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좋은 이별 나쁜 이별

현민
2023-04-16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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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좋은 이별 나쁜 이별

 

 

나의 집은 오래된 3층짜리 주택이다. 우리가 살지 않으면 허물어 새집을 지어야만 하는, 12개의 방과 12명의 사람들이 있는 집. 5년 전 레아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이 집을 찾고 사람을 모아 셰어하우스를 시작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이 필요에 의해 이 곳에 모이고 떠나가 지금 내가 이곳에 산다. 각자 사느라 바쁘면서도 우리는 같이 사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서로의 시간들을 경험한다.

내가 이사 온 이후로 집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 집을 허물고 새집을 지어 비싸게 세놓으려 했던 집주인이 치솟는 물가 탓에 집을 유지하기로 결정했고, 당분간 우리 12명은 집을 구할 필요가 없을 만큼의 넉넉한 기간을 재계약했다. 그리고 가장 오래 살았던 미키와 캐시가 이사를 가 가일과 레오가 들어왔고, 나와 앞, 옆방을 마주하는 쿠쉬와 필리페는 본국으로 장기 휴가를 가 그 기간 동안의 단기세입자 다니와 발렌티나가 새로 들어왔다. 그리고 A가 쫓겨났다.

 

최근 사람이 너무 많이 바뀌어서 내가 임시로 만들었던 우체통 이름표

 

A는 영화를 공부한다고 했다. 내가 이사를 온 직후, 한동안은 그를 볼 수 없었다. 다른 애들에게 A가 어디에 갔냐고 물었는데, 그의 개인적 문제 때문에 잠시 집을 비웠다고 했다. 몇일 뒤, 부엌 문을 열자 A가 있었다. 반가웠던 나는 활기찬 인사를 건네고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이 집의 또 다른 플랫메이트인 B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셋이 창가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나는 A의 눈이 유독 빨갛다고 생각했다. 차를 잡은 손이 덜덜 떨린다는 것도. 그러다 B가 나에게 A와 둘이 잠시 이야기해도 괜찮냐고 했다. 그러라고 한 뒤, 담배를 피면서 책을 읽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A가 소리를 지르며 들고 있던 잔을 바닥에 던졌다.

그때 알게 되었다. A가 B에게 관심을 보였고, B가 거절을 한 뒤로부터 A가 폭력적으로 굴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래서 A가 집을 비웠었다는 사실을.

 

A는 위태롭게 굴었다. 방에서 노래를 크게 틀었고, 밥을 먹을 때는 술이 함께였다. 잠을 안 잤고, 눈이 새빨개진 채로 부엌에서 대마초를 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그를 만날 때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말을 걸어 밥을 먹었는지, 잠은 잘 자는지에 대해 물었다. 가해자한테 잘해주는 기분이 들어서 기분이 이상했지만, 네가 어서 괜찮아져서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최선이었다.

하지만 A에 대한 또 다른 사실은 그가 항상 상냥했다는 것이다. 내가 터키 전통방식으로 차를 내리는 걸 신기해하자 차를 대접해준다거나, 자기가 만든 음식을 나누어주었다. 어느 날은 이 도시에서 억울하게 사고를 당해 죽은 사고 피해자를 추모하는 행사에 간다고 했고, 어느 날은 자신의 트렌스젠더 친구가 최근에 태국에서 성전환 수술을 마치고 돌아와 그 축하파티에 간다고 했다. 진심으로 그녀의 성전환을 기뻐하던 A의 얼굴이 나를 자꾸 어렵게 만들었다. 만약 내가 컵 던지는 장면을 보지 못했다면 덜컥 그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조건을 A는 잔뜩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느꼈다. 아직도 내가 얼마나 사람을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싶어하는지.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사는 일은 언제나 생과 사가 엎치락뒤치락했고, 모든 사람에게는 좋은 면과 나쁜 면이 뒤섞여 있다는 것을. 세상을 흑과 백으로 이해하는 게 더 이상은 부족하다는 걸 알면서도, 어느 날은 그렇게 생각하며 사는 게 쉬우니까 그것에 기대 살고 싶고 그랬다. 어떤 상황을 기꺼이 이해하기엔 내가 가진 언어가 너무 부족했다.

 

어느 날 1층에서 빨래를 널고 있었는데 3층에서 B가 소리를 질렀다. 올라가보니 B와 A가 몸싸움을 하고 있었고, 3층에 사는 다른 룸메이트들이 나와 둘을 말리고 있었다. B는 소리를 듣고 올라온 애들에게 방금 A가 내 방에 들어와 옷장과 침대를 뒤집었다고, 더 이상은 못 참겠다고 했다. 우리는 A에게 당장 나가달라고, 가능한 빨리 이사해달라고 했다. A는 곧 바로 집을 나갔다. 그리고 우리는 부엌에 모여 담배를 피며 B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죄책감이 느껴졌다. A가 이렇게 군지 몇 달이나 되었는데, 우린 결국 최악의 상황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 왔던 거 아닐까 하면서. 생각해보면 그게 최선이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게 정말 최선이었냐는 물음이 끊이질 않았다. 나는 조금 멍해져 담배를 말았다. 옆에서 담배를 피우던 애들은 농담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있는 남자애들 차례로 나가면 여자애들만 받아서 여자 셰어하우스로 만들자고. 다들 웃었다. 나도 웃었다. 웃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밤이었다. 살면 살수록 유머가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는 걸,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을 웃어넘기며 사는 것이 가장 최선이라는 걸 알아가게 된다. 그날 밤 나는 A의 불행한 가정사와 몰랐던 이야기를 조금 들었다.

 

A가 떠난 주, 집에 가장 오래 살았던 캐시가 떠났다. 캐시는 A가 폭력적인 행동을 보일 때마다 그와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그의 멘탈 클리닉 예약을 잡아주고, 당장 경찰을 부르자던 다른 플랫메이트들을 진정시키고 설득했던 사람이다. 그는 베를린으로 떠난다고 했다. 그의 이별파티에는 많은 사람들이 왔다.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친구와 노래를 부르는 친구가 그녀를 위해 노래를 시작했다. 그 장면에서 나는 눈물이 좀 날 것 같았다.

 

I'll follow you into the park. Through the jungle, through the dark. Girl, I've never loved one like you. Moats and boats, and waterfalls. Alleyways, and payphone calls. I been everywhere with you. Laugh until we think we'll die. Barefoot on a summer night. Never could be sweeter than with you. Oh, home, let me come home. Home is whenever I'm alone with you.

 

Home is whenever I'm alone with you 부분을 부르며 캐시를 안아주는 캐시의 친구

 

널 따라 공원에도 정글에도 어둠에도 갈 수 있다고. 우리가 죽을 것 같을 때까지 웃자고. 내가 너와 있는 모든 곳이 집이라고 하는 이 가사를 들으며 내가 캐시라면 떠나는 일은 무섭겠지만 종종 두렵지 않은 기분이 들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날 밤 울어도 좋을 것 같았던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A가 떠났던 밤이 떠올랐다. 그 밤은 웃지 않으면 너무 괴로울 것 같았는데, 캐시의 밤에는 애쓰지 않아도 웃을 수 있었고, 눈물도 조금 흘렀고, 춤을 추며 노래도 불렀다.

A에게는 내가 모르는 모습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의 삶 어느 순간에는 그도 누군가를 웃게하고 행복하게 만들었을 테다. 하지만 나는 기꺼이 그가 나빴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를 아프게 했던 일들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 기꺼이 그것이 아프고, 슬프고, 나빴다고 말해야만 하는 순간들이 나에게는 있다.

 

파티가 끝난 뒤, 캐시가 떠나고 A가 이사 간 뒤에도 B는 한동안 아팠다. B는 A에게 세게 잡혀 파래진 손목을 보여주었다. 그 애는 밥도 잘 먹지 않았고, 방문을 잠그지 않으면 잠을 못 잤다. 담배를 피우러 부엌에 내려올 때마다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다. 화가 나서 괴로운 사람의 얼굴이었다.

결국 사건 이후의 고통은 피해자의 몫인 걸까? 나는 맞다고도 아니라고도 대답하지 않을 것 같다. 그저 매일 매일 그 애의 안부를 묻고, 끼니를 걱정하고, 가끔은 술을 마시고 함께 취해 춤을 추러 가며 그 애가 자기도 모르는 새에 건강해지길 바란다. 그리고 다시 보통의 날을 보내며 그 애가 그때 얼마나 용감했는지를 종종 떠올릴 것이다. A가 떠난 밤, 그래도 걔를 몇 대 때릴 수 있어서 너무 속 시원했다고, 너희가 그게 과했다고 말한다면 집을 나가버릴 거라고, 하지만 우리 모두에게 이런 일이 처음이었으니 너희를 미워하지 않을 거라 말했던 B의 마음들을.

서로의 시간을 겪으며 여기가 내 집인가 싶은 날들이 늘어간다.

 

캐시의 이별파티에서 함께 불렀던 노래

댓글 7
  • 2023-04-16 15:46

    12인 정원의 셰어하우스에서 울고 웃고 부딫히고 말리고 포옹하고 춤을 추고 담배를 피우는 장면들에서 어떤 다국적 자매애? 우정? 같은 것이 느껴졌어요! 그리고 최근에 고은 지원의 <함께 살 수 있을까?> 북토크 겸 인터뷰 글쓰기 모임 자리에서 현민의 이야기가 너무 좋았다는 독자 피드백도 있었답니다ㅎㅎ 앞으로의 이야기도 기대할게요~~

  • 2023-04-16 18:26

    "우리를 아프게 했던 일들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 기꺼이 그것이 아프고, 슬프고, 나빴다고 말해야만 하는 순간들이 나에게는 있다." 이 문장이 좋네. 내가 기억해야 할 말이기도 한 것 같고. 현민의 다음 글을 기다림......

  • 2023-04-17 08:42

    다양한 사람들과의 부대낌 속에서 현민의 삶이 깊어가네요
    부럽기도 하고 ㅎ
    이렇게나마 소식을 접하니 좋아요
    다음글로 또 만나요~

  • 2023-04-17 09:11

    <살면 살수록 유머가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는 걸>
    저는 이 말이 마음에 들어오네요.
    온 하루의 고단이 늦은 저녁 한 줌의 유머로 풀어지곤 하죠.
    살아간다는 건 그런거 같네요~
    어바웃 식물 세미나후에 수목원에 다같이 놀러갔던 날에
    첨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했던 현민님~ 참 반갑습니다.

  • 2023-04-17 09:23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사는 일은 언제나 생과 사가 엎치락뒤치락했고, 모든 사람에게는 좋은 면과 나쁜 면이 뒤섞여 있다는 것을. 세상을 흑과 백으로 이해하는 게 더 이상은 부족하다는 걸 알면서도, 어느 날은 그렇게 생각하며 사는 게 쉬우니까 그것에 기대 살고 싶고 그랬다." A 뿐만 아니라 삶의 많은 일들이 좋고 나쁨이 얽혀있는 것 같아요. 그래도 그 모든 것이 뭉뚱그려지지 않고, 한 올 한 올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으로 나눠서 살펴봐서 더 좋아요. 현민의 시선에서 함께 고민하고 생각할 수 있어서 좋군요!! 다음 글을 기대하게 되네요~~~

  • 2023-04-21 15:12

    내가 현민이 나이였을 때 나는 어땠지?
    나는 세상을 흑백의 이분법으로 보았던 것 같고, 아마 이렇게 섬세하지 않았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다면 지금은? 하하하 그냥 웃습니다.^^

  • 2023-04-21 18:16

    아고 … 많은 일들이 생기고 지나가고 있네요.. 현민의 독일에서 일상이, 세월이 쌓이네요. 그리 단순하지 않은… 다음 글 기다릴께요!

아스퍼거는 귀여워
  그 날은 평범한 오후였다. 감자가 한 50일쯤이었을까. 분유 냄새가 폴폴 나는 뽀시래기 시절, 남편은 출근하고 나는 감자랑 하루 종일 붙어있으면서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거실 소파 위에 앉아 다리 위에 아이를 끼워놓고는,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배부른 아이는 나른하게 누워있고, 모처럼의 평화로운 분위기. 그때 감자는 내 눈을 정확하게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등줄기부터 짜르르 행복감이 느껴졌다. “아…. 이게 행복이구나” 감자를 낳고 밤낮으로 잠도 못 자고, 회복이 늦어서 제대로 앉지도 서지도 못했던 나날들이었다. 내 배에서 나왔지만, 처음에는 실감이 안 났고, 나중에는 정신이 없었고, 씻지도 먹지도 못해 사랑스러움을 느낄 새도 없었다. 하지만 그 날 처음 눈이 서로 딱 마주친 그때. 나는 속절없이 사랑에 빠졌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존재라니. 그날부터 감자 입덕기가 시작되었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생각한다. “호옥시... 우리 아이가 천재?” 누구나 에겐 판단력을 상실하고, 자신의 아이만 보이는 시절이 있었더랬다. 첫 뒤집기가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다 싶다. 태어나서 한 줌밖에 안 되어 보이는 아이가, 조금씩 자라고, 꼬물거리고, 울고, 웃었다. 그때는 손가락만 쥐었다 펴도 대단해 보인다. 그런 아이가 뒤집기라니!! 혼자서 뒤집다니!! 놀랄 노자가 아닐 수가 없다. “우리가 아이가 뒤집었어요.” 동네방네 플래카드라도 붙이고 싶은 심정.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1~2개월이 뭐라고, 인터넷에는 질문들이 가득하다. ‘6개월이 지났는데…. 우리 아이 왜 뒤집기를 안 할까요’부터 ‘6개월인데 벌써 일어나 앉았어요’까지....
  그 날은 평범한 오후였다. 감자가 한 50일쯤이었을까. 분유 냄새가 폴폴 나는 뽀시래기 시절, 남편은 출근하고 나는 감자랑 하루 종일 붙어있으면서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거실 소파 위에 앉아 다리 위에 아이를 끼워놓고는,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배부른 아이는 나른하게 누워있고, 모처럼의 평화로운 분위기. 그때 감자는 내 눈을 정확하게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등줄기부터 짜르르 행복감이 느껴졌다. “아…. 이게 행복이구나” 감자를 낳고 밤낮으로 잠도 못 자고, 회복이 늦어서 제대로 앉지도 서지도 못했던 나날들이었다. 내 배에서 나왔지만, 처음에는 실감이 안 났고, 나중에는 정신이 없었고, 씻지도 먹지도 못해 사랑스러움을 느낄 새도 없었다. 하지만 그 날 처음 눈이 서로 딱 마주친 그때. 나는 속절없이 사랑에 빠졌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존재라니. 그날부터 감자 입덕기가 시작되었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생각한다. “호옥시... 우리 아이가 천재?” 누구나 에겐 판단력을 상실하고, 자신의 아이만 보이는 시절이 있었더랬다. 첫 뒤집기가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다 싶다. 태어나서 한 줌밖에 안 되어 보이는 아이가, 조금씩 자라고, 꼬물거리고, 울고, 웃었다. 그때는 손가락만 쥐었다 펴도 대단해 보인다. 그런 아이가 뒤집기라니!! 혼자서 뒤집다니!! 놀랄 노자가 아닐 수가 없다. “우리가 아이가 뒤집었어요.” 동네방네 플래카드라도 붙이고 싶은 심정.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1~2개월이 뭐라고, 인터넷에는 질문들이 가득하다. ‘6개월이 지났는데…. 우리 아이 왜 뒤집기를 안 할까요’부터 ‘6개월인데 벌써 일어나 앉았어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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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5 | 조회 44
가마솥의 59년생 서른살
     동창회 모임은 딱 한군데 나간다. 고등학교 3학년 반모임이다. 사회에 첫발을 디딜 즈음에 시작한 모임이니 얼추 한 사십년은 되었다. 모이면 하등 의미없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눈다. 학교 다닐 때 성적, 물론 충격적인 점수를 받았던 수학점수 등으로 이야기를 출발해서 세계 평화를 논하고 손주들 자라는 이야기가 나오면 마무리 시간이 된다. 요즘은 내게 은퇴후 생활에 대해서 묻는 친구들이 더러 있다. 10여년 전 고기리 우리집에 놀러 온 친구들은 내가 단독주택에서 살고 있고 또 평창 집을 가꾸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은퇴를 앞두었거나 은퇴한 지 서너 해가 되었는데, 미리 생각했던 전원주택 혹은 텃밭정도 가꾸는 시골살이를 이런 저런 이유로 실행하지 못하고 꿈만 꾸고 있는 녀석들이다. 한 녀석이 대뜸 목소리 톤을 높인다. “니들, 농사 지어봤냐? 니들처럼 시골 출신이면서 공부 잘 해서 손에 흙 묻히지 않은 놈들이 꼭 귀농한다고 설치더라. 난 농사라면 징글징글해서 때려 죽여도 안한다. 그 돈으로 그냥 사먹는 게 훨씬 싸다!” 녀석 참, 성질 급한 것은 여전하다. 내가 겪은 경험을 그에게 이야기했다.        내가 회사 대리 시절에 직속 과장이었던 선배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당시 사장은 좀 괴팍한 사람이었는데, 학벌도 좋고 인품도 바른 그 선배를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심하게 대했다. 임원회의 때마다 업무 성과를 핑계로 그 선배에게 이야기하는 톤은 옆자리의 우리들도 견디기 어려운 모욕적인 언사를 쏟아 내곤 하였다. 급기야 그 선배가 원형 탈모 증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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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2024.05.25 | 조회 107
현민의 독국유학기
    WG투어 터키편       인터네셔널 WG(독일에서는 셰어하우스를 WG라고 부른다. Wohngemeinschaft의 줄임말.)에 살다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WG 투어를 하자. 취지는 각자의 나라에 여행을 가자는 것이다. 우리 집은 12명이 함께 사는 특이한 경우라, 대화 때마다 등장하는 각 나라의 정치, 문화, 경제 상황을 다양하게 들을 수 있다. 독일, 터키, 인도, 헝가리, 코스타리카, 이탈리아, 미국 그리고 한국. 가봐야 할 곳이 많은데, 첫 번째로 우리는 터키에 가기로 했다.   독일 사람들은 새벽까지 파티를 한 후 해장 음식으로 되너를 먹는다. 터키 케밥은 독일 길거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데, 그만큼 터키 사람들은 80년대 이후 독일에 넘어와 독일 경제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터키는 유일하게 아시아와 유럽 동시에 면이 맞닿아 있는 국가다. 종교나 역사, 문화 면에서 유럽의 국가들과는 다른 갈래를 가지고 있지만, 유럽 곳곳에 퍼져있는 터키계 노동자들로 인해 굉장히 익숙하다. 2시간 비행이면 도착하고, 독일보다는 싼 물가이기 때문에 비교적 여행하기 만만하다. 나의 플랫 메이트 베이자는 터키의 수도 앙카라 출신으로 독일의 은행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그 애의 주도로 우리는 이스탄불로 향했다.   첫날 밤 공항에서는 호주인 아셔가 여행 비자가 없는 걸 입국장에서 알아버려 그 애를 한참 기다려야 했다. 한국에서 온 나, EU시민권이 있는 니키와 T 그리고 터키인인 베이자는 특별한 비자가 없이도 통과할 수 있었다. 아샤는 공항에서 50유로를 내 비자를 받고 한참 뒤에야 나왔다. 그게 모자랐는지 공항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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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민
2024.05.24 | 조회 98
윤경이는 마을활동가
      지난 4월 13일과 14일 낮 최고 기온이 27.3℃와 29.4℃였다. 아직은 이른 봄인데, 기온은 한여름이다. 작년보다도 더 빠르게 더워지는 것 같고, 무엇보다 햇빛의 강도가 작년과 또 다르게 더 강렬했다. (올해는 새로운 패턴이 생긴 것도 같다. 너무 일찍 더워졌다가 또 급하게 온도가 내려가 평년보다 더 쌀쌀해진 느낌이다) 그런 햇빛을 받으며 걷고 있는 나는 겁이 났다. 정말 지구가 불타오르는 것 아닐까 해서다.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아이들이 엄청 더워서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인다. 괜스레 미안해지고 안쓰러웠다. 기후변화가 시작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고, 이제 기후위기라고 한다. 이런 지구를 물려주는 어른으로서 나는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번 어린이날 행사에 참여하며 느낀 점을 정리하며 또다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본다.         친구야 노~올자     2024년 5월 5일 제102회 어린이날, 우리 동네에서는 제17회 금천어린이큰잔치 ‘친구야 노~올자’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는 2007년부터 시작된 마을 행사이다. 우리구는 1995년 구로구에서 분구된 후 ‘금천구’라는 정체성을 찾는데 시간이 좀 걸린 것 같다. 그래서 어린이날 행사도 한동안 없었다. 우리 동네 어린이들은 신도림 가로공원에서 열리는 어린이날 행사까지 다녀와야 했단다. 그런 상황을 보고 ‘나서는 어른들’이 있었다. 우리 동네 어린이들도 우리 동네에서 놀게 하자고. 그런 어른들의 제안으로 2007년 처음 금천구에도 어린이날 행사가 생긴 것이다. 전교조, 노동조합, 청년회, 진보정당 등 지역의 여러 단체가 첫 행사를 준비했다. 처음 열린 행사에서는 이주노동자와...
      지난 4월 13일과 14일 낮 최고 기온이 27.3℃와 29.4℃였다. 아직은 이른 봄인데, 기온은 한여름이다. 작년보다도 더 빠르게 더워지는 것 같고, 무엇보다 햇빛의 강도가 작년과 또 다르게 더 강렬했다. (올해는 새로운 패턴이 생긴 것도 같다. 너무 일찍 더워졌다가 또 급하게 온도가 내려가 평년보다 더 쌀쌀해진 느낌이다) 그런 햇빛을 받으며 걷고 있는 나는 겁이 났다. 정말 지구가 불타오르는 것 아닐까 해서다.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아이들이 엄청 더워서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인다. 괜스레 미안해지고 안쓰러웠다. 기후변화가 시작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고, 이제 기후위기라고 한다. 이런 지구를 물려주는 어른으로서 나는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번 어린이날 행사에 참여하며 느낀 점을 정리하며 또다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본다.         친구야 노~올자     2024년 5월 5일 제102회 어린이날, 우리 동네에서는 제17회 금천어린이큰잔치 ‘친구야 노~올자’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는 2007년부터 시작된 마을 행사이다. 우리구는 1995년 구로구에서 분구된 후 ‘금천구’라는 정체성을 찾는데 시간이 좀 걸린 것 같다. 그래서 어린이날 행사도 한동안 없었다. 우리 동네 어린이들은 신도림 가로공원에서 열리는 어린이날 행사까지 다녀와야 했단다. 그런 상황을 보고 ‘나서는 어른들’이 있었다. 우리 동네 어린이들도 우리 동네에서 놀게 하자고. 그런 어른들의 제안으로 2007년 처음 금천구에도 어린이날 행사가 생긴 것이다. 전교조, 노동조합, 청년회, 진보정당 등 지역의 여러 단체가 첫 행사를 준비했다. 처음 열린 행사에서는 이주노동자와...
김윤경~단순삶
2024.05.20 | 조회 237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나와 당신의 책임   10년 전,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쓰인 멋진 슬로건들을 생각하고 있자면, 만든 이를 찾아가 박수를 쳐 주고 싶어지곤 한다.전기를 소비하는 곳에는 책임이 있다. 전기를 생산하고 송전하는 곳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다. 그 책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슬로건이 있었다 .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또,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였던 송전탑 반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데에 기여했던 슬로건도 있다.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   누군가가 당사자이고, 누군가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규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에너지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말이다. 이 슬로건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운이 좋게도 끝없이 확장되는 사회 운동을 경험했다. 설령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밀양이 아니더라도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밀양은 졌다. 높이 100m짜리 송전탑은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다. 밭일을 할 때도, 병원을 가기 위해 마을 길을 걸을 때도, 캄캄한 밤 안방 창문에서도 쇳덩어리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낮 쇳덩어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저 철탑에는 핵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흐른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아도, 마주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송전탑에는 돈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을 공동체의 상처가 묻어 있다. 38만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사람을 짓밟았던 폭력의 상처, 함께 싸우다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 2014년, 2차...
나와 당신의 책임   10년 전,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쓰인 멋진 슬로건들을 생각하고 있자면, 만든 이를 찾아가 박수를 쳐 주고 싶어지곤 한다.전기를 소비하는 곳에는 책임이 있다. 전기를 생산하고 송전하는 곳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다. 그 책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슬로건이 있었다 .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또,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였던 송전탑 반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데에 기여했던 슬로건도 있다.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   누군가가 당사자이고, 누군가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규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에너지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말이다. 이 슬로건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운이 좋게도 끝없이 확장되는 사회 운동을 경험했다. 설령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밀양이 아니더라도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밀양은 졌다. 높이 100m짜리 송전탑은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다. 밭일을 할 때도, 병원을 가기 위해 마을 길을 걸을 때도, 캄캄한 밤 안방 창문에서도 쇳덩어리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낮 쇳덩어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저 철탑에는 핵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흐른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아도, 마주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송전탑에는 돈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을 공동체의 상처가 묻어 있다. 38만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사람을 짓밟았던 폭력의 상처, 함께 싸우다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 2014년, 2차...
남어진
2024.05.10 | 조회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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