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 야전과 영원 1부 2장 12절 은유의 「반짝임」

토용
2014-10-05 03:55
692

12절 은유의 반짝임

 

그렇다면, 라캉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 구조로 한 가지 더 든 은유의 구조는 어떠한가. 이것은 라캉이 은유의 공식으로 말하고 있는 하나의 말을 대신한 다른 말이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어휘인 압축이 여기에 중첩되어 있다. 그의 다발은 욕심이 없고, 원한이 깊지 않으며...사랑은 태양 아래 미소 짓는 조약돌이라는 시구가 예로 있는 것처럼, 이것은 시니피앙과 시니피앙을 하나의 말을 대신한 다른 말이라고 하는 은유의 공식에 따라 대신 대입함으로써 발생하는 창조적인 불꽃」 「시적인 불꽃이다. 바로 창작에서 문제가 되어 온 이 은유가, 가로선의 뛰어넘기이고, 시니피앙이 시니피에에 잠입하는 조건이다. 이 때문에 참된 의미가 결실을 맺는다. 실제 라캉은 은유란, 의미가 무의미 속에서 산출되는, 바로 그 지점에 위치를 점한다라고 명언하고 있다. 즉 의미의 창조적인 생산이다. 이것은 시인의 영감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라캉은 정신분석의 결정적 문제세미나의 서두에서, 촘스키가 무의미한 문장의 전형적인 예로 만들어 낸 저 유명한 색이 없는 녹색 관념은 맹렬하게 잔다(Colorless green ideas sleep furiously)조차 어떤 시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아마도 촘스키는 닥치는 대로 시니피앙을 시니피앙으로 바꾸는과정에서 이 문장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뜻밖의 의미를,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의 관계를 불꽃처럼 창조해 버린다. 그리고 필시 그 효과로서 시니피에를. 이 피하기 힘든 사태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은유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일 뿐이며, 시니피에와 시니피앙 관계가 이러한 불꽃에 의해 안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한순간의 출현에 머문다. 라캉은 오히려 결국 여기에서도 시니피에는 시니피앙이 창조하는 효과일 뿐만 아니라, 그 창조된 시니피에도 불꽃처럼 꺼져간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불꽃, 번뜩임이라는 말이 한 페이지 남짓마다 재차 되풀이되고 있는 것은, 그 증거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미리 지적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은유, 시니피앙 연쇄의 시공으로서의 2의 상징계의 이 단계 논지에서, 떠오른뭔가라는 것이다. 물론 이 은유의 정식화는 2의 상징계라고 우리가 불러온 것의 성립에 단단히 결부되어 있고 분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를 들어 라캉은 무의식의 형성물세미나에서, 은유는 환유라는 근본적인 구조가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다고, 마치 은유가 환유의 파생물, 환유에 대한 이차적인 것인 듯한 발언을 하고 있으며, 정신병세미나에서는 환유가 암호라고 한다면 은유는 정초하는 빠롤이다, 라고 극명하게 말하고 있다. 요컨대, 은유는 2의 상징계안 어디엔가 좀처럼 자리 잡기 어려워서, 거기서 어긋남이나 알력을 초래하는 무엇인가를 껴안아 버리고 말았다. 은유란 뭔가 1의 상징계상상계등의 다른 영역에서, 말하자면 밀수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있는 것이다. 시니피앙 연쇄의 끝없는 열광 가져오는 환유와는 다르게, 은유는 제2의 상징계에는 어울리지 않는 뭔가를 지니고 있다. 은유에 의한 이 가로선의 극복이 가로선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 극복이 환유에 영향을 주는 것 따위는 아닌 듯이 쓰여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해서, 리얼리즘이, 그리고 우리의 욕망의 궤도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상징계는 환유가 우위인 세계라고 이 시점에는 말해두자(187). 은유에 관해서는 이 장의 마지막에서 다시 한 번 논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쿠션의 누빔점, point de capiton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할까. 무언가 독자나 청중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꺼내온 것 같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를 거는 것, 그 끝없는 미끄러짐을 멈추게 하는 저 누빔점에 대하여. 그러나 필자에게 이 개념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라캉 자신도, 라캉파의 사람들도, 라캉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결국 이 개념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유동을 멈추게 하는 것이라고 해설하거나, 혹은 오이디푸스와의 관련을 암시하는 라캉을 추종하여 이것은 아버지의 기능이라고 말하는 정도일 뿐이고, 결국 대단한 발전은 기대하지 않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라캉 자신이 어디에선가 분명히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 있는 누빔점, point de capiton은 신화적인 것일 뿐입니다. 하나의 의미작용을 하나의 시니피앙에 고정하는 것은 결코 누구에게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보았듯이 그 자신, 후에 시니피에는 이해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곤경에 빠졌고, 그것과 시니피앙을 고정하는 것이 있다고 말해도 곤란하다. 다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신화적인 것이다, 라고 라캉 자신이 말하고 있다는 것은 머리 속에 넣어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후에 신화의 전문가에 대해서, 우리는 제2부에서 길게 논해야 하기 때문에.

 

확인하면서 나아가자. 시니피앙은 연쇄하고, 유동하고, 환유적인 구조에서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을 품고 계속 나아간다. 그 흐름이 물결치고 멈추는 것이 초래하는 우연한 섬광이, 효과로서 시니피에를 생산한다. 그렇다, 기호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표상하는것과 대조적으로, 라캉은 시니피앙을 다른 시니피앙에 대하여 (혹은 다른 시니피앙의 대신에(pour)), 주체를 표상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고 되풀이해서 서술하였다. 따라서 시니피앙은 시니피에를 표상하지 않는다. 주체를 표상한다. 더구나 다른 시니피앙이라는 준거의 차원을 향하여 표상한다. 마치 라캉의 개념조작이 한 번 번득이면 시니피에는 쇠약해지고, 소실되어 가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만족할 때까지 반복해서 라캉은 말한다. 시니피에는 흘러 나가고끊임없이 시니피앙의 아래로 끊임없이 미끄러져 들어가고있다고. 결국 시니피에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것은 무엇인가?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Jean-François Lyotard]가 일찍이 명쾌하게 라캉론을 쓰고, 그 안에서 시니피에를 결국 주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모르지도 않고, 그것이 합당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191) 시니피앙, 그리고 그 연쇄의 효과야말로 주체라고 우리도 말해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결국 가령 라캉이 불안세미나에서 시니피앙의 효과는 주체의 내부로, 본질적으로 시니피에의 차원을 출현시키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무언가 왜곡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어긋남이 엿보인다. 여기에서 결국 주체와 시니피에가 다른 것처럼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이것으로 좋다. 어긋남은 어긋남대로 놓아두자. 다름 아닌 라캉 자신이 이와 같은 어긋남을 원했기 때문에. 시니피에에 대해서는 그 스스로 알 수 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시니피에, 즉 시니피앙의 연쇄와 주체가 효과로서 만들어낸 무언가, 그것은 상상적인 환상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서술도 있고, 가령 만년의 리테라튀르(littérature)를 읽으면, 뭔가 현실계에도 관계하는 것 같은 서술도 보인다. 그러나 이점에 대해서는 현실계에 대해서 논할 때에 간략하게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자.

 

그러나 국내외를 불문하고 여기저기 보여지는, 시니피에는 요컨대 이미지이다, 라고 하는 이해는 너무 단순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이해는, 소쉬르와 라캉이 함께 시니피에의 장소에 나무의 그림을 그려 보여준 정도밖에 근거가 없다. 필자가 아는 한. 그것은 적어도 소쉬르의 경우는 개념내용이며, 그 그림 자체는 아니다. 라캉의 경우는 이미 논해왔다. 반복하지 않겠다.

 

좀 더 대략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봐왔던 저 문장이 끝날 때에 떨어지는 문자가 시니피에이고, 거기에서 탄생하는 그 떨어진 구멍의 주변을 두루 돌아다니게 강제되는 무언가가 주체이다, 라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우리가 라캉 자신으로부터 끌어내 입증한 대로, 이 문자는 대상a이고, 구멍의 주변을 도는 것은 향락, 잉여향락이라고 불리는 무언가이다. 여기에는 개념의 정치화(精緻化, 정교하고 치밀함)가 있다는 것보다도, 우리가 최초에 말했던 개념의 상호침투, 불균질성이 있다고 하는 쪽이 정확할 것이다. 여기서는 시니피에와 주체와 대상a가 침투해버렸다고. , 여기에는 라캉이 시대에 따라 스스로를 갱신해서 말한 역동이 있다는 것보다도, 단지 라캉은 항상 같은 누락항상 같은 구멍을 꺼내어 설명하는 버릇이 없어지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하는 편이 공정할 것이다. 항상 구멍의 논리, 항상 결여의 논리, 항상 배제의 논리인 것이다. 시니피에든 대상a, 주체이든 향락이든. 실제, 후에 라캉은, 상징계에도 상상계에도 현실계에도 구멍을 마구 뿌리기도 하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도 아무래도 좋다. 우리의 논리 밖이다. 그렇지만, 그가 진실의 구멍이라고 부르는 무언가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좋다 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라캉을 정말로 읽어야할 부분은 거기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을 말하기는 아직 빠르다. 계속하자.

 

 

(187) 물론 저 부성은유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논하는 것도 뒤로 미루자.

(191) 확실히 하기 위해 덧붙여 둔다. 나중에 서술하는 것 같이 시니피앙의 연쇄 안에서 소실해 간다는 특성을 라캉적 주체와 시니피에는 공유하고 있고, 그 유사성은 그렇게 간단하게 끊어버려도 좋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시니피에가 주체라고 하는 이해가 완전히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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