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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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야전과 영원 1부2장15절 -앞부분
(1)
인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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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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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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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 2014.11.09 | 522 |
498 |
단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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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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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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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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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 2014.11.09 | 621 |
497 |
131-132 단어와 해석
(2)
인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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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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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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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 2014.11.03 | 351 |
496 |
[해석] 야전과 영원 1부2장14절 트레 유네르(trait unaire)란 무엇인가
(1)
둥글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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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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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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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글레 | 2014.11.01 | 556 |
495 |
p129 단어
(3)
뚜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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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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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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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버기 | 2014.10.27 | 298 |
494 |
[해석] 야전과 영원 1부 2장 13절 대타자라는 죽음의 정령_뒷부분
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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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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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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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 2014.10.26 | 3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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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8 단어입니다
(4)
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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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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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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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 2014.10.25 | 4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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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야전과 영원 1부2장13절 대타자라는 죽음의 정령_앞부분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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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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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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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 2014.10.20 | 321 |
491 |
야전과 영원 120~121
(5)
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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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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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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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 2014.10.19 | 564 |
490 |
휴대폰이 망가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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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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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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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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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매 | 2014.10.13 | 372 |
489 |
p112~117 단어편집본
(1)
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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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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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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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 2014.10.06 | 381 |
488 |
[해석] 야전과 영원 1부 2장 12절 은유의 「반짝임」
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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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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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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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 2014.10.05 | 692 |
수정한 해석 P115~117 2014년 10월 19일
우선 이 대타자와 주체와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거기서부터 보자. 그것은 「단적」으로 욕망이다. 주체가 욕망하는 것은 항상 「욕망의 욕망」 「대타자의 욕망」이고 「자신의 욕망을 승인시키는 욕망」이었다. 대타자는 무엇을 원하는가. 주체는,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주체이고, 즉 대타자의 욕망에 승인되는 것을 욕망하는 주체이고, 그것에 따라서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을 성취하려고 하는 주체이다. 스스로의 욕망이, 대타자의 욕망인 것처럼. 스스로의 욕망이, 진리의 욕망인 것처럼. 그 자체가, 스스로의 진리를, 「진정한 자신」을 욕망하는 것인 것처럼.
그 끝내 찾아낸 「자기의 진리」가 대타자의 욕망이기도 하고 그 승인 아래에 있는 것처럼. 무한 욕망의 「초점 맞추기」가 거기에 있고 그것은 라캉이 시니피앙 연쇄의 환유적구조라고 부르는 것과 완벽히 일치한다. X라고 하는 시니피앙이 주체를 표상한다고 한다. 그것은 다른 시니피앙에 대해서 / 다른 시니피앙에 향해서밖에 주체를 표상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무한하게 미끄러져간다. 나는 X이다,라고 말할 때의 X의 무한의 스쳐감과 유출속에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것이고, 이것이 있기에 나는 나다. 그렇다, 이것으로 있는 나는 나다. 그러나 그것을 보증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이것이고, 이것으로 있는 나는 나다,라고 말하는 나다,를 보증하는 것은. 나는 이것이고 이것으로 있는 나는 나다,라고 말하는 나는 나다,라고 말하는 나는 나다, 라고 말하는, 나는, 나는 ······. 겨우겨우 무한히 계속하게 되는 이 공허한 시니피앙의 게임이, 대타자의 선명한 「나는 나다」 「있음으로 있는 존재」와 겹쳐진 순간, 그 절대적인 보증과 승인의 순간, 「너는 이것이다」 「너는 너다」 「너는 X다」라고 하는 최후의 언어가 스스로의 욕망과 겹치는 순간을, 주체는 끝없는 시니피앙의 연쇄속에서 강박적으로 되살리려고 하는 것이다. 명백하게 헤겔적인, 이라기보다 코제브의 해석아래에 있는 헤겔적이라고 말할만한 이 대타자와 주체와의 「욕망의 변증법」은 오랜 세월에 걸쳐 라캉의 사고의 틀이 된다. 실제 1962년 『불안』 세미나에서도 헤겔을 끌어와서 대타자와 주체의 욕망을 포개서 논하고 있다. 또 「대타자의 향락」이라고 하는 다른 양태를 갖는 것에 대해서 기술하고 이후, 74년의 세미나 『속여지지 않는 것은 방황』안에서도 반복해서 「주체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다」 「주체는 대타자 안에 이미 스며 있다」라고 말하고, 그 욕망의 「뒤엉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주205
desir(욕망)을 욕망이라고 번역하는 것에 이견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필자는 부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18세기 그리스도교 신비가 생 마르탱은 자신을 「욕망의 인간」이라고 자칭하고, 그것을 전기의 타이틀로 하고 있다. 그것 이외에도 그리스토교 성직자가 이러한 용법으로 이 어휘를 사용했던 예는 많이 있다. 즉 이것은 신을 「소망한다」의 뜻이고, 욕망이라고 하는 어떤 종류의 선입견이 있는 어휘를 사용하는 것은 상응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 의견도 일단은 통한다. 그러나 필자는 욕망이라고 하는 어휘를 선택한다. 그것은 이것이 이미 정착한 번역어이고 그것을 움직여서 멋대로 일을 혼란시키지는 말아달라고 하는 비판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유는 다른 데에도 있다. 그것은 이 제1부의 최후에 자연히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생 마르탱의 전술의 저작은 이렇게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