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 목적이 명확한 사람

이든
2024-04-07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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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간을 견디는 힘

 

모태 신앙이나 다름없는 천주교 신자이지만 성당보다 절집을 찾는 여행을 더 즐기는 편이다. 보수공사를 하거나 혹은 새로 건축한 절도 많다. 그 사이에도 절집을 둘러싼 산과 그 새 깊어졌을 나무뿌리, 새들에게 내어주는 나뭇가지는 계속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넉넉하고 아름다운 산세는 시간이 갈수록 깊어져 간다. 그러고 보면 나는 절집이 아닌 절이 자리 잡은 자연을, 그 공간이 좋아 절에 가는 것일까.

 

가장 좋아하는 절 집중 하나가 영주 부석사다. 대학 시절, 어느 늦여름 친구와 함께 갔던 부석사에서 본 석양이 생각나면 그 시간 속으로 마구 달려가고 싶어질 때가 종종 있다. 이름난 사찰들 대부분이 험한 길을 헉헉대며 땀을 쏙 뺀 끝에서야 짠하고 자태를 드러내는 것 과는 달리, 부석사는 친절하다. 올라가는 길의 평안함, 굽이 돌아가는 길의 나무 사이에서 아는 이가 나타날 듯한 다정함, 산세에 맞춰 제대로 자리 잡은 당간지주, 석탑, 기둥, 그리고 그 유명한 배흘림기둥, 오래된 나무가 풍기는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는 단단하고 날렵한 주심포의 강건함까지, 발 닿는 곳 모두가 소박하고도 화려함을 동시에 뿜어내고 있다. 자연스러움과 간결함을 모두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포근한 소백산 자락에 쏙 안기는 듯한 경관들에 내 마음은 어느 때보다 포근해지곤 했다. <화첩 기행>을 쓰신 김병종 선생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풍경이 아름다우면 아픔도 더 깊어지는 법인데, 부석사의 아름다움은 왠지 그 아픔을 치료하는 기운을 지닌 듯하다.

 

다시금 '공간'이 가진 힘에 대해 생각해 본다. 오랜 시간 그 장소를 지킨 공간의 잠재력을 떠올려본다. 처음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던 그 저력을 다시 보여줄 수 있을 정도의 축적된 힘에 대해서. 재능과 노력의 토대 위에 시간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는 가볍지 않고, 그 힘은 더 강해진다. 20대를 돌이켜보면 뿌리가 둥둥 떠다니는 느낌으로 그 시절을 보냈다. 뿌리내리기를 거부하고 두려워했다. 그 자체가 정체되고 소멸해 가는 징표라 생각했던 듯하다. 시간이 가면서 새로운 곳을 탐험하는 것만큼이나 그 자리에서 시간을 견디는 일에 시선이 가고, 존경심을 느끼게 되었다. 그 순간은 일상과 개개인의 아주 작은 삶의 부분인 경우가 많았다. 변화하는 세상의 에너지를 추적하고 탐색하고 충전하고자 동동거리다가도, 세상에서 멋진 일들을 해내는 삶의 궤적을 추적하다 보면 그 시간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진리를 확인하기도 했다.

 

견디는 시간의 가치를 알고, 자신만의 에너지를 축적하고 결국은 선한 결과물로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은 사람이나 건물이나 다를 바가 없구나 깨닫게 된다.

 

 

2. 사용목적이 명확한 사람

 

20년 가까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라이프 스타일과 영역을 확인하고 제품의 콘셉트를 기획하는 업무를 해왔다. 시장에서 성공하는 제품의 공통점은 사용목적이 명확하고, 소비자가 예상하는 기대치보다 조금 더의 효용을 주는 것이었다. 그 효용은 디자인, 기능 때로는 사용 후의 경험이 될 수도 있는데 기대하지 않은 순간에 느끼는 그 한 끗 차이가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경우가 있다. 무턱대고 모든 면에서 최고의 성능만 집어넣었다가는 잘 사용하지 않는 기능에 높은 가격만 지불하게 될 수 있어 외면당하는 경우도 많다. 사용목적이 명확하고 사용자의 기대치에 맞는 적정한 성능을 제공하며 의외성이라는 감동 한 스푼을 더하는 것. 간단하게 들리지만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의 기대가 무언지 파악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은 일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과 문화가 있고, 그들의 기대와 욕망은 단순하지 않다. 

 

사물에서 얻는 감동은 꼭 새로운 제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식주 전 영역에서, 오랫동안 사용하던 대상에서 한 단계 높은 경험을 했을 때 느끼는 희열이 있다. 요즘 깊이 생각하는 대상은 참기름이다. 나는 참기름을 사랑한다. 며칠이 걸리는 여행을 떠날 때면 집에 있는 참기름을 가져갈까 생각할 정도로, 내 식생활에서 중요한 식재료다. 몇 년 전 제주도에서 두 달을 보낼 일이 있었는데, 마트에 시판되는 참기름을 먹어보곤 그 밍밍한 맛에 실망해서, 다른 건 몰라도 참기름은꼭 내가 짜서 먹어야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하기도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실 때는 농사지어 보내주시는 참깨 들깨로 기름을 내려 먹었고, 그 후에는 엄마가 30년 동안 다니신 양평 기름집에서 기름을 짜 온다. 몇 년 전부터는 직접 엄마를 모시고 가는데, 용문역 근처에 있는 기름집은 아침 8시 문을 여는 시각에 맞추어 가도 최소 1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늘 문전성시를 이룬다. 장날과 겹치면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어져 그럴 때면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온다. 어릴 적 시장 나들이에선 내가 좋아하는 어묵을 엄마가 사주셨지만, 지금은 내가 맛집을 찾아 밥을 산다. 밥을 먹고 시장 한 바퀴 둘러보고 가면 대게 우리 차례가 가까워온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손님들도 순서를 확인하고는 각자의 볼일을 보고 돌아온다. 예전에 기름집은 가져간 깨나 혹은 주문한 깨를 쓰지 않고 속일까 봐 자리를 꼭 지키고 내리는 과정을 일일이 다 확인하곤 했단다. 여기는 사람들이 그냥 맡겨놓고 찾아가는 것을 보니, 확실히 사람들의 신의를 얻은 집이라고 엄마는 말씀하셨다. 오래가고 잘 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인 경우가 많다.

 

참기름을 짜는 과정은 볼 때마다 신기하다. 건강에는 저온 압착이 좋다고 하지만, 그렇게 할 경우 참기름의 고소한 맛은 덜해지고 양도 적게 나온다. 이 집은 아주 살짝만 깨를 볶아서 압착을 한다. 깔끔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그 볶기의 정도와 압착하는 기계의 정밀함에 좌우되는 것 같다. 그다지 크지 않은 기계에서 기름이 조르르 나올 때면 갓 짜낸 참기름의 고소함이 사방에 퍼진다. 예전처럼 식구가 많지 않은데도, 엄마는 참깨 한말 때로는 두말씩 수십 병의 기름을 짜신다. 오빠네는 물론이고 친척, 친구, 성당 친구 한 병씩 품에 안겨줄 리스트를 손에 꼽으며 기름병을 착착착 가방에 담는 표정이 참 풍요로워 보인다. 생들기름 몇 병과 볶은 깨를 추가로 사고 기름집 안주인을 똑 닮은 따님의 배웅을 받고 나올 때면 또 몇 달은 참기름 부자로 살 수 있겠구나 든든한 행복이 마음을 그득하게 채운다. 

 

이 기름집에는 아들과 딸이 모두 부모님을 도와 일하지만, 실질적인 경영자의 역할은 따님이 하는 듯하다. 손님응대, 주문, 기름을 내리고 배웅하는 일까지 어느 한 단계도 허투룬 구석이 안 보인다. 모든 과정이 명료하고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에 훤히 꿰고 있으며, 착착착 진행되는 빠른 단계 속에서도 '다정함'을 잃지 않는다. 몇 달에 한 번씩 가는 우리를 기억하고 엄마의 걱정을 묻고 다음을 기약한다. 그 순간의 말들이 형식적으로 느껴지지도 않고 이웃과 얘기를 나누는 듯 편안하고 좋다. 그 안에 어떤 가식도 없다. 이런 류의 사람들에게는 삶에 대한 자신감이 보인다. 아무도 부럽지 않고, 너무나 떳떳하게, 자연이나 남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으면서 살아가는 삶. 해야 할 일을 뚜렷이 인지하고 그 일의 주인은 바로 나라는 듯한 그런 당당함이 너무 근사하고, 나는 그 점이 늘 부럽다. 

 

나는 요즘 매사에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다. 항상 최고는 아니었지만, 스스로 나만의 영역이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고 그렇게 인정받고 있다고 믿어왔다. 어려운 일을 겪어도 결국은 해 내는 것으로 나를 증명했다, 고 착각했다. 일을 해 내는 성취가 중요한 것이지, 성과에 대한 보상에 대해 월급 이외의 것에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아마 내가 이렇게까지 오래 회사생활을 할 것이란 계획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생이란 게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어쩌다 보니 오래 다니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일을 하는 환경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그 변화의 체감은 5년 전부터 급격하게 피부에 와닿았고, 세대 변화라는 명목하에 후배세대들을 발탁해서 승진시키는 이제까지 회사에서 없던 일이 일어났다. 그 일을 겪고서야 알았다. 회사는 이 일 저 일을 열심히, 잘하는 사람보다는 사용목적이 명확한 사람을 더 앞순위에 둔다는 것을. 회사가 원하는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을 더 가까이 높이 두고 싶어 한다는 것을.  나는 일이 중요하지 인정과 보상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2년이 걸렸고, 지금은 그렇다면 내 사용목적은 내가 정할 수 있는 삶이 무엇일까를 더 늦기 전에 찾아야겠단 생각을 하고 있다. 

 

참기름의 명징한 사용성과 가치, 그리고 기름집주인의 태도를 다시 떠올려 본다.  나의 사용목적은 무엇일까. 나를 사용하는(바라보는) 사람들이 아닌, 내가 쓰이고 싶은 목적은 무엇일까. 내가 어떤 때 행복하고 직장생활 이후의 내 삶은 어떻게 사용하고 싶은지 나에게 계속 질문하고 있다. 대단한 것이 아니라더라도 내가 축적한 에너지의 쓰임이 뚜렷한 나의 세계를 찾아 오늘도 고민한다. 

 

댓글 5
  • 2024-04-07 18:27

    이든님의 글은 표현이 풍부하여 잘 읽히기도 하지만 참 공감이
    많이 가는 글이예요~ 할머니 약과와 같은 참기름의 등장으로 읽으면서 고소했어요~ 참기름을 짜주는 곳과 사용목적에 맞는 조직원을 선호하는 조직의 변화를 연결지으신 부분이 참 인상적이면서도 많이 공감이 갔구요~참기름과 조직이라니..연관성이 없는 주제를 연결하는 글쓰기 방식을 배우고 싶었어요^^

  • 2024-04-07 20:41

    "아무도 부럽지 않고, 너무나 떳떳하게, 자연이나 남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으면서 살아가는 삶. 해야 할 일을 뚜렷이 인지하고 그 일의 주인은 바로 나라는 듯한 그런 당당함"을 추구하시는군요. 이미 그렇게 살아내신 것만 같은데요? '시간을 견디는 힘'으로... 그저 이제 뭔가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신 것만 같아요.
    참기름은 나물무침에도 쓰고, 조림에도, 양념장에도 두루두루 쓰는 향신료로 이걸 쓰면 반찬의 품질이 높아지듯.... 이든님이 개입하면 더 완성도가 높아지는 그런 역할 어떨까요? 그게 회사일이든 다른 일이든 말이예요.

  • 2024-04-08 08:03

    사람의 노동력과 급여라는 대가의 지불 방식에는
    일방적인 계산법이 대입되어 있잖아요
    나는 제외되고 돈을 지불하는 주체가 금액을 결정하고 평가하는 부조리가..우리를 어느날 가끔씩 흔들어놓는 자본의 속성인것 같아요
    저는 이든님의 이번글이 선생님을 좀 보여주신 글이라고 생각했어요..그래서 반갑고 좋았습니다

  • 2024-04-09 19:07

    쓰임새는 이차적인 결과물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우선 하고 싶은 것을 하다 보면, 이렇게 저렇게 엮이면서, 관계성이 생기면서 비로소 사용 목적과 가치가 또한 만들어지는...쓸모없음 조차도 하나의 쓸모가 되는 그런 것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봅니다.

  • 2024-04-12 05:42

    "나의 사용목적은 무엇일까. 나를 사용하는(바라보는) 사람들이 아닌, 내가 쓰이고 싶은 목적은 무엇일까. 내가 어떤 때 행복하고 직장생활 이후의 내 삶은 어떻게 사용하고 싶은지 나에게 계속 질문하고 있다. 대단한 것이 아니라더라도 내가 축적한 에너지의 쓰임이 뚜렷한 나의 세계를 찾아 오늘도 고민한다."

    영주 부석사와 양평 기름집을 돌아 이든님이 도달한 질문이 묵직해요. 이 질문을 붙잡고 엎치락뒤치락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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