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 야전과 영원 제16절 <거울>이라는 장치

썰매
2014-11-16 14:02
572

제16절 <거울>이라는 장치

 

      간단한 것이다. 별 것 아닌 것이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처음에 거울이 있었으니. 우리의 의론은 거울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 거울의 표면으로 되돌아가 생각해보자. 이미 모든 주를 붙여 상세하게 설명해 왔기에, 일일이 문헌상의 출처를 명시하지는 않겠다. 단숨에 논해보자.

      

      거울 앞에 선 아이. 아이는 거울 속의 자기「전신상」을, 전체 이미지를 알아차리고 환희한다. 아이는 이미지의 세계, 상상계에 참입(參入)하고, 이리하여 상징계의 Fort-Da를, 그곳에서 분석해 온 언어를 갖게 된다. 아이는 이미 이미지의 세계에 들어가 있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언어를 갖는다. 그렇게 우리는 논의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의아하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벌써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이것이 너다」라는 말을, 아이는 벌써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째서 거울에 비친 「이것」이 자기라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이 같은 언명이 없다면 「이것」은 무언가 평평한 표면 속에 비친 무엇인가, 다소 움직이거나 정지하거나 하는 무엇인가, 혹은 숨을 내쉬거나 들이 쉬거나, 핥거나 핥아지거나 하는 무엇인가에 지나지 않는다.「이것이 너다」가 거기에 겹쳐 칠해지지 않으면 애당초 거울 이미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자기의 전체성을 발견하는 환희도 터져 나오지 않는다. 그 환희의 순간, 이미 언어는 거기에 잠입해 버린다.「융합적인 카니발리즘」「포학」으로부터 탈출을 가능하게 하는 원초의 이미지에, 이미 언어는 은밀히 스며들었던 것이다. 언어는 늘 철저하게 그 면에 심어져 있는 것이다. 반복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 때문에 이 기묘하게 빛나는 표면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이렇게 말해보자. 이미지는 이미지가 아니다. 모든 이미지의 토대가 되는 최초의 이미지, 거울의 자기이미지. 그것은 순수한 이미지가 전혀 아니다. 이미지라는 언어가 섞인 무엇인가이다. 순수한 이미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니피앙이 순수한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우리도, 환희할 일은 적겠지만, 매일같이 거울을 보며 그곳에서 자신의 모습을 인정한다.「이것이 나다」. 그렇다. 거기에 있는 것은「나다」. 무미건조한 일상의 차디찬 사실이다. 그러나 이조차 결단코 자명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비친 「나」는 「나」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모른다면 「거기에 비친 사람은 『나』이다」라고 말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역설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당연한 것이다. 그 거울에 비친 이미지가 「진정한 나」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터이다. 그것은 허상에 지나지 않다.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상징이며 가상이다. 「그것은 내가 아니다」. 누가 이 거울 속에 비친 모습 그 자체를 자신의 모습이라고 믿을 것인가. 「그것은 내가 아니」기에「이것은 나」인 것이다. 이것을 모른다면, 예컨대 동물이 거울 뒤에 돌아가 그곳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의아해하는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하게 된다. 혹은 어린아이가 텔레비전 속에「진짜」사람이 있는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그러한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그러나 유년기 한때의 환상으로서 누구나의 기억 속에 새겨져 있을 법한 오류를 범하게 된다. 누가 도대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 그 것, 그 자체가 「나」다 라고 생각할 것인가. 그것은 거울상이다. 따라서 허상이다. 표상이다. 그것은 죽은 것이다. 당연하다. 그것은 나와 다르게, 살아있지 않은 것이므로. 정신분석에서 표상이라고 하는 것은 「텅 빈 신체, 유령, 세계와의 관계인 핏기 없는 악몽, 말라비틀어진 향락」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라캉은 말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 문언을 어떠한 당혹감 없이 이해할 수 있는 지경까지 이미 와 있다. <거울>의 표상은 생기를 머금은 채 어딘지 죽은 사람의 형태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나 그 자체」는 아니지만, 거울에 마주해서「이것은 나다」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이미 순수한 이미지는 아니다. 「나다」「내가 아니다」라는 이중의 말이, 이미 거울에는 포개져 있다. 그렇지 않으면 거울은 기능하지 않는다. 거울이 주는 것은 이미지가 아니고, 당연하지만 거울 그 자체도 이미지는 아니다. 

 

       그렇다면, 이 거울은 무엇인가. 우리 주변에 있는 도구는 아니던가. 그렇다,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한 의미에서의 도구는 아니다. 거울은 보이지 않는 것이므로. 당신이 거울을 볼 때에 실제로 보는 것은 「너다」「네가 아니다」의 이중의 말이 새겨진 이미지에 지나지 않다. 「거울 그 자체」는 아니다. 그렇다면 거울을 뒤집어보자. 그것은 거울이 아니라, 판에 지나지 않는다. 거울의 기능을 다하고 있지 않으므로. 즉 거울은 어떤 초월론적인 기능을 가지도록 구성된 무엇이며, 따라서 그것은 경험의 조건을 설정한다. 거울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보게 한다. 시각상 거기에는 없고, 그러나 거기 없는 것에 의해서만 주체에 대한 존재자의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것. 이것이 거울이다. 따라서, 이 기능을 완수한 무엇인가는 모조리 거울이라 부를 수 있게 된다.

 

       이를테면, <거울>은 하나의 장치인 것이다. 그것 자체는 말도 이미지도 아니지만, 말과 이미지와 단적인 물질로부터, 무엇보다도 말과 이미지의 상호침투로부터 정교하고 치밀하게 구성된 하나의 장치인 것이다. 그리하여,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내가 아니다」. 그것은 표상이다. 이것을 전제하여 비로소 거울의 「이것은 나다」는 성립한다. 이 부분에 어려운 것이 있는가. 반복하겠다. 거울은 단적으로 단순한 현전성(現前性)을, 「지향대상」을 주는 그냥 도구는 아니다. 249 거기에 있는 것은 나는 아니지만 나다, 라고 하는 말과 함께, 우리는 거기에서 우리의 모습을 이미지로서 본다. 거울은, 「나인」이미지와 「내가 아닌」이미지, 그리고 「나다」「내가 아니다」라고 하는 상반되는 두 가지의 말로 잘 짜인 몽타쥬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일치와 불일치를 동시에 산출한다.

 

        따라서 결론은 이렇다. <거울>은 말과 이미지의 불균질한 침투상태로부터 구성된 장치이고, 그 장치는 말과 이미지의 사이에서 어떤 무엇인가를 생산한다. 즉 표상을 생산한다. 주체라는 표상을, 자아라는 표상을, 타자라는 표상을 생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표상은 욕망하고, 광란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논리와는 목적과 어휘조차 다른, 질 들뢰즈가 『의미의 논리학』에서 「거울은 역설적인 심급」이고 「동시에 말이고 물건이고, 이름이고 대상이고, 의미이고 보여지는 것이고, 표현이기도 하고, 지시이기도 하다」라고 성급함을 겁없이 계속해서 말했던 것은 옳다. 들뢰즈=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상징계와 상상계의 사이에는 경계라도 뻗어 있는 것인가」라고 강하게 반문하고, 「상상계와 상징계의 사이에는 어떠한 본성상의 차이도, 어떠한 경계도, 어떠한 한계도 인정할 수 없었다」라고 공공연하게 말한 것은 옳다. 그리고 피에르 르장드르가「나르시스에게 거울은 결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252라고 단언하고,「사회적 거울」의 개념을 잘 매만져 이 거울을 사회 쪽으로 풀어놓는 반면, 일관되게 상상계와 상징계는 분리할 수 없다고 되풀이해서 말했던 것은 옳다. 이 상징적이면서 상상적인 <거울>, 본고의 제 2부는 여기서부터 시작하게 될 것이다.

 

       상상계는 상징계의 뒷면이고, 상징계는 상상계의 안감이다. 여기에 놀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이것이 너다」라는 언표를 최종적으로 보증해야만 했던 결여를 끌어안은 죽음의 형상인 대타자, 그리고 눈앞에서 응고하고 동결되어 매혹하는 죽음의 이미지인 소타자는, 언제나-이미 거울에 존재하고 있다. 상징계는 상상계에, 주체는 자아에, 시니피앙은 이미지에, 욕망의 변증법은 질투의 변증법에, 트레 유네르는 맨 처음의 자기 이미지에, 상징적 동일화는 상상적 동일화에 뜻하지 않게 침투하여, 그 명확한 구별의 선분은 번져서 파선(破線)같은 줄이 생긴다. 시니피에는 주체와 섞이고, 무언가 대상a 같은 경향을 띠며 사라져 간다. 우리는 말했다. 라캉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어떤 종류의 불균질성을, 불확정성을, 혼성성을 갖는다고. 따라서 난해한 것이라고. 그것은 어느 정도까지 논증되었다.

 

(주249 )

우리가 여기에서 규명한 거울과 이미지의 문제계의 오류를, 기호학자 움베르트 에코는 모두 범하고 있다. Umberto Eco, Semiotics and the philosophy of language, The Macmillan press Ltd., London, 1984, p. 216.『기호론과 언어철학』타니구치 이사무 역, 국문사, 1996년, 397페이지. 더구나 영어판에서는 본서 최종장으로 수록된 이 거울에 관한 소론은, 이탈이아어판으로는 독립된 소책자로 출판되어있다.

(주 252)

나르시스의 수면이 <거울>이 아닌 것은, 나르시스가 「이것은 나다」라는 동일화의 언명도, 「이것은 내가 아니다」라는 거울상을 허상이라고 하는 언명도 진정 알아들을 수 없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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