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오의 변덕스러운 혼> 2회차 질문들

작은물방울
2023-10-20 00:53
184

p.128 식인이 투피과라니 족의 종교, 샤머니즘, 그리고 신화학을 횡단하는 동일한....<중략> 늙은 여인의 탐욕.....

즉 "사람들에게 장수를 약속하고 늙은 여인들이 분명 젊은 소녀로 돌아갈 수 있다..."남성들이 전투에서의 용맹함과 죽음 직전의 용기를 통해 영생을 손에 넣었다면, 식인은 장수ㅡ 나아가 불사를 획득하는 여성적 방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p.129까지 이르는 식인을 여성적 방식으로 보는 설명, 그리고 연로한 여성의 영향력 등은 갑자기 튀어 나온 느낌이다. 

불사와 식인을 여성적 방식이라 본 이유가 무엇인지 같이 유추해보자.  그리고 이후  복수는 남았지만 식인(실제 먹는 행위)은 점점 포기하는 분위기를 그리며 p.132에는 '여성적 영역의 패배'라 이야기한다. 

하지만 2부의 끝부분에서는 '식인'의 변형(식인적인 관계는 유지하는 방식)을 이야기하는데 실제로 남은 것은 "남성적 방식"의 물리적 전쟁이 아니라 식인적인 관계 "여성적 방식"인것인가?  굳이 젠더적 언어를 쓴 이유가 무엇일까?

댓글 5
  • 2023-10-20 07:27

    투피남바 사람들의 기억법
    "그들은 신에 관해서는 미약한 기억력을 보여주었지만 적에 관해서는 엄청난 기억력을 과시했다” (102)

    1. 복수
    - 복수는 정확히 기억을 생산하는 제도였다. 그러니까 기억은 적과의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여기서 개인의 죽음은 사회체의 긴 수명에 도움을 주었다. (89)
    - 복수가 미래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적의) 손에 죽었다. 지난 죽음에 대한 기억, 즉 한 집단과 다른 집단의 죽음에 대한 기억은 모두 생성의 산출로 나아갔다. 복수의 이중적인 영속성 - 끝없는 과정과 집단 스스로의 경계를 초월하는 관계성 -은 복수가 단순히 흔히 볼 수 있는 시간을 없애는 기계가 아니라, 오히려 시간을 생성시키고 시간 속을 여행하는 기계였다. 과거로 연결되는 것은 물론이고 의례적 대결을 행하는 위대한 현재를 통해 미래를 발생시킨다. 복수가 없다면 (적이 없다면 죽음도 없겠지만) 아이들도 이름도 연회도 없을 것이다. (중략) 따라서 상연된 것은 집단에 속한 고인에 대한 기억의 회복이 아니라 적들과의 관계 지속이다. 적들이야말로 집합 기억의 수호자들이었다. 집단의 기억 - 이름, 문신, 연설, 노래 -은 적에 대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100)

    2. 카우이나젠스(음주연회)
    - 투피남바 사람들은 잊지 않기 위해 술을 마시며… (114) 투피남바의 카우이나젠스는 기억을 되살리는 만취였다. 인디오들은 취하면 기독교 교리의 가르침을 잊고, 해서는 안 될 것들을 기억했다. 카우잉은 변덕스러움의 영약이었다.(117) 그들이 가장 취했을 때 과거의 악에 대한 기억은 다시 새로워지고 그들은 곧 적을 죽이려는 열망과 사람고기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혀 달아오르며 잔뜩 자만하기 시작한다.(117)
    - 술을 마실 동안 그들은 어떻게 이 이름들을 얻었는지를 마치 처음 말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결과적으로 모든 아이들이 적을 죽여서 얻은 이름을 알게 되는데, 이것들이 그들이 말하고 노래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신사라면 술을 마시는 연회를 제외하고는, 이름들에 대해 절대 언급하지 않는다. 술과 함께 그들의 행위에 대한 기억과 이야기들이 술술 나온다.(118) 밤새도록 노래를 부르고 나면 죽인 자에게 몰려가 취한 이름을 말해달라고 애걸복걸한다. 그가 이름을 말하면 사람들은 곧바로 죽은 자의 죽음과 죽인 자에 대한 찬사에 기초해서 새로운 노래들을 준비한다. (119)

    - 하지만 결국 인디오들이 굴복했을 때 “식인은 단지 부끄러운 기억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 사람고기를 먹고 있으면 지탄과 처벌을 받았다” (134)

  • 2023-10-20 08:31

    올려요

  • 2023-10-20 08:47

    투피남바 족의 경우 식인관습은 사회체 전체와 일치했다. 남자들 여자들, 아이들 모두 적을 먹어야 했다. 사실상 적이야말로 식인 연회의 순간에 사회체를 밀도와 외연의 최대치로 구성했다. 그러나 이 실천에는 겉보기에는 사소하고 일시적이면서도 결정적인 배제가 필요했다. 바로 죽인 자는 그의 희생자를 먹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원칙, 즉 사냥꾼이 그가 잡은 것을 먹으면 안 된다는 원칙의 단순한 적용 이상으로 보인다. ~ 공동체가~~ 적-되기를 상연하는 동안 적의 숨통을 끊는 자는 규칙과 상징의 무게를 혼자 짊어졌다. ~~ 식인주의는 누군가 식인을 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했다.
    ====
    "투피남바 사회의 식인은 적과의 '동일화', 근본적인 변성의 조건으로서 '타자'를 통한 자기 규정"이라고 한다.
    이러한 전통은 유럽인들이 가져온 가치들에 삼켜지고 내부화 시키고 그들의 전통을 뒤덮어버렸다. 브라질 투피남바의 식인의 의미를 읽으면서 인간이 인간을 먹는 것이 이토록 잔인한 일이라면 인간이 다른 동물을 먹는 것에는 너무 관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투피남바의 전통을 내면화 해본다면, 우리가 소와 돼지를 먹는 것을, 땅을 죽이고 대기는 죽이며 집어 삼켜 그들을 동일화 하는, 타자를 통한 자기규정으로 본다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했다. 곧 우리는 그들의 잠재적 적일 것이며 언젠가 그들의 복수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벌써 복수가 진행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사회적 규정도 원칙도 사라져버린 사회가 예수회 사람들이 치를 떨던 그 식인 사회보다 더 잔인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 2023-10-20 09:24

    *우리의 진수성찬에 무엇을 올릴까?

    - 135명의 보잘것 없는 부족집단 아라와테족에게 식인주의는 여전히 타자가 되는 한가지 방식이다.“노래의 ‘나’는 타자이고, 타자는 나 곧 노래하는 몸이다. ” 나는 너고 너는 나를 끝없이 역전한다. 인디오의 형이상학에서 사상은 거꾸로 돌아간다. (P188)동물, 식물, 개체는 모두 같은 유형의 ‘혼’을 가진 존재다. 다른 것은 몸과 몸이 가진 역량이다. 그들이 타자를 받아들이기 위해 그들의 식탁에 올린 그것에 환대하고 존중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식탁에 올려질 수많은 다른 몸을 가진 ‘나’에 대해 그들처럼 생각할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진수성찬은 좀 달라질까?

    ** *형이상학들, 왜 또다시 형이상학인가?(p162, 169)

    -인류학은 수많은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 인류학자가 무엇을 연구하는지에 따라서 그것은 비교 경제학, 비교 정치학, 비교 식물학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또 인류학이 다른 민족집단들의 형이상학이 무엇인지를 연구한다면 형이상학도 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전문적인 철학자가 아닌 다른 민족집단도 형이상학적 사변을 파헤칠 수 있다는 겁니다. 형이상학은 서양의 혹은 학술적 전통의 혹은 철학자들의 사유재산이 아닙니다!!!형이상학은 모든 인간 존재의 필수적인 활동입니다. 또 비인간 존재들도 그러할지 누가 알겠습니까?😁
    형이상학은 느슨한 의미에서 보편적 혹은 더 정확히 말해서 다원보편적 (pluriversal)이거나
    횡단적(transversal) 입니다. 메릴린 스트래선 (Marilyn Strathern)은 아름답고 정교한 문체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문화의 좋은 점은 모두가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
    이 말에 공명하자면, 나는 형이상학의 좋은 점은 모두가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스트래선이 문화에 대해 말하고자 한 것과 같은 의미에서 모두가 그것을 다르게 가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문화, 수많은 퍼스펙티브가 존재하는것.
    우리 사상의 원리로 환원되지 않는 사고가 있다는 것을 지각하는 것.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것은 그만큼 자기 중심(서구 중심)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이겠지.
    카스트로는 서구라는 자기를 중심에 놓고 거울을 바라보며 사고하는 일련의 사상들을 끝없이 비판.
    -166. 인류학은 민주적 의회의 현장에서 제외된 이들로 부터 정치철학과 형이상학적 사상을 배우고자 합니다.-

  • 2023-10-20 09:26

    변덕스러워 보이는 투피남바 사회에서 절대 버리지 않는 가치가 있다면 복수였다. 그것은 집단의 관계성에 있어서 필수적인 코나투스였다. 복수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개인에게는 명예로운 죽음이 부여되고 집단에게는 모독이 가해진다. 복수는 기억을 생산하고 개인의 죽음을 통해 사회는 수명을 이어갔다. 복수의 궁극적 형식은 대화와 식인으로 이루어진 의례였다.
    “복수가 없다면, 즉 적이 없다면 죽음도 없겠지만, 아이들도 이름도 연회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상연된 것은 집단에 속한 고인에 대한 기억의 회복이 아니라 적들과의 관계 지속이다. 적들이야말로 집합 기억의 수호자들이었다.”(100)
    투피남바족에게 기억은 적에 대한 기억이며, 복수의 전쟁은 자율성의 완고한 긍정이 아닌, “원초적인 타율성의 현현이며 타율성을 자율성의 조건으로 승인하는 것”이었다. 즉 복수는 사회의 총체성을 구성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투피남바 전사의 복수는 “근본적인 존재론적 불완전성을 표현”하는 사회의 중추적 가치였다.
    카스트루는 들뢰즈를 빌어 타자없는 사회는 사고할 수 없으며 외재적 관계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변덕스러움과 일관됨, 개방과 완고함은 하나의 진리의 두 얼굴인 것이다.

    하지만 투피남바는 유럽인들의 무자비한 침략에 의해 전쟁에서 패배했고 전쟁을 잃었다. “허용되지 않은 토착의 전쟁을 금지하고 식인풍습을 사형으로 다스리는 칙령이 내려졌다. 인디오들은 혼의 죽음과 함께 항복했다.”(132) 고집스럽게 지속되던 식인의례가 급속히 포기된 듯이, 인디오들 사이에서 조차 식인은 부끄러운 과거의 기억에 불과한 것이 된 듯이 보인다. 물론 부모로부터 (강제로) 아이들을 분리하여 학교에 보낸 것이 핵심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제국주의자들의 무자비한 대학살의 결과로 인디오들은 영혼과 코나투스를 상실하고 절멸해가는 슬픈 종족이 되어 버린 것일까. 카스트루는 그것을 고발하려는 것이 주목적은 아닌 것 같다.

    그는 마지막 장에서 애초에 식인 관습은 불안정한 것이었다는 레비스트로스의 주장을 덧붙인다.
    “레비스트로스는 식인을 타자와의 근본적인 동일화라는 배경으로부터 윤곽을 드러내는 불안정한 형상으로 이해한다.” 언제나 타자가 전제되는 사회생활에 있어서 사교성(sociability) 스펙트럼의 한쪽 극단에 무관심과 소통불가능성을 둔다면 반대쪽 극단에 위치하는 것이 바로 적을 섭취함으로써 동일화하려는 식인주의라는 것이다. 즉 식인은 사교성의 과잉이다.
    카스트루는 사교성 과잉의 사회였던 투피남바에서 상대적으로 쉽게 식인을 포기할 수 있었던 이유에 “유럽인의 도래”가 있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유럽인이 적의 위치와 기능을 점유함으로써 외부공간을 채우고도 남을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변덕스러운 인디오들에게 식인의 형태는 다른 가변적인 형태로 얼마든지 전환 가능하다. 예컨대 카스트루가 수년간 현지조사를 했던 아라웨테족은 적을 신으로 탈바꿈시킨 식인적인 종말론을 개발했다.

    이번 텍스트를 읽고 감히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재미있게 읽었고 우리와는 너무나도 다른, 타자가 존재의 근본적인 토대임이 너무나도 자명한 이들이 지구 한켠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카스트루가 인류학을 쓰는 방식은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든다. 그것과 스트래선이 말하는 인류학을 쓰는 문제를 연결해서 이야기해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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