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손주 바보, '함미' '하부지' 들

가마솥
2023-07-15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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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집은 4대(代)가 산다. 나를 기준으로 장모님과 아들 부부 그리고 손자, 하빈이가 함께 살고 있다. 장모님은 하빈이에게 증조할머니가 된다. 한 지붕 아래 여러 세대가 살다보니 항상 북적북적하다. 하빈이의 행동반경이 커질수록 물건들은 제자리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온 집안 바닥에는 녀석의 물건이 발길에 채이기 일쑤다. 실컷 정리하고 청소했는데, 마눌님이 밖에서 들어오며 “청소 좀 하지.....” 할 때도 있다. 대청소하지 않으면, 내가 봐도 그 결과가 크게 표시가 나지 않는다.

 

    아침 6시.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에 마눌님이 부엌으로 내려간다. 조금 지나서 하빈이가 깨어 며느리와 놀며, 실랑이 하는 소리가 들린다. ‘모닝 똥’을 처리하고, 세수를 시킨다. 부부가 출근 준비를 해야 하니 적당한 시간에 하빈이를 부른다. “할아버지 안녕히 주무셨어요? 해야지?“ 하는 며느리의 말에 녀석이 ’히~‘ 웃으며 머리를 꾸벅하고, 이내 팔을 벌려 내게로 온다. ”잘 잤어요?“ 번쩍 안아 준다. 오늘 하루를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시작한다.

 

 

 

한없이 이쁘지만......

 

   백일이 되기 전에도 나를 보며 잘 웃었다. 자기 기분의 표시이지, 나의 행동에 대한 반응은 아니었어도 기분은 묘하다. 핏줄인가? 자장가를 부르지만 눈만 말똥말똥하다가 나도 지치고 녀석도 지칠 때쯤, 눈꺼풀을 내렸다가 올렸다가 몇 번 하더니 제 몸을 온전히 내 품안에 맡기고 새근새근 잠잘 때 모습은 그야말로 천사가 따로 없다. “남자 뼉다구가 딱딱해서 내 품에서는 잘 안자요. 애기 재우는 것은 당신이 재워 줘야죠!”로 시작해서 한바탕 말싸움을 했던 녀석의 아빠, 내 아들 어릴 적 사건이 떠올라 혼자 피식 웃었다.

 

   돌이 지나니 이제 제법 의사표시를 한다. 우선 나를 보면 두 팔 벌려 안아 달라고 달려든다. 은퇴 후에 이렇게 나를 온몸으로 환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 이야기를 알아들으려는 듯 눈망울이 초롱초롱 할 때에는 분명히 천재가 태어난 듯하다. 물론 안 되는 일을 해달라고 땡깡을 피우기도 한다. 살짝 “이노옴~~”하면, ‘할아버지, 왜 그래요?’ 하듯이 빤히 쳐다보다가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시무룩한다. 귀엽다. 내 아들도 이렇게 귀여운 때가 있었나? 가물가물하다. ‘있다, 없다’ 존재를 인식한 뒤로는 까꿍놀이를 제일 좋아한다. “할아버지 어디 있지?” 물으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킨다. 글쎄, 막 돌 지난 녀석이 할아버지를 알아본다니까요.

 

 

 

 

 

 

 

 

 

 

 

 

 

 

 

 

 

 

 

 

 

 

               (잠자는 내 손자)                                                                                            ( 손자의 아빠, 내 아들)

 

    마눌님은 표정부터가 다르다. 녀석을 물며 빨며 난리 부르스를 춘다. 몇 년 전 허리 디스크 판정을 받은 뒤로 삐끗하면 안 되는데, 녀석을 덥석 안고 허리를 뱅뱅 돌린다. 허리 아픈 사람 맞나? 사실, 나는 손주 육아에서 보조적인 역할이지 본령(本領)은 마눌님이다.

우리 집 아침은 다섯 가지다. 먼저 장모님의 아침이 한식(韓食)으로 차려진다. 밥, 국, 반찬이다. 다음으로 빵과 야채로 양식(洋食)인 며느리 밥상, 나는 당뇨관리로 찐 야채에 요구르트로 초식(草食)이다. 체중을 빼야 하는 아들놈과 마눌님은 선식(禪食)이다. 온 식구들을 챙기느라 요즘 들어 비쩍(?) 말라가는 마눌님은 왜 선식인지 모르겠다. 뱃살이 잡힌다나 어쩐다나. 자기도 무언가를 먹겠다고 아우성치는 하빈이는 새벽에 먹은 우유가 내려가기를 기다렸다가 이유식(離乳食)을 먹인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 여섯 식구는 모두 각기 다른 아침을 먹는다. 그 아침상을 늘 마눌님이 차린다.

 

    녀석의 몸무게가 늘었다. 제법 무겁다. 팔꿈치가 아프다. ‘골프 엘보우’란다. 마눌님은 골프 때문에 아픈 것이라고 하지만, 병명이 그렇지 꼭 골프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나도 살짝 허리가 무지근할 때가 있다. 자세를 신경 쓰지만, 지 맘대로 움직이는 아이니까 무리한 자세가 될 때가 종종 있다. 녀석이 자박 자박 걸음마를 시작해서 걸을 수도 있으련만, 나만 보면 팔을 벌린다. 어이구야...... 녀석의 요구를 내치지 못한다.

 

육아풍경이 달라졌다.

 

    녀석이 다행히 어린이집 선생님을 좋아한다. 하지만, 선생님 품에 안기면서도 내게로 오겠다고 찡찡 거린다. “할아버지한테 인사하고, 빠이빠이 해야지?” 녀석은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손을 들어 ‘빠이빠이’를 하면서도 운다. 30여 년 전 어린이집 앞에서 들어가기 싫다며 울던, 내 아들과 ‘빠이빠이’하던 모습이 오버랩 된다. 아직도 돌아서는 뒤통수가 근질근질하다.

   내치지 못하는 것은 며느리도 마찬가지다. 아이 침대를 샀지만, 혼자 자다가 울면 다독거려 줄 수 없다며 녀석을 엄마 침대에서 재운다. 아이가 태어난 뒤로 아빠는 소파에서 잠을 자는 신세가 되었다. 카타르 월드컵 16강에 들어간 날, 딱 한번 녀석을 침대에 혼자 재우다가 “쿵!”하는 소리가 1층에까지 들린 뒤로는 더욱 신경을 곤두세운다. 며느리는 자다가 화장실을 가려면 침대 앞에 아빠를 불침번 세운다.

 

    우리 집은 포대기가 없다. 아이를 앞으로 안는 멜빵만 있다. 허리가 아플 뿐 만 아니라, 녀석을 안으면 아무 일도 못한다. 그러니, 며느리는 아이와 꼼짝없이 24시간을 함께 해야 한다. 아이와 관련된 빨래, 식기세척 등은 우리가 도와 주어도, 며느리는 다크써클을 달고 산다. 눈치를 봐가며, 적당한 시점에 “하빈이를 내가 볼까?”하며 방에 들어가면, 한번도 “아니예요.” 하지 않고 아이를 건네준다. 뭐랄까. 전전긍긍하며 힘들게 아이를 키운다는 생각이 든다. 말할 수는 없지만. 다른 집들은 어떻게 하나?

 

 

 

 

 

 

 

 

 

 

           ( 지금의 마눌님)                                                                                                       (30년전 마눌님)

 

    나처럼 직접 돌보는 것 같지 않은데, 혼자 손주를 돌보는 것처럼 말하는 할아버지들이 있다. A는 일찍부터 미국에 아이들을 유학 보내서 그곳에서 딸아이가 손녀를 낳았다. 미국의 육아환경도 우리네처럼 만만치 않은가 보다. 직업이 있는 딸이 아이 돌보는 사람을 한국 사람으로 구하는 일이 쉽지 않단다, 친구는 일 년에 서너 달은 손녀를 돌보러 미국에 간다. 딸의 SOS에 응답하는 것이다. B는 손녀를 우리 집처럼 자기 집에서 돌본다. 근처 아파트에 살던 딸네 식구가 아예 집으로 들어 왔다. 아이 돌보는 사람이 집으로 오니 좀 여유가 있어 보인다. 여느 아이와 다르지 않은 행동인데, 기회만 되면 손녀 자랑이다. 벌금으로 제어하였지만, 소용이 없다. C는 나처럼 아들이 손자를 낳았다. 최근까지 90 노부모를 모시고 살았던 친구여서 그런지, 가족에 관해서 조선시대 양반님네 같은 생각을 한다. 자기 집에 들어와 살거나, 최소한 주말에는 집으로 올 것을 아이들에게 요구한 모양이다. 며느리가 펄쩍 뛰며 친정집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여 육아 지원을 받겠다고 하였다며, 말도 안 된다고 섭섭해서 난리를 친다. 친구들 모두 네놈의 요구가 말도 안 된다고 간신히 말렸다. 그 뒤로도 아이를 보러 아들집(며느리집!)에 가야 한다는 둥, 그것도 시간을 허락(!)받아야 한다는 둥 투덜대기 일쑤다. 손주와 함께 살아 보지 않아서 며느리의 결정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르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친정부모에게 육아 돌봄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모계중심 육아라고나 할까? 산모 입장에서 편해서 그런 듯하다. 하기야 대가족 시대에 시댁에 들어가 살았던 때에나 어쩔 수 없이 시댁에서 아이를 키웠지, 핵가족 시대에 굳이 시댁을 찾을 이유는 없어 보인다. 어쨌든 요즘 젊은 부부들은 부모의 지원을 꼭 필요로 하고, 늙은 부모들은 가능한 지원한다.

 

라떼는 말이야......

 

    ‘라떼’이야기를 좀 하자. 우리는 부모가 돌봐주시면 감사하지만, 우리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육아 휴직도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아서, 마눌님은 회사에서 노조를 만들어 겨우 2개월의 출산휴가를 받았다. 화장실에서 젖병에 담은 모유를 집에 와서 먹이는 상황이었다. 어린이집은 나이 어린 유아는 받아 주지도 않았지만, 돌봐주는 시간이 길어봐야 회사 근무시간과 같은 '9 to 6'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나서 출근하고, 퇴근하여 데려올 수 없었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만들었다. 마당 있는 집을 구하고 선생님 뽑고 돌봄의 방식도 우리가 정했다. 시간을 쪼개서 어린이 집 관련한 회의에, 시설 보수에, 야외 놀이에 함께 하였다. 육아문제를 내 개인만의 해결보다는 동네로, 사회로 연결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돌이켜 보면, 공동육아는 아이 돌봄 뿐만 아니라 나를 성장시키기도 하였다. 요즘 젊은 부부들은 육아문제를 공적영역보다는 개인적으로 해결하려 한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 아이들은 딸랑 책 한권, ‘임신 출산 육아 365(?)‘ 뿐이었다. 그래도, 한 아파트에서 놀이터에만 나가도 여기 저기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부모들과 이야기하며 부족한 정보를 채웠다. 요즘 젊은 부부들은 SNS에서 많은 정보를 얻는 것으로 보인다. 육아 관련 정보가 많고 접근성이 쉽다는 것은 좋은 일이기는 한데, 인터넷의 TMI 정보는 불안을 야기시키곤 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보인다. 출산율 때문이다. 더욱이 젊은 부부만 사는, 고립된 육아에서는 더욱 그럴 수 있다. 비용도 많이 든다. 아이들이 적게 태어나니 육아 관련 상품은 예쁘고 고급스럽기는 하지만, 일단 매우 비싸다. 또 폐원하는 어린이집이 많아서 선택지가 좁다. 내부를 들여다 보면, 연령별 아이들의 균형이 맞지 않아서 분반 편성이 불균형적인 곳이 많다. 예를 들면, 1년 미만의 영아반은 아이 숫자가 부족해서 없애야 하고, 5~6세 반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많다. 그러면 1년 미만 영아의 부모는 아이를 보낼 곳이 없다. 공공 어린이집은 입원순서를 기다리다가 아이가 어른이 될 지도......

 

동네가 아니라 국가가 나서야 한다.

 

   돌봄제도가 잘 되어있는 북유럽 국가 중, 덴마크를 보자. 육아휴직제도는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해당되고, 아이를 임신한 여성은 출산 4주전부터 휴가를 가질 수 있다. 아이를 입양해도 똑같이 적용된다. 출산일로부터 14주간은 출산휴가기간이며, 아빠들은 아내의 출산휴가기간에 2주동안 휴가를 가지며 출산과 몸조리를 돕는다. 엄마의 출산휴가가 끝나면 32주의 육아휴직기간이 돌아온다. 아내와 남편이 나눠 쓸 수 있다. 총 52주의 출산 및 육아 휴가 기간을 모두 사용한다. 직장에서 눈치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덴마크 부부도 아이를 보육 시설에 맡기고 일하러 간다. 어린이집에 자리가 없어 못 보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이 자리는 아이가 10살이 될 때까지 보장된다. 10살이면 학교에 다녀도 방과 후 돌봄 보육이 필요한 나이이다. 부모가 내는 돈은 이용료의 최대 25%로 제한된다. 나머지는 정부가 지원한다. 만약 부모가 아이를 보육 시설에 맡기지 않고 따로 아이를 돌봐줄 사람을 고용하면, 정부는 그 돈도 대신 내준다. 육아책임이 국가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육아 1인당 1년간 지급하는 국가 예산, 한국은 예산분류가 안되어 빠졌고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한 미국은 꼴찌이다)

 

   아직도 부모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육아하기 힘든 상황인 우리 사회가 아쉽다. 30여 년 전, 성산동에서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만들어 동네가 나서서 함께 아이들을 키우면서, ‘이 사회가 내 자식들 때에는 이런 육아 환경이 아니길’ 바랐다. 공동육아 운동은 공적영역에 몇 가지 영향을 주기는 했으나, 근본적인 ‘육아의 공적책임 운동’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물론, 출산율을 걱정하는 정부가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매년 21조원 규모의 예산을 퍼부었다. 하지만,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다. 결과가 말한다. 지난 해 합계 출산율은 0.78이다. 많은 법을 만들고 고치고 시행하였지만, 효과는 제한적이다. 이를테면, 육아휴직 제도를 법적으로 아무리 잘 만들어 놓아도 현실적으로 잘 작동되지 않는다. 규모가 작은 중소기업일수록 그 법률의 혜택을 받기 어렵다. 왜 그럴까? 많은 이유가 있고, 관련하여 많은 전문적인 대안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근본적인 질문과 사회적인 합의에 따른 의식의 변화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즉, 육아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를 심도있게 물어야 한다. 지금처럼 가정이 모든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국가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다.

 

   ‘노키즈존’이라며 없는 영어를 만들어 아이의 출입을 제한하는 음식점, 숙박업소 등의 장소를 보면 주인을 불러 멱살을 잡고 싶은 심정이다. 육아 돌봄을 시장에 맡기니, 요즘 일반 유치원은 등원 아이 수가 적은 이유로 고비용 구조로 바뀐다. 죄다 영어 유치원으로 바꾸어 한 달에 수백만원씩을 요구한다. 부모의 형편에 따라 육아 돌봄이 계급화되는 현상까지 보인다.

   1991년에 제정된 영유아보육법을 보면, 제4조에 “모든 국민이 영·유아를 건전하게 보육할 책임이 있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이에 필요한 재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로 되어 있다. 아직도 보육은 가정의 책임이고 국가는 지원하는 곳이라고 못 박고 있다. 이런 인식 수준에서는 법적인 육아휴직제도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거나, 모든 육아 돌봄에 대한 정부의 예산지급 같은 정책은 꿈도 못 꾼다.

 

어쩌다 4대는 지속될 수 있을까?

 

   은퇴 후에는 친구들과 운동하며 놀고, 마눌님과 문탁에서 책 보고, 악기도 하나 배우면서 짬짬이 시간 내어 여행 다니며 그렇게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하루하루 체력이 달라지니, 먼 곳부터 갔다 오라는 충고를 받아 들여서 북유럽 여행 티켓팅도 했었다. 팬데믹이 취소시켰지만 말이다. 나이듦에 따라 운동도 적절히 조절해야 한다는 충고를 받아 들여, 주말마다 즐기던 동네축구는 보는 것으로 대체하고 슬슬 걸어 다니고 있다. 은퇴 전에 계획한 여유작작한 생활은 온 데 간 데 없고, 지금 내 생활은 ‘백수가 과로사(過勞死)한다’는 말이 딱 맞게 요일 별로 하루 시간표대로 움직여야 한다. 아이와 노모(老母)가 있는 여섯 식구를 돌보아야 하는 마눌님은 더하다. 지나고 생각해보니, 산산 조각난 은퇴 전 계획은 이미 자초하고 있었다. 내가 예상하지 못했을 뿐이다.

 

    사실 아들놈이 우리 집에 들어 온 것은 예정된 것이었다. 결혼 후, 바로 병역특례요원으로 중소기업에서 3년간 근무하여 병역의무를 해야 했다. 그것을 마치면 유학길에 오를 것이니, 간단한 살림으로 원룸을 빌려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아이를 가지면 우리 집에 들어 와서 유학갈 때까지 아이를 키우기로 했던 것이다. 녀석이 들어와 사는 것은 임시적이고, 나도 은퇴를 하였으니 ‘아이 하나 돌보는 것쯤이야’ 하였다.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는 많은 가족이 함께 사는 것이 로망이었고, 직장생활하면서 육아를 병행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공동육아’로 경험한 터라서 ‘이렇게 4대가 함께 사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마눌님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육아를 병행하느라 남몰래 눈물 꽤나 훔쳤다. 며느리가 회사에서 아이 때문에 조마조마하지 않게 하겠다고 마음먹었단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 집의 경우에는 ‘어쩌다 4대’가 오래 지속될 수 없을 듯하다.

 

    우선, 여섯 식구 중에 돌봄의 손이 필요한 사람이 두 사람이나 된다. 어린아이와 거의 구순 노모. 외부의 힘을 빌린다고 하더라도 식구 중 누군가는 자기 생활을 포기하고 돌봄의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 지금은 내가 손을 좀 보태기는 하지만, 주로 마눌님이 슈퍼우먼의 에너지를 쏟고 있다. 대가족처럼 식구들이 많아서 서로 돌아가며 돌봄 노동을 분담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출 수도 없다. 나도 마눌님도 갈수록 육체적인 능력은 점점 떨어질 테고, 이러다가 훌쩍 70대가 되면 은퇴 후 계획은 고사하고, 자기 몸 하나 추스르기도 바쁠 것이다.

부모를 모시려고 하고, 손주 돌봄을 외면하지 못하는 조선의 마지막 ‘낀 세대‘가 베이비붐 세인인 우리들인 듯싶다. 한편으로는 그래도 된다는 생각도 든다. 단군 이래 우리 세대처럼 이 사회의 혜택을 받은 풍요로운 세대가 있을까? 하지만, 지속할 수는 없다. 우리도 나이듦의 한숨 속으로 다가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우리 부모의 돌봄은 우리가 책임을 지고, 아이들의 육아 책임은 1차적으로 그들 부모의 몫으로 남기고 싶다.

 

 

 

 

 

 

 

 

 

 

 

 

 

 

 

 

 

 

 (하빈이에게  '메롱'을 가르쳤다! 흐흐흐)                                                              (30년전, 젊은 아빠. ㅎㅎㅎ)

 

   내 딸 아들은 녀석들의 외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특히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던 딸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존경하며 지금도 그리워한다. 우리는 주말마다 항상 가까운 처갓집에 들렀었다. 항상 두 팔 벌려 반겨 주셨고, 당신이 손주들과 함께 나눈 시간들은 아이들에게 누구보다 가까운 친근감을 주었고, 당신의 너그러움과 지혜는 손주들에게 존경하는 마음으로 남아 있다. “할아버지보다도 말이 안 통해!“ 사춘기 내 딸이 나와 말다툼하다가 내뱉은 말이다. 공부하기 싫어했던 아들 놈을 걱정하는 나에게도 “괜찮다. 앞날이 창창한 아이들이다”고 하셨던 분이다. 나도 나의 손주들에게 그런 할아버지로 남아 있으면 좋겠다.

 

 

 

 

 

 

 

 

 

 

 

 

 

 

 

 

 

 

 

 

  (장인 어른과 손녀, 한슬)                                                                                                 (장인 어른과 손자, 경섭)

 

   녀석들이 내년에 가까운 곳으로 나가서 살아 보겠다고 한다. 눈 뜨면 아침이 차려있고 퇴근하면 저녁이 차려 있는, 지금처럼 여유있는 생활은 분명 아닐 것이다. ‘어떻게 살려고?’하는 걱정도 들지만, ‘그렇게 살아 보기도 해야지’하는 생각도 든다. 가까운 곳이니, 급하면 SOS를 치겠지. 나도 보고 싶으면 언제나 달려 갈 수 있는 거리이니 아주 좋다.

 

나는 복 받은 할아버지이다.

 

댓글 6
  • 2023-07-17 10:38

    우와 4대가 함께 함께 사는 집이라니~ 신기하네요! ㅎㅎ
    저도 이제 44일차 아가를 키우고 있는데 조리원 1주 산후도우미 3주 남편 출산 휴가 2주가 끝나서 오늘부터 홀로 육아를 시작합니다!

    제 주변에도 다양한 케이스가 있는데 이렇게 시댁에 들어가서 친구도 있고,
    또 불편하다며 양쪽 부모님 도움을 최대한 안받고 도우미나 어린이집으로만 해결하는 친구들도 있더라고요.
    저도 시댁은 1시간 거리이고, 친정엄마는 돌아가셔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이 많네요...

    이런 현실 앞에서 '라떼는'이야기는 정말 흥미로웠어요.
    저도 어떻게 우리 엄마는 아이를 둘씩 키우고, 또 일까지 하셨던 고모 이모를 생각하면 너무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름 정부가 노력하고 있는데 이상한 육아 정책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거 보면 너무 황당하더라고요.
    https://www.hani.co.kr/arti/area/capital/1061939.html

    말씀해주신대로 지금 있는 정책인 육아휴직 제도를 남자들도 눈치 없이 쓸 수 있는 환경이었으면 좋겠지만,
    그럴려면 문화와 사회가 전반적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굳이 고생해서 애를 왜 낳아?'라는 젊은 세대의 문화 (저도 한때는 그런 마인드였네요 ^^;;) 와
    한국이 치열한 경쟁사회다보니 쉽지 않을 것 같아요 ㅜ

    할아버지 세대 입장에서 지금 시대의 육아를 보는 관점을 보니 너무 재밌었습니다 🙂
    내년에 아드님이 나가시면 어떤 삶이 펼쳐질지도 궁금하네요!

    • 2023-07-17 10:46

      뭔가 프로젝를 해야겠군요.
      엄마 1년차, 엄마 10년, 엄마 20년차, 할머니, 할아버지 1년차, 5년차... 트랜스제너레이션 콜라보 워크숍 "아이를 함께 키울 용기!!"

    • 2023-07-17 11:11

      응원 또 응원합니다! 힘드시면 누구에게든지 손을 내미세요..

  • 2023-07-17 11:23

    보고서 읽는 느낌이에요! 인디언님의 보고서는 가마솥님과 다를 거란 느낌도 들고^^ 두 분이 모두 글 써보시면 좋겠어요~

    • 2023-07-17 11:42

      인디언님의 보고서를 기다리는, 17갤 아들맘 추가요!

  • 2023-07-18 08:02

    라떼는…진짜 다들 어떻게 애들을 키웠을까요? 그때는 그래도 동네든 공동육아든 공동체가 가능했고 또 먹고살기가 지금처럼 살벌하지 않았던 거겠죠? 포대기에 아이를 업고 있는 인디언샘 모습이 많은 걸 말해주네요. ^^

K장녀_돌봄을 말하다
    엄마네 집, 딸네 집   지금 사는 집을 지은 건 14년 전이다. 집을 지은 가장 큰 이유가 부모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였다. 이미 은퇴도 하셨고 연세도 있으셔서 곧 우리와 살게 될 것이라고, 아니 내가 모시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식물 가꾸는 걸 좋아하는 엄마와 책 읽고 글 쓰는 걸 좋아하는 아빠를 생각해 조용한 전원주택을 선택했고, 설계도 아래층은 부모님을 위한 공간으로, 위층은 우리들 공간으로 만들었다. 두 분은 집을 지을 때는 그렇게 관심을 보이시고 아빠는 상량문까지 직접 붓글씨로 써주시더니, 막상 집이 다 완성되어 같이 살자고 하니 고개를 저으셨다. 3~4년을 조르다가 아직 두 분이 살만하시니까 그러시는 거라고, 아직 건강하셔서 그런 거니까 오히려 다행이라며 일단 우리 생각을 접었다. 우리집을 참 좋아하셨던 아빠는 가끔씩 집에 오시면 바깥 데크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신문을 보시다가 주변 숲과 나무들을 돌아보시며 흐뭇한 표정을 짓곤 하셨는데, 돌아가시기 몇 달 전 병원에서 퇴원하시고 한 달 정도를 우리집에서 지내셨을 뿐이다. 같이 살았으면 좋았을텐데...   엄마 아빠는 우리집으로 오는 대신 당신들의 집을 지으셨다. 엄마네 집은 원래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이었고 오래된 나무들이 많았다. 동네가 개발지구가 되면서 집이 수용되었고 대토를 받았는데 그 땅에 집을 지은 것이다. 힘들게 집을 왜 짓느냐며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아빠가 대장암 수술로 병원을 들락거릴 때였는데도 기어코 집을 짓기 시작했다. 설계부터 집짓는 과정의 모든 의사결정을 엄마가 다 했고, 병원에서 폰뱅킹으로 비용을 지불해가며 그렇게...
    엄마네 집, 딸네 집   지금 사는 집을 지은 건 14년 전이다. 집을 지은 가장 큰 이유가 부모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였다. 이미 은퇴도 하셨고 연세도 있으셔서 곧 우리와 살게 될 것이라고, 아니 내가 모시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식물 가꾸는 걸 좋아하는 엄마와 책 읽고 글 쓰는 걸 좋아하는 아빠를 생각해 조용한 전원주택을 선택했고, 설계도 아래층은 부모님을 위한 공간으로, 위층은 우리들 공간으로 만들었다. 두 분은 집을 지을 때는 그렇게 관심을 보이시고 아빠는 상량문까지 직접 붓글씨로 써주시더니, 막상 집이 다 완성되어 같이 살자고 하니 고개를 저으셨다. 3~4년을 조르다가 아직 두 분이 살만하시니까 그러시는 거라고, 아직 건강하셔서 그런 거니까 오히려 다행이라며 일단 우리 생각을 접었다. 우리집을 참 좋아하셨던 아빠는 가끔씩 집에 오시면 바깥 데크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신문을 보시다가 주변 숲과 나무들을 돌아보시며 흐뭇한 표정을 짓곤 하셨는데, 돌아가시기 몇 달 전 병원에서 퇴원하시고 한 달 정도를 우리집에서 지내셨을 뿐이다. 같이 살았으면 좋았을텐데...   엄마 아빠는 우리집으로 오는 대신 당신들의 집을 지으셨다. 엄마네 집은 원래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이었고 오래된 나무들이 많았다. 동네가 개발지구가 되면서 집이 수용되었고 대토를 받았는데 그 땅에 집을 지은 것이다. 힘들게 집을 왜 짓느냐며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아빠가 대장암 수술로 병원을 들락거릴 때였는데도 기어코 집을 짓기 시작했다. 설계부터 집짓는 과정의 모든 의사결정을 엄마가 다 했고, 병원에서 폰뱅킹으로 비용을 지불해가며 그렇게...
인디언
2024.06.10 | 조회 150
일상명상
아빠의 소망   아빠는 2003년 처음 뇌경색 진단을 받았다. 이후 두 차례 뇌경색이 재발했으니까 20년 넘는 세월을 불편한 몸으로 지낸 셈이다. 특히 본인 뜻대로 되지 않는 발음과 언어표현 때문에 많이 속상해하셨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는 알츠하이머까지 더해져 나빠진 인지와 그로 인한 우울감으로 기억과 함께 할 말 또한 잃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아빠는 내가 가면 기분이 좋아져서 말을 꽤 하셨다. 아빠가 나에게 항상 하시던 말씀도 있었는데, 그건 “형제라고 하나밖에 없는데 오빠랑 자주 왕래하고 지내라”였다. 늘 그러겠노라 대답했고 때론 “어제 오빠랑 전화 통화했어요~”라고 거짓말도 했는데 그러면 아빠가 좋아하셨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빠와 나는 부모님 생신 때 아니면 서로 얼굴 볼 일 없는 사이였다. 언젠가는 교대역에서 환승하며 오빠를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고 전혀 놀랍지도 반갑지도 않은 얼굴로 손만 흔들며 지나쳤었다.   그랬던 남매가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 삼 개월을 수시로 함께 했다. 병원 로비에서 아빠의 중환자실 면회를 기다리던 시간, 주치의 상담을 위해 병원으로 향하던 차 안, 임종 면회를 마치고 눈물을 닦으며 상조회사 상품을 검색했던 순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을 함께 겪으면서 오빠와 나는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남편은 그즈음 이렇게 말했다. “장인어른이 남매 사이 연결해 주고 가시려나 보네…”     이제서야 알게 된 오빠의 시간들   지난 5월 엄마, 오빠, 그리고 조카 은규와 함께 제주로 2박 3일 여행을 다녀왔다. 함께 제주에 가기로 약속하고 나에게는 오빠가 급한...
아빠의 소망   아빠는 2003년 처음 뇌경색 진단을 받았다. 이후 두 차례 뇌경색이 재발했으니까 20년 넘는 세월을 불편한 몸으로 지낸 셈이다. 특히 본인 뜻대로 되지 않는 발음과 언어표현 때문에 많이 속상해하셨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는 알츠하이머까지 더해져 나빠진 인지와 그로 인한 우울감으로 기억과 함께 할 말 또한 잃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아빠는 내가 가면 기분이 좋아져서 말을 꽤 하셨다. 아빠가 나에게 항상 하시던 말씀도 있었는데, 그건 “형제라고 하나밖에 없는데 오빠랑 자주 왕래하고 지내라”였다. 늘 그러겠노라 대답했고 때론 “어제 오빠랑 전화 통화했어요~”라고 거짓말도 했는데 그러면 아빠가 좋아하셨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빠와 나는 부모님 생신 때 아니면 서로 얼굴 볼 일 없는 사이였다. 언젠가는 교대역에서 환승하며 오빠를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고 전혀 놀랍지도 반갑지도 않은 얼굴로 손만 흔들며 지나쳤었다.   그랬던 남매가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 삼 개월을 수시로 함께 했다. 병원 로비에서 아빠의 중환자실 면회를 기다리던 시간, 주치의 상담을 위해 병원으로 향하던 차 안, 임종 면회를 마치고 눈물을 닦으며 상조회사 상품을 검색했던 순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을 함께 겪으면서 오빠와 나는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남편은 그즈음 이렇게 말했다. “장인어른이 남매 사이 연결해 주고 가시려나 보네…”     이제서야 알게 된 오빠의 시간들   지난 5월 엄마, 오빠, 그리고 조카 은규와 함께 제주로 2박 3일 여행을 다녀왔다. 함께 제주에 가기로 약속하고 나에게는 오빠가 급한...
도라지
2024.06.09 | 조회 157
기린의 걷다보면
1.세월호 10주기_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    올해는 세월호 참사 10주기였다. 공동체 홈피에 안산 화랑유원지에서 참사 10주기 기억식이 열린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4월 16일 오후 2시, 기억식에 참석하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안산 화랑유원지에 갔다. 햇빛이 여지없이 쏟아지는 유원지 주차장이 식장이었다. 식순에 따라 기억식이 시작되었고, 희생자분들의 이름이 한 명 한 명 호명되는 순서가 되었다. 삼백 사명의 이름이 다 불리는 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지나갔다. 2014년에 마을 작업장 월든에서 단원고 교실 의자에 놓을 방석을 만들었던 일, 바느질을 하면서 읽었던 <416 단원고 약전>, 책의 구절을 읽으며 울먹이던 친구의 목소리. 10년이 지나는 동안 사고의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유가족들의 요구에 정부의 대응은 여전히 답보상태인데, 정부에서 나온 기관장들의 추도사에는 알맹이 없는 계획들이 연이었다. 이 간극을 메우려면 얼마나 시간이 더 걸릴까.          그날 이후 한국일보에서 세월호 참사 10주기 특별기획으로 <산 자들의 10년>이라는 기획기사를 읽게 되었다. 그 중에는 아들과의 마지막 통화에서 “구조하러 온 해경지시를 잘 따라서 조심히 나오라”고 말한 남편을 10년 내내 원망했다는 아내의 이야기도 있었다. 벼락같이 닥친 그 일로 가족의 일상은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하던 일을 접었고 살던 곳에서도 떠나서 아무도 모르는 외진 곳에서 살고 있다는 유가족이었다. 하지만 올해 10주기를 계기로 다시 한 번 힘을 내보기로 했다는 이야기였다. 지난 2월 25일부터 3월 16일까지 세월호 참사 10주기 전국 시민행진에 함께 나서서 304km 전 구간을 완주했다....
1.세월호 10주기_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    올해는 세월호 참사 10주기였다. 공동체 홈피에 안산 화랑유원지에서 참사 10주기 기억식이 열린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4월 16일 오후 2시, 기억식에 참석하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안산 화랑유원지에 갔다. 햇빛이 여지없이 쏟아지는 유원지 주차장이 식장이었다. 식순에 따라 기억식이 시작되었고, 희생자분들의 이름이 한 명 한 명 호명되는 순서가 되었다. 삼백 사명의 이름이 다 불리는 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지나갔다. 2014년에 마을 작업장 월든에서 단원고 교실 의자에 놓을 방석을 만들었던 일, 바느질을 하면서 읽었던 <416 단원고 약전>, 책의 구절을 읽으며 울먹이던 친구의 목소리. 10년이 지나는 동안 사고의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유가족들의 요구에 정부의 대응은 여전히 답보상태인데, 정부에서 나온 기관장들의 추도사에는 알맹이 없는 계획들이 연이었다. 이 간극을 메우려면 얼마나 시간이 더 걸릴까.          그날 이후 한국일보에서 세월호 참사 10주기 특별기획으로 <산 자들의 10년>이라는 기획기사를 읽게 되었다. 그 중에는 아들과의 마지막 통화에서 “구조하러 온 해경지시를 잘 따라서 조심히 나오라”고 말한 남편을 10년 내내 원망했다는 아내의 이야기도 있었다. 벼락같이 닥친 그 일로 가족의 일상은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하던 일을 접었고 살던 곳에서도 떠나서 아무도 모르는 외진 곳에서 살고 있다는 유가족이었다. 하지만 올해 10주기를 계기로 다시 한 번 힘을 내보기로 했다는 이야기였다. 지난 2월 25일부터 3월 16일까지 세월호 참사 10주기 전국 시민행진에 함께 나서서 304km 전 구간을 완주했다....
기린
2024.06.05 | 조회 201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5월 <1234 읽고 쓰기>에서 발표한 글을 수정 보완한 글입니다 .   <재개발구역 고양이들  3편>은  18회에서 이어집니다.        벌레들은 말할 수 있을까? - 야콥 폰 윅스퀼,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정지은 옮김, 도서출판b         글이 안 써질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는가? 나는 소나무 숲으로 간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나무 앞에서 씨앗 문장을 발견한다. 서울 강북구 우이동 덕성여대 맞은편에는 소나무 1천여 그루가 자생하는 솔밭근린공원이 있다. 나는 공원 옆에 있는 카페에서 글을 쓰다가 바람을 쐬러 소나무 숲길을 걸었다. 그리고 이런 문구를 발견했다.             문구는 공원에 있는 모든 소나무 줄기에 붙어 있었다. 소나무의 크기에 따라 약물 주입량만 조금씩 달라졌다. 이 간단한 문구는 소나무와, 소나무를 죽이는 소나무재선충과, 소나무재선충을 죽이는 강북구청 공원녹지과의 역학관계를 암시한다. 공원을 걷다 보면 울타리에 걸려 있는 현수막 글귀도 볼 수 있다. "멧돼지 출현 주의!", "주의! 너구리 발견시 반려동물을 안고 즉시 자리를 피해주세요." 비슷한 문구를 뉴스에서도 볼 수 있다. "빈데믹(빈대+팬데믹) 여파 진드기 매개병 걱정."[1], "러브버그 출몰 지역 집중방역."[2] 이런 언표 속에 등장하는 온갖 종류의 벌레들은 그저 ‘해충’이란 범주로 묶인다. 출몰! 주의! 와 같은 경고음 앞에서 목소리를 잃는다. 벌레에 대한 인상은 넘치는데 벌레에 대한 인식은 빈곤한, 지금은 어떤 세계인가?      벌레의 세계를 궁금해한 사람들도 있었다. 1934년, 생물학자 윅스퀼은 동물들이 어떻게 세계를 지각하고 행동하며 ‘주체’적...
 5월 <1234 읽고 쓰기>에서 발표한 글을 수정 보완한 글입니다 .   <재개발구역 고양이들  3편>은  18회에서 이어집니다.        벌레들은 말할 수 있을까? - 야콥 폰 윅스퀼,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정지은 옮김, 도서출판b         글이 안 써질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는가? 나는 소나무 숲으로 간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나무 앞에서 씨앗 문장을 발견한다. 서울 강북구 우이동 덕성여대 맞은편에는 소나무 1천여 그루가 자생하는 솔밭근린공원이 있다. 나는 공원 옆에 있는 카페에서 글을 쓰다가 바람을 쐬러 소나무 숲길을 걸었다. 그리고 이런 문구를 발견했다.             문구는 공원에 있는 모든 소나무 줄기에 붙어 있었다. 소나무의 크기에 따라 약물 주입량만 조금씩 달라졌다. 이 간단한 문구는 소나무와, 소나무를 죽이는 소나무재선충과, 소나무재선충을 죽이는 강북구청 공원녹지과의 역학관계를 암시한다. 공원을 걷다 보면 울타리에 걸려 있는 현수막 글귀도 볼 수 있다. "멧돼지 출현 주의!", "주의! 너구리 발견시 반려동물을 안고 즉시 자리를 피해주세요." 비슷한 문구를 뉴스에서도 볼 수 있다. "빈데믹(빈대+팬데믹) 여파 진드기 매개병 걱정."[1], "러브버그 출몰 지역 집중방역."[2] 이런 언표 속에 등장하는 온갖 종류의 벌레들은 그저 ‘해충’이란 범주로 묶인다. 출몰! 주의! 와 같은 경고음 앞에서 목소리를 잃는다. 벌레에 대한 인상은 넘치는데 벌레에 대한 인식은 빈곤한, 지금은 어떤 세계인가?      벌레의 세계를 궁금해한 사람들도 있었다. 1934년, 생물학자 윅스퀼은 동물들이 어떻게 세계를 지각하고 행동하며 ‘주체’적...
경덕
2024.06.02 | 조회 188
K장녀_돌봄을 말하다
    아버지의 미수연   지난달에 가까운 친척들을 모시고 아버지의 88세 미수연을 했다. 다들 나이가 들어 왕래가 어렵다 보니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뵌 후 2년 만에 만나는 분이 대부분이었다. 홀로 된 아버지를 걱정하고 계실 듯해서 겸사겸사 식사 대접을 했다. 축하 인사 후 아버지 차례가 되었다. 말씀하실 때는 청산유수다. “예전에 어른들이 나이 80이 되면 무덤 속에 누운 이나 살아있는 이나 똑같다고 했습니다. 이제 나도 내년이면 90이니 오래 살았습니다. 이제 사는 것이 지겹습니다. 빨리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서 얼굴도 보고 이야기도 나누니, 행복합니다.” 아버지가 데이케어센터에 갈 때 들고 다니는 가방에는 때때로 아버지의 심경을 적어 놓은 메모가 들어있다. “날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내가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 사는 낙이 없다. 빨리 죽고 싶다.” 밥도 잘 드시고 컨디션이 좋아 보일 때도 우울하고 쓸쓸한 기분이 아버지의 평소 정조다. 알츠하이머 치매의 증상에는 우울감도 포함된다. 정말 오랜만에 아버지로부터 행복하다는 말씀을 들었다.   친척들은 다들 아버지가 외롭지는 않은지, 어떻게 일상을 보내는지 궁금해했다. “큰아들이 옆에 살아서 아들과 며느리가 매일 아침에 오고 저녁에도 와서 챙긴다.” 아버지의 대답을 듣는 나는 어이가 없다. 자식 넷이 일주일씩 돌아가며 아버지 집에서 지내온 것이 벌써 햇수로 4년째! 큰아들과 며느리를 앞세우는 것은 그래야 위신이 선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허세일까, 아니면 자식들 넷이 일주일씩 돌아가며 온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지금 이 순간 정말로 그렇다고...
    아버지의 미수연   지난달에 가까운 친척들을 모시고 아버지의 88세 미수연을 했다. 다들 나이가 들어 왕래가 어렵다 보니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뵌 후 2년 만에 만나는 분이 대부분이었다. 홀로 된 아버지를 걱정하고 계실 듯해서 겸사겸사 식사 대접을 했다. 축하 인사 후 아버지 차례가 되었다. 말씀하실 때는 청산유수다. “예전에 어른들이 나이 80이 되면 무덤 속에 누운 이나 살아있는 이나 똑같다고 했습니다. 이제 나도 내년이면 90이니 오래 살았습니다. 이제 사는 것이 지겹습니다. 빨리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서 얼굴도 보고 이야기도 나누니, 행복합니다.” 아버지가 데이케어센터에 갈 때 들고 다니는 가방에는 때때로 아버지의 심경을 적어 놓은 메모가 들어있다. “날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내가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 사는 낙이 없다. 빨리 죽고 싶다.” 밥도 잘 드시고 컨디션이 좋아 보일 때도 우울하고 쓸쓸한 기분이 아버지의 평소 정조다. 알츠하이머 치매의 증상에는 우울감도 포함된다. 정말 오랜만에 아버지로부터 행복하다는 말씀을 들었다.   친척들은 다들 아버지가 외롭지는 않은지, 어떻게 일상을 보내는지 궁금해했다. “큰아들이 옆에 살아서 아들과 며느리가 매일 아침에 오고 저녁에도 와서 챙긴다.” 아버지의 대답을 듣는 나는 어이가 없다. 자식 넷이 일주일씩 돌아가며 아버지 집에서 지내온 것이 벌써 햇수로 4년째! 큰아들과 며느리를 앞세우는 것은 그래야 위신이 선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허세일까, 아니면 자식들 넷이 일주일씩 돌아가며 온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지금 이 순간 정말로 그렇다고...
요요
2024.05.27 | 조회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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