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난잡한’ 아니 ‘난장판’ 가족 돌봄

먼불빛
2023-05-11 08:33
418

 

 

 

(글)먼불빛

문탁에서 2016년부터 공부해왔다.

2021년 양생프로젝트 공부하다가 책에 심하게 멀미를 겪었다.

원래 뭐든지 좀 늦되다. 멀티는 더더욱 안된다.

올해 양생프로젝트 다시 한번 도전해 볼 예정이다.

 

 

 

 

 

 

88세의 늙고 병든 어머니

 

50대 후반 혹은 60대가 되면 누구나 부모님 돌봄 문제가 당장 눈앞의 현실로 닥친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아버지는 내가 54세 되던 해 돌아가셨고, 이제 60이 된 나에게는 88세의 어머니가 남아계신다. 그리고 어머니는 10년 차 파킨슨병 환자로 심장의 가동률은 33%(의사 말로는 언제 심정지가 와도 이상하지 않다고 함), 신장도 이미 한쪽은 기능을 잃었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누구에겐가 의지해야만 하는 상태이다. 특히 작년 12월 또다시 심장이 안 좋은 데다 신부전이 재발하였고, 중환자실에 입원했다가 극적으로 회복하셨다. 현재는 엄마가 5년간 지속해서 다녔던 주간보호센터에서 운영하는 공동생활가정에 입소 대기 중이며, 엄마를 보살필 요양보호사가 상주하는 주간보호센터에서 일시적으로 보호를 받으며 생활하고 계신다.

 

 

 

 

 

엄마는 원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듬해(2017년) 봄부터 동생과 함께 살았다. 동생은 엄마와 함께 사는 동안 엄마의 병원과 수많은 약 수발을 혼자 감당하면서 주 보호자 노릇을 했다. 그 6년 동안에도 엄마는 각종의 검사와 입원, 퇴원을 반복했고, 주간보호센터에서 쓰러져 119에 실려 가기를 몇 번, 동생의 속을 꽤나 끓게 했다. 말이 쉽지 ‘6년간 엄마의 돌봄’이라는 이 간단한 단어 조합 안에는 엄청나게 복잡한 감정과 노동과 고통이 퇴적층처럼 촘촘히 쌓여 압축되어 있다. 돌보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고된 일인지, 얼마나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일인지... 라고 나는 말 할 자격이 없다. 그 고된 6년간을 오로지 동생 혼자서 돌덩이처럼 무거운 ‘엄마의 돌봄’을 감당해 왔다. 나는 언제든 그 복잡하고 힘든 현장을 떠날 구실(생계와 직장)을 갖고 있었다. 이제 엄마의 돌봄 7년 차에 우리 가족(?)에게는 또 다른 국면이 펼쳐지고 있다. 엄마는 이전과 다른 의존적 몸으로 변했고, 우리의 손이 아닌 시설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다. 엄마와 같이 살면서 사랑과 의무를 다하고자 했던 동생은 엄마 돌봄에서 나가떨어진 상태가 되었다. 나는 작년 퇴직 후 7월경부터 엄마 돌봄에 합류하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은 우리 각자에게 윤리적이든, 상황 논리적이든 어떤 선택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어떤 선택을 해도 참담함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답도 없고 끝도 없는 이 돌봄의 난장판을 어떻게 통과할까.

 

 

여동생의 딜레마

 

 

동생이 엄마 돌봄에 슬슬 지쳐가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건 더 오래전이었겠지만, 겉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건 2021년 정도부터였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는 치명적이었다. 엄마는 센터를 나가지 못하면서 우울증이 심해졌고, 우리도 조심해야 하는 상황들이 자꾸 생기면서 한동안 엄마를 보러 가지 못했다. 동생은 세 남매의 단톡방에 ‘지쳤다’ ‘힘들다’ ‘엄마에게 자주 짜증 낸다’라는 문자를 올렸고 주말에 방문 당번을 정하고 벌금을 내자는 안까지 올렸다. 오빠는 언제나 짧게 ‘못가’라고 당당히 답하거나, 묵묵부답이었고, 나는 대체로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은 했지만, 솔직히 엄마나 동생이 1순위가 되지는 못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미안해하거나 변명이라도 했다는 점이 오빠와 다르다면 달랐을까 동생 입장에서 야속하기는 마찬가지였었을 것이다.

 

퇴직한 나는 동생에게 ‘노는 사람’이었다. 그 말은 동생 입장에서 나는 언제든 엄마가 필요로 할 때 달려가야 하고 바쁘다느니, 일이 있다느니 따위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제 ‘언니가 시간이 많으니, 엄마를 가장 많이 돌봐야 하지 않겠어?’라고 항변하는 것 같았다. 동생은 이제 이전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하고 싶은 것도 하면서, 자신을 위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아마도 동생의 마음속을 훔쳐볼 수 있다면 분명 이렇게 일갈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엄마와 함께 산 6년 동안 독박을 제대로 썼다. 엄마와 함께 사는 일이란 몸도 영혼도 모두 뺏기는 일이다. 엄마의 부정적인 기운이 너무 싫고 답답해 집에 들어가기가 싫다. 집은 쉬는 곳이 아니다. 그렇다고 딱히 어디 갈 곳도 없다. 엄마는 내가 그렇게 많은 시간 동안 애탕 끌탕 하며 보살폈지만, 고맙다는 말보다는 늘 성에 차지 않아 했다. 물론 나도 엄마에게 잘해주지 못했다. 엄마에게 있는 대로 짜증을 냈는가 하면, 하지 않아야 할 말을 퍼부었고, 혼자 내버려 둘 때가 더 많았는지도 모른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을 내가 할 줄은 몰랐다. 대체 얼마만큼 해야 효녀가 되는 걸까? 어디에 있든 늘 ‘엄마’라는 존재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나를 짓눌렀다. 일을 하고 있어도 집중이 안 된다. 언제 엄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늘 불안하다. 아무도 내 마음을 모를 것이다. 언니나 오빠는 그저 잠시 스쳐 가는 바람 같은 존재다. 결국은 나 혼자 감당해야 한다. 언니가 작년에 퇴직하고 집에 있을 때는 엄마를 많이 돌봐주었다. 그렇게 마음이 가벼울 수 없었다. 언니가 쉬는 동안엔 엄마를 돌봐야 하는 책임을 더 가져 가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엄마한테 일이 생길 때마다 일부러 언니를 더 호출했다. 언니는 어떤 설명 없이도 뭘 해야 하는지 알아서 일을 해주었다. 정말 의지가 되었다. 그러나 언니는 취직해 버렸다. 끝났다.

 

작년에 엄마가 중환자실에 들어가 계실 때는 정말 마음이 편했다. 엄마가 사경을 헤매는데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집이 집 같았다. 그런데 최근 엄마가 요양병원에서 조금 회복하는 듯 보이자 언니는 엄마를 다시 집으로 모셔 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을 내비쳤다. 물론 나도 언니 말대로 엄마를 집으로 모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엄두가 안 난다. 나는 엄마가 다니던 주간보호센터 원장님과 상의해 보았다. 원장님은 대기 기간이 길어질 수도 있지만 센터에서 운영하는 공동생활가정에 입소하기까지 센터에서 지내시도록 할 수는 있다고 했다. 나는 엄마를 센터로 모시자고 언니, 오빠에게 제안했다. 엄마도 원했고 낯선 요양원보다는 나은 선택 같았기 때문이다.

 

 

ⓒ이지영 그림 (<시사인>  2022.04.24 )

 

 

엄마는 지금 센터(공동생활가정)에 있으면서도 나에게 수시로 전화한다. 집에 오고 싶다는 의사 표현이다. 그러나 지난 주말에 잠깐 엄마가 집으로 왔을 때도 벌써 세 번이나 넘어지셨다. 현관 비밀번호도 까먹고 멍하니 서 있는 엄마를 어떻게 집으로 모실 수 있을까? 나는 과연 엄마를 감당할 수 있을까? 지금 엄마가 있는 곳은 밤에도 돌봄을 받을 수 있어서 다른 시설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시설이 다 똑같지 않을까? 그에 비하면 여기가 차라리 나는 낫다고 생각한다. 24시간 요양보호사를 구하기도 어렵지만, 구한다 해도 집도 좁고 엄마를 돌보는데 더 낫다는 보장을 못하겠다. 그런데도 정말 집으로 모시는 것만이 능사일까? 엄마를 집으로 모시는 순간 독박 돌봄의 연속일 뿐이다. 그러나 엄마가 거기 계시면 언니도, 오빠도 나도 비교적 공평하게 엄마를 돌볼 수 있다. 지금 그냥 엄마를 저대로 두면 나는 나쁜 자식일까? 그런데 왜 나만 나쁜년이 돼야 하는 거지? 왜, 왜? 억울하다.

 

 

나의 졸렬한 변명

 

 

엄마 돌봄이 막상 내게 닥치고 보니, 엄마도 엄마지만 동생이 더 심각해 보였다. 처음엔 동생에게 정말 진심으로 미안했고, 엄마보다는 동생을 살려야겠다는 마음이었다. 그 모든 행동이 다 이해가 됐고, 집에 들어오기 싫은 것, 엄마에 대해 끊임없이 욕을 하는 그 마음도 이해가 됐다. 그럴수록 빨리 엄마에게서 벗어나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엄마를 돌보는 시간이 동생에게는 휴식이 되었으면 했다. 그러나 내가 합류하자 동생의 태도는 점차 달라졌다.  일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며엄마 돌봄에서  빠지려고 한다. 나를 돌려막기로 세워 놓고 엄마의 독박 돌봄에서 슬쩍 빠져나가자는 속셈이 아닐까? 엄마를 돌보는 일보다 동생과의 신경전이 나로서는 더 스트레스였다. 너무 화가 나는데 따지고 보면 엄마도 동생도 나도 그 누구도 원망할 수가  없다. 엄마의 돌봄은 내가 안 하면 동생이 해야 하고, 동생이 안 하면 내가 해야 하는 시소게임이다. 동생과 내가 엄마 돌봄을 놓고 어떤 결정을 내린다 해도 항상 찜찜하고 죄스럽고, 잘돼봐야 ‘찜찜한 홀가분함’ 밖에 남지 않았다.

 

오빠는 자기 일정에 어떤 피해도 볼 수 없다는 태도다. 거절도 너무 당당하고, 거침이 없어서 그 기세에 눌릴 판이다. 그도 마음 한구석에 우리처럼 ‘죄스러움’과 ‘찜찜한 홀가분함’이라는 게 있을까? 물론 오빠도 새언니 눈치 보랴 나름의 어려움이 있을 테지. 그러나 그런 것까지 내가 친절히 이해하고 싶지 않다. 나나 동생이 오빠를 타박이라도 할라치면 엄마는 몹시 불편해하며 우리 삼 형제가 합심하는 모습만을 보여주길 원했다. 저럴 땐 나도 엄마가 혼자 되거나 말거나 내버려 두고 싶다. 오빠는 의무는 다하지 않으면서 권한은 가져가려고 한다. 지난번 엄마를 병원에서 퇴원시키려고 할 때도 엄마를 자기 집 근처 요양병원으로 옮기자고 했다. 나는 엄마의 옷이라던가, 기저귀 등 물품이 많이 필요할 텐데 자주 왔다 갔다 하고 사소한 심부름을 오빠가 다 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흥! 결국 동생이 그 먼 데까지 잔심부름으로 왔다 갔다 할 게 뻔하니까). 그러자 갑자기 태도를 바꾸면서 그럼 엄마 집 근처로 모시자고 했다. 매사에 저런 식이다. 오빠를 저렇게 만든 건 다 엄마, 아빠 잘못이다. 1남 2녀의 그 잘난 K-장남으로 키워진 탓이다. 동생이나 나나 오빠와 싸우자니 지치고, 그냥 넘어가자니 속이 끓는다. 결과적으로 오빠 몫까지 땜빵하고 있는 꼴을 보면 내 뼛속엔 가부장제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몸서리쳐진다. 엄마 돌아가시면 안 보고 살 거다. 얼어 죽을 놈의 가족 따위는 해체야. The end라구.

 

 

 

 

 

엄마를 요양병원에 그냥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6년 전에 입소했던 요양병원은 모든 시설이 개방되어 있었고, 엄마가 어떻게 지내는지 다 보고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코로나 때문인지 내부 통제가 철저해 대체 어떤 상태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고, 엄마의 말만으로 모든 상황을 짐작할 뿐이다. 엄마를 당장 집에 모실 수 없다면 적어도 병원보다는 익숙한 환경과 익숙한 사람들이 있는 센터(공동생활가정)가 훨씬 낫다고 나도 생각한다. 그러나 대기 기간이 꽤 길 텐데 일시적이라면 모르지만, 계속 있게 된다면 엄마에게 괜찮을지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집’으로 모시는 게 어떠냐고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그런데 오빠는 단칼에 ‘엄마가 괜찮다는 데 무슨 소리냐’고 했고, 동생은 내 말에 수긍하는 듯했지만 결국은 자신 없다며 피했다.

 

그래, 내가 엄마를 집으로 모시자고 얘기하는 건 주제넘은 소리다. 그건 또 동생에게 엄마에 대한 전적인 부담을 지우는 일이니까. 아무리 내 몫만큼 감당해 준다 한들 24시간 함께 사는 동생의 하중에 비할 수 있을까? 요양보호사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데,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다. 엄마도 엄마지만 동생도 살려야 한다. 오죽하면 동생은 엄마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너무 마음이 가벼웠다고 했다. 그 맘을 내가 어찌 모를까. 엄마가 집으로 못 갈 바에야 지금 있는 곳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주말에라도 집에 모시고 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 세 남매에게 최선이 엄마에게도 최선일까?

 

답답하고 미치겠다던 엄마가 며칠 전 오빠를 만나고는 다시 거기 그냥 있겠다고 했다. 오빠 말 한마디가 엄마를 움직이는 꼴이라니. 그러나 안다 나는. 엄마는 우리가 힘들까 봐 참는 것이라는 것을. 엄마의 안전과 평안을 중심에 놓고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일이 돌봄일 텐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엄마 돌봄에 동생과 내가 진 몫은 2분의 1이 아니라, 3분의 1이다. 나머지 1은 엄마의 셀프다. 자식들을 위해 불편해도, 집에 가고 싶어도 시설에서 지내며 견뎌보고자 하는 엄마 자신의 노력 말이다. 돌봄에 공평한 몫의 나눔이라는 게 가능하기나 한 걸까? 엄마가 스스로 견디는 그 몫 덕분에 동생과 나는 그 더럽고 치사스러운 시소게임을 멈출 수 있다.

 

 

내가 빨리 죽어야 느그가 편할낀데..

 

 

결국 이 와중에 가장 큰 고통을 받는 건 엄마다. 그런데도 엄마는 ‘엄마 거기 어때? 지낼만해?’하고 물으면 ‘마, 그저 글타.. 그냥 그렇게 지내는 거지’ 한다. 엄마는 혹시 아수라 백작인가? 센터에 있을 땐 답답하다며 집에 가고 싶다고 전화해서 마음을 들쑤셔 놓고, 만나서 얼굴 맞대고 물으면 대답이 달라진다. 늙고 병든 엄마의 의사는 믿을 만한 것인지, 그저 우리가 도리에 따라 판단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자식 된 도리라는 것은 무엇인지, 이 상황에서 맞게 판단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알쏭달쏭할 뿐이다.

 

그러나 ‘내가 얼른 죽어야 느그들이 편할낀데...’ 하는 엄마의 그 말만은 진심일 것이다. 엄마 돌봄의 문제는 아무리 고민해도 누구에게도 흡족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선택이 될 수밖에 없는 데 그 누군가가 돌봄을 받아야 할 당사자가 되고 있다는 현실이 너무 가슴 아프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엄마를 시설에 모시느냐 아니냐가 아니고, 시설이 좋다, 나쁘다도 아니다. 엄마를 놓고 우리 세 남매의 각기 다른 입장들과 어려움, ‘죄책감’과 이 ‘찜찜한 홀가분함’ 사이에서 결국 엄마의 희생을 담보로 얻어지는 각자의 평화는 유죄일까 무죄일까. ‘난잡한 돌봄’은 커녕 난장판처럼 혼란스럽고 진퇴양난인 이 사태 앞에서 나는 과연 ‘웰컴투 60’이라 말해도 되는 것일까? 이것은 그대로 곧 내게 닥쳐올 미래일 것인데….

 

 

댓글 7
  • 2023-05-11 10:27

    저 역시 모친 돌봄을 준비 중(우선 현재는 마음가짐만요.)인 1인입니다. 저는 혼자여서 형제끼리의 시소게임을 안해도 되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 2023-05-11 10:32

    주간보호센터, 공동생활가정......요양병원 말고도 알아야 할 것들이 많네요. 난장판에서 맨정신으로 버티기 힘들지만 이렇게 써주셔 도움이 많이 됩니다!! 알아야 할 것,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네요!!

  • 2023-05-11 12:17

    저는 이미 난장판 비스무리하게 스쳐간 1인입니다.
    글을 읽으니 저랑 오빠만이 돌봄을 한게 아니고 요양병원에 입소했던 엄마도 함께 돌봄의 몫을 나눈거였다는 생각이 드네요~
    거친 돌봄의 현장을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읽으면서 예전의 일들이 다시 구성되네요.

  • 2023-05-11 16:37

    남의 일 같지 않게 읽히는 1인, 음... 생각이 더더더 많아지는군요 ㅋㅋ

  • 2023-05-14 22:00

    저에게도 곧 닥칠 일들이겠죠…동생들과 부디 잘 헤쳐나가길 바라지만 쉽지 않을 것 같네요.. 참..어려운 문제입니다..

  • 2023-05-22 11:53

    무사님 진정 혼자가 오히려 다행이랍니다 ㅎㅎㅎ
    근데 그게 혼자는 아니라는게 또 쉽지가 않습니다
    다름 아닌 엄마가 계시죠
    돌봄은 일방적 서비스가 아닌 상호관계맺기라는 .....

    그나저나 모두들 화이팅!!! 입니다^^

  • 2023-06-04 07:39

    한 번도 겪어보지 못 한 이 시대의 난제. 노인돌봄.
    현재의 부모 돌봄은 가부장적 문화 아래 여전히 여성의 몫으로 남아있군요. 그렇게 키워진 건지, 환경이 그러한 건지, 아님 남자들이 원래 싸가지가 없는 건지. 언니도 없고 여동생도 없는 나는 그래도 울 오빠 정도면 괜찮지 하고 지냅니다. 수시로 집 나가고 싶다는 생각만 하면서. ㅎㅎㅎ

K장녀_돌봄을 말하다
    아버지의 미수연   지난달에 가까운 친척들을 모시고 아버지의 88세 미수연을 했다. 다들 나이가 들어 왕래가 어렵다 보니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뵌 후 2년 만에 만나는 분이 대부분이었다. 홀로 된 아버지를 걱정하고 계실 듯해서 겸사겸사 식사 대접을 했다. 축하 인사 후 아버지 차례가 되었다. 말씀하실 때는 청산유수다. “예전에 어른들이 나이 80이 되면 무덤 속에 누운 이나 살아있는 이나 똑같다고 했습니다. 이제 나도 내년이면 90이니 오래 살았습니다. 이제 사는 것이 지겹습니다. 빨리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서 얼굴도 보고 이야기도 나누니, 행복합니다.” 아버지가 데이케어센터에 갈 때 들고 다니는 가방에는 때때로 아버지의 심경을 적어 놓은 메모가 들어있다. “날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내가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 사는 낙이 없다. 빨리 죽고 싶다.” 밥도 잘 드시고 컨디션이 좋아 보일 때도 우울하고 쓸쓸한 기분이 아버지의 평소 정조다. 알츠하이머 치매의 증상에는 우울감도 포함된다. 정말 오랜만에 아버지로부터 행복하다는 말씀을 들었다.   친척들은 다들 아버지가 외롭지는 않은지, 어떻게 일상을 보내는지 궁금해했다. “큰아들이 옆에 살아서 아들과 며느리가 매일 아침에 오고 저녁에도 와서 챙긴다.” 아버지의 대답을 듣는 나는 어이가 없다. 자식 넷이 일주일씩 돌아가며 아버지 집에서 지내온 것이 벌써 햇수로 4년째! 큰아들과 며느리를 앞세우는 것은 그래야 위신이 선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허세일까, 아니면 자식들 넷이 일주일씩 돌아가며 온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지금 이 순간 정말로 그렇다고...
    아버지의 미수연   지난달에 가까운 친척들을 모시고 아버지의 88세 미수연을 했다. 다들 나이가 들어 왕래가 어렵다 보니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뵌 후 2년 만에 만나는 분이 대부분이었다. 홀로 된 아버지를 걱정하고 계실 듯해서 겸사겸사 식사 대접을 했다. 축하 인사 후 아버지 차례가 되었다. 말씀하실 때는 청산유수다. “예전에 어른들이 나이 80이 되면 무덤 속에 누운 이나 살아있는 이나 똑같다고 했습니다. 이제 나도 내년이면 90이니 오래 살았습니다. 이제 사는 것이 지겹습니다. 빨리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서 얼굴도 보고 이야기도 나누니, 행복합니다.” 아버지가 데이케어센터에 갈 때 들고 다니는 가방에는 때때로 아버지의 심경을 적어 놓은 메모가 들어있다. “날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내가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 사는 낙이 없다. 빨리 죽고 싶다.” 밥도 잘 드시고 컨디션이 좋아 보일 때도 우울하고 쓸쓸한 기분이 아버지의 평소 정조다. 알츠하이머 치매의 증상에는 우울감도 포함된다. 정말 오랜만에 아버지로부터 행복하다는 말씀을 들었다.   친척들은 다들 아버지가 외롭지는 않은지, 어떻게 일상을 보내는지 궁금해했다. “큰아들이 옆에 살아서 아들과 며느리가 매일 아침에 오고 저녁에도 와서 챙긴다.” 아버지의 대답을 듣는 나는 어이가 없다. 자식 넷이 일주일씩 돌아가며 아버지 집에서 지내온 것이 벌써 햇수로 4년째! 큰아들과 며느리를 앞세우는 것은 그래야 위신이 선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허세일까, 아니면 자식들 넷이 일주일씩 돌아가며 온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지금 이 순간 정말로 그렇다고...
요요
2024.05.27 | 조회 197
아스퍼거는 귀여워
  그 날은 평범한 오후였다. 감자가 한 50일쯤이었을까. 분유 냄새가 폴폴 나는 뽀시래기 시절, 남편은 출근하고 나는 감자랑 하루 종일 붙어있으면서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거실 소파 위에 앉아 다리 위에 아이를 끼워놓고는,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배부른 아이는 나른하게 누워있고, 모처럼의 평화로운 분위기. 그때 감자는 내 눈을 정확하게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등줄기부터 짜르르 행복감이 느껴졌다. “아…. 이게 행복이구나” 감자를 낳고 밤낮으로 잠도 못 자고, 회복이 늦어서 제대로 앉지도 서지도 못했던 나날들이었다. 내 배에서 나왔지만, 처음에는 실감이 안 났고, 나중에는 정신이 없었고, 씻지도 먹지도 못해 사랑스러움을 느낄 새도 없었다. 하지만 그 날 처음 눈이 서로 딱 마주친 그때. 나는 속절없이 사랑에 빠졌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존재라니. 그날부터 감자 입덕기가 시작되었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생각한다. “호옥시... 우리 아이가 천재?” 누구나 에겐 판단력을 상실하고, 자신의 아이만 보이는 시절이 있었더랬다. 첫 뒤집기가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다 싶다. 태어나서 한 줌밖에 안 되어 보이는 아이가, 조금씩 자라고, 꼬물거리고, 울고, 웃었다. 그때는 손가락만 쥐었다 펴도 대단해 보인다. 그런 아이가 뒤집기라니!! 혼자서 뒤집다니!! 놀랄 노자가 아닐 수가 없다. “우리가 아이가 뒤집었어요.” 동네방네 플래카드라도 붙이고 싶은 심정.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1~2개월이 뭐라고, 인터넷에는 질문들이 가득하다. ‘6개월이 지났는데…. 우리 아이 왜 뒤집기를 안 할까요’부터 ‘6개월인데 벌써 일어나 앉았어요’까지....
  그 날은 평범한 오후였다. 감자가 한 50일쯤이었을까. 분유 냄새가 폴폴 나는 뽀시래기 시절, 남편은 출근하고 나는 감자랑 하루 종일 붙어있으면서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거실 소파 위에 앉아 다리 위에 아이를 끼워놓고는,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배부른 아이는 나른하게 누워있고, 모처럼의 평화로운 분위기. 그때 감자는 내 눈을 정확하게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등줄기부터 짜르르 행복감이 느껴졌다. “아…. 이게 행복이구나” 감자를 낳고 밤낮으로 잠도 못 자고, 회복이 늦어서 제대로 앉지도 서지도 못했던 나날들이었다. 내 배에서 나왔지만, 처음에는 실감이 안 났고, 나중에는 정신이 없었고, 씻지도 먹지도 못해 사랑스러움을 느낄 새도 없었다. 하지만 그 날 처음 눈이 서로 딱 마주친 그때. 나는 속절없이 사랑에 빠졌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존재라니. 그날부터 감자 입덕기가 시작되었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생각한다. “호옥시... 우리 아이가 천재?” 누구나 에겐 판단력을 상실하고, 자신의 아이만 보이는 시절이 있었더랬다. 첫 뒤집기가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다 싶다. 태어나서 한 줌밖에 안 되어 보이는 아이가, 조금씩 자라고, 꼬물거리고, 울고, 웃었다. 그때는 손가락만 쥐었다 펴도 대단해 보인다. 그런 아이가 뒤집기라니!! 혼자서 뒤집다니!! 놀랄 노자가 아닐 수가 없다. “우리가 아이가 뒤집었어요.” 동네방네 플래카드라도 붙이고 싶은 심정.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1~2개월이 뭐라고, 인터넷에는 질문들이 가득하다. ‘6개월이 지났는데…. 우리 아이 왜 뒤집기를 안 할까요’부터 ‘6개월인데 벌써 일어나 앉았어요’까지....
모로
2024.05.25 | 조회 199
가마솥의 59년생 서른살
     동창회 모임은 딱 한군데 나간다. 고등학교 3학년 반모임이다. 사회에 첫발을 디딜 즈음에 시작한 모임이니 얼추 한 사십년은 되었다. 모이면 하등 의미없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눈다. 학교 다닐 때 성적, 물론 충격적인 점수를 받았던 수학점수 등으로 이야기를 출발해서 세계 평화를 논하고 손주들 자라는 이야기가 나오면 마무리 시간이 된다. 요즘은 내게 은퇴후 생활에 대해서 묻는 친구들이 더러 있다. 10여년 전 고기리 우리집에 놀러 온 친구들은 내가 단독주택에서 살고 있고 또 평창 집을 가꾸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은퇴를 앞두었거나 은퇴한 지 서너 해가 되었는데, 미리 생각했던 전원주택 혹은 텃밭정도 가꾸는 시골살이를 이런 저런 이유로 실행하지 못하고 꿈만 꾸고 있는 녀석들이다. 한 녀석이 대뜸 목소리 톤을 높인다. “니들, 농사 지어봤냐? 니들처럼 시골 출신이면서 공부 잘 해서 손에 흙 묻히지 않은 놈들이 꼭 귀농한다고 설치더라. 난 농사라면 징글징글해서 때려 죽여도 안한다. 그 돈으로 그냥 사먹는 게 훨씬 싸다!” 녀석 참, 성질 급한 것은 여전하다. 내가 겪은 경험을 그에게 이야기했다.        내가 회사 대리 시절에 직속 과장이었던 선배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당시 사장은 좀 괴팍한 사람이었는데, 학벌도 좋고 인품도 바른 그 선배를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심하게 대했다. 임원회의 때마다 업무 성과를 핑계로 그 선배에게 이야기하는 톤은 옆자리의 우리들도 견디기 어려운 모욕적인 언사를 쏟아 내곤 하였다. 급기야 그 선배가 원형 탈모 증세를...
     동창회 모임은 딱 한군데 나간다. 고등학교 3학년 반모임이다. 사회에 첫발을 디딜 즈음에 시작한 모임이니 얼추 한 사십년은 되었다. 모이면 하등 의미없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눈다. 학교 다닐 때 성적, 물론 충격적인 점수를 받았던 수학점수 등으로 이야기를 출발해서 세계 평화를 논하고 손주들 자라는 이야기가 나오면 마무리 시간이 된다. 요즘은 내게 은퇴후 생활에 대해서 묻는 친구들이 더러 있다. 10여년 전 고기리 우리집에 놀러 온 친구들은 내가 단독주택에서 살고 있고 또 평창 집을 가꾸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은퇴를 앞두었거나 은퇴한 지 서너 해가 되었는데, 미리 생각했던 전원주택 혹은 텃밭정도 가꾸는 시골살이를 이런 저런 이유로 실행하지 못하고 꿈만 꾸고 있는 녀석들이다. 한 녀석이 대뜸 목소리 톤을 높인다. “니들, 농사 지어봤냐? 니들처럼 시골 출신이면서 공부 잘 해서 손에 흙 묻히지 않은 놈들이 꼭 귀농한다고 설치더라. 난 농사라면 징글징글해서 때려 죽여도 안한다. 그 돈으로 그냥 사먹는 게 훨씬 싸다!” 녀석 참, 성질 급한 것은 여전하다. 내가 겪은 경험을 그에게 이야기했다.        내가 회사 대리 시절에 직속 과장이었던 선배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당시 사장은 좀 괴팍한 사람이었는데, 학벌도 좋고 인품도 바른 그 선배를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심하게 대했다. 임원회의 때마다 업무 성과를 핑계로 그 선배에게 이야기하는 톤은 옆자리의 우리들도 견디기 어려운 모욕적인 언사를 쏟아 내곤 하였다. 급기야 그 선배가 원형 탈모 증세를...
가마솥
2024.05.25 | 조회 169
현민의 독국유학기
    WG투어 터키편       인터네셔널 WG(독일에서는 셰어하우스를 WG라고 부른다. Wohngemeinschaft의 줄임말.)에 살다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WG 투어를 하자. 취지는 각자의 나라에 여행을 가자는 것이다. 우리 집은 12명이 함께 사는 특이한 경우라, 대화 때마다 등장하는 각 나라의 정치, 문화, 경제 상황을 다양하게 들을 수 있다. 독일, 터키, 인도, 헝가리, 코스타리카, 이탈리아, 미국 그리고 한국. 가봐야 할 곳이 많은데, 첫 번째로 우리는 터키에 가기로 했다.   독일 사람들은 새벽까지 파티를 한 후 해장 음식으로 되너를 먹는다. 터키 케밥은 독일 길거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데, 그만큼 터키 사람들은 80년대 이후 독일에 넘어와 독일 경제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터키는 유일하게 아시아와 유럽 동시에 면이 맞닿아 있는 국가다. 종교나 역사, 문화 면에서 유럽의 국가들과는 다른 갈래를 가지고 있지만, 유럽 곳곳에 퍼져있는 터키계 노동자들로 인해 굉장히 익숙하다. 2시간 비행이면 도착하고, 독일보다는 싼 물가이기 때문에 비교적 여행하기 만만하다. 나의 플랫 메이트 베이자는 터키의 수도 앙카라 출신으로 독일의 은행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그 애의 주도로 우리는 이스탄불로 향했다.   첫날 밤 공항에서는 호주인 아셔가 여행 비자가 없는 걸 입국장에서 알아버려 그 애를 한참 기다려야 했다. 한국에서 온 나, EU시민권이 있는 니키와 T 그리고 터키인인 베이자는 특별한 비자가 없이도 통과할 수 있었다. 아샤는 공항에서 50유로를 내 비자를 받고 한참 뒤에야 나왔다. 그게 모자랐는지 공항에서부터...
    WG투어 터키편       인터네셔널 WG(독일에서는 셰어하우스를 WG라고 부른다. Wohngemeinschaft의 줄임말.)에 살다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WG 투어를 하자. 취지는 각자의 나라에 여행을 가자는 것이다. 우리 집은 12명이 함께 사는 특이한 경우라, 대화 때마다 등장하는 각 나라의 정치, 문화, 경제 상황을 다양하게 들을 수 있다. 독일, 터키, 인도, 헝가리, 코스타리카, 이탈리아, 미국 그리고 한국. 가봐야 할 곳이 많은데, 첫 번째로 우리는 터키에 가기로 했다.   독일 사람들은 새벽까지 파티를 한 후 해장 음식으로 되너를 먹는다. 터키 케밥은 독일 길거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데, 그만큼 터키 사람들은 80년대 이후 독일에 넘어와 독일 경제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터키는 유일하게 아시아와 유럽 동시에 면이 맞닿아 있는 국가다. 종교나 역사, 문화 면에서 유럽의 국가들과는 다른 갈래를 가지고 있지만, 유럽 곳곳에 퍼져있는 터키계 노동자들로 인해 굉장히 익숙하다. 2시간 비행이면 도착하고, 독일보다는 싼 물가이기 때문에 비교적 여행하기 만만하다. 나의 플랫 메이트 베이자는 터키의 수도 앙카라 출신으로 독일의 은행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그 애의 주도로 우리는 이스탄불로 향했다.   첫날 밤 공항에서는 호주인 아셔가 여행 비자가 없는 걸 입국장에서 알아버려 그 애를 한참 기다려야 했다. 한국에서 온 나, EU시민권이 있는 니키와 T 그리고 터키인인 베이자는 특별한 비자가 없이도 통과할 수 있었다. 아샤는 공항에서 50유로를 내 비자를 받고 한참 뒤에야 나왔다. 그게 모자랐는지 공항에서부터...
현민
2024.05.24 | 조회 149
윤경이는 마을활동가
      지난 4월 13일과 14일 낮 최고 기온이 27.3℃와 29.4℃였다. 아직은 이른 봄인데, 기온은 한여름이다. 작년보다도 더 빠르게 더워지는 것 같고, 무엇보다 햇빛의 강도가 작년과 또 다르게 더 강렬했다. (올해는 새로운 패턴이 생긴 것도 같다. 너무 일찍 더워졌다가 또 급하게 온도가 내려가 평년보다 더 쌀쌀해진 느낌이다) 그런 햇빛을 받으며 걷고 있는 나는 겁이 났다. 정말 지구가 불타오르는 것 아닐까 해서다.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아이들이 엄청 더워서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인다. 괜스레 미안해지고 안쓰러웠다. 기후변화가 시작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고, 이제 기후위기라고 한다. 이런 지구를 물려주는 어른으로서 나는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번 어린이날 행사에 참여하며 느낀 점을 정리하며 또다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본다.         친구야 노~올자     2024년 5월 5일 제102회 어린이날, 우리 동네에서는 제17회 금천어린이큰잔치 ‘친구야 노~올자’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는 2007년부터 시작된 마을 행사이다. 우리구는 1995년 구로구에서 분구된 후 ‘금천구’라는 정체성을 찾는데 시간이 좀 걸린 것 같다. 그래서 어린이날 행사도 한동안 없었다. 우리 동네 어린이들은 신도림 가로공원에서 열리는 어린이날 행사까지 다녀와야 했단다. 그런 상황을 보고 ‘나서는 어른들’이 있었다. 우리 동네 어린이들도 우리 동네에서 놀게 하자고. 그런 어른들의 제안으로 2007년 처음 금천구에도 어린이날 행사가 생긴 것이다. 전교조, 노동조합, 청년회, 진보정당 등 지역의 여러 단체가 첫 행사를 준비했다. 처음 열린 행사에서는 이주노동자와...
      지난 4월 13일과 14일 낮 최고 기온이 27.3℃와 29.4℃였다. 아직은 이른 봄인데, 기온은 한여름이다. 작년보다도 더 빠르게 더워지는 것 같고, 무엇보다 햇빛의 강도가 작년과 또 다르게 더 강렬했다. (올해는 새로운 패턴이 생긴 것도 같다. 너무 일찍 더워졌다가 또 급하게 온도가 내려가 평년보다 더 쌀쌀해진 느낌이다) 그런 햇빛을 받으며 걷고 있는 나는 겁이 났다. 정말 지구가 불타오르는 것 아닐까 해서다.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아이들이 엄청 더워서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인다. 괜스레 미안해지고 안쓰러웠다. 기후변화가 시작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고, 이제 기후위기라고 한다. 이런 지구를 물려주는 어른으로서 나는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번 어린이날 행사에 참여하며 느낀 점을 정리하며 또다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본다.         친구야 노~올자     2024년 5월 5일 제102회 어린이날, 우리 동네에서는 제17회 금천어린이큰잔치 ‘친구야 노~올자’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는 2007년부터 시작된 마을 행사이다. 우리구는 1995년 구로구에서 분구된 후 ‘금천구’라는 정체성을 찾는데 시간이 좀 걸린 것 같다. 그래서 어린이날 행사도 한동안 없었다. 우리 동네 어린이들은 신도림 가로공원에서 열리는 어린이날 행사까지 다녀와야 했단다. 그런 상황을 보고 ‘나서는 어른들’이 있었다. 우리 동네 어린이들도 우리 동네에서 놀게 하자고. 그런 어른들의 제안으로 2007년 처음 금천구에도 어린이날 행사가 생긴 것이다. 전교조, 노동조합, 청년회, 진보정당 등 지역의 여러 단체가 첫 행사를 준비했다. 처음 열린 행사에서는 이주노동자와...
김윤경~단순삶
2024.05.20 | 조회 258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