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라의 암 이야기3> 수술이 가장 쉬웠어요

문탁
2023-04-19 09:35
241

 

 

 

 

 

 

 

노라

얼마나 놀기 좋아하면...ㅎㅎ..

문탁의 터줏대감이다. 모르는게 있으면 나에게^^

 

 

 

항암 중 ‘잘 먹어야 한다!’는 꼭 지켜야 하는 암환자 수칙이다. 그러다 5차쯤 되니 꾀가 생겼다. 항암하고 3주째는 어쨌든 몸이 회복되더라는 기억을 가지고 있던 나는 5차, 6차 때 먹는 것을 소홀히 해 버렸다. 몸은 회복되지 않았다! 기력은 거의 바닥이었고 이러다간 수술도 못 받을까 걱정 될 지경이었다. 이전에 항암 하시던 아빠가 뭐 드시라 할 때마다 짜증을 내셨는데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겪어봐야 알게 된다! 설상가상 항암제 부작용으로 손톱이 곪고 빠졌다. 마치 백설공주에게 독 사과를 권하던 마귀할멈 손톱처럼 검게 되었다. “더 늦었으면 큰일 날 뻔 했지요?” 심각한 표정으로 치료하던 외과의사에게 물었다. 대답은 “이미 많이 늦으셨어요.” 데쟈뷰다! 처음 검사한 유방외과에서 한 질문이 “혹시 심각한가요?”였다. 그 때 대답도 “예. ……”

 

 

항암 중 나는 문탁 친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특히 이 병을 미리 거쳐 간 바람님과 간호사였던 달팽이, 여여님과 상의했다. 어느 병원에 가야 할지,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언제 마음이 아픈지, 문탁 친구들은 병명이 나오지 않았을 때부터 심난한 나와 가족들이 먹을 반찬을 준비해 주었다. 매일 아침 친구들로 구성된 ‘써포터즈’가 카톡으로 안부를 물었다. 지난 밤 얼마나 아팠는지? 무얼 먹었는지? 잘 잤는지? 그들과의 대화로 나는 하루를 시작했다. ‘하이 에브리원!’ 이라는 인사는 내가 몸이 좀 나아졌다는 신호였다. 친구들은 화요일마다 돌아가며 도시락을 가져다주었다. 물김치, 도미찜, 계란말이, 미역국, 소고기, 닭죽…… 난 이런 관심과 사랑을 한꺼번에 받은 경험이 없다보니 어떻게 보답해야 하나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행복했다! 그래서 나도 중간 중간 나보다 더 도움이 필요한 친구들에게 내가 받은 사랑을 나눠 주었다. ‘선물의 순환’을 배운 사람답게!!

 

 

출처: 경향신문 <한뼘양생> 2022.04.07

 

 

 

5달 동안의 긴 항암이 끝났다. 이제 수술이다! 수술을 준비할 때 제일 큰 고민은 ‘전절제냐? 부분절제냐?’다. 그러나 그것은 의사의 결정이고,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전절제인 경우에 복원을 하느냐 미복원으로 남느냐에 대한 문제였다. 의사는 처음부터 전절제를 얘기했고, 복원은 성형외과와 상담해야했다. 복원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모두 통증과 기간과 돈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나는 전이와 재발이 잘 되는 유방암이었기에 두려움이 컸다. 언제 재발되어 또 수술할지 모르는데 지금 예쁜 가슴을 가지려고 복원 수술하라니 말도 안돼! 내가 이 나이에 다시 결혼 할 것도 아니고, 가슴 하나는 없는 셈 치겠다, 아마조네스의 전사처럼 살겠다! 라고 주장했다. 조심스럽게 복원을 조언하는 이들의 말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복원을 권하는 사람들에게 반박할 미복원에 대한 자료만 인터넷으로 찾았다.

 

 

인생은 예상대로 진행되지 않는 법! 나는 선항암이 잘되었기에 수술 전 검사에서 암세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고 나왔다. 의사는 수술 전 날 활짝 웃으며 도전정신(?)을 가지고 부분절제를 해보자고 했다. 난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 못하고 전절제도 상관없다고 주장하다 남편에게 한마디 들었다.(의사의 마음을 못 읽는다고 ㅠㅠ) 그래서 부분절제로 방향을 틀었다. 예상보다 긴 수술시간이 들었다.(원래는 1시간 반 그러나 4시간으로) 나는 의사의 도전의식 덕분에 부분절제를 하였고, 그 근처에 있는 모든 근육과 조직들을 끌어 모아 원래 가슴처럼 복원이 되었다. (이건 무척 드문 일로 내가 엄청 운이 좋은 것이다!) 의사는 인턴들을 쭉 데리고 병실에 와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잘 봐! 내가 원래 꺼보다 더 잘 만들었지?” 만약 내가 전절제를 계속 주장했다면? 지금 무지 힘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성성의 상징 운운을 떠나서, 한쪽 가슴이 없으면 그 무게만큼 몸의 균형이 안 맞아 척추가 휜다. 그리고 어깨가 안쪽으로 말려들어 평생 통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나는 여러 사람의 의견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끝까지 고집부리지 않고 얼른 방향을 수정한 내가 기특했다!

 

 

 

 

 

일주일 넘는 입원기간에 누가 나를 간병할 것인가? 병원에 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요즘 남자 보호자들이 부쩍 늘었다. 아들의 부축을 받거나, 남편과 동행하는 환자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여자병실에서 간호하는 남자 보호자들은 환자들의 원망의 대상이 된다. 밤마다 코골이 때문에 잠을 못 잤다는 댓글이 아주 많았다. 간병인으로 남편을 데리고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끝에 통 크게 남편의 코를 위해(?) 1인실을 신청하기고 했다. 돈은 아깝지만 좋은 호텔에서 일주일 보냈다 셈 치자고 생각했다. 입원수속을 밟는데 1인실이 마감 되었단다 ㅠㅠ 내가 갈수 있는 곳은 이제 5인실 간호병동(보호자 출입금지)과 하룻밤 150만원인 VIP병동뿐이다. 남편이 갑자기 허세를 부리며 돈이 문제냐며 같이 VIP병동으로 가자고 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아까부터 웃고 있었다. 지혜로운 나는 일주일치 VIP병동 입원비를 내 통장에 넣어 달라고 하고, 쓸쓸하게 보호자가 갈 수 없는 5인실 간호병동으로 갔다. 이제부터 일주일 넘게 혼자 있어야 한다. 통장에 들어온 그 돈이 나의 두려움과 허전함을 달래줄 수 있을까? …… 충분히 달래주었다!

 

 

난 이전에도 수술을 두 번 했다. 아이를 낳을 때 수술실로 들어가는 침대에 누워 기도했다. 위험한 상황이 되면 아이를 먼저 구해 달라고! 그런데 이번에는 홀로 긴 시간 수술 대기실에 누워 있었다. 갑자기 내가 이전에 공부했던 루쉰의 소설 『아Q정전』이 생각났다. 형장에 끌려가던 ‘아Q’처럼 뭔 노래라도 하나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대 사랑 받는 난, 행복한 사람……’ 뜬금없이 이 노래가 생각났다. 항암 할 때의 모든 고통은 잊혔고 고마웠던 일들만 기억나는 순간이었다.

 

 

다음 번에는 방심하면 안 되는 <방사선 치료 이야기>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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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의 암 이야기는, 일리치약국 뉴스레터 <건강한달>에 2022년7월부터 6개월간 연재되었습니다.

이제 여기 홈페이지 <자기돌봄의 기술>에 Re-Play 합니다.

 

1편: "우리 엄마 아미래"  https://moontaknet.com/?page_id=14957&uid=38860&mod=document

2편: 항암'산'을 넘다 https://moontaknet.com/?page_id=14957&uid=38861&mod=document&pageid=1

3편: 수술이 가장 쉬었어요

4편: 방심하면 안 되는 방사선 치료 https://moontaknet.com/?page_id=14957&uid=38870&mod=document&pageid=1

5편: 돈 많이 든 '재활치료' https://moontaknet.com/?page_id=14957&uid=38871&mod=document&pageid=1

6편: 사람이 아주 겸손해질 때 https://moontaknet.com/?page_id=14957&uid=38872&mod=docu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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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어진의 현장분투기
나와 당신의 책임   10년 전,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쓰인 멋진 슬로건들을 생각하고 있자면, 만든 이를 찾아가 박수를 쳐 주고 싶어지곤 한다.전기를 소비하는 곳에는 책임이 있다. 전기를 생산하고 송전하는 곳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다. 그 책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슬로건이 있었다 .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또,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였던 송전탑 반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데에 기여했던 슬로건도 있다.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   누군가가 당사자이고, 누군가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규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에너지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말이다. 이 슬로건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운이 좋게도 끝없이 확장되는 사회 운동을 경험했다. 설령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밀양이 아니더라도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밀양은 졌다. 높이 100m짜리 송전탑은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다. 밭일을 할 때도, 병원을 가기 위해 마을 길을 걸을 때도, 캄캄한 밤 안방 창문에서도 쇳덩어리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낮 쇳덩어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저 철탑에는 핵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흐른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아도, 마주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송전탑에는 돈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을 공동체의 상처가 묻어 있다. 38만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사람을 짓밟았던 폭력의 상처, 함께 싸우다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 2014년, 2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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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어진
2024.05.10 | 조회 177
일상명상
덕밍 아웃, 그 후   지난 글에서 호기롭게 덕밍 아웃을 했지만 명상에 빠져든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던 것은 아니다. 명상에 빠진 것은 결과지 이유는 아니니까. 하여 명상이 처음부터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친구와 같다고 했지만 정작 누군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면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그냥 좋으니까 좋았다는 식의 동어 반복을 되풀이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언가에 꽂힐 때 그 이유를 다 알아서는 아닌 것 같다. 우연히 어떤 것에 마음이 불꽃처럼 호응할 때 그저 속절없이 빠져드는 게 아닐까. 처음엔 빠져든 이유를 잘 모르는 터라 경우에 따라 ‘입덕 부정기’를 겪기도 하면서 말이다. 대개는 빠져든 다음에야 그 이유를, 스스로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발견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이유 덕분에 다시 그 대상을 더 깊이 애정하게 되는, 다이내믹한 순환이야말로 덕질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지.     나도 명상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른바 덕질의 묘미를 맛보고 있다. 명상이 뭔지도 모르고 매달리듯 빠져들었다가 이제야 차츰 명상이 뭔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명상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들에, 그렇거나 많이 휘둘리고 있는 줄 몰랐다. 그 때문에 명상을 통해 처음 경험했던 침묵과 평온이 그토록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는지도. 만약 명상이 아니었다면 일 년 365일, 꺼지지 않는 텔레비전처럼 소란스런 정신적 수다 때문에 괴롭다는 걸 영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그 순전한 무지에서 벗어난 순간, 마치 세상의 비밀을 다...
덕밍 아웃, 그 후   지난 글에서 호기롭게 덕밍 아웃을 했지만 명상에 빠져든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던 것은 아니다. 명상에 빠진 것은 결과지 이유는 아니니까. 하여 명상이 처음부터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친구와 같다고 했지만 정작 누군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면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그냥 좋으니까 좋았다는 식의 동어 반복을 되풀이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언가에 꽂힐 때 그 이유를 다 알아서는 아닌 것 같다. 우연히 어떤 것에 마음이 불꽃처럼 호응할 때 그저 속절없이 빠져드는 게 아닐까. 처음엔 빠져든 이유를 잘 모르는 터라 경우에 따라 ‘입덕 부정기’를 겪기도 하면서 말이다. 대개는 빠져든 다음에야 그 이유를, 스스로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발견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이유 덕분에 다시 그 대상을 더 깊이 애정하게 되는, 다이내믹한 순환이야말로 덕질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지.     나도 명상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른바 덕질의 묘미를 맛보고 있다. 명상이 뭔지도 모르고 매달리듯 빠져들었다가 이제야 차츰 명상이 뭔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명상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들에, 그렇거나 많이 휘둘리고 있는 줄 몰랐다. 그 때문에 명상을 통해 처음 경험했던 침묵과 평온이 그토록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는지도. 만약 명상이 아니었다면 일 년 365일, 꺼지지 않는 텔레비전처럼 소란스런 정신적 수다 때문에 괴롭다는 걸 영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그 순전한 무지에서 벗어난 순간, 마치 세상의 비밀을 다...
오영
2024.05.09 | 조회 164
K장녀_돌봄을 말하다
          언젠가 엄마의 구술 생애사를 써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엄마의 삶을 기록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엄마의 삶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녀딸이 인터뷰를 시작하긴 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진행을 못해서 좀 아쉽다. 이렇게 빨리 엄마가 기억을 잃고 이야기를 못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산업화세대 워킹맘   10년 전쯤 아버지가 대장암 재발로 병원에 오래 입원해 계실 때 엄마는 병원간호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혈관이 잘 안 나오는 아버지에게 혈관 주사를 놓으려면 꽤나 힘이 들었는데 엄마가 곧잘 혈관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1935년생인 엄마는 간호사이자 조산사였다. 엄마가 간호사 면허번호를 말하면(0000번 대) 간호사들(면허번호 000000번 대)은 깜짝 놀라며 ‘선배님’이라 불렀다. 엄마는 은근히 그걸 즐기는 듯했다.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하던 엄마는 결혼하면서 그만두었고, 시골학교 교사인 아빠의 고향에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걸 도왔다고 했다.   엄마는 의대에 가고 싶었다. 중학생 때 친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들어오셨는데 엄마가 의대 가는 걸 반대해서 간호학교에 갔다. 동생인 삼촌 두 분은 의사다. 엄마 세대, 즉 산업화 세대에 많은 딸들은 아들들을 위해서 진학을 포기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남동생을 위해 희생한 누나들. 엄마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딸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의대에 갈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 또래는 대부분 형제가 4~5명 정도 된다. 유독 우리집은 형제가 오빠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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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2024.05.07 | 조회 310
기린의 걷다보면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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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4.05.06 | 조회 180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 2편           동물의 의례   초코는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고 햇볕을 쬐다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왼쪽 뒷다리는 굽어 있었고 굽은 다리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는 다친 다리를 허공에 들고 걸었다.   초코는 골절된 다리로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초코를 치료하기 위해 포획틀을 설치했지만, 초코 대신 엉뚱한 고양이가 들어왔다. 봉봉오리님은 포획틀에 갖힌 초코의 단짝 고양이 카레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속 터지는 희극'이라고 했다. 『지구에 살 자격』에는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재개발구역에서 돌봄하는 것이 무조건 슬플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마냥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재개발구역이 조금 이상한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다. 나는 그곳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를 돌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내염을 오래 앓아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카레의 곁에는 늘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초코가 있다. 둘은 추운 날 하나의 겨울 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몸이 관통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던 8개월의 오잉이는, 피를 흘리며 몸을 숨겼던 일주일 간의 시간 동안, 혀가 닿지 않는 그의 상처를 핥아준 형제들이 있었다. 『지구에 살 자격』, 145쪽   밥그릇...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 2편           동물의 의례   초코는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고 햇볕을 쬐다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왼쪽 뒷다리는 굽어 있었고 굽은 다리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는 다친 다리를 허공에 들고 걸었다.   초코는 골절된 다리로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초코를 치료하기 위해 포획틀을 설치했지만, 초코 대신 엉뚱한 고양이가 들어왔다. 봉봉오리님은 포획틀에 갖힌 초코의 단짝 고양이 카레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속 터지는 희극'이라고 했다. 『지구에 살 자격』에는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재개발구역에서 돌봄하는 것이 무조건 슬플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마냥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재개발구역이 조금 이상한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다. 나는 그곳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를 돌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내염을 오래 앓아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카레의 곁에는 늘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초코가 있다. 둘은 추운 날 하나의 겨울 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몸이 관통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던 8개월의 오잉이는, 피를 흘리며 몸을 숨겼던 일주일 간의 시간 동안, 혀가 닿지 않는 그의 상처를 핥아준 형제들이 있었다. 『지구에 살 자격』, 145쪽   밥그릇...
경덕
2024.05.01 | 조회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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