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3일]6주차 <에티카>3부 후반부 세미나 공지

겸목
2024-04-10 21:48
73

 

지난 토요일 <탈탈낭독회>가, 일~월에는 <평창 공휴재 고사>가, 수요일에는 총선과 <일리치약국에 놀러와>가 숨가쁜 일정으로 있었습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3부는 머릿속에 남아 있을 틈이 없겠지만, 우리는 이번주 토요일 다시 <에티카>3부의 후반부를 세미나합니다. 첫 시간에 도대체 이건 뭔 책인가? '스피노자 o난감'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처음 읽는 사람이나, 한 번 쓰윽 봤던 사람이나, 예전에 쓰윽 봤던 사람이나......모두에게 대략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스피노자를 읽는 경덕님이 '연애코칭' 또는 심리해설서처럼 읽었다고 해주셔 넘 감사했습니다. <에티카>는 형이상학과 존재론, 인식론, 윤리학, 정치학을 망라하는 텍스트이지만, 3부는 3부 대로 독립적으로 읽을 수 있는 부분이 있고, 경덕님처럼 요즘 우리가 읽는 자기계발서나 코칭책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감각'으로 읽어가면 좋겠습니다. 스피노자는 연애를 그리 잘하진 못했겠구나, 질투심이 많았던 것 같아, 이런 이해를 베이스로 우리의 감정과 유비해서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3부의 주요 키워드는 코나투스와 정서모방입니다. 이건 4부의 '예속에 대하여 또는 정서의 힘에 대하여'로 이어지는 정치론의 문제의 키워드가 됩니다. 다음 시간에는 발제 없이 정리 39~정리 59까지 각자 공부하며 질문하고 싶은 부분이나 이해되지 않는 부분 전원 메모 올립니다. 이 부분에 대해 토론하고, 3부 끝에서 스피노자가 다시 정리하고 있는 <정서들에 대한 정의> (진태원 번역본) 같이 강독하기로 했습니다. 이번주에 이해 못해도, 다음주 진태원의 <스피노자 윤리학 수업>(그린비)로 다시 한 번 세미나하니 너무 무서워하지 마시고, 가랑비에 옷 젖듯이 스피노자에게 스며들기를 기다려봅시다. 다음주 청소와 간식은 윤경, 스프링, 언희, 유상입니다. 

 

질문과 메모는 금요일 오후 10시까지 댓글로 올려주세요~

댓글 7
  • 2024-04-12 20:51

    정리41. 스피노자는 정리40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밉상짓을 했을거라고는 잘 인정하지 않지만, 사랑 받을 짓을 했다고 믿는 일은 자주 일어난다(정리41주석)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리 41주석에서 '이에 따라 사람들이 서로 좋은 일을 베푸는 것보다는 복수를 행하는 일에 더 쉽게 빠져든다'의 전후 맥락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정리49. 스피노자는, 알고 보면 우리에겐 자유 의지가 없지만, 실제 우리는 서로를 자유롭다고 평가(상상)하기에 서로에 대해 더 많은 미움과 사랑을 갖게 된다고 말합니다. 심신 미약에 의한 살인보다 고의(자유의지)로 의한 살인을 우리가 더 괘씸하게 여기는 이유이기도 하겠죠? 그러나 '본래 우리에겐 자유 의지가 없다'는 스피노자의 말대로 라면, 혹 모든 범죄에도 필연적이고 인과적인 이유가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되지는 않을까요?

    정리59. 웃음과 떨림과 창백함은 왜 정신과 상관없이 오직 신체하고만 관련있을까요?

    스피노자의 정서 강의 어렵지만 재미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정서를 중심으로 타인을 겁쟁이나 용감한 사람, 혹은 소심하다 평가를 내리고, 스스로를 자유롭다 여기기에 후회도 더 깊어진다는 것(정리51주석).// 그리고 정의 6은 아메드가 말한 '모든 사랑은 자기애적'이라는 의미와 연결되는 것 같아 흥미롭습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과의 결합 의지로 볼 수도 있지만 실은 사랑하는 이의 자기 관념을 수반하는 '자족감/ 자기애'로서의 의지라는 것. 그리고 정리 50과 정리15에서 말하고 있는, '어떤 것이든 간에 우연히 정념의 원인이 된다'는 것 역시, 외부 대상의 객관적 성질과 정서 사이 인과관계는 단선적이지 않다는 즉, 아메드 말처럼 '감정은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는 말과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 2024-04-12 21:57

    Q1) 정리44. 사랑에 의하여 완전히 정복된 증오는 사랑으로 변한다. 그리고 이 사랑은 증오가 앞서지 않았던 경우보다 한층 더 크다.
    더 큰 기쁨을 맛보기 위해 의도적으로 어떤 것을 증오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정리 59>에는 '작용을 하는 한에 있어서의 정신에 관계하는 감정에는 기쁨 또는 욕망에 관계하는 것이 있을 뿐'이라고 나옵니다. 사랑에 의해 증오를 정복하는 것은 '작용하는 정신'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더 큰 기쁨을 맛보기 위해 의도적으로 어떤 것을 증오할 수는 없다고 하는데, '작용하는 정신'에 '증오'는 포함될 수 없는 것일까요?

    Q2) <정리 45>와 <정리 47> 증명에 나오는 '유사한 타인', '유사한 자'는 <정리 55>의 두 번째 계에 나오는 '자신의 동배'와 같은 의미일까요? <정리 55> 계의 증명에서 '인간은 타인의 본성에 특유하고 자기의 본성과 무관한 활동능력 또는 덕이 자기에게 부여되기를 욕구하지 않을 것'이기에 본성이 다른 존재는 질투할 수 없다고 나옵니다. 누군가를 존경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의 본성이 그 사람에게 특유한 것이고 우리의 본성과 공통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유사한', 혹은 '공통된 본성'으로 표상되는 관념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 2024-04-12 22:08

    또 하나의 참고서! <스피노자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마트롱)에는 정념의 계열을 나눠서 정리해줍니다.

    1. A1군: 개인적 삶의 토대(정리9~정리13의 주석), 곧 욕망,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2. A2군: 개인적 삶의 전개(정리13의 주석~정리26의 주석, 그리고 여기에 정리50 덧붙이기), 곧 환경을 함수로 생겨나는 사랑과 미움의 파생태-->공감/반감, 마음의 동요, 희망과 공포, 안도와 낙담, 유사한 것에 대한 연민과 호감과 분개, 유사한 것에 대한 경쟁심인 시기심, 과대평가(자만)와 과소평가(경멸)
    3. B1군: 인간 상호관계의 토대(정리27~정리32 주석), 곧 감정모방, 여기서 따라 나오는 보편성의 욕망, 그리고 여기서 발생하는 인간 상호적인 사랑과 미움-->연민과 시기심(경쟁심), 자비심, 암비치오(명예심, 칭찬, 인정), 자부심과 부끄러움, 자족감과 후회, 지배욕망
    4. B2군: 인간 상호관계의 전개(정리33~정리49), 곧 환경을 함수로 생겨나는 인간 상호적인 사랑과 미움의 파생태.-->아쉬움, 겁많음, 앙심, 복수심, 잔인함

    *일단 옮겨봅니다

  • 2024-04-12 22:45

    정리41. 스피노자는 사랑받을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는데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상상하면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오히려 미워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 사랑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는데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으면 그 사랑이 부담스럽지 않을까요? 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왜 날 사랑하는 거지? 날 제대로 알긴 하는 걸까? 제대로 날 알게 된 뒤에도 날 사랑할까? 그의 사랑이 의심스럽기만 합니다. 날 왜 사랑하는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모르는 채로 그의 마음이 언제든 돌아설 수 있으므로 그를 미워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정리59. 주석 마지막에서 5째줄 - 나는 떨림, 창백함, 흐느낌, 웃음 등과 같이 정서들 안에서 관찰되는 신체의 외적 변용들에 대해서는 무시했는데, 왜냐하면 이것들은 오직 신체하고만 관련될 뿐, 정신하고는 아무 관계도 맺지 않기 때문이다.
    - 스피노자는 신체적인 사건들은 정신적인 사건들이 일어나게 하는 원인이 아니라고 하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신체와 정신 두 개의 원인과 결과의 계열이 서로 정확히 평행하게 달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신체의 모든 움직임을 신체적 원인으로만 설명하는 것이 완전히 이해되지는 않는다.
    - 정신과 무관하다는 것은 신체의 인과관계에 정신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 같다. 근데 또, 평행이론에서는 정신과 신체가 인과관계는 아니지만, 한 존재의 두 양태로서 서로 대응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서도 떨림이나 창백함에 대응하는 정신은 있는 것으로 봐야겠죠?

    - 지난 시간 질문과 관련한 자체 AS.
    - 다른 것에 의해 파괴되지 않는 한, 계속해서 존재하려는 자연적 경향성이 코나투스이며 이는 하등동물이나 무생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 인간처럼 고도로 복잡하고 의식적으로 반성적인 존재에게는 존재를 보존하려는 경향성이 숙고, 의도적 계획, 의식적 노력을 수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래야 존재를 더 잘 보존할 수 있으니까.

  • 2024-04-12 23:28

    정리 42. 사랑이나 자부심에 대한 희망에 끌려 누군가에게 좋은 일을 행하는 사람은 그의 좋은 일이 무심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게 되면 슬퍼질 것이다. 여기에서 자신과 유사한 실재에 대해 그가 할 수 있는 한 사랑이나 자부심의 원인으로 상상하려고 노력할 것이고, 그 원인을 현행적으로 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 원인의 실존을 배재하는 다른 실재를 상상한다는 말이 이해가 안갑니다. 오히려 노력에 대한 댓가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 같은 걸로 슬퍼지게 되는 게 아닐까요?

    정리 47. 우리가 미워하는 것이 파괴되거나 다른 나쁜 일로 인해 변용된다고 우리가 상상하는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기쁨은 마음의 어떤 슬픔 없이는 생겨나지 않는다. 주석에서 실재에 대한 회상이 살아나는 한에서 사람은 슬픔과 함께 그것을 바라보도록 규정된다고 하는 데 규정이 억제되는 한에서 기쁨을 느낀다고 하는데.. 이 부분의 이해가 잘 안되요...

    에티카에서 정서를 설명하는 방식이 기하학적 방식이라 어렵지만 오히려 이해하기에 명쾌합니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심신평행론과 코나투스 개념은 정신과 신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지 를 새롭게 제시해주었습니다. 정서에 의해 우리의 판단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기쁨과 슬픔, 욕망의 일차 정서와 행위 역량 간의 상관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은 자기 신체의 변용들 및 그것들의 관념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고 합니다. 자기 인식은 정신에게 기쁨의 정서를 증가시키고 행위 역량을 증가시킵니다. 우울한 우리 사회가 기쁨의 정서로 능동적이고 활기차게 전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2024-04-13 07:01

    메모 1.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이 내가 원하고, 잘하는 일일까?” 혹은 “이 일이 정말 나답게 사는 일일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그런데 누구도 쉽사리 가지 않은 길에 대해 정답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주로 가는 길을 따라 가거나 혹은 권위있는 누군가의 삶을 모델링 하고자 한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논리에 따를 때, 혼란과 혼돈의 지점에서 나 이외 대상을 원인으로 삼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모든 종은 이미 자신의 생존을 위한 코나투스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나답게 잘 산다는 것은 내 안에 이미 존재한다. 따라서, 우선 내가 어떤 순간(혹은 무엇을 할 때)에 기쁨의 감정을 느끼는지 알고(이 때 나는 더 큰 완전함으로 이행되어 역량이 향상될 것이므로), 두 번째 이 때 내가 느끼는 기쁨의 원인에 대해 고찰한다면 ‘나답게 산다’고 할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삶을 살아가도 되지 않을까? (혹은 이런 생각자체도 필요 없을지 모른다.)

    메모 2.

    우리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이 있고, 사회문화 현상 속에서 하나가 유행하면 너도 나도 따라하고 그 속에 포함되지 못하거나(혹은 뒤쳐질때) 불안감이 엄청나다. 이러한 현상의 기저에는 ‘똑같지 않고 다른 것은 이상한 것’, 혹은 ‘네가 하면 나도 할 수 있지, 네가 그것 했어?’라는 시기, 질투심도 크게 작동한다. 집단문화가 이질적인 것, 차이를 인정하지 않음으로 인해 서로 같아지기 위한 경쟁을 부추기기도 했고, 다른 한편 운동선수가 ‘나는 최강이다, 나는 할 수 있다’를 외치며 시합에 임하는 것처럼 과잉된 자기확신이 있는 사람만 우리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누구라도 자신의 동배가 아닌 사람의 덕을 시기하지는 않는다”라고 하는데 할 때, 우리 사회에 팽배한 경쟁적 시기, 질투와 이로 인한 좌절감은 ‘모두가 동배’라는 집단문화의 결과일까?

  • 2024-04-13 08:29

    6주차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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