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야전과 영원 1부2장13절 대타자라는 죽음의 정령_앞부분

바람~
2014-10-20 00:43
322

야영해석정리 1213

 

13절 대타자라는 죽음의 정령, 시니피앙 연쇄의 끝에_앞부분(112~117쪽)

 

우리의 결론은 이렇다. 시니피앙의, 그리고 그 연쇄효과로서 시니피에가 미끄러져 떨어져 탈락하여 없어지는 그 순간에, 그 작은 틈에서 찰나의 잔광처럼 나타나는 것이 주체이다, 라고. 실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의 가로선의 저항으로서라기보다 앞서 인용했던 문언처럼 부유하는 시니피앙과 흘러나오는 시니피에와의 현실의 경계(bord)로서, 한순간만 출현하는 것, 이것이 주체이다. 주체를 표상하는 것, 시니피앙. 이 연쇄의 타오르는 듯한 환유적 욕망 속에서 차례차례 당겨진 끝에, 구두점이 찍힌 한순간에 하나의 통합 단위가 결정되어 소급적으로 출현하는 표상, 그것이 주체다. 한순간만 출현하고는 사라지는 주체. 그렇다, 라캉은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은가, 스스로의 소실(aphanisis)을 동반하지 않는 주체 따위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그러나 그 주체는 뜻하지 않게 문자의 탈락을 깨닫고, 다시 환유의 실을 더듬어 찾는 강박반복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 시니피앙은 다른 시니피앙을 마주하여서/에 대해서 주체를 표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양태에서인가.

 

그것에 대해서는 이 약간 우습게도 보이는 화장실도식을 보자. 이 그림은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가. 직역한다. 이 도식이 상징화 하고 있는것은, 오줌의 격리 규칙에 공공생활을 따르게 하는 지상명령, 대다수의 원시공동체와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이 지상명령이다. 오줌의 격리 규칙이다. 여기는 웃을 데가 아니다.(195) 왜냐하면, 마침 역에 들어오는 열차 안에서 마주보고 앉아있는 어린 남매가, 역의 플랫폼에 있는 이 그림과 같은 광경을 접하고서, , 부인이야」 「바보야, 남자야. 보이지 않아?라고 말다툼을 하는, 그런 작은 에피소드를 더구나 같은 페이지에서 중복하는 것에 의해, 라캉이 여기에서 무언가를 시니피앙이라는 개념에 밀수하려는 것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명백하다. 성별에 얽힌 상징적 규칙이라는 가치이고, , 여라는 말이 시니피앙이라는 것이고, 더구나 그것은 남-여와 시니피앙 연쇄에서만 작용한다는 것이다. 실로 이 그림은, 가벼운 웃음과 다소 해학을 섞어 라캉이 살짝 더한, 소쉬르에 대한 결정적 변경을 나타내는 것이다. 라캉은 낮과 밤도 시니피앙이고, 상호 대비에서만 성립한다고 하는 의미를 말한 뒤에, 똑같이 남과 여시니피앙이라고 말하고, 그것은 수동적 태도인지 능동적 태도인지그런 것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또 남과 여라는 구별은, 새롭게 주어진 것이라 해도 경험에서 이끌어낸 것이 아니라, 그 개인에게 시니피앙의 체계가 이미 주어져 있기때문에, 사람은 남과 여로서 스스로를 아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 여자라는 시니피앙은 남자라는 시니피앙에 대해서 주체를 표상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시니피앙의 수준에서는 그렇다. 시니피앙에는 차이만 존재한다. 다른 시니피앙에 대해서/대신하여서 주체를 표상하지 않으면 시니피앙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시니피앙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버리면 그것은 어떤 의미도 될 수 없다. 따라서 라캉은 거기에 연쇄, 유동성을, 그리고 욕망을 도입하려고 한다. 나는 여자다」 「나는 남자다, 이것은 참으로 어떤 대비 아래에서, 차이 아래에서 주체를 표상한다.

 

그리고, 라캉이 말하는 완전히 참된 시니휘앙은 그 자체로는 무엇도 의미하지 않는 시니휘앙이다라는 말의 의미도 여기에서 역설적으로 명확해진다. 전혀 무엇도 의미하지 않는 시니휘앙이라고. 전혀 무엇도 의미하지 않고, 주체를 다른 시니휘앙으로 표상하는 것. 그것은 어떤 말이 될까. 환유의 구조에 있어서도, 적어도 어떤 시니휘앙의 환유의 실을 끌어당겨가는 열광다른 것에로의 욕망을 허무하게도 그 응시에 의해 의미해버린다그것이 공허한 말의미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고 할 것이고, 은유란 원래 섬광 같은 일순의 것이라 해도 시인의 창조이고, 완전한 의미의 창출이었다는 것이 아닐까. 어떤 시니휘앙이 다른 어떤 시니휘앙에 대한 주체의 표상이 진짜 시니휘앙, 그 자체로는 전혀 무엇도 의미하지 않는 시니휘앙일 것인가. 단적으로 말하자. 그것은 나는 나다이다. 더 말하자면 구약성서에 있는 신의 대사 나는 있어서 있는 자이다가 그것이다.(199) 훌륭하기까지 한 무의미한 언명이다.(200) 당신은 나의 남편이다보다도, 아내다보다도, 스승이다보다도, 빛이 있으라보다도, 훨씬 치명적으로 공허한 말이다. 이것이 우리의 2상징계의 결론인 것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아직 결론의 때가 아니다. 게다가 문제가 남아있다. 1상징계에서 우리의 약속의 진리를 보증하는 제3자로서 제기되고 있던 대타자, 빛이 있으라고 정초적인 말을 하는 진리의 장소이면서 인 대타자는 여기서 어떻게 되어가는 것일까. 1상징계에 있어서는 거기서 듣고 있는 사람과 내가 함께 구성되어 가는」 「3자로서의 대타자, 시니휘앙의 보고(宝庫)이고 말의 계약성실의 보증인이었을 대타자는.

 

우선 이 대타자와 주체와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거기서부터 보자. 그것은 단적으로 욕망이다.(205) 주체가 욕망하는 것은 항상 욕망의 욕망」 「대타자의 욕망이고 자신의 욕망을 승인시키는 욕망이었다. 대타자는 무엇을 원하는가. 주체는,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주체이고, 즉 대타자의 욕망에 승인되는 것을 욕망하는 주체이고, 그것에 따라서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을 성취하려고 하는 주체이다. 스스로의 욕망이, 대타자의 욕망인 것처럼. 스스로의 욕망이, 진리의 욕망인 것처럼. 그 자체가, 스스로의 진리를, 진정한 자신을 욕망하는 것인 것처럼. 끝내 찾아낸 그 자기의 진리가 대타자의 욕망이기도 하고 그 승인 아래에 있는 것처럼. 무한 욕망의 초점 맞추기가 거기에 있고, 그것은 라캉이 시니피앙 연쇄의 환유적구조라고 부르는 것과 완벽히 일치한다. X라고 하는 시니피앙이 주체를 표상한다고 한다. 그것은 다른 시니피앙에 대해서/다른 시니피앙을 향해서 밖에 주체를 표상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무한하게 미끄러져간다. 나는 X이다, 라고 말할 때의 X의 무한의 스쳐감과 유출속에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것이고, 이것이 있기에 나는 나다. 그렇다, 이것으로 있는 나는 나다. 그러나 그것을 보증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이것이고, 이것으로 있는 나는 나다, 라고 말하는 나다, 를 보증하는 것은. 나는 이것이고 이것으로 있는 나는 나다, 라고 말하는 나는 나다, 라고 말하는 나는 나다, 라고 말하는, 나는, 나는 ······.  겨우겨우 무한히 계속하게 되는 이 공허한 시니피앙의 게임이, 대타자의 선명한 나는 나다」 「있음으로 있는 존재와 겹쳐진 순간, 그 절대적인 보증과 승인의 순간, 너는 이것이다」 「너는 너다」 「너는 X라고 하는 최후의 언어가 스스로의 욕망과 겹치는 순간을, 주체는 끝없는 시니피앙의 연쇄속에서 강박적으로 되살리려고 하는 것이다. 명백하게 헤겔적인, 이라기보다 코제브의 해석아래에 있는 헤겔적이라고 말할만한 이 대타자와 주체와의 욕망의 변증법은 오랜 세월에 걸쳐 라캉의 사고의 틀이 된다. 실제 1962불안세미나에서도 헤겔을 끌어와서 대타자와 주체의 욕망을 중복하여 논하고 있다. 대타자의 향락이라고 하는 다른 양태를 갖는 것에 대해서 기술한 이후, 74년의 세미나 속여지지 않는 것은 방황안에서도 반복해서 주체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다」 「주체는 대타자 안에 이미 스며 있다라고 말하고, 그 욕망의 뒤엉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195) 지금, 라끄 라바르트와 낭시는 이 한 문장에 주의 깊게 엮어진 애매함을 보고 있다. 필자는 필요 없다고 건너뛰었지만, 그들이 말하는 것에 의하면, 실은 상징화(symbolise)의 목적어로 취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르는 말이 하나 더 있고, 그것은 단락이지만, 이 앞에 함께라는 전치사가 있어서, 그것에 의해 문의(文意)는 뜻밖의 난해함과 다의성을 가지게 되었다, 라고.

 

(199) 이것은 필자의 독단이 아니다. 라캉은 이하 개소에서 근친간()의 금지를 선명(宣明)하고 명명(命名)을 행하는 아버지있어서 있는 자이고, 하나의 구멍이라고 말하고 있다.

 

(200) 다짐을 위해 확인을. 나는 있어서 있는 자이다가 무의미해서 공허하다는 등은 역사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었고, 헤브라이말로 “‘ehyeh ‘asher ‘ehyeh”, 라틴어라면 “ego sum qui sum”, 영어라면 “I am who am”일 것이고, 이 말을 나는 존재이다라고 읽었다는 점에서 저 소위 존재--(onto-theo-logy)의 팽대해진 역사가 시작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다만, 필자는 이 말을 나는 존재이다라고 의미내용이 있는 것으로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있어서 있는 자이다라고 하는 그 자체는 공허하고 내용 없기 짝이 없는 언명을 굳이 말한다라고 하는 순수한 말의 행위로서 이해하는 점에서, 라캉이 여기서 참된 시니휘앙(우리들이 말하는 방식으로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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