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이다] 돼지는 말한다 - <돼지라서 괜찮아>
필름이다
2016-10-20 08:48
515
이번 주와 다음 주 금요일, [필름이다]에서는 아주 특별한 영화 두 편을 상영합니다.
주제를 '동물권'이라 말했지만 사실은 동물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인간에 관한 영화입니다.
우리는 도대체 누구일까, 라는, 뼈아픈, 그러나 피해갈 수 없는 질문!
여기 돼지에 관한 장시(長詩)가 있습니다.
다음 주 금요일 만나게 되는 황윤감독이 구제역 이후 <잡식가족의 딜레머>라는 영화를 찍었다면,
시인은 구제역 이후 <돼지라서 괜찮아>라는 시를 씁니다.
그러나 시인은 말합니다. 나는 구제역이 아니라 몸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라구.
인간은 인간의 몸을 다루는 방식으로 동물의 몸을 다룬다구.
[필름이다]에서는 오늘부터 다음주 금요일까지 매일 아침 <돼지라서 괜찮아>의 단편 한편씩을 올립니다.
시를 읽다보면 굿모닝이 아니라 배드모닝이 될지 모르겠고,
아침부터 이런 시를 읽어야 하냐고 항의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기도라도 생각하고 (혹은 수행이라고 생각하고^^) 매일 아침 이 시들을 각자/함께 읽어보는 것은 어떨지요?
[필름이다]가 '동물권' 영화주간을 맞아(빙자하여) 여러분께 드리는 간절한 제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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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는 말한다 / 김혜순
아무래도 돼지를 십자가에 못 박는 건 너무 자연스러워, 의미 없어
나는 선방에 와서 가부좌하고 명상을 하겠다고 벽을 째려본다
있지, 지금 고백하는 건데 사실 나 돼지거든. 있지, 나 태어날 때부터 돼지였어
더러워 나 더러워 진짜 더럽다니까. 영혼? 나 그런 거 없다니까
그러나 머리는 좋지 아이큐는 포유류 중 제일 높지 청결을 좋아하지
난 화장실 넘치는 꿈 제일 싫어해 그 꿈 꾸고 나면 아이큐가 삼십은 빠져
나는 더러운 물속에서 아침잠을 깬 사람처럼 쿨적거린다
코를 풀고 싶지만 선방엔 휴지가 없다 스님들은 콧물 안 나오나?
있지, 너 돼지도 우울하다는 거 아니? 돼지도 표정이 있다는 거?
물컹거리는 슬픔으로 살찐 몸, 더러운 물, 미끌미끌한 진흙
내가 로테르담의 쿤스트할레에서 얀 배닝이라는 사진가가 일제 식민지 치하
수마트라 할머니들 찍은 사진을 봤거든 그런데 그 사진 속 표정은 딱 두 종류였어
불안 아니면 슬픔, 그래서 난 걸어가면서 그 주름 얼굴들에게 이름을 붙여줬지
당신은 불안, 당신은 슬픔, 슬픔 다음 불안, 불안, 슬픔, 슬픔.
나의 내용물, 슬픔과 불안, 일평생 꿀꿀거리며 퍼먹은 것으로 만든 것
슬픔과 불안, 그 보리밭 사잇길로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돼지 한 마리 지나가네
그런데 돼지더러 마음속 돼지를 끌어내고 돼지우리를 청소하라 하다니
명상하다가 조는 돼지를 때려주려고 죽봉을 든 스님이 지나간다
아무래도 돼지를 십자가에 못 박는 건 너무 자연스러워, 의미 없어
아무래도 돼지가 죽어서 돼지로 부활한다면 어느 돼지가 믿겠어?
아무래도 여긴 괜히 왔나 봐, 나한테 템플스테이는 정말 안 어울려
있지 조금 있다 고백할 건데 나 돼지거든 나 본래 돼지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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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청결한 포유류 돼지가 사는 곳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영상으로만 봤죠)
가끔 고속도로 위에서 마주치는, 어디론가 실려가는 돼지들은
정말 시꺼멓고 더럽고.... 그렇더군요. 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