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1일]9차시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공지

겸목
2024-05-08 08:18
106

 

 

 

공지를 올리기 위해 교보문고에 들어가 검색해봤더니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가 새로운 번역으로 그린비에서 나왔네요! 표지는 산뜻한데, 인간사랑출판사 책이랑 번역과 페이지가 달라서 세미나할 때 혼동이 야기될 거란 심란함이 잠시......그러나 이미 <에티카>를 공부할 때도, 강영계본/황태연본/진태원본의 혼란스러움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무사히 지나가리라 봅니다.

 

 

사라 아메드의 <감정의 문화정치>도 머리 아팠는데, 스피노자의 <에티카>3부도 머리 아프고.....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는 두통의 절정 아닌가? 하는 '소리없는 아우성'(카톡이라 문자로만 읽음)을 들으며.....제 생각과는 기가 막히게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는 반응에 대해 뭐라 정리? 증명? 주석?을 달아야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으로 공지 올립니다.

 

 

4주 동안 우야든동 우리는 <에티카> 3부의 맛을 봤습니다. 아직 그 맛이 강렬하지 않고 약간 떫은 맛 혹은 쌉싸름한 맛 혹은 약간 달달한 느낌 아닐까요? 그래도 우리는 스피노자와 <에티카>를 조금은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들뢰즈는 우리가 느끼는 맛의 정도와 같은 것! 강도와 역량 개념을 가져와 <에티카>를 좀더 와닿게 이해하게 해준 사람입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머리 싸매고 읽고,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도 머리 싸매고 읽지만, 두 권을 번갈아 읽게 되면, <에티카>의 의미가 조금은 명료해지는 부분이 있어요! 그럴 때 '와! 들뢰즈 천잰데!!'이런 감탄사와 함께 '땡큐! 들뢰즈!"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발리바르가 개체는 '관개체성'이다는 개념으로 <에티카>의 이해를 넓혀준 것처럼, 들뢰즈는 '표현'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해줍니다. 우리가 이번에 읽은 부분에도 나온 삼항일조로 실체-속성-양태를 설명하며 속성의 표현을 통해 실체든 양태든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줘요. 우리가 만나는 세계는 '표현들'뿐이죠. 이런 설명이 실체와 양태를 이원론적으로 분리하지 않고 동시적이고 일치적인 것으로 이해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14장 신체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뒷부분에서 데카르트/라이프니츠/스피노자의 자연법칙에 관한 논의도 동일한 맥락의 문제입니다. 데카르트는 법칙에 따라 물질세계를 설명하는데 이것이 '기계론적'이라는 것이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의 비판으로 데카르트의 자연은 '불활성'을 특징으로 한다는 거예요. 움직이지 않는, 생명이 없는 자연을 기계적으로 설명했다고 봅니다. 생명을 갖는 활동으로서의 자연을 바라보는 점에서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는 동일한 입장이지만,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와 같이 신을 제일원인이며 초월적인 위치에 둡니다. 반면에 스피노자의 신은 내재적인 신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초월적/내재적' 대립쌍.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의 14장 '신체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변용능력'과 정서(감정)의 연관성입니다. '행위역량=변용능력=실존강도'로 등식을 세우며 들뢰즈는 우리의 윤리적 실천은 변용능력을 키워가는 데 있고, 여기엔 정서가 수반되며, 해보기 전에는 '모른다'는 점입니다. 드뎌 우리는 '모른다'는 출발점에서 당당히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니 하나하나 경험해가며 알아가고, 역량을 키워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여기에 시그널로 정서라는 것이 있음을 기억해라. 요런 메시지가 이번 세미나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런 게 어디 써있냐고? 멱살을 잡으며 달려들면 할 말은 없지만......'매직아이' 보듯 멀리서....가까이서....반복해서 보면 보일 겁니다.

 

 

고난의 발제는 라겸과 스프링, 메모는 전원, 청소와 간식은 1조 라겸, 정의와미소, 겸목, 경덕입니다.  

 

 

 

댓글 10
  • 2024-05-08 11:12

    공지에서 당황과 노파심 그리고 배려를 느꼈습니다. 땡큐.

  • 2024-05-10 09:30

    267쪽
    이제 그 양태가 지속하면서 자신의 변용 능력을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능동적 변용들에 의해 실행하게 된다고 가정해 보자. 이 측면에서 그 능력은 작용하는 힘 혹은 역량으로 나타난다. 이해 역량 혹은 인식 역량은 영혼에 고유한 작용 역량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수동적 변용과 능동적 변용의 비율과 관계없이 변용 능력은 일정하게 유지된다. ..... 두 역량의 비율이 달라지면서 두 역량이 변용 능력을 구성한다.
    둘째, 변화가 가능한 다른 층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변용 능력은 항상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도, 어떤 관점에서나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피노자는 하나의 실존 양태를 전체적으로 특징짓는 관계는 일종의 탄성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첫째 역량은 수동적 변용과 능동적 변용 두 역량의 비율은 달라지나 변용능력은 일정하다고 하고, 두 번째는 변화가 가능한 다른 층위에서 변용 능력은 일정하지 않다라고 하는데, 이 둘의 차이가 무엇인지..
    그것이 271쪽의 두 가지 착상의 양립인지...
    자연학적 착상은 변용능력은 수동적 변용이든 능동적 변용이든 동일한 본질에 대해서 일정하게 유지되고, 윤리학적 착상은 변용 능력은 양단의 한계 내에서만 일정하다. 이것이요.

  • 2024-05-10 20:06

    고난의 발제 1.....14장 앞 부분 메모입니다.

    14장-신체는-무엇을-할-수-있는가-발제.hwp

    • 2024-05-11 17:25

      보이도록^^

  • 2024-05-10 23:24

    270쪽
    우리의 겪는 힘은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긍정하지 않는다. 이 부분에서 표현한다는 것은 어떤 걸까요?

    271쪽
    윤리학적 착상에 따르면, 변용 능력은 양단의 한계 내에서만 일정하다. 수동적 변용들에 의해서 실행되는 동안에 변용 능력은 최소치로 줄어든다. 그때 우리는 불완전하고 무능하다. 우리는 어떤 의미로는 우리의 본질 혹은 우리의 역량 정도와 분리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분리된다. 여기선 양단의 한계라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그 양단의 한계를 벗어 나게 되면 변용 능력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실체는 어떻게 달라질까요?

  • 2024-05-11 00:32

    발제2. 14장 후반부입니다.

  • 2024-05-11 06:49

    271쪽) 양태는 언제나 최대한 완전하다 VS 양태가 실존하는 동안에는 어느 순간 그것에 속하는 변용들에 따라서 그것의 본질 자체가 변할 수 있다. 서로 대립되는 이야기 같은데.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스피노자는 어느쪽에 서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요? - 본질 자체가 변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능동적 존재가 되려고 구체적으로 시도해 보아야 한다' 고 이야기하려는 것일까요?

    281쪽)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의 차이점 중 '목적성' 과 '인과성' 의 부분: 사물이 존재하는 어떤 궁극적인 목적성이 있다는 것이 라이프니츠의 관점이라면 스피노자의 '인과성'은 '그냥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요? 내재적 인과성이란 무엇일까요?

  • 2024-05-11 07:11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14장 ‘신체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으며, 이건 <에티카> 핵심정리가 아닐까 싶었다. 아마, 다른 장을 읽어도 비슷한 느낌이 들 것이다. 스피노자의 주석서들이란 결국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여러 버전으로 설명해주는 것일 거다. 그러니, 우리는 너무 쫄지 말고, 다양한 버전의 설명들을 참고하면 된다.

    이상으로부터 윤리적 물음의 중요성이 나온다. 우리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모른다고 스피노자는 말한다.(3부 정리2 주석)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가 어떤 변용들을 할 수 있는지, 우리의 역능이 어디까지 미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어떻게 우리는 그것을 미리 할 수 있는가? 우리 실존의 시작부터, 우리는 필연적으로 수동적 변용들에 의해서 실현[충족]된다. 유한 양태는 사전에 그것의 본질 혹은 <역능의 정도>로부터 분리되고 그것이 할 수 있는 것, 그것의 능동[활동] 역능으로부터 분리되는 그대로의 조건들에서 태어난다. 우리는 추리를 통해 능동[활동]역능이 우리의 본질의 유일한 표현, 우리의 변용 능력의 유일한 긍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앎은 추상적인 것으로 머문다. 우리는 그 능동[활동] 역능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그것을 획득할 수 있는지 혹은 되찾을 수 있는지 모른다. 능동적으로 되려고 구체적으로 시도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것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에티카>는 다음과 같은 점을 환기시키며 끝을 맺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수동적으로] 감수할[작용받을] 때만 실존한다고 느낀다. 그들은 감수함으로써만 실존을 생각한다; “(무지한 자는)감수하기를 멈추는 순간 동시에 존재하는 것도 멈춘다.”(5부 정리42 주석)(306쪽)

    분명, 발제에도 이 부분이 나올 거지만, <에티카>의 핵심을 들뢰즈는 이런 멋진 표현으로 압축적으로 설명해준다. 스피노자의 <에티카> ‘윤리학’은 결국 유한양태들의 윤리학이다. 실체의 능력을 분유 받은 우연적 존재(유한양태)들이 수동/능동 변용능력을 펼치는 필연의 세계의 이야기이다. 수동/능동의 비율처럼 우연/필연의 비율도 있다. 수동이냐, 능동이냐, 우연이냐 필연이냐가 아니라 ‘비율’의 개념을 가져다준 들뢰즈에게도 감사하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코나투스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자연철학적으로 그것은 신체가 운동하려는 경향을 지칭한다; 형이상학적으로 그것은 본질이 실존하려는 경향을 지칭한다. 스피노자에게는 그럴 수가 없다; 양태의 본질은 “기능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 것도 결여하지 않으며, 해당 양태가 실존하지 않을 때조차 그 자체 있는[그것의 ~임] 그대로 전부이다. 따라서 그것은 실존으로 이행하려는 어떤 경향도 내포[함축]하지 않는다. 코나투스는 정말로 양태의 본질(혹은 역능의 정도)이지만, 일단 양태가 실존하기 시작한 뒤에 그렇다. 한 양태는 외연적 부분들이 그를 특징짓는 관계 아래 들어가도록 바깥으로부터 결정될 때 [우연히] 실존하게 된다: 그때, 오직 그 때만 그것의 본질 자체가 코나투스로서 결정된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 있어 코나투스는 일단 실존이 주어진 뒤에 그 실존을 고수[고집]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그것은 본질의 실존적 기능[함수]을, 다시 말해 양태의 실존에서의 본질의 긍정을 지칭한다. 그래서 우리가 실존 물체를 고려하면 코나투스는 운동하려는 경향일 수도 없는 것이다. 단순 물체들은 바깥으로부터 운동하도록 결정된다; 만일 그것들이 똑같이 [바깥으로부터] 정지하도록 결정될 수 없다면, 그것들은 운동하도록 결정될 수 없을 것이다. 스피노자에게는 정지 역시 어떤 것이 아니라면 운동은 아무 것도 아닐 것이라는 고대의 테제가 변함없이 되풀이된다. 단순 물체의 코나투스는 그에게 결정지어진 상태를 보존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합성 물체의 코나투스는 그를 정의하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보존하려는, 다시 말해 항상 새로운 부분들을 그의 실존을 정의하는 그 관계 아래 유지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312)

    이 부분도 ‘양태’에 대한 탁월한 설명이라는 생각이 들어 옮겨본다.

  • 2024-05-11 07:15

    9주차 메모

  • 2024-05-11 07:23

    조금 더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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