 여자애가 아니었다. 그냥 나는 거기 있었다.

 퀴어의 상징인 무지개가 내 몸에 없다는 게 아쉬워지자마자, 한 사람이 무지개 스티커를 길거리에 서 있는 경찰에게 붙여주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하나만 줄 수 있어? 물으니 그는 나에게 한 뭉치를 주었다. 곧장 가슴팍에, 왼쪽 뺨에, 매고 있는 가방에 붙이고 지해와 성은에게도 붙여주었다.

 

 

퍼레이드는 엄청나게 길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이 도시 어디에 있었을까? 이러다간 진짜 세상이 바뀌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싸우지 않고, 책을 만들지 않고, 설득하지 않아도 이 흐름과 기세로 세상이 바뀌어버릴 수도 있다고. 물론 그것은 누군가들이 무수히 해왔고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겉모습이 특이하면 특이할수록 그가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덥썩 안기고, 아무에게나 말을 걸었다. 길을 걸으면서 나는 어디까지가 우리, 퀴어와 앨라이(Alley, 지지자)들이며 어디서부터가 그들, 우연히 길에 있던 사람들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멈춰 이 행진을 구경하고 있었고 아무도 화나 보이지 않았다. 길에서는 고함을 지르거나 북을 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를 미워하는 이들이 없었다. 최근 서울 퀴어퍼레이드 개최가 서울 시청으로부터 거부된 것과 매번 퀴퍼에 갈 때마다 입구에서 고성방가로 우리를 위협하는 혐오세력을 웃어넘겨야 했던 시간들이 생각났다. 네가 이곳에서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아무도 너를 위협할 수 없어. 네가 남들과 다르게 때문에 차별받을 일은 없어. 이 간단하고 마땅한 말이 현실이 되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다양성이란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 궁금해 왔다. 그건 혼란이나 공포가 아니었고, 부드럽고 편했으며 달고 벅찼다. 언젠가 이런 것에 유난하게 느끼지 않아도 되는 때가 왔으면 좋겠다고 걸으며 생각했다.

 

 

퍼레이드가 끝나는 기점에서 걸어 들어오는 사람들의 팻말을 읽었다.

Equality is not like cake. If someone get’s it. you don't get less.

평등함은 다른 사람이 가지면 네가 적게 얻는 케이크 같은 것이 아니다.

Not same but equal.

똑같은 게 아니라 평등함.

Never apologize for who you are.

네가 누구인지에 대해 절대 미안해하지 마.

Max-Planck-Gymnasium

막스 플란크 김나지움

 

 

김나지움은 독일에서 4학년부터 12학년이 다니는 중고등학교다. 내가 마지막으로 학교에 속해있을 때 퀴어 퍼레이드에 학교 깃발을 들고 갔다면 인생이 얼마나 피곤해졌을까 싶다. 내가 만난 어떤 어른들은 정말, 그저 차별주의자들에 가까웠다. 다른 건 모두 되는데 퀴어와 페미니즘, 장애, 동물권, 정신병 등에 대해서는 본인들이 떠나온 시대의 사람들처럼 행동했다. 왜 어떤 이야기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으나 가장 나중에 도착할까?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은 차별과 혐오가 그 사람을 두들겨 패는 것뿐인 줄 안다. 하지만 침묵이나 중립 혹은 그들의 한마디도 신체적 폭력만큼이나 유해했다. 지나온 과거에 대해 날 선 질문들이 드는 반면에 지금은 그런 것에 힘을 쏟고 싶지 않다. 이미 자기가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은 정말로 괴롭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내 옆에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더 집중하고 싶다. 그리고 누군가에겐 말해주고 싶다. Never apologize for who you are. 절대 사과하지 마. 네 존재에 대해서. 네가 너인 것에 대해서 절대 미안해하지 마.

 

퍼레이드 중

 

퍼레이드가 끝나고 오후 2시부터 밤 12시까지 뮌헨 시청 앞에 설치된 메인 스테이지에서는 공연이 이어졌다. 무대 위에는 성별을 예측할 수 없거나 아니면 너무 예측할 수 있거나, 금기된 말들을 장난처럼 노래하는 사람들이 올라왔다. 그들은 대체로 웃겼고, 맨 가슴을 흔들었고, 무대 위에서 서로 입을 맞췄고, 노래가 끝나면 엉덩이로 인사를 했다. 무대 한 켠에는 늘 열정적인 수화 통역사가 있었다. 종종 더우면 무리에서 나가 부스를 한바퀴 돌았다. 그 후에는 내 손에 무지개 팔찌와 깃발, 부채와 선캡, 비눗방울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어떤 사람들이 음란 축제라고 부르는 곳에서 나는 안전함을 느꼈다. 관광객이 365일 붐비는 뮌헨 시청 앞 무대 위의 저 가수가 젖꼭지를 드러내도 괜찮고, 괜찮아야만 하는 일이 나의 생존과도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행사가 끝나는 밤 12시 이후에는 시청 안에서 뒷풀이 파티를 한다고 했다. 시청에서의 퀴어 파티라니 굉장히 구미가 당겼지만, 밤에는 우리 집에서도 파티가 있었기에 9시쯤 돌아갔다.

 

메인 스테이지 위 공연

가슴에 X자로 밴드만 붙이고 나왔는데 그마저도 공연 중에 뗐다.

 

퀴어 페스티벌에 왔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퀴어라는 이름 아래 모인 사람들은 퀴어 정체성 만을 가진 이들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나여서 슬펐거나, 종종 싫었거나, 어떨 땐 내가 나인 걸 미안해 본 기억을 가진 몸들. 쫓겨났거나, 탈출했거나, 싸워봤거나, 그러다가 포기해봤거나, 결핍을 채워보려고 사랑을 갈구했거나, 상처가 커서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거나 그런 역사를 가진 몸들이 그곳에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프라이드가 필요해서, 프라이드를 외쳐야만 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 공간에 오게된 이들은 각자의 상처를 발판삼아 서로를  존중한다. 궁극의 고난이 만들어내는 유머와 노래와 춤과 이야기는 차원이 다르게 아름다운 법이다. 이것이 어떤 미래가 될지 아무도 모르고 우리가 과거보다 정녕 낫기는 할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겠지만, 나의 몸은 자꾸 그쪽으로 기운다. 

 

 

 

셰어 하우스 파티를 퀴어 퍼레이드와 같은 날 했다.

파티 테마는 Gay crop top이었고

현관문 앞에 입장 규칙이 써져 있다.

 

댓글 6
  • 2023-07-17 11:37

    특이할수록 나를 해치지 않을 거란 느낌!! 왠지 알 것 같네.

  • 2023-07-17 18:47

    사실 전 퀴어퍼레이드에 한 번도 참여해본 적이 없어요..라고 썼는데.. 갑자기 옛날 기억이 불쑥 떠올랐어요.
    20년도 전에 토론토에서 퀴어퍼레이드를 참관한 적이 있군요. 그냥 화려하고 신나고 멋졌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우리나라에는 아직 퀴어퍼레이드가 없었던 때라 굳이 찾아가서 내심 그들의 자유를 부러워하며 구경꾼으로 보고 왔었군요.
    구경꾼이었으니.. 참여는 아닌 게 맞군요!ㅎ
    현민의 글을 읽으며 퀴어한 공간과 시간이 취약하고 상처입은 개인들을 치유하는 느낌을 조금은 알 것만 같아요.
    내년에는 퀴퍼에 꼭 가서 그 느낌 저도 느껴보고 싶어지네요.
    그리고.. 안심하고 나를 드러내도 되는 작은 해방구들을 우리 함께 여기저기에 만들 수 있으면 좋겠어요!^^

  • 2023-07-17 19:18

    저도 서울시청 앞에서 퀴퍼 구경만 한번 하고 직접 참여해본 적은 없는데 꼭 가고 싶네요
    무지개 스티커 뺨에 붙인 현민의 신나는 얼굴이 참 좋아요
    글은 항상 좋구요~^^

  • 2023-07-17 19:37

    저도 독일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내며 이번에 튀빙겐 퀴퍼에 처음 참석해봤어요. 한국 퀴퍼와 달리 평온하고 혐오세력 없는 퍼레이드가 낯설었던 것, 평온하게 그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자유와 해방감-에 공감돼요. 마지막 문단이 너무 와닿고요! 이렇게 현민님 글 읽을 수 있어서 좋아요🙏

    *비밀메모가 필터링되었습니다

  • 2023-07-18 07:47

    "각자의 상처를 발판삼아 서로를 존중한다" 좋아요~~^^

    • 2023-07-18 08:19

      찌찌뽕! 저도 이 문장이 콕! 독일의 문화가 부럽네요!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나와 당신의 책임   10년 전,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쓰인 멋진 슬로건들을 생각하고 있자면, 만든 이를 찾아가 박수를 쳐 주고 싶어지곤 한다.전기를 소비하는 곳에는 책임이 있다. 전기를 생산하고 송전하는 곳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다. 그 책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슬로건이 있었다 .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또,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였던 송전탑 반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데에 기여했던 슬로건도 있다.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   누군가가 당사자이고, 누군가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규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에너지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말이다. 이 슬로건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운이 좋게도 끝없이 확장되는 사회 운동을 경험했다. 설령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밀양이 아니더라도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밀양은 졌다. 높이 100m짜리 송전탑은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다. 밭일을 할 때도, 병원을 가기 위해 마을 길을 걸을 때도, 캄캄한 밤 안방 창문에서도 쇳덩어리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낮 쇳덩어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저 철탑에는 핵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흐른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아도, 마주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송전탑에는 돈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을 공동체의 상처가 묻어 있다. 38만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사람을 짓밟았던 폭력의 상처, 함께 싸우다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 2014년, 2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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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어진
2024.05.10 | 조회 117
일상명상
덕밍 아웃, 그 후   지난 글에서 호기롭게 덕밍 아웃을 했지만 명상에 빠져든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던 것은 아니다. 명상에 빠진 것은 결과지 이유는 아니니까. 하여 명상이 처음부터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친구와 같다고 했지만 정작 누군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면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그냥 좋으니까 좋았다는 식의 동어 반복을 되풀이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언가에 꽂힐 때 그 이유를 다 알아서는 아닌 것 같다. 우연히 어떤 것에 마음이 불꽃처럼 호응할 때 그저 속절없이 빠져드는 게 아닐까. 처음엔 빠져든 이유를 잘 모르는 터라 경우에 따라 ‘입덕 부정기’를 겪기도 하면서 말이다. 대개는 빠져든 다음에야 그 이유를, 스스로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발견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이유 덕분에 다시 그 대상을 더 깊이 애정하게 되는, 다이내믹한 순환이야말로 덕질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지.     나도 명상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른바 덕질의 묘미를 맛보고 있다. 명상이 뭔지도 모르고 매달리듯 빠져들었다가 이제야 차츰 명상이 뭔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명상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들에, 그렇거나 많이 휘둘리고 있는 줄 몰랐다. 그 때문에 명상을 통해 처음 경험했던 침묵과 평온이 그토록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는지도. 만약 명상이 아니었다면 일 년 365일, 꺼지지 않는 텔레비전처럼 소란스런 정신적 수다 때문에 괴롭다는 걸 영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그 순전한 무지에서 벗어난 순간, 마치 세상의 비밀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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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
2024.05.09 | 조회 105
K장녀_돌봄을 말하다
          언젠가 엄마의 구술 생애사를 써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엄마의 삶을 기록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엄마의 삶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녀딸이 인터뷰를 시작하긴 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진행을 못해서 좀 아쉽다. 이렇게 빨리 엄마가 기억을 잃고 이야기를 못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산업화세대 워킹맘   10년 전쯤 아버지가 대장암 재발로 병원에 오래 입원해 계실 때 엄마는 병원간호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혈관이 잘 안 나오는 아버지에게 혈관 주사를 놓으려면 꽤나 힘이 들었는데 엄마가 곧잘 혈관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1935년생인 엄마는 간호사이자 조산사였다. 엄마가 간호사 면허번호를 말하면(0000번 대) 간호사들(면허번호 000000번 대)은 깜짝 놀라며 ‘선배님’이라 불렀다. 엄마는 은근히 그걸 즐기는 듯했다.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하던 엄마는 결혼하면서 그만두었고, 시골학교 교사인 아빠의 고향에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걸 도왔다고 했다.   엄마는 의대에 가고 싶었다. 중학생 때 친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들어오셨는데 엄마가 의대 가는 걸 반대해서 간호학교에 갔다. 동생인 삼촌 두 분은 의사다. 엄마 세대, 즉 산업화 세대에 많은 딸들은 아들들을 위해서 진학을 포기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남동생을 위해 희생한 누나들. 엄마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딸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의대에 갈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 또래는 대부분 형제가 4~5명 정도 된다. 유독 우리집은 형제가 오빠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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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걷다보면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기린
2024.05.06 | 조회 159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 2편           동물의 의례   초코는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고 햇볕을 쬐다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왼쪽 뒷다리는 굽어 있었고 굽은 다리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는 다친 다리를 허공에 들고 걸었다.   초코는 골절된 다리로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초코를 치료하기 위해 포획틀을 설치했지만, 초코 대신 엉뚱한 고양이가 들어왔다. 봉봉오리님은 포획틀에 갖힌 초코의 단짝 고양이 카레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속 터지는 희극'이라고 했다. 『지구에 살 자격』에는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재개발구역에서 돌봄하는 것이 무조건 슬플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마냥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재개발구역이 조금 이상한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다. 나는 그곳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를 돌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내염을 오래 앓아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카레의 곁에는 늘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초코가 있다. 둘은 추운 날 하나의 겨울 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몸이 관통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던 8개월의 오잉이는, 피를 흘리며 몸을 숨겼던 일주일 간의 시간 동안, 혀가 닿지 않는 그의 상처를 핥아준 형제들이 있었다. 『지구에 살 자격』, 145쪽   밥그릇...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 2편           동물의 의례   초코는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고 햇볕을 쬐다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왼쪽 뒷다리는 굽어 있었고 굽은 다리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는 다친 다리를 허공에 들고 걸었다.   초코는 골절된 다리로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초코를 치료하기 위해 포획틀을 설치했지만, 초코 대신 엉뚱한 고양이가 들어왔다. 봉봉오리님은 포획틀에 갖힌 초코의 단짝 고양이 카레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속 터지는 희극'이라고 했다. 『지구에 살 자격』에는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재개발구역에서 돌봄하는 것이 무조건 슬플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마냥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재개발구역이 조금 이상한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다. 나는 그곳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를 돌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내염을 오래 앓아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카레의 곁에는 늘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초코가 있다. 둘은 추운 날 하나의 겨울 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몸이 관통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던 8개월의 오잉이는, 피를 흘리며 몸을 숨겼던 일주일 간의 시간 동안, 혀가 닿지 않는 그의 상처를 핥아준 형제들이 있었다. 『지구에 살 자격』, 145쪽   밥그릇...
경덕
2024.05.01 | 조회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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