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7일] 8주차 <스피노자 윤리학 수업> 세미나 공지

겸목
2024-04-25 12:07
56

 

 

 

 

<스피노자 윤리학 수업> 가운데 7~10강까지 세미나합니다. 7강 8강이 3부를 주요하게 다루고 있지만, 9강도 수동에서 능동으로 이행할 수 있을지 다루고 있는 점에서는 3부 연관성이 많네요. 10강은 <에티카>의 결론이기도 하고 5부의 내용을 아주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에티카>의 기획을 살펴보는 데는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이렇게 4주에 걸쳐, 아주 엉성하게 <에티카>를 수박 겉핥기해봅니다. 이래서 남는 게 뭐가 있을까?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에티카>에 대한 입문코스라 생각하고, 감정을 좀더 다층적으로 이해해보는 루트도 생각해보시면, 우리가 보낸 4주도 나름 '알찼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거예요.

 

 

발제는 정의와미소님과 윤경샘이고, 메모는 경덕, 라겸, 겸목입니다. 금요일 오후 10시까지 공지글에 댓글로 발제와 메모 남겨주세요. 간식과 청소는 윤경, 스프링, 언희, 유상샘입니다. 이번주 세미나가 끝나면, 우리도 한 주 휴강(5/4)이네요. 한 주 쉰다는 생각으로 기쁜 마음으로 오세요~

 

 

댓글 6
  • 2024-04-26 22:07

    내일 발제 올립니다.

    ㅎㅎㅎㅎㅎ 겸목샘이 링크를 하나만 주셔서 후기에 발제를 달아버렸네요..

  • 2024-04-26 22:55

    "다수의 물체들이 서로 간에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관게 내지 비율을 유지할 때, 그 물체들은 하나의 개체를 구성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192) 개체는 본성상 관계론적인 개체입니다.개체를 개체로 만드는 것, 즉 개체의 본질 내지 형상은 바로 그 개체를 구성하는 부분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일정한 운동과 정지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194)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를 본질로 하는 것은 단지 생명체만이 아니라, "각각의 모든 실재"라고 말합니다.(197)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를, 우리가 보통 개체라고 부르는 것에게 고유한 것으로 한정하지도 않습니다. 국가와 같은 집합적인 실재도 코나투스를 갖고 있으며, 지구 전체도 자기 나름대로의 코나투스를 계속 발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코나투스를 좁은 의미의 의식적인 노력이나 지향적인 추구 행위로 한정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198) 외부 원인에 의해 파괴되지 않는 한, 각각의 독특한 실재가 지닌 이러한 코나투스는 무한정하게 계속되는 것입니다.(199)"

    >> 스피노자에 의하면 개체는 다수의 물체들의 집합적 실재를 말합니다. 국가도 지구도 개체이자 실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노력으로서의 코나투스는 유기체 뿐만 아니라 무생명체들도 공유하는 특성이라고 합니다. 개체의 본질이 개체의 구성물들 사이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라고 하는데, 그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요? 그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인간의 인식 능력을 1,2,3종 인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운동과 정지의 비율이 개체인 것도 개체가 아닌 상태도 있을까요? (예를 들어 경계를 분명하게 그을 수 없는 구름이나 바람과 같은 대상들?)

  • 2024-04-27 03:23

    7,8장 발제문 올립니다.

  • 2024-04-27 06:45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공통통념(2종인식)을 실천철학의 관점에서 재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합니다. 하여 공리같은 수학적 의미의 공통 통념보다 어떻게 능동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의 ‘실천적 관점(수동정서로서의 기쁨의 전략적 이용)’에서 2종 인식을 사유하려 했지만(291), 그러나 이는 생각보다 강력한 정서적 고착의 힘을 간과한 것(293~299)이라고 진태원샘은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대상의 평범화' 전략과 '1종 인식을 이용해 다른 원인을 고려하는' 전략(300)을 추가로 제시합니다. “우리 본성과 상반되는 정서(슬픔의 계열)들을 겪지 않는 동안 우리는 '지성을 따르는 질서'에 의해 신체 변용들을 질서 짓고 연관시킬 수 있는 능력(기회)을 갖게” 되니까 말이죠. 이른바 수동적 정서로써 수동적 정서를 넘어 2종 인식으로 가는 방법입니다.

    하여, 평범한 우리를 2종 인식으로 안내하는 이런 '올바른 삶의 규칙(지성을 따르는 질서, 공동사회에서 따라 나올 수 있는 좋은 것에 관한 원칙)'은 명령에 복종하는 형식이기는 하지만 인민 전체의 안녕을 위한 국가(주권자)에게 복종한다는 점에서는 노예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308)고 저자는 설명하면서, 올바른 삶의 규칙을 '좋은' 공동체의 원칙에 따르는 것으로 정의내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는 이런 '정치(국가)'를 구성하는 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하냐는 정치적인 문제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 대부분은 수동적 정서에 예속되는 존재들이고, 하여 지금과 같은 대의 민주주의 현실에서 최상의 덕과 지혜를 가진 사람을 가려내는 것도 힘들지만 대리인 자신의 이익에 헌신하는 대의제의 한계가 고스란히 입증되고 있기에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성을 따르는 질서인 올바른 삶의 규칙은 도대체 뭘까요? 아니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요? 개별자들이 일상에서 자기 배려처럼 스스로 실천해야 하는 문제인 걸까요.

  • 2024-04-27 07:13

    (가족을 넘어선) 사회관계는 적어도 가장 심층적인 동기에서만큼은 효용주의적인 계산에 의거하지 않는다. 근본동인은 오히려 명예욕인데, 이 욕망은 “무사심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이익”으로 환원되지도 않는다. 그리고 명예욕으로부터, 공동체의 접합제 구실을 하는 과시적 증여와 같은 관대함이 새겨나며, 역으로 위신을 얻기 위한, 또 위신을 목적으로 권력을 얻기 위한 끊임없는 경쟁도 생겨난다. 여기에 토지소유를 둘러싼 첨예한 갈등이 더해진다. 하지만 상호간의 긴장은 항상적인 적선의 관행을 통해 부분적으로 상각된다. 종교적 차원에서도 동일한 동기에서 동일한 귀결이 뒤따른다. 곧 종교는 신자들에게 선행과 자비를 훈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재판과 십자군으로 세상을 피로 물들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후견관계나 봉신관계와 같은 사적인 충성관계가 맺어지는데, 여기에서 제후는 이런저런 정도로 신성화된다. 하지만 가신이 질투에 빠지게 되어서든, 제후가 압도적인 구속력을 잘 발휘하지 못해서든, 이 관계도 이내 퇴락한다. 그리하여 다른 한편, 사적인(혹은 개인이 가문에 결속되어 있는 이상, 가문 간의) 복수의 원칙이 지배하는 주기적 내전이 일어난다. 물론 주기적 휴전도 있지만 이것도 아주 잠깐밖에 지속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 교역의 싹이 출현하며, 이렇게 하여 효용주의적인 동기는 좀더 확장된다.
    여기서 우리가 유럽 봉건 사회의 몇몇 측면을, 그것도 상당 정도로 목격하고 있다는 인상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겠는가? 권력의지가 전적으로 계산에 의거하는 홉스의 인간은, 맥퍼슨 식으로 말하자면 “소유적 상업사회”의 인간일 것이고, 일상어로 말하자만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일 것이다. 그런데 스피노자에게서 정념에 사로잡힌 인간은 그대로 놔둘 경우 봉건적 인간처럼 처신한다. “부르주아”란 이런 인간의 뒤늦은, 그리고 취약한 변양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은 우리가 이미 커다란 윤곽을 그린 바 있는 어떤 인공적 조견형성을 통해서만 영속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비록 민주적이지는 않더라도 광범위한 규모로 이루어지는 집단통치, 교역을 최대한 자극하는 소유제 및 여타의 제도들, 관용적이며 순전히 윤리적이기만 한 비미신적 종교를 체계적으로 진작시키는 교회제도 및 여타의 제도들을 통해서 말이다. 더욱이, 이렇게 함으로써 정념적 소외는 전위되고 정비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비록 부르주아가 처한 조건이 내적 해방에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해도, 여하간 봉건적 인간의 진정한 극복을 실현하는 자는 부르주아가 아닌 스피노자주의 철학자이다. (마트롱,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 5장 정념적 삶의 토대와 전개, 317~319쪽)

    연민-명예의 야망-지배의 야망-시기심-연민
    적선-과시적 증여-압제-수탈-적선
    간접적으로 좋은 슬픔-기쁨-간접적으로 나쁜 기쁨-슬픔-간접적으로 좋은 슬픔

    군주정-봉건제/귀족정(과두제)-민주정

  • 2024-04-27 07:47

    8주차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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