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웰처럼 '돈 쓰기'

겸목
2024-04-06 21:49
48

목요일 오후, 낙산 성곽 길을 걸었다. 발길 옮기는 데마다 공짜 벚꽃이 피어 있었다. 벚꽃이 핀 성곽 길을 걷는다는 게 유유자적해 보였지만, 우리 일행은 초행길이라 스마트폰GPS를 따라가면서도 이 길이 맞나, 저 길인가? 두리번거리느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엄한 길을 헤매고 있는 건 아닌지, 비탈진 골목길을 소득 없이 오르내리기엔 평균연령 50대 후반인 우리의 체력도 간당간당했다. 헐떡이며 두리번거리며 눈에 들어오는 꽃은 건성으로 예뻤다. 그때 전화가 왔다.

 

“선생님! 문자 보셨어요? 보내주신 지원서의 강의내용을 좀 더 추가해서 써주셨으면 해요.” 도서관 지원사업 담당자는 예의바르고 사교적인 말투로 내가 보낸 지원서에 결격사유가 있음을,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경고와 함께 수정해야 한다고 부탁조로 명령하고 있었다. 요즘 시간이 없다, 당장 해줄 수는 없다, 고 바쁜 척을 했지만, 나는 이 수정작업을 곧 하게 되리라 수긍하고 체념했다. “무슨 전화냐?”는 일행들의 질문에도 “별 거 아니다”고 말했지만, 내 안에서는 마음의 동요가 밀려왔다. 언제 그걸 고치나? 그냥 넘어가면 안 되나? 내 글이 그렇게 별론가? 마지막 질문이 가장 뜨끔한 자기검열이다. 이런 짜증은 이런 글은 정말 쓰기 싫다는 방어심리를 작동시킨다. 돈벌이를 위해 관공서에 제출할 공문서에 쓰는 글은 ‘개요식’이다. 길지 않으면서도 도서관 담당자와 심사위원들이 단박에 알아챌 수 있는 문장으로 ‘매력 어필’해야 한다. 교양 함양에 도움이 되고, 지루하지 않고,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으며, 공공성을 창출하는 강좌임을 알려야 한다. 이런 글! 내공이 필요하다. 그런데 나는 이런 내공은 훈련하고 싶지 않다. 그럼, 지원사업에 참여하지 않으면 되는데, 경제적인 이유로 이를 외면할 배짱은 없다. 그럼, 잘해볼까? 마음을 내야 하는데, 그건 또 싫다. 그냥 해치우고 싶기만 하다.

 

긴가민가하며 좁은 골목길을 돌고 돌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소설가가 운영한다는 북카페다. 주택 두 채를 사서 하나의 건물로 만든 2층짜리 북카페는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외국인들이 테라스에 앉아 동네 산책 나온 느낌으로 음료를 마시는 모습은 홍상수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외국인 친구가 “봉주르”라고 인사하고 지나가고, 고양이 서너 마리가 어슬렁거리는 카페. 이곳은 월~일까지 요일담당 알바가 7명이 있어 연중무휴로 영업하는데, 목요일 담당 알바는 얼마 전에 퇴직한 신문기자라고 한다. 소설가의 환대는 도서관 직원처럼 정중하고 사교적이며 소설가답게 분위기 있었지만,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사람의 양식화된 매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공간에 대한 상찬과 함께 친밀함과 호의를 표시했지만, 우리의 속내도 소설가에 대한 존경보다는 최근에 나온 우리 책의 북토크를 이곳에서 할 수 있는지 문의하기 위해서였다. 주중에 갑작스런 나들이, 그것도 벚꽃 핀 성곽 길을 낀 북카페 나들이는 환호할 일이지만, 해야 할 일들이 빈틈없이 채워져 있는 일정에서 한나절을 날려버리면 이후 더 쪼들리는 스케줄을 감당해야 된다는 계산에 마냥 즐겁지가 않았다. 하필이면 날씨도 좋았지만, 날씨 프리미엄도 제값을 못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 그냥 놀자는 마음을 먹어도 될 텐데, “여기서 북토크를 할 수 있을까요?” 은근슬쩍, 자연스럽게, 조급해 보이지 않은 말투로 부탁해야 한다는 생각이 놀고 싶은 마음에 초를 쳤다. 말을 할까, 말까, 이 타이밍일까, 계산하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현타’가 오고, 유명 북카페의 인지도를 이용해 책 한 권이라도 팔아야 한다는 현실적인 생각이 초단위로 갈팡질팡했다.

 

종이 더미 속에서 타자기 놓을 자리를 찾지 못하며 그렇다고 종이를 버릴 수도 없는 한 남자가 있다. 이미 쓰레기통은 넘쳐나고 “답장 못한 편지들과 아직 못낸 공과금 고지서들 사이에 현금으로 바꾸지 못한 게 거의 확신한 2기니짜리 수표가 끼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는 종이더미를 함부로 버릴 수도 없고, 주소록에다 주소를 옮겨 적어야 하는 편지도 있는데 주소록을 잃어버려서 그걸 찾을 생각을 하면 “극심한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있”다.(「어느 서평자의 고백」, 『나는 왜 쓰는가』) 그는 다음날 정오까지 보내야 할 글을 아직 시작도 못했다. 오후 4시가 돼서야 서평을 써야 할 책을 소포에서 꺼냈지만 펼쳐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것들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심지어 종이 냄새만 맡아도, 아주까리기름친 차가운 쌀 푸딩을 먹어야 하는 기분이다.” 그의 본심은 “나는 이 책에 아무 흥미도 못 느끼기에 돈 때문이 아니면 이 책에 대한 글을 쓰지 않을 것”이란 말이다. 그는 유명작가가 되어 경제적인 안정이 보장될 때까지, 스스로 쓸모없는 일이라 생각하는 서평자의 일을 업으로 삼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로 돈벌이까지 한다면 운이 좋은 경우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오웰처럼 서평가는 책을 각별히 아끼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책이라면 진절머리 내는 노동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된다. 기고가가 아닌 나에겐 강사 일이 그러하다. 내가 공부한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다는 점에서 양질의 일자리임에 틀림없지만,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에게 또 언제 볼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건 이런 거예요, 설명하는 일은 더구나, 나만 관심 있고, 내 관심사에 듣는 사람들이 호응하지 않을 때에는, 1인극을 하는 배우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 오늘도 공연을 잘 마치고 내려가자, 는 다짐을 혼자 한다. 관대한 관객 가운데 한 명이 “잘 들었다”고 예의 바른 인사를 해줄 때, 마냥 흐뭇하지만은 않다. “잘 들었다”의 액면가가 우리 도서관에 오신 강사에 대한 인사치레처럼 느껴질 때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내가 명강사도 아니니 이런 대접은 정찰제처럼 정확하다.

 

오웰은 돈을 자신의 글 속에 ‘액센트’있게 사용했다. 겨우 6페니 주고 산 장미묘목이 여러 해 동안 얼마나 다양한 기쁨을 주었는지, 공장지대를 날아가는 새들은 반 페니의 임대료도 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통쾌하다느니, 부부가 담배를 끊었다면 가정경제가 훨씬 나았을 거라는 자조적인 표현까지, 그는 끊임없이 돈을 글 속에 가져왔다. 그의 글에서 돈에 대한 표현들은 실제 화폐처럼 활기를 띤다. 돈을 우습게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돈을 숭배하지도 않는, 그의 태도가 그의 글 속에서 돈을 다양한 억양을 갖는 말로 살아나게 한다. ‘돈과 오웰’을 생각해보며, 내가 오웰에게 졌다고 본 지점이다. 나는 돈에 무능하고, 돈을 좋아하지 않지만, 돈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에 ‘쫄아 있다.’ 우습게보지도, 숭배하지도 못하고, 쫄아 있는 모습만 있다. 그래서 ‘돈’에 대한 나의 인식은 평면적이고 얄팍하다. ‘돈’을 숙고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웰처럼 써보기로 했다. 새로 이사한 집에는 베란다에 작은 꽃밭이 있다. 2월에 이사 왔을 때는 텅 비어 보이던 그곳에 3월 마지막주에는 진달래꽃이 피어, 거기 있는 나무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 옆에는 가시가 나있는 넝쿨이 있어 장미임을 알 수 있는 작은 나무도 한 주 있다. 아마 초여름에는 꽃을 보게 될 것이다. 빨강 장미인지, 흰 장미인지, 노랑 장미인지 아직 모른다. 그리고 무엇이 피어나거나 열리게 될지 모르는 서너 그루의 나무가 더 있다. 이번 주에는 나무젓가락처럼 말라 비틀어 보였던 훌쭉한 나뭇가지에 연두색 싹이 돋아났다. 며칠 지나면 그 나무의 이름도 알게 될 것이다.

 

지난주에 농원에 가서 배양토 10킬로그램과 비료 한 포대를 사왔다. 몇 그루의 나무 사이 비어진 땅에 모종을 심어보려 한다. 배양토와 비료를 사는 데 1만2천원이 들었다. 1만2천원이면 치킨 한 마리를 시키지 못하고, 일리치약국 직원 세 명이 스타벅스에서 회의 겸 머리를 시키는 티타임을 가질 수 없고, 곧 상영관에서 내려올까 봐 조마조마한 영화 <추락의 해부> 한 편을 보지 못한다. 치킨도 못 시키고, 커피도 못 사마시고, 영화 한 편 볼 수 없지만, 1만2천원 주고 산 배양토와 비료는 우리 꽃밭에 무엇을 피어나게 할지, 1만2천원의 스토리텔링이 궁금해진다.

 

 

댓글 2
  • 2024-04-07 21:23

    피해갈 수 없는 일과 돈 문제, 그 민감한 사안이 투명하게 보여서 좋았어요.
    돈 때문에 글을 썼던 발자크나 피츠 제럴드 같은 이도 명작을 내셨으니...
    일에 치여도 해 나가다 보면 근사한 결과물이 생길수도 있겠죠. 아님 말고 ㅎㅎ
    그래도 건강은 늘 챙기며 설렁설렁 하세요.

  • 2024-04-07 21:25

    아, 그 꽃밭인지 채소밭인지 매우 궁금하네요.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242
시즌1_에세이 개요 (1)
이든 | 2024.05.12 | 조회 35
이든 2024.05.12 35
241
시즌1 에세이(초고) (2)
단풍 | 2024.05.12 | 조회 40
단풍 2024.05.12 40
240
시즌1 에세이 개요 (1)
먼불빛 | 2024.05.12 | 조회 43
먼불빛 2024.05.12 43
239
지금의 나를 있게 해주는 것들
무이 | 2024.05.11 | 조회 34
무이 2024.05.11 34
238
에세이초고(1)-유유
유유 | 2024.05.11 | 조회 32
유유 2024.05.11 32
237
시즌1에세이초고
시소 | 2024.05.11 | 조회 23
시소 2024.05.11 23
236
시즌1 에세이초안
꿈틀이 | 2024.05.11 | 조회 35
꿈틀이 2024.05.11 35
235
나는 왜 읽고 쓰는가
수영 | 2024.05.11 | 조회 34
수영 2024.05.11 34
234
냉혹함--살아가는 힘 (1)
먼불빛 | 2024.04.21 | 조회 53
먼불빛 2024.04.21 53
233
루시 바턴과 나 (1)
이든 | 2024.04.21 | 조회 48
이든 2024.04.21 48
232
엄마에게도 가슴 시린 연애와 이별의 시절이 있었다 (1)
유유 | 2024.04.21 | 조회 58
유유 2024.04.21 58
231
루시 바턴에게 배운 것들 (1)
겸목 | 2024.04.20 | 조회 49
겸목 2024.04.20 49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