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감성기르기 프로젝트 #18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한 향>

프리다
2024-02-12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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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산이 참 좋다. 그래서 자주 산을 오른다. 가끔 정상에 오르기도 하지만 명확한 도착 지점 없이 산을 떠돌다 내려온다. 등산복도 따로 없다. 면티, 편한 바지에 가벼운 운동화면 된다. 10여 년 전부터 서서히 시작된 산행은 어느 순간 나에게 특별한 무엇이 되었다.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이 뭔가를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하는 마음에, 이 뭔가를 하루라도 빨리 나누고 싶은 마음에 공생자 행성의 문을 두드려 본다. 똑똑.

 

자주 찾는 산은 불곡산이다. 산행의 출발점은 세 가지 변수에 의해 결정된다. 집 앞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어떤 버스를 먼저 만나 타느냐에 달렸다.  109번을 만나면 불곡산 정상 방향 등산로에, 109-1번을 만나면 불곡산 형제봉 방향 등산로에 내려 오르게 된다. 버스가 보이지 않으면 가끔 30분 걸어가 등산로를 오르기도 한다.

오늘은 109번이 서 있으니 불곡산 정상 쪽 등산로다. 등산로 초입, 이마트의 방향제 냄새를 잠시 견디면 그날의 숲 향기가 미풍과 함께 나를 반긴다. 밤새 눈이 내렸다가 녹아 다양한 질감의 땅을 느낄 수 있었다. 질척한, 찐득한, 푹신한, 아삭한, 뽀득한, 미끌한...

 

강한 바람의 눈발을 짐작케 하는 나무 왼편으로 쌓인 눈. 눈의 반짝임에 수직의 선명한 자태가 돋보인다. 겨울 산의 아름다움은 설경이기도 하지만 진짜 매력은 무성한 잎이 떨어지고 나서 보이는 탁 트인 숲길과 나무들의 적나라한 누드다. 꽃과 잎사귀에 가려 보이지 않던 맨몸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갑작스런 나무의 변심이다. 하늘을 향해 뻗던 가지가 어떤 연유로, 자라던 방향을 갑자기 역행하면서 뒤틀리며 자란 걸까.

세 그루의 나무가 함께 뒤엉켜 샴쌍둥이처럼 자라고 있다가 생뚱맞은 다른 종의 나무가 그 틈을 비집고 올라왔다. 몇 해를 살아내다가 결국 고사(枯死)했다.

 

 

기존 나무의 몸통 사이로 다른 나무가 자라다 잘려 나간 모습(좌)/ 아래 몸통 쪽이 벌어져 있고 그 위쪽으로 벌어졌다 붙은 것(우)으로 보아 그사이를 뚫고 어떤 나무가 올라왔다가 사라진 흔적이다. 좌측 나무가 원래 모습으로 자라게 하려면 밑둥까지 잘라줬어야 오른쪽 나무처럼 회복을 할텐데 안타깝다. 이들 나무의 관계는 공생관계일까. 투쟁관계일까. 먼저 뿌리를 내렸던 나무가 기꺼이 자리를 양보해 준 것일까. 아니면 밀고 올라온 나무의 힘에 못이겨 자신의 몸을 변형시켜야만 했을까.

 

 

누군가 나무를 갉아먹고, 다른 누군가는 그 틈에 도토리를 숨기고, 또 누군가는 도토리를 먹다말고 도망갔다.

 

나무는 주검도 아름답다. 잘려 나간 그루터기마다 각각의 조형미와 무늬를 가지고 있다.

 

단단한 바위를 뚫고 뿌리내린 유연함과 맹렬한 힘에 난 이 나무들을 ‘불곡산의 크라켄’이라 부른다.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뿌리의 조용하지만 엄청난 괴력을 느낄 수 있다.  흙이 비바람에 흘러내리고 등산객의 발에 차여 뿌리가 드러났다. 장시간 흙 밖으로 나온 뿌리는 줄기화 되어 뿌리의 기능을 잃는다고 한다. 이젠 뿌리가 등산객을 위한 발판이 돼 버렸다. 

 

바위에 붙은 민트색 무리. 이끼가 아니었다. 이름도 낯선 지의류다. 바위나 나무에 붙어 자라 이끼(선태류)로 오해하지만, 전혀 다른 생물이라고 한다. 지의류는 균류(곰팡이)와 조류의 이질적인 두 종이 결합해 하나의 생물이 된 기묘한 존재다. 발생 처음부터 한몸이 되어 서로가 만드는 양분을 나누는 공생체다. 엽록소를 만드는 조류를 균류가 감싸고 있어 지의류는 짙은 초록색이 없다. 열대지방부터 극지, 바다에서 고지대까지 살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생명력이 강하다고 하지만 공해엔 취약하다. 대기질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종으로 공해 심한 우리나라에선 보기 힘들어졌다는데 오호, 운이 좋았다!

 

산에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봄의 전령사 생강나무꽃이다. 아직 겨울 산이지만 생강나무 꽃망울이 막 터지기 시작했다. 김유정 소설 <동백꽃>의 마지막 장면, 소년과 소녀가 부둥켜안고 파묻힌 ‘노란 동백꽃’은 사실 생강나무꽃이다. 동백꽃은 생강나무꽃의 강원도의 방언이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푹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소설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 생강나무꽃은 3월초부터 만개하며 독특한 생강향을 뿜어낸다.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한' 황홀함을 느껴보고 싶다면, 근처 산으로 올라가 보자. 봄을 준비하는 생의 에너지들이 곧 폭죽을 터트리기 위해 여기저기서 꿈틀거리고 있다!

 

 

댓글 17
  • 2024-02-13 08:15

    와~~~ 2024년 공생자행성 뉴페이스 프리다님!! 환영합니다~~~~
    10년 불곡산울 오르면서 쌓인 프리다님의 나무들을 향한 애정이 글에 듬뿍 담겨있네요
    다음엔 어떤 인연의 실타래가 풀려나올지 궁금해집니다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해지는 생강꽃’향에 올 봄엔 꼭 취해봐야겠어요
    프리다님 산행에 따라갈까요?? ㅋㅋ

  • 2024-02-13 08:42

    프리다샘의 산행은 어쩐지 '기품'이 느껴지네요.
    나무 하나를 봐도 그냥 보는게 아닌, 사색과 섬세함이 담겨, 일지 라기 보다는 문학 같아요.
    💕 좋은 글 감사해요.

    생강나무는 고운 노랑 꽃이 생강가루를 닮아서 생강나무 인가,
    아님 생김새와 달리 강한 생강향이 나서 일까.
    저도 산에가면 아찔한 생강나무 찾아봐야 겠어요.

  • 2024-02-13 09:50

    오호~생강나무꽃이 피었군요, 봄이 오고 있군요, 저도 불곡산의 겨울 나무들 수피는 언제 봐도 멋지더이다~~프리다님의 불곡산에는 산에 대한 애정이 듬뿍^^

  • 2024-02-13 11:34

    "산행의 출발점은 세 가지 변수에 의해 결정된다. 집 앞 마을버스 정류장에 109번이 서 있으면 불곡산 정상 방향 등산로를, 109-1번이 서 있으면 불곡산 형제봉 방향 등산로로 오르게 된다. 버스가 없으면 가끔 30분 걸어가 등산로를 오르기도 한다."
    오호, 신박하군요^^

    올해는 저도 쫌 지겨운 광교산 말고...ㅋㅋㅋ... 불곡산 한번 가봐야겠어요.
    문탁에서 불곡산가려면 어찌 가나요?

    • 2024-02-13 16:42

      걸어서 가려면 탄천으로 해서 정자동에 있는 토지공사와 지에스 주유소 사이 입구로 가는게 제일 빠른 코스 아닐까 싶네요~

      • 2024-02-13 23:36

        네 맞아요. 걸어서는 그 길이 가장 가깝고, 대중교통으로는 정자역 1번출구 바로 앞에서 109번 타고 이마트에서 내리시면 되요

  • 2024-02-13 16:48

    프리다쌤 눈에 비친 나무들은 놀랄만큼 역동적이네요~
    나무 옆에 붙어있는 눈도 처음 본 장면이고,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 2024-02-13 22:52

    아니, 그냥 한번 오르셔도 이만큼 보고 오신다는 건가요? 와... 저도 불곡산이라면 꽤 올랐던 사람인데 이렇게 근사한 산행은 한번도 없었다는 것이.... 안타깝네요;;; 조만간 생강나무 찾으러 가봐야겠어요 또한번 많이 배웁니다 ^^

  • 2024-02-14 08:05

    나지막하고 섬세한 호흡으로 글을 따라가다 보니 마치 불곡산을 걷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만난 공생과 투쟁… 우리삶에서 동전의 양면처럼 느껴져요.. 저에게 이 한 편의 글이 희로애락을 던져줍니다. 글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 2024-02-14 09:27

    어제 오랜만에 광교산 산책을 했어요.
    무사님이 사는 곳 석성산에 도롱뇽이 알을 낳았다고 해서 뒷산 도롱뇽도 알을 낳았을까 궁금해서 올라갔는데, 역시 아직이더군요.
    생태감성 충만한 프리다님 글을 읽으니 매일 매일 산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일어납니다.

  • 2024-02-15 10:47

    프리다님 산 이야기 좋네요.
    저번에 우연샘 등산 이야기에 꽂혀 올해 목표가 광교산 가기였는데..
    석성산이 추가 되었네요 ㅋㅋ

  • 2024-02-18 11:58

    벌써 생강나무꽃이 폈군요.
    섬세한 프리다의 생태감성 기대됩니다.

  • 2024-02-22 10:24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한 향'을 읽다가 고만 저는 소금을 뿌려 놓은 듯 흐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인 메밀꽃이 생각나요^^

  • 2024-02-27 16:24

    와~
    프리다샘
    걷는거 안좋아하는데
    봄이 되면 산에 함 가봐야겠단 생각이 드는 글이에요
    흐드러진 봄 꽃 사이로 같이 쓰러질 ? 은 없지만
    쌤과 같이 걷는것도 좋을듯요
    언제 날 잡아 아찔해져봐요
    프리다샘의 공생자행성 응원 할게요 💚

  • 2024-02-27 22:27

    와~ 늘 오르는 산이지만 그냥 무심하게 지나쳤던 것들이 프리다님 감성을 따라가보니 놀랍고 예쁘고 오묘하네요.
    아찔한 생강꽃나무향은 또 어떨까요?
    저도 언제나 그 자리에서 반겨주는 자연을 섬세하게 세심하게 보게 되게 될 기쁨을 누려봐야겠어요
    감사해요~

  • 2024-02-28 09:30

    프리다선생님은 산에서도
    green rose를 보는군요.
    오늘은 도서관에 가서
    동백꽃과 메밀꽃 필 무렵을…

  • 2024-02-28 20:11

    자세히 보니 산도 나무도 더 커지는 마법이 펼쳐지는 느낌이어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