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생프로젝트 시즌1-3강 후기

고은
2021-03-19 10:46
366

 

하루를 잘 버틸 수 있을까 엄청난 긴장과 부담을 안고 갔던 첫 오프라인 세미나..

였는데 역시 생각대로 잘 버티지 못하고 2교시에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강의를 거의 못들어서 후기를 쓰는게 괜찮을까 싶었는데, 괜찮다는 조장님 말씀 듣고 늦게나마 올려봅니다.

 

 

헤러웨이와의 첫만남

  OT 시간에 자기소개를 하면서 동양고전과 근래 페미니스트들의 이론을 연결시켜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거창한 작업을 해낼 수는 없겠지만, 이번에 세미나를 하면서 제 눈에 띄는 것들을 좀 포착해두고 싶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참, 현민이 메모에서 동양고전의 공/사와 헤러웨이의 공/사를 직접적으로 연결시켜서 이야기를 썼던데, 해당 조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궁금하네요. 그 둘을 바로 직결시키는 게 가능할까요?)

  <사이보그 선언>을 읽으면서 제 눈에 들어왔던 건 헤러웨이가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이었습니다. 저에겐 우리 또래에게 혹은 오늘날 담론에서 아이러니, 이분법에 대한 이야기는 익숙하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저는 어쩌다 헤러웨이가 아이러니, 이분법에 대해 말하게 되었을까? 그게 왜 오늘날 독자들에게까지 의미가 와닿게 되었을까?가 궁금했습니다. 그것을 <사이보그 선언>에서는 대표적으로 현실-허구를 통해 이해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타일로 사상을 드러내는 헤러웨이(?)

  헤러웨이는 <사이보그 선언>의 첫 파트에서 사이보그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갑니다. <선언> 답게 미괄식이 아니라 두괄식의 서술이라 속 시원한 느낌이었는데요. 그래서 또 첫 부분에 등장하는 정의를 잘 풀어 읽는 게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이보그는 그 이름에서부터 그리고 헤러웨이의 정의에서부터 잡종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풍깁니다. 

  - Cybernetic(기계) + Organism(유기체)

  - Fiction(허구)의 피조물 + Social reality(사회현실)의 피조물

  - 세상을 바꾸는 허구 + 삶 속 경험

  - "나는 이러한 사이보그가 우리 사회적 신체적 현실의 지도를 그리는 허구이자, 매우 생산적인 결합의 가능성 또한 제시하는 상상적인 자원이라고 주장하려 한다."(19)

  대개 fiction과 real은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사이보그는 이 둘 모두를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사이보그의 기원(서구적 기원의 허구에서 탄생했다는 현실), 현 위치(경계 사이의 존재가 허구로 느껴지는 현실), 그것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도래하지 않은 위험한 가능성 그 자체인 현실)에서 모두 허구와 현실의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과학자인 헤러웨이가 허구로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 재밌었습니다. 그것은 헤러웨이가 과학자임에도 사실이 아닌 비유 혹은 은유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점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듯 보였습니다.

  둥글레 쌤이 메모를 읽고 덧붙이셨듯, <사이보그 선언>을 쓴 헤러웨이 자체가 사이보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뭐랄까.. 헤러웨이가 사실-은유를 만나게 하며 글을 쓰는 것처럼, 현실-허구가 만나는 현실을 인식하는 것처럼, 사이와 경계를 횡단하는 삶 자체를 그리고 있는게 아닌가? 헤러웨이가 이 책을 통해 줄곧 비판하고 있는 서구의 이분법을 넘어선 어떤 삶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이 책은 이론서라기 보단 삶의 한 방식 그 자체를 보여주는 책이 아닌가? 헤러웨이의 아이러니와 이분법에 대한 이야기가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 역시, 은유와 허구를 적극적으로 삶에 가지고 들어왔기 때문이 아닌가?.. 글을 쓰고 세미나를 하며 이런 질문들이 생겼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이것이 저에게 매력적이었던 건, 헤러웨이가 문제에서 적당한 거리를 두기 보단 적극적으로 문제에 자신의 삶-글쓰기를 밀착시켜버린다는 지점이었습니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는 (...) 본질주의적 이론의 생산에 큰 책임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라는 말 뒤에 곧바로 "하지만 내 생각에는 책임이 얼마쯤 있었던 것 같다"고 덧붙이는 것. 또 이것이 가져다줄 "대안적 권력과 기쁨"을 이야기하며 "경계를 구성할 때의 책임"(19)을 논해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 이분법의 문제를 전방위적으로 자신의 글쓰기 스타일 혹은 현실을 인식하는 스타일로 가져와 일단 부딪혀본 것.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내가 다시 책임을 지게 될 수 있음에도 일단 나부터 해보는 것. 이것이 여성 사상가가 가지고 있는 어떤 힘이 아닌가..하는 감탄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때 엄청난 신자, 엄청난 페미니스트였던 사람들의 헤러웨이 독법

  세미나에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허구의 문제를 훨씬 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현실에 존재하는 가상 존재들을 생각하면 픽션이 현실이라는 이야기가 훨씬 더 잘 와닿더라구요. 그리고 아마 이 부분에서 문탁 선생님께서 제가 허구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오독"했다고 말씀하시는 부분도 이런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 책에서 제 경험을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와 같이 메모를 하신 둥글레쌤은 이 책을 진짜 경험적으로 읽으신 것 같아서 신기했습니다. 헤러웨이는 23~25살에 파리에서 인도차이나 전쟁을 목격하며 정치적 진보 입장을 취하기 전까지 보수적인 정치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엄청난 가톨릭 신자였던 헤러웨이는 어머니의 친구가 원장으로 계시는 수녀원에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었을 정도, 낙태죄를 반대하고 사회주의 사상에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을 정도였다고 해요. 절실한 신자이셨던 둥글레쌤은 책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종언어"나 "페미니스트 방언", "여신보다는 사이보그가 되겠다"는 말을 거의 본인 경험에 입각해서 생생하게 풀어내주셨는데, 재밌었습니다. 젊었을 적 페미니스트들에게 "너는 왜 남성 신을 믿냐"는 질문을 받고 "나는 신이 남자라 믿는게 아니다"라는 대답을 하셨다고 하네요ㅋㅋ 

  강의에서 문탁 선생님은 페미니즘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의 문제를 헤러웨이가 이 책에서 해소하고 있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녀의 급진적 이론은 극단적으로 총체화시키는 이론이다." (다음 책에서)종간의 연결을 이야기할 과학자가 계속 페미니스트이기 위한 작업을 이곳에서 닦았다고 볼 수도 있을까요? 저도 OT에서 페미니스트라고 손을 들긴 했지만, 언제나 스스로 페미니스트인가 혹은 페미니스트여야하는가 하는 질문을 품고 있습니다. 정체성 정치의 한계점을 돌파하면서도 페미니스트로 남아있는 헤러웨이의 이후 저작들이 궁금해지네요.

 

 

댓글 1
  • 2021-03-19 13:28

    책에서 자기 경험을 발견하지는 못했다고는 했지만

    자기 문제와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연결하려고 했던 고은이의 고심은 느껴지더만요.

    재밌게 같이 공부해봅시다.

    해러웨이.. 오랜된 책인데 나한텐 신박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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