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마 천국 01> 극장에서 영화를 안 보는 이유

청량리
2016-07-16 15:35
738

logo copy.jpg


[시네마천국 01]

극장에서 영화안 보는 이유






글 : 청량리


 








나는 극장에서 영화를 잘 보는 편이 아니다. 집중이 잘 안 되기 때문이다. 영화관은 화면이 커서 좋지만, 주변이 늘 어수선하다. 특히 이런 씨쥐비 같은 멀티플렉스 상영관들은 상영관을 늘리려고 화면과의 거리가 가깝다. 재수 없게 앞쪽 라인에 있으면 목 디스크 걸리기 딱 좋다. 자막 보려고 눈이 영화 주인공보다 더 바쁘게 움직이다보면(극장 자막은 늘 세로쓰기지..지금 글은 가로쓰기인데..) 토비콤을 장기 복용해야 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조조할인 제도가 없어져서 반값에 영화보는 맛이 사라진 뒤로는 거의 극장에 가질 않는다(물론 아이들 덕분에 애니메이션 보러는 몇 번 간 적 있지만).


악어떼 아이들과 완득이단체관람한 뒤로 최근에 극장에 간 게 작년 여름인 듯하다. 광주 출장 마치고 막차타서 터미널에 도착하니 새벽 2시 반. 회의가 잘 끝나서 발걸음도 가볍고 배도 출출하니 편의점에서 캔맥주 하나 마시고 있는데, 가만있자...야탑터미널에도 이런 씨쥐비 같은 게 있지 않았나 싶었다. 마시던 캔맥주 들고 지하로 내려가 보니 아직 심야 상영하는 프로가 몇 개 있었다. 혹시나 싶었는데 그때 잘 나가던 베테랑도 새벽 3시 상영표가 있었다. 얼른 밖에서 캔맥주 하나 더 사와서 좌석표와 상관없이 편한 자리 잡았다. 이런 새벽에 극장에 누가 오나 싶었는데, 야탑역 근처라 그런지 진짜 커플인지 부킹 커플인지 모를 남녀들이 군데군데 자리하고 있었다. 황정민, 유아인과 2시간 동안 롤러코스터 타듯 신나게 보고 나오니 새벽 5시반. 밖에는 첫차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학 때 술퍼마시다 보면 종종 새벽 청소부분들을 뵙게 되는데, 왠지 그거랑 느낌이 비슷했다. 영화는 재밌었는데, 왠지 모를 씁쓸함과 아쉬움. 영화가 뭐, 사실 오락영화라서 그럴 수도 있었다. 새벽에 보기엔 추천하고 싶진 않다. 영화 베테랑은 그래서 내용보다 혼자서 심야영화 보기 전 들뜬 설레임과 보고 난 후 씁쓸한 새벽의 환한 거리가 기억에 남는다.

베테랑.jpg



이왕 이렇게 된 거, 혼자 극장에서 본 영화 이야기 하나 더 한다. 언제 봤는지 기억 잘 안나서 찾아보니 2004년 개봉작이란다. 이것도 어느 여름날 버스터미널 씨쥐비 같은 곳에서 본 영화인데, 공교롭게 영화제목도 터미널이다. 그때도 터미널에 내려서 뜬금없이 영화나 한편 볼까 싶어서 둘러보다가 제목이 터미널인게 맘에 들어 사전 정보도 없이 표를 끊었다. 물론 톰 행크스 주연이고 스필버그 감독인 영화라서 일단 망하진 않겠다 싶은 맘도 있었다. 영화는 주인공이 미국으로 들어오는 공항에서 시작한다. 입국심사 직전 그의 나라에서 일어난 쿠데타로 갑자기 유령국가가 되어버려서 미국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공항에서 9개월 동안 살아간다는 다소 황당한 이야기다. 재밌는 건 당시까지 드골공항에서 살고 있는 한 사람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이다. 공항과 버스터미널의 분위기는 전혀 다르지만, 극장을 나오면서 대합실이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국가가 없는 사람이 머물 수 있는, 어디든지 갈 수 있으나 어디에도 없는 곳, 작은 대합실이 마치 주인공이 살았던 그 터미널 같았다. 10년이 지났지만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갈 때면 그 영화가 늘 생각난다. 두 번의 경험을 통계 내긴 어렵지만, 10년 주기로 본다면, 2026년 어느 여름날 터미널 씨쥐비에서 혼자 영화를 볼 것 같다.

터미널2.jpg




, 그러고 보니 문탁 공부방에서 새벽에 혼자 영화를 본 적도 있었다. 건축협동조합을 만들고 한창 바쁠 때, 문탁공부방은 나의 공식 야근장소였다(그때는 아직 다락방 사무실도 없었다). 야근에 지칠 무렵, 스스로 선물을 하나 마련했다. 오늘 해야 할 일을 하고 나면 영화 하나 보여주마. 파지사유가 막 생겨났을 무렵인데 당시 영업(?)이 끝난 파지사유에서 혼자 소리 키워놓고 보기도 뭣하고, 공부방 사운드도 가마솥님 덕분에 훌륭한 중저음이 아직 살아 있었다. 분량을 다 하진 못 했지만 이만하면 됐다고 나름 칭찬해주고 본 영화가 그래비티. 사실 그래비티에서는 중저음을 살릴 음악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 음악이 등장하는, 예를 들면 우주정거장이 폭발하면서 산드라 블록이 엄마 잃은 아이마냥 울부짖는 장면에 등장하는 사운드가 중요하다. 비교적 짧게 느껴진 상영시간이었지만, 우주에 다녀오기엔 충분했다. 엔딩 크레딧은 올라가는 동안 공부방 안에서 마치 흘러가는 별처럼 느껴졌다. 나에게 있어 졸린 새벽을 깨어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좋은 영화 한 편 때리는 것이다. 영화 그래비티는 문탁의 공부장을 작은 소우주로 느끼게 해 준 영화다. 그래서, 문탁 공부방에서 상영할 필름이다 프로그램을 깨알 광고를 하자면 8월에 히치콕 영화를 24시간 연속 상영할 예정이다. 아무래도 Alfred Hitchcock, All Day Long' 24시간 히치콕 상영은 틀어 박힐 수 있는 문탁 공부방이 딱인 듯하다(물론 이건 싸장님과 상영관 매니져와 논의해야겠지만).

Gravity-1.jpg




사실 영화를 극장에서 잘 안 보게 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영화를 보고 나면 그때 흘러나오던 음악이나 씬 스틸러인 저 배우가 누군지, 거의 상영시간만큼 찾아보게 된다. 그런데 극장에서 영화를 보게 되면, 동면 이후 동굴 밖으로 나온 곰이 본 환한 세상처럼 머리가 멍해진다. 매표소의 팝콘 냄새와 극장 밖의 소음들로 엔딩 크레딧 때 흘러나온 음악은 귓가에서 사라지고, 씬 스틸러가 등장한 장면은 거리의 네온싸인으로 지워져 버린다. 뭔가 그 느낌을 조금 더 갖고 싶은데, 극장에서는 그게 안 된다. 그래서 파지사유에서 영화를 보고 나면 어땠어요?’라는 질문을 하기도, 대답을 하기도 쉽지 않다. 필름이다에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전혀 알지 못하지만 영화에 참여한 그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장면들을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니 다행이다. 헌데 씨쥐비에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감과 동시에 청소하시는 분이 들어오고 불을 켜버리니, 뻘쭘하게 혼자 앉아 있기도 뭣하다.

 

요즘엔 많은 영화들을 노트북으로 본다. 늘 노트북으로 일 하다 보니 영화 볼 때도 작다는 느낌은 없다. 오히려 드라마나 다큐 장르의 영화를 굳이 커다란 화면으로 꼭 봐야하나 싶은 생각도 든다. 그래도 그래비티와 같은 장르의 영화는 다시 한 번 극장에서 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기도 한다. 영화 관람료가 점점 올라가고, 점점 동네 영화관들이 사라지고 이런 씨쥐비 같은 멀티플렉스들이 점점 늘어나고, 3D4D가 되면서 극장이 점점 놀이시설처럼 되면, 나는 점점 더 극장엔 안 갈 듯하다. 그럼, 어디 가냐고? 당연, ‘씨네마 드 파지. film IDA




댓글 7
  • 2016-07-16 21:13

    세로쓰기 자막 때문에 극장에서 영화를 안 본다...

    우와 극장을 몇십년 동안 안 갔나보네요...

  • 2016-07-16 21:41

    마지막 멘트 죽이는데요 ㅎㅎ

    저두 그래비티를  봤을 때가 생각나네요. 

    고상한 세상에 살려했던 제게 중력이 있는 속세에 발디뎌여야한다고 말해주더군요. 

    마지막 장면에 감동받았었어요.  

    전 영화관에서 봤었는데...파지 공부방도 괜찮았겠다 싶네요. 

  • 2016-07-16 21:59

    드디어 청량리가 <시네마 천국> 첫 주자로 나섰군요.

     

    사실 전 혼자서 영화관에 가는 걸 즐겨요.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제 맛이잖아요?

     

    하지만 극장에선 집중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야요.

    솔직히 아까 오후에도 혼자서 후다닥 cgv에 가서 영화 한편을 보구 왔는데

    내 뒤에 앉은 여자 둘이 계속 떠들어서 몇번 고개를 돌려 째려봤는데도 멈추질 않더라구요. 아주 강심장.

    그래서 자리를 옮겨 앉았더니 이번에는 통로를 사이에 두고  대각선 아래쪽의 남자가 스무번도 넘게 스마폰을 켜는 거예요. 정말 가서 때려주고 싶더라구요. ㅠㅠㅠ..

    영화가 끝났더니 여기 저기서 술렁술렁... "끝난거야?", "뭥미?", "이 영화 뭐야?" 술렁술렁..꿀렁꿀렁 ... 그리고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기 전에 여지없이 청소아줌마가 앞문 활짝 열어놓더라구요. ㅋㅋㅋ

    여운이라는게 없더군요^^

  • 2016-07-16 22:48

    혼자 식당에 가고, 혼자 극장에 가지 못하면

    어른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철딱서니 없는 때가 있었다.

    무슨 영환가 기억은 안나지만, 혼자 가서 관객이 2~3명인 영화를 본 적도 있다.

    그래서 같이 영화 보는 사람들과 아는 척을 해야 할 것 같은 요상한 분위기의 관람이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영화는 늘 좋더군요^^

    <씨네마 천국>도 물론 좋겠지요!!

     

     

  • 2016-07-17 10:43

    요즘 개봉한 영화 중에 서프레제트 - 보고싶었는데 계속 놓치다가...어제 검색해보니 밤 12시반인지 한시인지 한타임하더군요...
    갈까말까 고민중이예요, 가서 잘 지도 모르고 약간 귀찮기도 하지만 댓글달다보니 가봐야겠다는....생각이 굳어집니다^^

    멀티플렉스가 안 좋은 점도 많지만 가까이 있어서 후딱 가보기 좋은 점은 있어요~~ 예전 동시상영관처럼 오징어냄새도 안나고 ㅋㅋ

    그래도 왠지 여운이 쉬이 사라지는 거 같았는데 청량리 글보니 그렇구나 싶네요~~ 

  • 2016-07-17 11:35

    전 '본 투 비 블루'  보러 서둘러 극장 가야겠어요. 

    좀 멀어도 광화문 시네큐브에 가면 캐러맬 냄새 없이 영화볼 수 있어서 좋아요.^^

    내일부터 단식인데... 헐렁한 뱃가죽 걸치고 제 첫사랑이 연기한 쳇베이커를 볼 생각에, 

    음... 단식이 기대되는군요. ㅎ 

  • 2016-07-17 15:47

    헐 ~~~~~~~

    어디서건 볼 수만 있다면야 !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40
소오름~ 갱스오브뉴욕 게릴라 상영 후기 (2)
광합성 | 2016.09.12 | 조회 514
광합성 2016.09.12 514
39
<시네마 천국 09> 영화가 지루한 그대에게 (4)
| 2016.09.10 | 조회 470
2016.09.10 470
38
<시네마천국 08> '방화'의 추억 (6)
자룡 | 2016.09.04 | 조회 526
자룡 2016.09.04 526
37
[게릴라상영] - 갱스 오브 뉴욕 (5)
필름이다 | 2016.09.01 | 조회 957
필름이다 2016.09.01 957
36
<시네마천국 07> 페르세폴리스 - 지적이고 아름다운 애니메이션 (3)
다다 | 2016.08.29 | 조회 554
다다 2016.08.29 554
35
[필름이다] 히치콕데이? 오, 노우! 슬리핑데이!! (8)
필름이다 | 2016.08.22 | 조회 541
필름이다 2016.08.22 541
34
<시네마 천국 06> 영화, 그냥 본다 (8)
토용 | 2016.08.21 | 조회 404
토용 2016.08.21 404
33
<시네마천국 05> 영화는 , 맛있다. (7)
담쟁이 | 2016.08.13 | 조회 515
담쟁이 2016.08.13 515
32
<8월 기획전> - 히치콕 데이 - CDP냐? CGV냐? (5)
관리자 | 2016.08.12 | 조회 1014
관리자 2016.08.12 1014
31
<시네마천국 04> 영화라는 책갈피 (5)
동은 | 2016.08.06 | 조회 558
동은 2016.08.06 558
30
8월 기획전 : 더운 한여름, 영화 한가득 - 알프레드 히치콕 상영전 (1)
청량리 | 2016.08.02 | 조회 571
청량리 2016.08.02 571
29
<시네마천국 03> 추억속의 영화관 (5)
지금 | 2016.07.30 | 조회 607
지금 2016.07.30 607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