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바턴에게 배운 것들

겸목
2024-04-20 23:49
33

나는 진실한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작가를 좋아한다. (중략)하지만 그 순간 나는 그녀가 자신의 책에서조차 진정한 진실은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기 이름조차 제대로 말할 수 없지 않았나! 하지만 나는 그 점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59쪽)

 

나는 그녀가 쓴 책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녀가 뭔가를 피해 비켜서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215쪽)

 

 

『내 이름은 루시 바턴』에서 ‘나’가 작가 세라 페인에 대해 진술하고 있는 부분이다. ‘나’는 세라 페인을 좋아하지만, 그녀의 글에서 그녀가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중요한 결격사유를 찾아낸다. “뭔가를 피해 비켜서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면, 세라 페인은 통념상의 ‘좋은’ 작가가 아닐 수 있고, 그녀의 글을 읽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라 페인의 글에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회피의 기록, 또는 실패의 기록을 ‘나’는 왜 좋아하는 것일까?

 

 

“세라 페인은 항상 무대에 능해요.” 그의 말에서 호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혼자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 도시에서 참 오래 살았는데, 그날 밤엔 이 도시를 사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정확히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이유를 거의 말할 수는 있었겠지만,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날 밤부터 이 이야기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의 부분 부분을.

나는 써보기 시작했다. (114~115쪽)

 

 

이것은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르다. 나는 무언가를 ‘알게’ 되어서 글을 쓴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얼마나 진실에 가닿았는가가, 그 글의 가치와 작가의 진정성을 담보해준다고 생각했다. 소설 속 ‘나’는 정확히 말할 수 없어서, 그 이야기를 써보기 시작한다. 음....그렇군! 알지 못하기 때문에 쓰기 시작할 수 있다니! 이건 희망적인 메시지다. 그간 글을 쓰지 못했던 건, 잘 알지 못해서, 정확히 알지 못해서, 쥐뿔도 알지 못해서.....라는 심리적 허들을 넘지 못해서였다. 잘 몰라서 탐색을 시작할 수는 있지만, 그것에 대해 ‘뭔가’ 쥐어지는 것, 장악한 것이 있어야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것 없이 쓴다는 건 무책임하고, 무용하다 생각했다. 끝까지 생각을 하고 사태를 꿰뚫는 일은 어렵다. 어느 정도 선에서 ‘절충’이 필요한데, 여기까지가 내 최선이라는 마지노선을 드러내는 일이 나는 부끄러웠다. ‘고작 이걸!’ 이라는 자괴감이 나의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는 문턱을 만들었다.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글을 시작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니! 우선, 반갑다.

 

그런데 나는 이것을 정말 몰랐을까? 소설에서도 반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 그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절대 알지 못하며, 앞으로도 절대 알 수 없을 것”(157쪽)이라는 점이다. 이걸 세라 페인은 멋지게 표현한다. “평가 없이 빈 종이와 마주하라”고. 작가인 ‘나’도 비슷한 표현을 남겼다.

 

 

내 마음이 갑자기 어둠에 대한 앎으로 너무 깊어 나도 모르게 소리가 터져나올 것 같고, 그러면 나는 가장 가까운 옷가게로 들어가 낯선 사람과 새로 들어온 스웨터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아마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도 이렇듯 반쯤은 알게 반쯤은 모르게, 사실일 리 없는 기억의 방문을 받으면서 세상을 이런 식으로 어찌어찌 통과해나갈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공포라는 감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보도를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이 어떤 마음인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삶은 아주 많은 부분이 추측으로 이루어진 듯하다. (21~22쪽)

 

스무 살 이후 대학에 가며 집을 떠나온 ‘나’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엄마가 병간호를 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다. 일평생 다정한 말 한 마디 없었던 엄마에 대해 ‘나’는 서운함, 불편함, 미안함뿐 아니라 친밀함과 사랑까지 느낀다. 이런 복잡한 감정은 엄마의 죽음의 순간까지 계속된다. 임종을 앞두고 엄마는 딸에게 ‘가라’고 말한다. 이건 냉정함으로도 다정함으로 독해될 여지가 있다. ‘나’가 부모와 함께 고향에 남은 오빠와 언니에게 느끼는 감정도 비슷하다. 그들을 배신했다는 미안함과 돌보지 못했다는 애틋함도 있지만, 작가로 살아가기 위해 글을 쓸 시간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에 형제들에게 소홀했음을 자책하지만도 않는다. 이혼한 전남편과 자식들에 대한 감정도 그렇다. 그들에 대해 전부 알지 못한다는 사실과 많은 부분 자신의 추측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인정한다. 그래서 이건 추측에 불과한 ‘나-루시 바턴’ 개인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건 루시 바턴뿐 아니라 모두의 조건이기도 하기 때문에 ‘모두’의 이야기가 되는 역설이 만들어진다. ‘루시 바턴 버전’의 이야기이지만, 모두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 것이다. 모두의 이야기는 ‘모두’라는 ‘추상’으로 이야기될 수 없고, ‘루시 바턴’이라는 한 개인의 구체적 인 이야기로만 진술될 수 있다. 여기에도 그간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나만의 고유의 이야기여야만 이야기될 만한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개인의 이야기면 그것은 이야기될 만한 자격이 있다는 말로 독해된다.

 

이런 발견이 나에게 힘이 된다. ‘나의 이야기는 너무 평범해. 별다른 것이 없어’ 라고 과소평가하게 되는 마음을 눌러준다. ‘그냥 나의 이야기를 해보자.’ 그것이 진실에서 비켜서 있어도, 무언가를 회피하고 있는 듯해도, 그 회피와 실패가 음영으로 말해주는 바를 사람들은 읽을 수 있다. ‘나’의 이웃 몰라가 내가 모르는 영화 이야기를 계속함으로써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에는 공백을 포함하고 있다. 그 공백을 가지고도 메시지는 전달된다.

 

하지만 가장 생생한 기억은 해가 지면서 햇빛이 근처 빌딩들, 브롱크스 지역의 빌딩들에 가 닿던 장면이다. 그렇게 햇빛이 그 빌딩들을 비추고 나면, 이어 여기저기 도시의 불빛들이 켜지기 시작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내 앞에 그 세상이 돌연 펼쳐진 것 같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다. (203쪽)

 

 

도시의 불빛들이 켜지면서 거기서 시작될 이야기를 궁금해 하는 일, 그걸 함부로 추측하고 평가하지 않는 일, 그걸 계산 없이 마주하는 일. 말이 쉽지 어려운 일이다. 그럴 수 있을까? 그러기를 원하는가? 물음표를 두려워하지 말고 껴안아보자. 날 잡아먹지는 않을 테니. 모르면 써본다. 여기가 출발점이다.

 

댓글 1
  • 2024-04-22 19:56

    '나'란 누구일까?
    '나'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것일까?
    저에게도 지난 몇 년간 제일 궁금했던 거예요.
    결국은 '모르겠다, 내가 나에게 가장 어두운 심연이다' 였어요.
    몰라서 글을 쓴다니.. 맞아요. 루시바턴에 저 대목도 있었죠!
    나도 모르겠으니, 쓰긴 써야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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