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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밀양은? (2) - 2018 캐나다 학술대회 발표글

문탁
2024-01-31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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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네트워크와 밀양과의 인연은 이제 13년째입니다. 매우 오래되었지요. 작년에는 문탁의 청년들이 감따기 농활을 다녀왔고,  지난 주말에는 또다시 문탁의 학인들이 밀양을 다녀왔습니다. 이번에 함께 간 사람 중에 새롭게 문탁 공부방회원으로 합류한 효주님이 계셨습니다. 효주님은 밀양에 대해서, 밀양과 문탁에 관해서 더 알고 싶어하셨습니다. 생각해보니 최근에 문탁에 접속한 새로운 회원들은 다 그러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좀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밀양과 문탁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두 개의 자료를 다시 새 글로 게재합니다.  하나는 2017년 밀양인문학캠프에서 발표한 동영상이고, 또 하나는 2018년 제가 캐나다 한국학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우리에게 밀양은?>이라는 글입니다. 여기에는 두번째 글을 게재합니다.

 


 

우리에게 밀양은?

- 인문학 공동체는 어떻게 실존하는가 -

 

이희경(문탁네트워크)

 

 

목차

 

1.우리는 왜 밀양에 갈까? 우리는 왜 밀양에만 갈까?

2.문탁, 그리고 소위 ‘연대’의 첫 경험

3.밀양, 삶 정치적 투쟁의 장소

        1)땅

        2)불복종

        3)101 농성장

4. 정치란 무엇인가?

        1)감응

        2)질문

        3)사건

5. 공부, 지식에서 수행으로

 

 

 

1. 우리는 왜 밀양에 갈까? 우리는 왜 밀양에만 갈까?

 

문탁네트워크(이하 문탁이라 칭함)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에 자리 잡은, 만들어진 지 9년쯤 되는 작은 마을인문학공동체이다. 우리 홈페이지에는 “문탁네트워크는 친구와 함께 공부를 통해 삶의 비전을 찾아가는 작고 단단한 네트워크입니다.”라고 쓰여 있다. 또한 “누구나 시인이 되고 농부가 되는 곳,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곳, 민주주의와 삶이 살아있는 곳, 우리가 만들고 싶은 마을입니다.”라는 바람도 적혀있다.

 

밀양. 경상남도 동북부에 있는 한 지역의 이름이다. <밀양아리랑>의 그 밀양이고, 이창동 감독의 <밀양>(2007년)이라는 영화의 바로 그 밀양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언급하는 ‘밀양’은 구체적인 지명이라기보다 ’새만금’, ‘용산’, ‘대추리’, ‘강정’과 같은 상징적 장소이다. 그곳들 모두 국익 혹은 개발의 이름으로 자행된 국가폭력으로부터 자신의 삶터를 지키려는 주민들의 투쟁이 가열차게 일어났던 곳이다.

 

문탁은 2012년 처음 밀양의 투쟁을 알게 된 후 지금까지 7년간 밀양과 꾸준히 교류해왔다. 그동안 우리는 홈페이지에 밀양과 관련된 직, 간접적인 포스팅을 400회 이상 했는데 내용은 밀양소식을 전달하거나 활동 후기를 남기는 것부터 송전탑투쟁이나 탈핵운동과 관련된 시론을 쓰는 것까지 다양했다. 또한 집회참석, 농사지원활동, 마을행사 참여 등 밀양에 직접 내려간 횟수도 24회에 달한다. 1년에 최소한 3회 이상은 밀양에 내려갔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우리를 밀양에서는 ‘연대자’라고 부른다. 밀양집회에서는 “연대자들에게 감사한다”는 이야기가 늘 빠짐없이 나온다. 우리와 계속 관계를 맺어왔던 밀양 동화전 마을의 한 주민은 “우리가 뭐라꼬, 도대체 밀양이 모라고, 문탁에서 이렇게까지 해주십니꺼?”라는 말을 입에 달고 계신다. 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이하 ‘밀양송전탑반대대책위)의 이계삼 사무국장도 늘 이렇게 말한다. “공부하는 곳 중에 문탁처럼 행동하시는 곳을, 전 본 적이 없습니다.”

 

“문탁은 학인들의 공동체일 것이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자리에서, 자신의 언어로, 자기가 살 수 있는 최대한의 실천을 해왔다...문탁은 밀양에게 어떤 책임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책임을 느끼든 느끼지 않던, 잊든 기억하든, 누구도 무어라 말하지 않고, 그러지 않아도 되는 존재였지만, 그들은 ‘무언가에 매이는 것이 자유’라는 역설을 구현하듯 철저히 ‘스스로’ 밀양과 ‘엮여’ 주었다. 그리고 문탁은 밀양을 잊지 않았다. 잊히는 것이 두려운 이에게, 늘 부질없는 고립감과 패배감과 마주서야 하는 이들에게 ‘나는 당신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 신호를 끊임없이 타전해주었고, 어떤 부탁에도 거절하는 법이 없었으며, 부탁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방식으로 손 내밀어주었다. 문탁은 말하자면 밀양에게는 ‘선물(膳物)’이다.”

 

우리로서는 과분한 칭찬이고 감사의 말이다. 그러나 이계삼의 말은 역설적으로 경기도에서 인문학공동체를 꾸리는 우리와 송전탑건설 반대투쟁을 벌이는 밀양주민들 사이에는 정체성의차원에서든 물리적 차원에서든 상당한 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우주의 원리를 탐색하고 삶의 비전을 탐구하는 인문학 공부와 구체적 현안을 놓고 현실에 직접 개입해 들어가는 투쟁은 바로 수렴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거기(밀양) 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사실 우리가 가지 않는 투쟁현장은 너무도 많다.

 

그렇다면 우리가 밀양에 지속적으로 가는 일은 감사나 칭찬을 받아야 하는 일이라기보다 분석되고 해석되어야 하는 일이 아닐까? 우리는 왜 밀양에 가는가? 우리는 밀양에서 호명하는 대로 ‘연대자’인가? 그럼 밀양도 문탁의 ‘연대자’인가? ‘연대’는 쌍방향적인가? 밀양과 우리는 함께 연대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연대’의 토대는 무엇인가?

 

뿐만 아니라 우리가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의 ‘연대자’라면 우리는 수없이 많은 투쟁현장 중에서 왜 밀양하고만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가? 그것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인가? 아니면 특정한 노력의 결과물인가?

 

이 글은 밀양투쟁에 대해 소개하고 분석하는 글이 아니다. 밀양투쟁과 관련해서는 한국사회에서 그것이 갖는 상징만큼이나 이미 수없이 많은 기록물, 영상물, 연구물들이 나와 있다. 그렇다고 이 글이 밀양투쟁에서 연대자의 의미를 묻는 글도 아니다. 역으로 이 글은 소위 ‘연대자’의 입장에서 밀양의 의미를 묻는 글이다. 공부하는 공동체가 어쩌다가 직접적인 투쟁현장과 관계를 맺게 되었는지, 어떻게 7년 동안 그 관계를 지속시켜나갔는지를 추적하는 글이다. 그것은 인문학공동체의 ‘인문학(공부)’의 의미를 새삼 묻는 것이며, 인문학공동체의 ‘공동체’의 의미를 다시 묻는 일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이 글은 한국사회 제도권 밖의 한 ‘인문학공동체’가 어떻게 실존해왔는지에 대한 인류학적 탐구보고서이다.

 

 

2. 문탁, 그리고 소위 연대의 첫 경험

 

문탁네트워크는 2009년 9월 작은 공부모임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나는 10여 년간의 <연구공간 수유너머> 활동을 접은 직후였으며, 다른 친구들도 각각 생활협동조합이나 대안학교 연구소 등의 활동을 그만 둔 상태였다. 우리는 ‘지식공동체’, ‘생협’, ‘대안학교’ 등 9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펼쳐진 미시적 운동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으나 그 한계 역시 절감하고 있었다. 새로운 삶의 비전이 필요했고 그것을 위해 다시 공부하자는데 의기투합했다.

 

하여 초창기 우리는 ‘비전세미나’라는 이름으로 이반 일리치의 자율주의 철학을 탐구하고, 경제인류학 공부를 통해 ‘선물의 공동체’를 모색하고, 데리다, 랑시에르 등의 정치철학 스터디를 통해 ‘환대의 원리’를 탐색해나갔다. 근대의 외부를 탐사하기 위한 동양고전 공부도 시작하였다.

 

생활인들이 제도권 밖에서도 강도 높게 공부하기 시작하자 찾아오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고 회원들의 연령대와 성별, 백그라운드가 다양해졌다. 그런 문탁이 사회적 이슈에 처음 개입한 것은 2011년 7월 9일 당시 한진중공업 사태를 응원하기 위해 가동된 2차 ‘희망버스’에 동참하면서부터였다. 그런데 그 활동은 우리 내부에서 상당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쟁점은 세 가지 정도였는데 하나는 우리는 왜 ‘희망버스’를 탔는가? 둘째는 문탁 내에서 ‘희망버스’를 타는 일은 공동의 활동이 될 수 있을까?, 셋째는 앞으로도 ‘희망버스’를 계속 탈 것인가?’였다. 어떤 점에서 이 글의 논점은(우리는 왜 밀양에 가는가? 우리는 왜 밀양에만 갔는가?)는 그때의 논란의 연장선상에 있다.

 

다시 그 때의 쟁점을 정리해보자. 첫째, 우리는 왜 ‘희망버스’를 탔는가? 와 관련하여 대부분은 쉽게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을 했다.

 

“내가 왜 희망버스를 탔는지 이유를 쉽게 설명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의명분 때문도 아니고, 희망버스의 한계도 보였지만, 하지만 그냥 갔다. 나는 마음이 시켜서 갔을 뿐이다.”(자누리)

“왜 갔는지 모르겠다.(웃음) 1차 희망버스가 준비될 때부터 아, 가야 하는데...이런 마음이 있었는데 바빠서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때 같이 못가서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요요)

“나 한 사람의 힘은 적지만 작은 힘이라도 보태는 게 의미가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나는 주말에 생업이 있어서 가능한 주말에 다른 일을 잡지 않는데, 이번에는 주말의 생업을 다 폐하고 갔다.”(뚜버기)

“나도 미안한 마음이 컸다...그리고 비장하게 결심하지 않아도 되는 희망버스라는 방식도 마음에 들었다...살림하는 아줌마도 하루쯤 살림을 접고 갈 수 있는 그런 방식..” (빛내)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모여지는 희망버스라는 새로운 운동, 이런 게 매우 궁금했다...문탁에서 이런 활동을 같이 한다는 것도 신선했다.”(달팽이)

 

확실히 그랬다. 한국사회에서 ‘희망버스’는 조직노동자의 연대투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양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일반 시민들의 자발적 동참이었으며 이들을 불러 모은 것은 노동운동의 대의라기보다 당시 크레인 위에서 홀로 고공시위를 하던 김진숙의 분투에 대한 인간적인 감동이었다. 그런 점에서 ‘희망버스’는 광우병사태 때의 촛불집회처럼 한국 사회에서 매우 신선하게 등장한 투쟁의 형식이었다. 그런데 “비장하게 결심하지 않아도 되는” ‘희망버스’조차 문탁에서 공론화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의 두 번째 쟁점은 ‘희망버스를 타자는 말을 하는 것이 왜 조심스러웠을까?’였다.

 

“문탁의 일상적인 활동내용과 다른 것이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달팽이)

“(문탁에서) 원자력 관련 책읽기, <5월애>같은 (광주관련 영화보기) 활동에 대해..불편함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문탁에서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과 관계가 만들어지고 있는 중인데 열린 장에서 이런 제안들이 가져올지도 모를 오해와 선입견에 대한 조심스러움이 있었다.”(요요)

“나는 노동자투쟁은 계급투쟁이자 정치투쟁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나와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선입견이 생겨서 관계의 확장에 불편함이 생길까봐 그런 부담감 때문에 편하게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바람꽃)

“나도 희망버스와 관련하여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광우병 촛불이나 4대강, 원자력 반대의 경우에 비하면 망설임이 컸는데 그것은 노동운동이다 아니다, 라기 보다는 이슈가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한 현실 때문 아닐까? 이런 일로 문탁의 활동의 외연을 스스로 좁히는 결과를 낳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요요)

 

2011년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는 문탁의 세미나회원들에게 각종 사회적 이슈를 제기하고 동참을 권유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했다. 문탁에 오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무엇인가를 함께 도모할 ‘손’들이 늘어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경험과 생각의 차이가 늘어나고 내부의 이질성이 커져가는 것이기도 했다. ‘이근안’이 누군지도 모른다는 친구에게 다짜고짜 ‘희망버스’를 타자고 권유하기는 어려운 노릇이었다. 우리 중 어떤 누구도 우리의 활동이 계몽적이거나 위계적으로 작동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앞의 두 가지 보다 더 첨예했던 쟁점은 ‘포스트 희망버스’였다. 우리는 앞으로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까지 갈 것인가? 부산이 너무 멀다면 투쟁중인 다른 사업장을 방문할 것인가? 그렇다면 그건 얼마만큼 언제까지 해야 할 것인가? 누군가는 “계속 희망버스를 타자.”라고 주장했고 누군가는 “이제 타지 않겠다.”고 말했다.

 

“나는 희망버스를 타고 갔다 온 뒤 생각이 명확해진 게 있다. 그건 우리가 말하는 마을이라는 게 고정된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고, 내가 하는 활동이 바로 내 마을의 활동이라는 것이다... 공동체의 삶과 사회적인 운동 사이의 거리가 멀게 느껴져도 나의 일상을 통해 계속 그 관계를 물어야 한다. 세미나나 강좌처럼 안전한 공간에서 공부만 같이 하는 마을, 이런 협소한 마을이 내가 원하는 건 아니다.” (요요)

“나는 희망버스 이후에 이제 앞으로 이런 식의 투쟁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고민은 내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내 현장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로 더욱 심화되는 것 같다. 우리가 1박2일을 보내면서 ‘더 이상 힘들어서 못하겠다. 앞으로는 가까운 곳에 연대하러 가자’는 말을 서로 나누었는데, 돌아 온 뒤 다시 그것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유성기업에 간다고 하자. 그 활동이 의미가 있으려면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은) 가야하는 걸까? ”(문탁)

“난 내 현장을 벗어난 일에 대해서 계속 관심을 갖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그것이 일시적이라 하더라도..... 공부와 활동의 일상 속에서 계속 삶의 깊이를 추구하고 자기 성찰을 하는 것이 참 어렵다. 그런데 희망버스는 비록 일회성 사건이긴 하지만 그런 걸 다시 인식하고 관성을 깨게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나?”(요요)

“우리가 일상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그건 우리의 능력이 부족해서다. 밖에서 답을 구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능력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를 물어야 되는 것 아닌가? 지금 우리의 일상을 그냥 두고 밖에서 에너지를 얻는 것은 일시적인 효과가 있을 뿐이다.”(문탁)

 

사실 나는 ‘희망버스’(내가 참여한 2차 희망버스)에 대해 실망했었다. 수없이 많은 쓰레기가 나왔고 그 지역의 시민단체들이 정성껏 준비한 밥이 아무렇게나 남겨지고 버려졌다. ‘희망버스’를 타게 한 힘은 새로운 것이었지만 그것은 아직까지는 정서적인 것에 머물렀을 뿐 새로운 윤리적 태도를 형성시키고 있지 못했다. 나는 다양한 시민들이 참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울려 퍼지는 80년대식 노동가요가 불편했고, 정동영 등 야권의 정치인들이 경찰과 협상하는 동안 (우리를 포함하여 소위 나머지) 시민들이 하염없이 대기하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 어이없었다. 적어도 나에게 희망버스는 ‘정치’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했었다.

 

문탁에 오는 사람들 대부분의 욕망은 앎을 증식시키는 것이다. 문탁이 제도권 밖 인문학공동체인 한 이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앎에 대한 이런 최초의 욕망이 문화자본의 축적으로 연결될 것인가 아니면 삶의 급진적 변형으로 연결될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문탁이 낡은 학교적 배치를 벗어나 앎의 새로운 배치를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당시 나는 ‘희망버스’를 타는 일이 학교에서 체험학습 가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일까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다. ‘희망버스’를 타는 일이 정말로 “관성을 깨는 일”일까? 오히려 이념지향적인 중년층의 ‘신체적 관성’은 혹시 아닐까, 라는 생각. 그 이후 ‘희망버스’는 나에게는 탈 수도 타지 않을 수도 없는 화두가 되었다.

 

어쨌든 우리가 다시 외부의 투쟁현장에 나서게 된 것은 그로부터 1년 후, 총선을 치루고 대선을 앞둔 2012년 가을이었다. 밀양을 처음 방문한 것도 그 때였는데 문탁과 밀양과의 관계를 말하기 전에 우선 밀양투쟁에 대해 먼저 소개한다.

 

 

3. 밀양, 삶 정치적 투쟁의 장소

 

2015년 12월, 밀양송전탑반대대책위는 <밀양송전탑투쟁 10주년 기념행사>를 안내하면서 밀양투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밀양송전탑 반대대책위입니다. 밀양송전탑 투쟁이 시작된 지 꼭 한 달 뒤면 10주년이 됩니다. 2005년 12월 5일, 상동면 여수마을 주민들이 북과 꽹과리를 들고 한전 밀양지사 앞을 찾아가 시위를 한 것이 밀양 투쟁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싸움이 10년을 이끌어올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 10년 동안 두 분의 어르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경찰청 집계로는 총 383명이 입건되었습니다(2012년 이후에 총 69명이 기소됨). 현장 응급후송 사례는 100건이 넘습니다. 단일 국책사업에 대한 주민의 저항으로는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이어진, 최대의 저항이라 할 만합니다.

그리고, 2014년 12월, 밀양구간 69기의 철탑은 모두 완공되었고, 현재 송전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200여세대의 주민들은 한전의 합의금 수령을 거부하면서 ‘밀양의 진실과 정의가 바로 설 때까지’투쟁하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밀양투쟁은 한국전력이 소위 ‘전력난’을 해결하기 위해 신고리 3호기 원자력발전소가 추가로 가동되어야 하고, 거기서 만들어진 전기를 도시로 전송하기 위해서는 아파트 40층에 해당하는 높이 100미터의 765㎸ 초고압송전탑의 건설이 불가피하다며, 총 건설예정인 송전탑 162개 중 69개를 밀양지역에 짓기로 결정하면서 불거진 투쟁이다.

 

이 과정은 한전이 말하는 전력난이 정말 존재하는가를 둘러싼 ‘팩트(fact)’ 논란, 신고리 3호기의 안전성 논란, 신고리 3호기가 가동되더라도 꼭 추가 송전선이 필요한가, 그것이 꼭 초고압송전탑의 방식이어야 하는가를 둘러싼 논란, 주로 도시에서 쓰는 에너지를 위해 농촌주민들이 희생되어야 하는가와 관련된 에너지 정의문제(이것은 밀양투쟁당시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는 구호로 표현되었다), 장기적으로 에너지를 핵 발전에 의존해야 하는가와 관련된 탈핵사회의 비전 등 수많은 층위의 복합적 쟁점을 지닌 문제였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수많은 연구자와 기록자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밀양투쟁에 접근하고 있고 의미 있는 결과물들이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내가 해석하는 밀양투쟁을 네 가지 키워드, 즉 ‘땅’, ‘불복종’, ‘101 농성장’을 중심으로 간략히 정리해본다.

 

1)땅

 

서울에서 나서 서울에서 자란 나는 ‘땅’에 대한 실감이 없다. 내가 ‘땅’을 이해하는 방식은 아파트 전세 값을 통해서이다. 우리 동네 34평 아파트 매매가격이 5억7천만 원이라는 것, 전세가격은 4억이라는 것, 지난 10년 동안 전세 값이 2배로 뛰었다는 것. 나에게 땅은 부동산이고 재산이다. 그러니 나는 이치우 할아버지가 평생 일구었다는 논 열 마지기가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 거기에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어떤 수고를 해야 하는지, 한 해 소출이 어느 정도인지, 그 땅이 할아버지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가 없다.

 

밀양투쟁을 전국적 이슈로 만든 변곡점이 되었던 이치우 할아버지(당시 74세)의 분신상황을 보자. 밀양시 산외면 보라마을에서 살고 있는 이치우 할아버지와 그의 동생 이상우 할아버지는 “학교도 변변히 못 다니고 평생을 엎드려 땅만 팠다.” 그렇게 평생을 가꾼 “논 열 마지기는 그들 형제의 전부였다.” 그런데 그 논 가운데로 송전탑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그 땅에서 농사를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루아침에 평생을 일구어 온 땅을 빼앗기게 된 것이다. 게다가 한국전력공사(이하 ‘한전’)측의 보상금액은 시가 4억 정도의 논 전체가 아니라 송전탑이 들어서는 주변만 평가한 약 6,000만원. 이치우 할아버지는 한전의 공사를 온 몸으로 막고 있었다. 결국 한전 측은 용역을 투입했고 “열흘 넘게 공사를 막아왔던 게 수포로 돌아갈 상황이었다. 하루 종일 용역과 몸싸움을 하고는 내일 또 해보자는 용역들의 비웃음 앞에서 이치우 할아버지는 깊이 절망했다.” 2012년 1월 16일, 결국 이치우 할아버지는 “내가 죽어야 이 문제가 해결되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분신한다.

 

밀양에서 낳고 자랐으며 일제 강점기에 위안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이른 결혼을 했던 김말해 할머니(91세). 그녀의 남편은 6.25 직후 보도연맹사건으로 행방불명되었고, 아버지가 진짜 ‘빨갱이’인지 확인해보겠다며 베트남전에 참전한 큰 아들은 허리를 크게 다쳐서 돌아왔고, 둘째 아들은 “고생만 하다 갑자기 죽어뿌따.” 그렇게 신산하게 살아온 할머니의 땅. 논 서마지기와 밭 열 마지기. 그것이 과연 그녀의 ‘재산’일까? 그 땅을 수용하여 거기에 송전탑을 짓겠다는 것을 죽을힘을 다해 반대하는 그녀의 투쟁은 과연 ‘재산권’ 투쟁일까?

 

“내 나이? 많아. 구십 다 됐어. 우리 작은아들 두 살 묵었을 때 저거 아버지 안 죽었나....그전에 보도연맹 카는 거 안 있나... 그때 한참 빨갱이 시대 안 있었나. 빨갱이들이 그릇도 뺐어가고 밥도 해달라고 그캤는데. 밥도 한 번 해준 적 없는데, 보도연맹이라꼬. 우리 신랑이 동네 반장질 했거든...3월 달에 나가서 6월 달에 없어졌거든? 아무 죄도 없는데 생사람 잡았어...

그래.. 나이 스물세 살 묵은 게 그 살림을 다 도맡아가 했지. 내 손톱 발톱 뭉개지도록 오만 일 다 하고 그래 살았다...

원래는 ...시집오니까 논 서 마지기 있었다 카이...시집와가 이 집하고 밭떼기 열 마지기 산 거 고게 다다. 전부 감나무 밭이라 카이. 내가 오만 데 다 댕기며 머리 다 빠져가며 사 놓은 거, 저것도 송전탑 땜에 물거품 되다시피 하고. 고게 그리 아깝고. 팔면 돈이나 될낀데, 아무도 사러도 안 온다.....

우린 저거 들어오면 못 사는데. 땅 손바닥만 한 거 사놨는데 물거품 되는데. 언제 누가 살아도 여긴 물 좋고 공기 좋고. 손주들 와서 살고 누가 와도 다 잘살 낀데.... 송전탑 저거 보통 것도 아니고 76만 5,000볼트 디게 센 게 와가... 밑에 산소도 파내라고 지랄병 하는데 우야겠노.... 센 게 들어오만 2, 3년 있으면 감도 안 되고 아무것도 안 되는 기라. 저거 오면 이 골짜기 못 산다. ‘내논 땅 없습니꺼.’부동산이 그렇게 왔었는데, 저거 들어오곤 논 있나 밭 있나 아무도 안 온다 카이. 개미 새끼도 하나 안 왔다....”

 

 

한전은 밀양주민들이 보상을 더 받기 위한 싸움을 한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그들은 나처럼 땅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치우 할아버지에게, 김말해 할머니에게 논과 밭은 단순한 재산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평생 “엎드려” 정직한 노동으로 일구어 온 자신의 ‘온 삶’이고 자존심이다. 그들에게 땅은 조상이 살았던 곳이고, 자신의 뿌리인 어머니의 산소가 있는 곳이고, 시아버지와의 약속과 의리 때문이라도 지켜내야 하는 고향이다. 땅은 한 평에 얼마짜리 부동산이 아니었다. 단장면의 고준길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한전은) 저 노인들이 보상은 필요 없다고 하지만 돈 더 주면 그냥 좋아할거다... 이런 본질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변죽만 울린다 할까요? 본질적 접근은 안 해요.... 평생 자기 손으로 가꾼 그것인데 그걸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은 거예요. 그게 못 쓰는 땅이 되고, 못 쓰는 땅을 아까와하는, 땅에 대한 애착. 이 동네에 철탑이 들어오면 못 산다 하던데, 공동체가 파괴 되는 거죠. 고향을 떠나야 한다고 하는데..”

 

‘아깝다’는 단어가 무엇인지 이해 못하는 한, 그것이 ‘손해 본다’와 같은 말이 아니고 ‘가성비’ 따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한, 밥을 남기는 게 아깝고 땅을 놀리는 게 아깝고 멀쩡한 물건을 버리는 게 아깝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실감이 없는 한, 밀양투쟁의 본질에 다가설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밀양투쟁은 평생 무엇인가를 키우고, 가꾸고, 짓고, 살렸던 사람들의 투쟁이다.

 

2)불복종

 

사실 밀양은 대대로 ‘1번’을 찍어왔던, 소위 ‘PK’라고 불리는 한국 보수당의 텃밭 중 하나이다. 그래서 어쩌면 송전탑 건설도 “나라가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첫 단추가 너무 잘못 끼워졌다. 밀양송전탑의 존재가 정부 문서에 처음 언급된 것은 2000년 1월이다. 이후 신고리-북경남 765kV 송전선로의 전체적인 윤곽이 확정되고 밀양시 등 관계기관과 협의도 진행되었지만 막상 주민들은 이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2005년 8월에 이르러서야 밀양지역 경과지 5개 면의 주민들을 향한 형식적인 주민설명회가 개최된다. 그러나 이조차 참석인원은 5개 면의 인구 21,069명 중 0.6%에 불과한 126명 뿐이었다. “이러한 한전의 비밀주의와 주민 배제가 이 싸움을 10년간의 장기적인 투쟁으로 만드는 데 가장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전은 일방적으로 토지를 수용하고 용역회사의 직원을 통해 벌목작업을 하는 등 송전탑건설공사를 강행하며, 이것을 막는 노년의 주민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모욕하고 괴롭힌다.

 

“철탑을 세우기 위해 부지의 나무를 베러 인부들이 오면, 우리 할매, 할배들은 벌목을 막으려고 나무를 감싸 안는다. 이 과정에서 나이 드신 분들이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말도 못할 상해를 많이 입는다. 인부들은 나무 하나를 베는 척하고 얼마쯤 톱질을 하다가 다시 위의 다른 나무로 옮겨간다. 그러면 우리는 또 그 나무 벌목을 막으려고 따라 올라간다. 그러면 또 다시 다른 나무로 옮겨가고, 그러면 우리는 또 따라가고... 그럴 때 인부들은 저 위에 따라 올라오는 우리더러 ‘워리 우리’하고 우리를 개 부르듯 한다. 완전 개 취급하는 거다. 베어 쓰러진 나무에 할머니들이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그러면 인부들이 저 할매 넘어졌다. 불로 붙여라, 화장시켜라, 이따위 말들을 한다. 그리고 가장 주도적으로 하는 분들을 집중적으로 돌려서 자빠뜨리든지 해서 병원에 입원시켜 못 나오게 하라는 지시도 한다. 이렇게 한 이천 평 되는 곳을 하루에 스무 바퀴, 서른 바퀴를 돌린다. 이 나무 저 나무 옮겨 다니면서 벌목을 막는 과정에서, 젊은 인부들이 바위 위에 올라가 뒷짐을 지고 할머니들을 내려다보며 ‘씨발년 씨발년~’ 노래를 부르며 가파른 벌목지를 거의 기어 다니다시피 하는 할머니들을 모욕했다.”

 

밀양주민들이 보기에는 경찰도 다르지 않았다. 특히 2013년 10월 한전의 송전탑건설 공사가 재개된 이후에는 “매일 3천명의 경찰병력이 10개월간 상주”하면서 “매일 전쟁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2014년 6월11일 소위 ‘밀양송전탑 행정대집행’이 단행되었는데 여기에 동원된 인원은 경찰버스 50대, 총 2000명의 경찰, 공무원 200명, 한전 직원 등이었다. 주민들은 공사현장의 농성장에서 목에 쇠사슬을 감거나 옷을 벗은 채로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모두 끌려나오고 연행되었다.

 

초기의 주민배제, 그리고 이어진 국가폭력.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법’의 이름으로 수행되었다. 국가와 한전은 공익을 위해 법에 정해진 절차에 따라 국책사업을 벌이는 중이다. 그런데 밀양주민들은 지역이기주의에 빠져 정당한 공무를 방해하고 있으니 약간의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행정대집행’을 단행할 수밖에 없다, 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밀양주민들이 보기에 이런 일들은 국가가 국민을 향해 벌이는 전쟁이었다.

 

“이 골짜기 커갖고 이 골짜기서 늙었는데 6.25 전쟁 봤지, 오만 전쟁 다 봐도 이렇지는 안 했다. 이건 전쟁이다. 이 전쟁이 제일 큰 전쟁이다. 내가 대가리 털 나고 처음 봤어. 일본시대 양식 없고 여기와가 다 쪼아가고, 녹으로 다 쪼아가고 옷 없고 빨개 벗고 댕기고 해도 이거 카믄. 대동아 전쟁 때도 전쟁 나가 행혀 포탄 떨어질가 그것만 걱정했지 이러케는 안 이랬다.... 근데 이거는 밤낮도 없고, 시간도 없고. 이건 마 사람을 조지는 거지. 순사들이 지랄병 하는 거 보래이. 간이 바짝바짝 마른다. 못본다 카이, 못봐....”

 

“한전과 경찰이 우리를 죽이러 오니까 우리는 저항한 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총을 들었습니까, 칼을 들었습니까, 사람을 죽였습니까. 사년 형을 때리는 것은 저는 납득도 안가고 이해도 안갑니다..... 참새도 밟으면 짹 하는데 우리를 죽이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짹 해야 안 되겠습니까? 이런 법이 있는지 세상에 저는 처음 봤습니다... 우리를 죽이러 오기 때문에 저항한 것밖에 없는데 구형을 사년을 때린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법과 정의가 살아있는 세상. 2016년 겨울 내내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이었을 것이다. 정권이 바뀌고 정의로운 세상에 대한 비전이 천명되었다. 그런데 평창 동계올림픽의 남북단일팀 구성이 스포츠의 공정한 규칙을 위반하는 일이고, 북한 선수들은 정부의 낙하산이라는 비판이 청년층을 중심으로 쏟아져 나왔다. 이들에게 북한 선수들은 불공정한 방법으로 입학한 정유라와 다름없는 존재였다. 나는 매우 당황스러웠다. 서바이벌 게임에 내몰리고 있는 청년들의 현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과 정의(正義)가 “나의 권리를 조금이라도 침해하지 말라”의 문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은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월든』의 저자 소로는 미국의 멕시코 전쟁 그리고 노예제도를 반대했다. 국가란 인간들이 만든 편의적인 체제에 불과한데 그런 편의적인 체제가 갑자기 다수결의 원칙을 내세워 부당한 질서에 모두를 굴복시키려 한다면? 그때 저항은 의무라고 생각했다. 소로는 6년간 인두세를 내지 않는 것으로 국가에 저항한다. 그리고 그 유명한 『시민불복종』을 쓴다.

 

흔히 비폭력불복종으로 번역되는 간디의 ‘사티아그라하’는 영국 지배에 대한 정치적 저항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정신적 고결함을 파괴하며, 인간관계의 평화를 깨뜨리는 모든 폭력에 대한 불복종이었다. 하여 그것은 영국을 향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스스로에게 하는 맹세이기도 했다. 나부터 한없이 고귀해지겠다는, 나부터 한없이 낮아지겠다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맹세!

 

“이 부당한 일들에 저는 벌금을 낼 수가 없습니다.”(고준길, 단장면 용회마을)는 말에서 나는 소로를 읽는다. “하지만 이거는 아니잖아요...이거는 아니거든요. 그래서 내 생명권 지키고 후손을 살리기 위해서..형을 받는다면 얼마든지 받겠습니다.”(정임출, 부북면 위양마을)는 말에서 나는 간디를 본다. 나는 밀양투쟁에서 위대한 불복종의 정신을 다시 발견한다. 사는 법은 “이런 법”(=국가의 법)을 이긴다. 사는 법을 몸에 새긴 사람은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정의인지 직관적으로 안다. 나는 직접 보지 못했지만 그분들의 법정 최후진술을 읽으면서 생각한다. 그 법정엔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넘쳤을 것”이라는 걸.

 

3)101 농성장

 

‘밀양의 전쟁’에서는 앞에서 말한 배제와 폭력 뿐 아니라 분열과 교란의 전술도 사용되었다. 합의서에 도장을 찍지 않으면 마을 이장을 잡아가겠다는 협박, 합의하면 자식을 취직시켜주겠다는 회유, 공무원인 자식들을 동원해 도장을 찍게 하는 위력행사,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한전의 회유와 분열, 교란은 교묘하고 치사했다. 이 과정에서 수십 년 함께 살았던 마을공동체는 산산이 파괴되고 이웃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사람이 아무리 부자라도예 남의 도움 없이는 못 삽니다.,, 나도 마실에서 혼자 이렇게 살면 이놈의 전기가 우예 된다, 싱크대가 우예 된다, 보일러가 우예 된다, 그걸 돈 주고 할라 캐도 여기 기술자가 있노, 뭣이 있노? 다 이 주위에서 봐줘가지고 그리 잘 삽니더. 사람들이 다 울력으로 삽니더, 울력으로예. 참말로 정답게 잘 지내는 동넵니더, 여가. 어른들을 한 집 부모같이 생각하고 언제든지 한 명 한 명 할머니들 목욕 가시자고 다 준비해 데꼬 가지요, 또 관광시켜주지요, 또 회관에 무엇이 없으니 전부 지그 어매한테 사다주듯이 다 사다주고 합니다. 그래 이 마실 사람들이 인정스럽게 잘하고 재미나게 사는 동네를 저놈의 송전탑이 마실도 다 버리고, 사람 심경도 다 버리고 했습니더. ...도장 찍어준 사람 안 찍어준 사람 그기 사단이 돼가지고 동네 사람 인심을 다 배려놨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마을공동체가 해체되는 속에서도 새로운 공동체가 구성되고 있었다. 특히 101번 농성장은 유명한데, 산길을 40분이나 올라가야 도달할 수 있는 그곳은 전기도 없고 물도 없는 곳이었지만 환대와 우정의 정신이 살아있는 진정한 코뮨이었다. 다큐멘터리 <즐거운 나의 집 101>에서는 그곳의 투쟁을 ‘즐거운 농성’, ‘맛있는 농성’, ‘발랄한 농성’, ‘노래하는 농성’이라고 말한다. 그곳은 집이 아닌 집이었고, 집이 된 이상 모두가 간절하게 지키고 싶은 곳이었다.

 

“101번 농성장은 ‘언니들이, 어르신들이 늘 기다리’고 있다가 ‘반갑게 맞아주는’ 곳이다. ‘힘들게 올라왔다는 걸 알기 때문에 서로서로 진짜 많이 챙겨주고’‘거기서 만나는 사람들은 다 특별해요. 소중하고.’ 전기도 물도 없어 ‘모든 것이 누군가가 힘들게 지고 온 것’이기 때문에 ‘거기서는 뭘 하나 먹더라도 감사하고 특별’한 곳(송재현)이다....그곳은 ‘경쟁이나 이익을 떠나서 선한, 정의로운 목적을 위해’ 사람들이 함께 하는 곳, ‘사람이 사람에게 선물인 곳’, ‘사람이 귀한 줄 알게 되는 곳’(박성준)이다”

 

 

4. 정치란 무엇인가?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문탁네트워크 내부에는 정치에 대한 두 가지 태도가 존재하고 있었다. 하나는 주로 80년대 20대를 보낸 중년층의 태도인데, 이들은 스스로를 ‘진보’나 ‘좌파’라고 생각한다. 다른 하나는 연령적으로 좀 젊은 그룹의(여기에는 청년들도 포함된다) 태도인데, 이들은 당대의 정치적 이슈에 거의 무관심하다.

 

그러나 이런 현상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정치는 이념적인 기반 위에서 행해지는 권력구조의 변동이라고 생각하는 점에서, 이 두 그룹은 정치에 대한 동일한 표상을 갖고 있다. 하여 일부 회원들은 문탁이 공부만 하고 사회적 투쟁에 동참하지 않는다는 것에 불만을 갖고 있었으며 또 다른 일부 회원들은 공부하는 공동체가 왜 정치적 색깔을 드러내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표명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12년을 맞는다. 알다시피 그 해는 총선과 대선이 한꺼번에 치러지는 소위 ‘정치의 해’였다. 게다가 2011년에서 2012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내내 야당과 시민단체가 주도하는 한미FTA비준 무효 시위가 열리고 있었고 문탁의 많은 회원들도 동네의 반FTA 시위에 참여했다. 우리는 이런 정세 속에서 아예 ‘정치’에 대한 공부를 제대로 해보기로 했다. 근대정치사상가들의 중요 개념을 탐구하는 세미나를 조직했고, 민주주의를 공부하는 강좌도 열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근대정치학의 예외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스피노자 정치학을 발견하였다. 정치는 홉스가 말하는 대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자연상태)에서 각자 자신의 자연권을 양도하며 맺는 상호계약(사회상태)으로 이행하는 문제도 아니며, 맑스가 말하는 대로 적대적인 계급들 간의 계급투쟁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탈취하는 문제도 아니었다. 스피노자는 우리에게 서로 다른 타자들이 각자의 타자성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공통된 것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정치라는 것을 알려줬다. 이렇게 되면 정치는 더 이상 구체적 삶(일상, 욕망)과 무관한 국가장치 영역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정치는 더 이상 적대와 부정, 금지와 투쟁의 영역이 아니라 우정과 긍정, 환대와 구성의 영역으로 변환된다.

 

나는 스피노자 정치학이 특히 문탁과 같은 공동체에서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내부의 두 경향, 즉 정치에 대한 강남좌파적인 습속과 공부에 대한 학교태적 관성의 동시적 극복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문탁은 인문학공동체이지만, 스피노자적 의미에서 정치적 공동체이기도 하다. 문탁에는 정해진 강령과 규약이 없고 서로 다른 성별, 연령, 경험, 이념적 지향성을 가진 타자들이 모인 타자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통의 활동(처음에 그것은 공부다)을 수행하면서 서로의 의지와 능력을 조율하여 공명하는 한에서만 실존한다. 보다 많은 사람들의 차이가 조율되면서 공통적인 것을 생산해내면 우리의 능력은 커지고 그 반대가 되면 우리는 취약해진다. 우리는 안정성과 불안전성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나아간다.

 

어쨌든 그해 11월, 우리는 그동안의 공부를 총 정리하며 <데모스, 너의 정치를 발명하라>는 제목의 인문학 축제를 개최하였다. 우리의 문제의식은 “선거를 관전하고 후보를 품평하는 투표하는 주체를 넘어 우리가 어떻게 ‘새로운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지 모색”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축제를 준비하는 과정 중의 하나로 강정, 쌍용자동차노조, 재능교육노조 등 실제 투쟁이 벌어지는 현장을 직접 방문하였다. 밀양 역시 이 과정에서 우리가 찾아간 여러 투쟁 현장 중의 하나였다. (그때만 해도 그 인연이 7년이나 이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다시 희망버스로 돌아가자. 우리는 왜 한진중공업에 갔나? 우리는 왜 강정이나 쌍용, 재능교육, 밀양에 관심을 갖나? 그것은 시민의 책무감(관용) 때문인가? 사회적 연대의식 때문인가?

 

데리다는 ‘환대’와 ‘관용’을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 불어에서 Host라는 용어는 주인과 손님(이방인)의 두 가지 뜻을 갖고 있는데, ‘관용’(똘레랑스)은 주인의 입장에서 주인의 주체성과 안정성을 훼손 받지 않는 선에서, 이방인이 주인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선에서 주인에 의해 행해지는 초대인 반면, ‘환대’는 이방인의 이름을 묻지도 않고, 그에게 계약을 요구하지도 않고 나의 모든 것을 내어 주는 ‘방문의 환대’를 말한다고 한다. 따라서 환대는 언제나 권리, 법이나 정의와 결별하는 절대적 환대를 일컫는다. 그러나 절대적 환대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환대가 현실화되려면 권리와 의무에 대한 법적 한계를 규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데리다에 의하면 우리는 언제나 이 딜레마 속에서, 즉 모든 권리와 법을 초월하는 절대적 환대와 권리와 의무에 의해 제한되는 조건적 환대 속에서 번민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달리 말하면 이율배반이 있다. 환대의 법과 환대의 법들 사이엔 해결할 수 없는 이율배반, 변증법화할 수 없는 이율배반이 있는 듯하다. 한편 환대의 법은 무제한적 환대에의 무조건적 법인가 하면, 다른 한편 환대의 법들은 언젠 조건 지어지고 조건적인 권리들과 의무로서...환대의 권리들과 의무들이기 때문이다.

이 아포리아야말로 이율배반이다...비극은...이 이율배반의 두 대립 항이 대칭적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거기엔 이상한 서열이 있다. 법은 법들 위에 있다...그러나 환대의 법들의 저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도 환대의 무조건적인 법은 환대의 법들을 필요로 하고, 법들을 요청한다. 이 요청은 구성적인 것이다.”

 

스피노자주의자로서 나는 데리다의 이 이야기를 ‘모든 것이 엮여져 있다’는 관계의 실재성은 실제로 구체적인 조건 속에서 ‘엮여져야만’ ‘엮여져 있게 되는 것’이라는 이야기로 바꿔 읽는다. 하여 나는 우리에게 밀양은? 이라는 질문은 서로의 정체성이나 의미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양자가 어떻게 공통적인 것을 구성해나갔는지, 그 조건을 탐색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한 즉 우리와 밀양이 함께 엮였던 구성적 계기에 대한 탐색!

 

1)감응(affect)

 

밀양에 처음 가는 사람들은 그곳에서 어떤 특별한 느낌을 받는다. 그곳의 경관 때문이기도 하고, 공기 때문이기도 하고, 감나무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싸움의 당사자들인 밀양주민들의 친화력, 그리고 ‘말빨’이다.

 

나는 처음 밀양에 내려가서 전기와 송전탑 문제에 대한 그분들의 해박한 지식에 놀랐는데, 그건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그분들이 처한 상황을 너무나 알아듣기 쉽게, 그리고 자신들의 감정을 적절히 넣어서 전달하는 설득력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분들은 그간의 투쟁을 적절한 유머와 적당한 애환을 섞어 무용담처럼 엮어내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이 탁월하다.

 

우리는 인문학공동체에서 지식과 언어를 다루는 일을 일상적으로 하지만, 우리 언어의 대부분은 관념적이거나 산만하거나 감정적이기 일쑤여서 서로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 하여 우리는 상대의 말에 집중하지 못하고, 수시로 졸고 수시로 딴 짓을 한다. 이에 비해 밀양주민들의 언어는 힘이 있고 풍부하고 현장 장악력이 있다.

 

“동화전 마을의 잘생긴 대책위원장님, 어디 가서도 꿀리지 않을 것처럼 ‘쎄’ 보이는 박은숙샘, 까칠한 츤데레 귀영엄니, 뭐든 적당히 하자는 하사장님. 당시 이들이 이 마을의 송전탑 반대운동 주역들이었다. 귀영엄니를 제외하고는 모두들 말술이었다. 소주 한두 병은 거뜬히 마셨다. 술을 좋아하는 만큼 이야기도 좋아했다. 귀영엄니는 술은 잘 안 드셨지만, 술 취한 사람보다 말을 더 재미있게 하셨다. 나는 공기가 좋아 술을 많이 마셨고 취했다. 애처럼 밀양에 대해, 송전탑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박은숙샘은 나더러 아무것도 모르고 왔냐며 핀잔을 주었고, 위원장님은 친구 따라 강남 간다며, 문탁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왔다가 눌러앉은 사람도 있다며”

 

그리고 언어의 힘만큼이나 놀라운 것은 밀양 투쟁주역 대부분이 어르신들이라는 점이다. 현대사회에서 노년층은 체계적으로 배제되고 있으며 기껏해야 사회복지수급계층으로, 즉 사회적 비용 정도로 취급되고 있기 때문에, 그분들의 정신이 실제로 펼쳐지고 그분들의 육체가 구체적으로 실감되는 상황은 강렬한 감응을 일으킨다. 특히 노년층과 접촉할 경험이 거의 없는 도시의 청소년, 청년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어르신들이 어떤 고초를 겪으셨는지 자세하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인상 깊었던 건, 계속해서 어르신들이 훗날을 걱정하기 때문에 우리가 밀양을 지켰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가 않다는 할머니 할아버님들은, 이런 일을 겪어보니 이 세상에 너희가 설 곳이 없겠더라 싶으셨다고 합니다. 저는 가족 중에서도 가까운 할머니 할아버지가 없어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습니다. 저에겐 밀양이 제가 처음 만나는 할머니, 할아버지인 듯합니다. 아 할머니, 할아버지의 마음은 이런 거구나 싶어 너무 놀랐습니다. 인생을 살 만큼 사시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에, 이토록 험한 싸움에 가담한다는 건 어떤 마음일까.. 짐작도 되지 않습니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저는 옆에서 친구들이 훌쩍거리기에 밤사이에 추워서 감기가 걸렸나 했더니. 그게 아니라 폭풍 눈물을 흘리는 중이었습니다. 민영이, 해은이, 김현민이는 휴지까지 뜯으며 울었습니다. 어르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나 하고 싶은 질문이 있냐는 말에 아무도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친구들은 돌아오는 차에서도 딥슬립하기 전까지 눈물을 훔쳤습니다.”

 

마지막으로 밀양에서 받는 감응은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그분들의 삶-정치적 투쟁의 모습에서였다.

 

“하사장님은 이런 얘기를 해주었다. 송전탑을 막으려 산 중턱에 올라간 할매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그 땅에 밭을 일궈 쪽파를 삼는 것이었다고. 송전탑을 짓기 위해 쌓아 놓았던 철물들과 포크레인은 비와 바람에 녹슬고 있었지만, 밟히고 파헤쳐진 쪽파는 더 파랗게 자라고 있었다고. 쪽파 밭 옆에는 밀양 사람들과 연대자들이 함께 흙벽돌을 하나씩 이고지고 산을 올라 만든 황토방이 있었다. 밀양에서 돌아오는 날, 나는 황토방 한 켠에 종이를 붙이고 글자를 적었다. ‘쪽파가 철탑을 이길 겁니다.’그리고 생각했다. 나도 쪽파다.”

 

우리를 밀양과 엮어주었던 미안함, 놀라움, 존경심 같은 초기의 감정은 강력한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 식으로 이야기하면 그것은 (주민들로부터 받는 것이기 때문에) 수동적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우리 대부분은 다른 사건과 사태, 거기서 일어나는 온갖 감정들에 파묻혀 밀양에서 받았던 강렬한 감정은 잊어버리게 된다.

 

2)질문

 

다른 투쟁 현장과는 달리 우리가 밀양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시기적인 것과 관계가 있다. 우리는 2012년 9월에 처음 밀양을 방문했는데 밀양 투쟁은 2013년, 2014년에 가장 밀도가 높은 시간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 시기 밀양은 마치 사파티스타가 치아파스 라칸돈 정글에서 전 세계를 향해 메시지를 보내듯, 경상남도 끝자락에서 전국을 향해 계속해서 메시지를 발신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응답해야 했는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지지방문이나 집회개최와 같은 직접행동으로 나타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밀양을 우리의 공부로 끌어들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공부거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전기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고, 핵 발전의 원리와 그 위험에 대해 공부했다. 세미나도 열었고 강좌도 개최했고 북콘서트도 만들어냈다. 그러나 밀양이 우리의 공부로 들어오는 과정은 그렇게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문탁식구들은 이제 집회 한번 나가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지만 자기 공부와 바쁜 일상 속에서 탈핵 공부를 같이 해보자는 제안은 부담스러워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시간부족의 문제만은 아니었을 터, 우리의 공부가 질문과 질문을 연결시키면서 새로운 질문을 구성해내는 데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다보니 밀양은 처음엔 공부의 화두였는데 점차 공부의 소재로 축소되어갔다. 그에 따라 밀양은 문탁의 가장 중요한 공통활동에서 점차 한 세미나 팀의 분파적 활동으로 제한되어갔다.

 

다시 밀양을 우리의 화두로 만드는 것이 필요했다. 그것은 밀양에 대한 공부가, 송전탑과 전기에 대한 공부가, 후쿠시마와 체르노빌에 대한 공부가 지금까지 우리가 해왔던 공부와 연결되며 새로운 질문으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는 2015년 인문학축제의 주제를 ‘반(反)성장과 좋은 삶’으로 잡고 대토론회를 진행했다.

 

“눈물 없는 전기는 가능할까. 눈물 없는 전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더 밝은 세계가 아니라 지금보다 더 어두운 세계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둠도 풍요로운 세계를 연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잠시 동안 함께 느껴보는 어둠은 그것을 향해 가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집회도 시위도 아니고, 큰 목소리로 외치는 것도 아니지만 일상의 삶 속에 침묵과 어둠을 늘리는 것 역시 반성장이고, 탈핵이고, 다른 사회를 만드는 실천이다.

 

그날 대토론회에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쟁점에 직면했고 만만치 않은 갈등을 경험했다. 혼자 손으로 아이를 키우니 온갖 일회용품을 쓸 수밖에 없다는 젊은 엄마의 볼 멘 항의, 요리를 못하는 데 꼭 요리를 직접 해야 하는 것일까, 라는 직장인의 진지한 질문, 자동차, 스마트폰을 덜 쓰자는 우리를 무슨 근본주의자나 러다이트 보듯 하는 젊은 세대의 차가운 눈초리. 그러나 질문은 많아졌고, 그것을 어떻게 갈무리 할 것인가, 또 어떻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 것인가가 과제로 남았다. 2016년 인문학축제의 주제는 ‘일상의 수행, 수행의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밀양이 화두로 던지고 우리가 ‘반(反)성장’과 ‘일상의 수행’으로 받은 질문은 문탁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3)사건

실제의 밀양은 문탁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있지만, 화두로서의 밀양은 문탁의 구성적 활동의 실질적 ‘하드캐리’였다. 우리는 밀양을 통해 새로운 사건을 만들고 그것을 기꺼이 감당했으며 기쁨을 증식시켰고 역량을 키웠다.

 

대표적으로 2013년 5월의 골목집회와 2014년 8월부터 11월까지 76.5일 동안 진행된 1인 릴레이 시위가 있다. 먼저 2013년 5월 골목집회는 한전의 송전탑공사재개방침의 공식화 이후 문탁 내의 긴급회의를 통해 결정되었는데, 우리는 집회 상황실로 변신한 강의실에 모여서 온갖 아이디어를 내고 재빠르게 역할 분담을 한 후, 세미나 발제 대신 성명서를 쓰고 대자보를 만들고 구호를 정하고 손 피켓을 만들었다. 이 과정은 밀양을 우리의 문제로 다시 사유하게 하는 성찰의 시간이었고 잠시나마 우리를 예술가, 기술자, 작업자로 변신시키는 매직의 시간이었다. 이후 우리는 피켓이나 플랭카드 만들기의 달인이 된다.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우선은 힘없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전이 벌이는 부당하고 폭력적인 ‘갑질’에 대한 분노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찌 국민을 이리 천하게 보는겨.’라는 밀양 할머니들의 처절한 분노에 깊이 공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 모인 것은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다 잘라내고 나면 너흰 어디 기대고 살래?’라며 자신의 몸을 포클레인에 묶은 할머니들의 서글픈 절규 속에서 ‘나무를 베려면 나의 등에 도끼질을 하라’며 자신의 삶의 터전인 숲의 나무들을 온 몸으로 껴안은 인도 히말라야의 칩코(Chipko) 운동을 봅니다. 성장이나 개발이 아니라 생명을 서로 돌보는 삶이 먼저라는 위대한 운동과 영혼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저희는 밀양의 싸움을 통해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봅니다. 무한성장과 무한전기의 세상에서는 누군가의 안락이 누군가의 피눈물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뼈아프게 깨닫습니다. 그 누구의 삶도 파괴되지 않고, 그 어떤 생명도 짓밟히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하게 됩니다."

 

 

그 다음해 벌어진 76.5일간의 1인 릴레이시위도 우리로서는 매우 큰 경험이었다. 그것은 폭력적인 6.11 행정대집행에 항의하기 위해 만들어진 집회였고 우연히 시작되었지만 우리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쪽으로 우리를 끌고 갔다. 우리가 사건을 만들었다기 보다 사건이 우리를 우리도 모르는 곳으로 데려다 주었다고나 할까.

 

“문탁의 많은 일이 그러하듯 '탈핵 1인 시위'도 툭 던져진 한 마디가 시작이었습니다. 기억하시나요? 6월 11일 밀양행정대집행 이후 문탁에서도 삼성동 한전 본사 앞에서 밀양과 동시에 며칠 간 1인 시위를 했습니다. 제대로 된 피켓도 준비 못한 채 시작된 1인 시위에 여러 친구들이 참가했습니다. 그리고 뒤풀이에서 일회성으로 그칠 게 아니라 우리가 사는 곳에서 꾸준히 밀양의 문제와 핵문제를 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라는 이야기가 오고갔습니다.

자연스레 우리의 삶터에서 몇몇이 아닌 문탁의 친구들이 모두 함께 할 수 있는 1인 시위, 그리고 그 기간은 765라는 숫자에 맞춰 해보자는 의견들이 나왔고 2014년 축제와 맞물려 하나의 저항이자 축제로 '탈핵1인 시위'가 기획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참여하는 각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피켓에 적고 각자 개성 있는 퍼포먼스를 기획해보자고 했지만 막상 준비하다보니 '개성 있는'과 '퍼포먼스'라는 게 여간 힘들지 않았습니다. 낯선 이 단어들에 움츠려 들지만 그래도 시작하려 합니다. 할 수 있는 만큼 하다보면 문탁 친구들의 숨은 재능이 하나 둘씩 나타나지 않을까요? 소박함이 우리의 무기일 수도 있고.^^"

 

 

1인 릴레이집회는 분당 한복판에서 매일매일 같은 시간에 76.5일 동안 열렸는데, 매일 매일 후기가 올라오다 보니 참가자들은 자발적으로 전 날의 시위와 차이를 두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피켓도 다른 것으로 만들고, 눈길을 끌기 위해 복장에도 신경 쓰고, 색다른 퍼포먼스를 고민하게 되고 전단지를 나눠주거나 길 가는 사람들에 말을 건네는 노하우도 풍부해져 갔다. 그것은 하루하루를 보태는 활동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곱하는 활동이 되어갔다. 우리는 촛불집회도 아니고 희망버스도 아닌 우리 고유의 정치적 활동을 발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우리는 그런 우리가 기특하고 뿌듯했다.

 

"최근 문탁의 실존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활동은 765이다. 우리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우리는 미금역까지 문탁으로 만들었다.^^) 우리가 어디까지 접속할 수 있는지,(우리는 세빈이나 강아지 운동이까지 접속했다!) 우리가 어떤 능력까지 발휘할 수 있는지(우리는 해바라기를 뒤집어쓰고 노래를 불렀다. 헐!)를 765는 보여준다.

765에 대해 처음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765의 활동은 결코 그 기원을 상기시키지 않는다. 765를 끌어가는 데 느티나무나 녹색다방이 엄청난 백업활동을 하고 있지만 765의 운동은 결코 느티나무나 녹색다방이라는 단위로 환원되지 않는다. 심지어 765는 탈핵과 밀양을 이슈로 하고 있지만 그것이 765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765를 만드는 사람들은 매일 날짜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특이성을 증식시킨다.

765는 들뢰즈처럼 이야기하면 n+1의 다수적 다양성이 아니라 n-1의 탈중심적 다양체이다. 765는 공통적인 것을 구성하는 활동 그 자체이고, 공통적인 것으로만 존재하는 문탁 그 자체이다."

 

처음에 우리는 밀양을 ‘울컥’하는 감정으로 만났다. 그러나 밀양은 점차 우리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화두’가 되었고, 나아가 우리의 역량과 기쁨을 키우는 사건이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를 밀양과 “엮어냈다.

 

 

5.공부- 지식에서 수행으로

 

작년 우리는 밀양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시도를 했다. 송전탑을 물리적으로 막는 데 실패했고, 이계삼이 말하는 ‘작은 승리’가 절실히 필요한 것도 사실이지만, 나는 밀양투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갔다고 생각한다. 이제 살면서 투쟁하는 것이 필요하고, 지치지 않는 게 중요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밀양을 말하고 기억하고 해석하는 담론공간이 필요하다. 하여 밀양시즌2선언에 대한 우리의 화답은 ‘공부’로 밀양과 관계를 맺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할머니, 할아버지와 어떻게 ‘공부’로?

 

할머니들과는 <논어>나 <장자>를 낭송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마을이 산산조각 깨졌다는데 우리가 마을에서 어린이서당이나 청소년책읽기 프로그램을 꾸준히 한다면 마을공동체 회복에 미약하나마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문탁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2주에 한번, 혹은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밀양에 내려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밀양 너른마당 회원들과 세미나를 하거나 공통의 주제로 심포지움이나 포럼을 열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해보지 않고서는 어떤 것이 가능한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일단 1주일 동안 인문학캠프를 ‘뷔페식’으로 열어보기로 했다. 강좌, 세미나, 낭송, 이야기극, 사주명리학워크숍, 동의보감 강의, 수지침, 생활체조, 어린이서당, 포럼, 청소년영화프로그램, 청년 집담회 등, 1주일 동안 19개의 프로그램이 돌아갔다. 왁자지껄 들썩들썩한 1주일이었다.

 

개인적으로는 1주일을 밀양에서 머물면서 그곳의 지리를 익혔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밀양의 어르신들을 ‘투사-밀양할매(배)’라는 보편개념으로 떠올리는 게 아니라 ‘경금. 그리고 비겁이 강한 윤여림 할배’, ‘나랑 같은 정화이고, 대운이 4인 김철원 실장님’, ‘겉보기와 달리병화 일간에, 10년 전에 밀양으로 이사 오신 구미현샘’, ‘계수 권귀영 샘’과 ‘임수 김은숙 샘’, ‘갑목이면서 밀양에서 가장 먼저 싸움을 시작하신 고정마을 안병수 할배’....이런 식으로 구체적으로 떠올리게 되었다는 것이 소득이었다. 구체적 앎은 구체적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

 

1주일 동안 열린 인문학캠프는 대체로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런 대규모의 프로그램을 지속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불필요한 일이었다. 주민들은 사주명리공부를 가장 좋아했지만 (역시 사람들은 자기 삶에, 자기 운명에 가장 관심이 많다) 그건 문탁 내에서 지속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종목이었다. 여전히 밀양과 ’공부‘를 매개로 만나는 방식은 분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문제적이었던 것은 “문탁분들은 왜 공부를 하세요?”라는 밀양주민들의 질문이었다.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왜 공부하느냐는 질문은, 마치 드라마 <대장금>에서 “감 맛이 나서 감 맛이 난다고 하는데 왜 감 맛이 나느냐고 물으시면”처럼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그렇다고 “삶의 비전을 찾기 위해서 공부해요”라거나 “숨 쉬는 것처럼 공부해요”라고 말하는 것은 성의가 없어 보였다. 우리는 나름대로 길게 말하려고 노력했는데 그럴수록 우리는 점점 더 버벅거렸다. 아쉬웠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분들의 질문에는 공부에 대한 어떤 표상이 전제되어 있었다. 공부란 지겹고 힘들지만 성공을 위해서 학교나 가정에서 강요받는 것. 공부란 졸업장을 따고 그 졸업장은 연봉으로 교환되는 것. 그러나 가방끈이 길다고 인품이 훌륭하지는 않는 법.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다는 것. 그러니 그분들의 질문은, 너희는 왜 힘들고 지겨운 공부를 계속 하고 있니? 너희는 혹시 너희도 모르는 지적허영과 성공에 대한 욕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니? 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제도 밖 인문학공동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의 공부에는 목표도 토대도 전공도 마침도 없다는 의미이다. 누군가는 더 많은 지식을 쌓기를 원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반대로 공부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하고 싶은 공부가 뚜렷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친구 따라 강남 가듯 공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함께 공부하는 한 서로의 욕망과 관심은 섞이고 각자의 질문은 충돌하고 증식한다. 하여 누구라도 출발점에 그대로 서 있는 사람은 없다. 왜 공부하느냐는 질문에 만약 우리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우리의 공부가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존재하기 때문이며, 우리의 공부가 목표 없는 과정, 방향 없는 계기들이기 때문이며, 우리의 공부가 계속 흘러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공부하세요?”라는 밀양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은 한편에서는 너희의 공부가 진짜 수행이 되고 있느냐는 밀양의 매서운 질책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공부가 수행인 한 밀양도 함께 해야 하지 않겠냐고, 우리가 밀양에게 권하는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두 번째 밀양×문탁 인문학캠프가 진행되었다. 이번에는 2박3일로 짧고 굵게 치렀다. 나는 이주농업노동자 문제라거나 구미현 3대의 이야기도 좋았지만, 그런 내용보다 밀양과 문탁이 좀 더 친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뻤다. 앞으로 밀양과 문탁은 어떻게 공통적인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여 서로에게 배우고 가르칠 수 있을까? 밀양이 오랫동안 문탁의 화두였던 것처럼 문탁이 밀양의 새로운 질문이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번에는 밀양이 응답해야 하는 차례일지도 모르겠다.

 

댓글 3
  • 2024-02-01 01:27

    몇 번 곱씹어가며 읽다가 이제야 댓글을 답니다. 음... 뭔가 이상한 감정이 드는군요 하하하
    평소 문탁에서 얘기하는 ‘연대’란 어떤 걸까.. 하는 궁금함이 있었어요. 연대라는 말 자체가 제 삶에서 생소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이번 밀양방문은 저에게 묘한 감정과 생각들을 연이어 일으켰던 사건이었어요.
    덕분에 피곤한 문탁샘에게 밀착 질문을 연이어 퍼부어서 문탁샘을 더 피곤하게 만들기도 했지요^^;;;;

    밀양방문과 올려주신 글로 인해 어느 정도 질문은 해소되었습니다.
    밀양에 대한 자료도 좀 더 찾아볼게요. 마음 감사해요, 문탁샘!

    오늘 문탁에 방문했더니 마주치는 샘들마다 저의 안부를 챙겨주셨어요. 몸은 좀 괜찮냐 살펴주시기도 하시고... 이런 마음도 작은 의미의 연대겠지요.
    마음을 쓰고, 공감하고, 함께 해주고, 귀 기울이고, 문탁에서의 에세이 데이에 참석하고 댓글을 다는 세세한 행동까지...

    앞으로 저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 2024-02-01 14:51

    저는 이 글을 작년 11월 밀양 방문 전에 읽었어요. 서생원 둘러 보다가 젤 밑에 칸에 있는 자료집에서 우연히 발견했지요!
    저는 밀양의 응답을 매년 '감 농활'로 실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ㅎㅎ
    그때 무척 몰입해서 읽었는데, 무려 캐나다 한국학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글인 줄은 몰랐네요!!!

  • 2024-04-04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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