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차 후기 <랭스로 되돌아가다>_3-5부

노을
2023-07-01 05:51
230

   7월 1일이다. 몇 주 전부터 서울에서 열리는 퀴어퍼레이드 소식을 보고 있다. ‘피어나라 퀴어나라’라는 이름으로 시작되기 전까지 퍼레이드 장소로 서울광장을 쓸 수 없다는 통보로 우여곡절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서울광장을 못쓰게 하는 처사에 굴하지 않고 광장에서도 집회가, 을지로에서는 퍼레이드와 축제를 벌인다.  축제에 참석할 계획으로 있었던 차에 마지막에 함께 나눴던 수치심과 자긍심에 대한 생각을 수업 이후에도 틈틈이 하게 되었다.

 

   “우리에 앞서, 낙인 찍힌 정체성이 있다. 우리는 그 속으로 들어가 거기에 신체를 부여하며, 그것과 함께 어떤 식으로든 세상을 헤쳐나가야 한다. (중략) 나는 내 사회적 환경과 나 사이에 만들어진-내가 애써 정초한-거리,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나의 자기-창조가 모두 내가 되어가고 있던 존재(즉 동성애자)를 맞이하기 위해 창안한 하나의 방식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긍심을 갖는 일의 어려움, 이 후에 나눈 문장들. 그 중 ‘나는 모욕의 산물이며, 수치심의 아들이다’ 그리고는 전해지는 떨리는 목소리, 빨개지는 눈시울, 쿨렁거렸던 마음. 관련된 소절들을 같이 나누고, 경험을 나누기도 했는데 나에게는 그 ‘자긍심’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일지를 다시 곱씹는 계기가 되었다. 수치심이 자긍심으로 변형하는 과정의 첫 단계는 ‘사회로부터 낙인 찍힌 (먼저의) 정체성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이 말은 과거의 흔적을, 고통을, 모욕을, 수치를 직면하는 일임을 말할 거다. 자긍심 이전에 ‘자기 고통’의 자리를 먼저 직면해야 한다는 점이 자긍심으로의 변모를 어렵게 하겠다고 느낀다. 

 

   십 여년 전 게이프라이드축제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성 정체성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며 행진했던 사람들 틈에서 같이 협력의 몸짓과 환호를 내질렀을 때의 기쁨의 순간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다시 나의 현실로 돌아왔을 때를 떠올려보자. 나는 일상의 성적 모욕을 마주할 때에 그 성적 모욕에 대한 반응(반격)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않는다. 침묵으로 말하지 않다가 어떤 기억이 신체 감각에 박히는 듯 모르게 살다가 어느 날 몸의 반응으로 기억을 소환하기도 하고, 그런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기도 한다. 어떤 모욕 앞에서 자신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 실제의 모습이다. 그렇게 축제에서의 ‘나’와 실제의 ‘나’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저자에게 낙인 찍힌 자기정체성을 다시 주조하는 과정은 ‘수치전’을 쓰는 일이었다. 수치를 계보학적으로 분석, 재해석을 하는 일이다. 수치심을 떨쳐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또, 그렇게 될 수도 없는 것이 사회적 조건이다. 다만, 해석하는 능력을 기르는 끊임없는 자기 수행의 과정 그 자체가 목적이다. 위의 문장에 따르면, 낙인 찍힌 정체성에 들어가 신체를 부여한다는 말은 해석한다는 것이 신체적 작용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3부에서 저자는 새로운 정치적 소속감과 정치적 주체의 구축을 위한 예시로서 집렬성체적 집단의 투표인구가 사회의 다른 분파와 재조직되는 과정으로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유의미하게 보았다. 예컨대 파업 혹은 동원. 저자는 그러한 과정에서 ‘자기가 타자와 맺는 또 다른 관계, 세계에 대한 또 다른 시선, 세상사에 대한 또 다른 담론’을 만들게 될 것이라 했다. 새로운 해석의 시작은 타자와 내가 비로소 만나 관계 맺는 일, 다른 시선을 체험하는 일, 다른 세계를 보고 대화 나누는 신체적 경험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혐오와 수치를 낳는 사회 정상성의 규범들을 일상에서 예리하게 포착하여 능동적으로 해석하고 새로운 담론을 만드는 정치적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일까? 스피노자가 언급했던 외부의 모욕에 포획되는 수동적 주체와 새로운 해석에 의해 정상성의 기준을 질문하며 도달하는 새로운 존재로서의 능동적 주체에 대한 쌤의 내용이 와닿았고, 더 궁금해지기도 했다. 

 

   우리는 결코 모욕과 수치심에서 쉽사리 해방될 수 없다. 상처를 입히는 욕설의 작용, 그것이 남기는 과거의 흔적들을 직면하고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의 변형, 자기 정체성의 주조, 재발명이 가능하다. 어느 한 순간에 탁 이루어지고,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닌,  느리고 인내가 필요한 무한정의 (지적, 정신적, 신체적) 자기 수련.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한 것을 가지고서 우리가 스스로 하는 것이다.’

 

  이런 저런 나의 생각을 적어보기는 했지만, 수치전을 쓰는 것과 같은 자기 작업의 수련 과정을 거치기 위해 낙인된 정체성을 발견하고, 고통을 직면하며, ‘되어가는 존재’가 되기 위한 신체적, 정신적, 지석인 노력의 과정은 얼마나 고달프고, 어려울까. 글을 쓰는 과정 그 자체, 자기 기술지와 같은 글을 쓴다는 것의 어려움을 어떻게 글로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세워둔 존재 원칙은 얼마나 고독한 일이었던가. <에필로그>에 저자는 <랭스로 되돌아가다>를 다 쓰기 전에 일부러 <변경지방>을 읽지 않고, 다 쓴 후에 읽었다고 했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애도의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던 저자는 책을 읽고 난 후 슬픔과 회한도 내보인다. 사회폭력이 아버지를 그리고 자신을 이기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으면 좋았겠다는 말로 맺는다. 

 

  이전의 낙인된 정체성/모욕과 수치를 마주하며 계보학적으로 분석하는 글쓰기의 수련 과정. 자기 기술지를 통한 정치적/능동적 주체 되기. 타인과의 관계맺음, 세계에 대한 다른 시선과 담론을 만드는 과정. 그렇게 해석하는 능력을 키워 나가는, '되어가는 존재'에 대해서 여러모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는 수업이었다. 

 

댓글 5
  • 2023-07-02 18:29

    샘, 멋진 후기네요.
    그리고 제가 어제 에세이데이여서 퀴퍼에 가지는 못했지만 (사실 퀴퍼까지 참석하진 않아요. 체력의 한계로..ㅋㅋ) 퀴퍼주간엔 꼭 이 운동화를 신습니다. ㅎㅎㅎ

    KakaoTalk_20230702_182917611.jpg

    • 2023-07-02 20:53

      와! 쌤 신발 멋져요!! ^^ 저는 pride 티셔츠를 사왔습니다. 어제 취약한 몸들의~ 세미나 주제들! 완전 관심가는 내용들인데, 거기에 갔어도 좋았겠다 싶었어요 ㅠ ㅎ
      학교 학생, 부모님이랑 퀴퍼 같이 가기로 했구, 학교 졸업생들이 바투카다 팀으로 참여하고 있어서 같이 박자타다가 돌아와 늦잠자고, 오늘은 비스듬히 손탁님 책 읽고 있습니다 ㅎㅋ

      19세기 결핵의 낭만화- 핏기없는 창백한 얼굴(자아) 이미지, 20세기 여성의 마른 체형에 대한 분석이 흥미로워요. 나는 어떻게 보여질지를 생각했고, 입었는지를 생각해보게 되네요 ㅎ

  • 2023-07-02 23:39

    '되어가는 존재'로서의 노을샘을 응원하며 저도 동참해 봅니다

    디디에가 자극한 수치심은 몸이 먼저 알아차리며 반응했다. 그가 속한 사회적 계급과 성적 정체성으로 겪은 수치심의 기록은 내 수치심에도 이유가 있었음을 그저 내 탓만이 아님을 보게 하는 위로가 있었다.

    지난 번 에세이를 쓸 때 밝혔지만 나의 아저씨 드라마에서 내 귀를 잡은 장면은 '너, 그것도 몰랐어'였다. 또 하나 ‘동백꽃 필 무렵’에서 동백이와 용식이가 결국 이별하게 될 때 '나는 헤어질 방법도 몰랐고, 그렇다고 그녀를 붙잡을 방법을 몰랐다'며 우는 대사 앞에 또 붙잡혔다.

    일상에서도 나는 ‘너 몰랐어? 혹은 ’이거 몰라?‘ 하고 물으면 쿨하게 인정하기 어려워하고 생각과 몸에 방어기제가 작동한다. 어느 순간 그것을 알아차리고 왜 난 유독 ’모른다‘는 단어에 이렇게 민감하고 얼어붙는가 생각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 순전히 내 무능이나 머리 나쁜 걸 감추고 싶어 하는 욕구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인정하고 난 후에 불쑥불쑥 올라오는 의문과 질문이 생겼지만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다.

    랭스로 되돌아오다를 읽고 이야기 나누면서 나의 ’모른다‘ 와 ’수치심‘은 맥락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더 확고해진 층위들을 경험했고 그 경험들은 더욱 더 쌓였을 뿐 어떻게 뚫고 나갈지 모르고 살았다. 주변이 그렇게 사니까 다들 그렇게 사는 줄만 알았던 것이다. 이 부분도 삶을 되돌아볼수록 수치심을 동반한 자책으로 작용한다.

    수치심이 삶을 지배하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남들이 자신을 하찮게 대해도 폭력인지 모른다. 이 수치심은 오랫동안 주변에서 나를 희롱했지만 정치적. 사회적 맥락의 작동으로 연결하지 못했다. 이 수치심과 맞짱을 뜰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 기술서를 써보는 일 같다. 글쓰기는 끊임없는 자기 협상 과정이라고 한다. 자기협상은 극복되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수치심의 경계를 흐리게 하는 작업이다. 내가 운명이라고 믿었던 것들을 다시 해석해 내고 벗어나는 일이다.

  • 2023-07-04 01:43

    자기기술지적 후기 잘 읽었습니다, 노을샘. 저도 에리봉이 "자기되기"를 위해 거쳐야 했던 글쓰기 과정이 무척 고달팠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연히 퀴어 축제 날 별도로 열렸던 '노 프라이드' 행사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성노동+약물이슈 연구모임이란 곳에서 주최하는 걸로 되어 있더라구요. 제가 정확한 배경을 알지 못하나 그 행사의 취지에 "우리는 ‘정상적인’ 퀴어들의 프라이드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프라이드 정치가 고양하는 자긍심 반대편으로 밀려났던 구체적인 경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라고 되어 있더라구요. 퀴어 정체성 이외에 여러 교차적인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이들에게 자긍심이란 이들이 말하는 "정상적인" 퀴어들과는 매우 다를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이들이 대기업부스와 대사관부스가 들어선 축제에서 이탈하고 싶어한다는 사실 자체가 많은 걸 생각하게 해주더군요. 수치와 자긍심은 "입장"에 따라 상대적일 것 같단 생각이 드네요...

    • 2023-07-04 21:38

      해야쌤. “정상적인” 퀴어라는 것에 대해서 그간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무엇을 섬세하게 살펴봐야 하는지에 대해서 점검하게 되어요.
      퀴퍼에 갔을 때, 그렇잖아도 대사관과 구글 부스, 이케아 후원 가방이 노들야학 등의 부스와 나란히 있던 장면을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낯설었거든요. 갑자기 노르웨이 네덜란드 등의 유럽 대사관과 대기업 부스라니. 뭐지. 그랬었는데. 쌤의 말씀으로 생각을 해보면, 랭스로~ 에서도 추론할 수 있듯이 유럽에서는 자유와 인권에 대한 가치적 우위로 인해 퀴어에 대한 인정의 정치가 인종에 대해서 보다 더 열려있어서 그런걸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기에 더 찾아봐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노 프라이드’ 축제에 대해서 좀더 찾아봐야겠습니다! https://nopride2023.my.canva.site/
      “망명과 자긍심”이란 책에서 ‘자긍심과 증언’ 대해 나왔던 내용을 다시 찾아 읽기는 했는데, 관련된 공부가 얕은지라 알듯말듯 잘 모르겠더라고요. 수치심이 자긍심으로 변형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자기 고통에 대한 직면과 증언에 대해서는 생각해보게 됩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퀴어에서 탈각되고 싶은 존재들의 증언이 어떤 것일지, 그들에게 자긍심으로의 변형을 말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일 수 없겠다 생각해봅니다.

      전에 아감벤? 프리모레비? 가 홀로코스트의 무젤만/죽은 자들에 대해 쓰면서 증언은 생존자가 아닌 증언할 수 없는 자의 무젤만의 몫임을 말했던 지점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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