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끄는 짐승들> 2회차 후기

곰곰
2024-04-23 01:56
63

이번 후기에 당첨(?)되었다. 메모를 가장 늦게 올리는 사람이 후기를 쓰기로 했는데.... 내가 그렇게 되었다. 흑. 

발제는 노라샘과 자누리샘이 맡아주셨다. 

 

3부. 나는 동물이다.

우리는 인간이 동물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동물이라는 말의 ‘더 통상적인 용법’, 즉 동물을 인간과 동떨어진 하위 존재로 보는 시각과 맞물려 끊임없이 모순을 만든다. 우리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동물로 여기고 싶어하지 않을 정도로 동물이 아니다. 동물이란 무엇이고, 인간만이 이렇게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은 어떻게 강고해진 걸까?   

 

플라톤 이래 인간의 고유함을 논할 때 하나의 척도가 되는 것은 ‘직립보행’ 능력이다. 다윈도 자세를 인간의 표지로 사용했다. 이족보행은 인간 종에게 유일하고 발달과정상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지점이라고 믿었다. 세미나에서도 공생자행성의 마스코트 바다의 첫 ‘직립’에 함께 기뻐했던 일을 떠올리며 정상성에 대해, 상징으로서의 직립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데리다는 동물이란 하나의 말이며 ‘인간/남성’이 만들어낸 호명이라 했다. 인간/남성은 다른 생명체의 이름을 부여할 권리와 권위를 스스로에게 주었고, 자연에 이름표를 붙이고 그것을 범주화하려는 시도들은 강박적 충동이었다. 이러한 충동은 호기심만이 아니라 교회의 지식 생산에 대한 권위를 행사했고 자연에 대한 이해와 자연 안에서의 ‘인간’의 위치에 대한 특별한 이해를 조장했다. 

 

이성의 강조는 인간이 이성적 영혼을 소유한다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인간을 정점에 둔 위계적 분류체계는 중세에 들어 ‘자연의 체계’나 ‘존재의 대사슬’ 개념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데카르트를 지나, 린네에 이르러서는 인간은 사피엔스로 분류된다. ‘지혜로움’이라는 선험적으로 있다고 생각되는 내부적 자질의 이름을 붙였다. 이것 자체가 다른 종적인 기준 방식하고는 전혀 다른 방식을 인간에 대해서만은 허가하고 있다. 그리고 19세기 다윈의 진화론은 모든 생명체는 하나의 가족이라고 선언했건만, 이상하게도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차별은 더욱 공고해졌다. 

 

(존재의 대사슬)

 

 

4부. 자연 그대로. 

저자는 ‘자연’을 동물과 장애를 연결하는 연결고리로 가져온 듯하다. 동물 권리 운동의 선구자로 간주되는 피터 싱어를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이 연결성을 탐구한다. 피터 싱어는 쾌고감수능력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과 동물의 ‘평등한 고려’에 의거해 동물 해방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죽임에 대해서는 이해관계의 위계가 도입된다. 동물은 쾌고감수능력이 있지만 인지적 능력이 떨어지므로 고통없이 단번에 죽인다면 괜찮다는 것. 저자는 쾌고감수능력이라는 부분에서 모든 종들의 평등을 얘기하면서도 궁극적으로 와서는 사실 결국 위계를 나누어 죽임을 당해도 되는 존재와 아닌 존재를 나누고 있지 않느냐고 비판한다. 물론 피터 싱어의 담론이 인간 중심주의 벗어날 수 있고 종차별주의를 넘어설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까지는 인정하지만 거기서 머물면 안 된다. 그러면 동물과 장애 혼동하게 되고 장애인의 지위를 열등한 것으로 보게 되면서 또다른 문제들을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고통이 종 차이를 넘어서 공유되는 것이라며, 차이를 넘어 잠재적인 공감의 장소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장애는 고통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다. 당연한 것들을 다르게 보는 인식, 돌봄의 가치와 방식을 질문하는 것에 대해서. 

 

메모 리뷰

달팽이샘은 메모에서 부이-파우츠의 이야기를 보며 사람 비위를 잘 맞춰 사람들과 친근한 마을 고양이 양양이가 떠올랐다고 썼다. 파우츠는 동료 과학자들에게 부이의 처우를 개선해달라고 감히 말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했는데, 샘은 양양이를 입양하고 싶다는(그리고 그러지 못하는 이유도 함께) 얘기를 들으며 양양이가 마을에서 더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찾는 게 더 좋을 일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다고. 양양이에게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인지 판단하기는 일은 쉽지 않다. 

 

뚜버기샘은 장애운동과 동물권리 운동이 양립할 수 있을지 질문했다. 동물화의 끔찍한 폭력이 가해져왔던 역사적 맥락에 있는 장애운동의 지반에 서서 “동물임을 자처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동물화라는 잔혹한 현실을 비판한다”는 것은 힘든 문제다. 저자는 동물들이 우리의 친족이라는 인식을 가진다면, 동물임을 자처한다면 그것은 인간 폄하가 아니라 종차별주의의 폭력에 대한 저항의 방식이 아닐까라고 동의를 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릭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어떤 의미일까? 사이드쇼의 프릭 공연가들 중 많은 수가 스스로 장애의 경험을 “독특한 숙명이 아니라 문화적 소수의 경험”으로 여기며 프릭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인식해왔다는 점에서 테일러는 긍정적인 가능성을 읽어내는 것 같다고 썼다. 

 

수수샘이 피터 싱어의 2달러 질문을 읽으며 ‘만약 나에게 약 한 알로 남자의 몸이 될 수 있게 해준다면 그 약을 먹을 것인가?’로 바꾸어 스스로 질문해 보았다는 부분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샘은 그 약을 안 먹고 ‘내 몸이 여성임을 인정함으로써 나는 내 한계를 인식할 뿐만 아니라, 여성인 나의 신체를 창의적인 장으로, 세계와 상호작용하고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에 대한 잠재력을 가진 창의적인 장으로 알아갈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된다’(장애 -> 여성으로 바꾸어 적음)라고 쓸 수 있을지 물었다.

 

띠우샘은 싱어가 장애를 부정적인 것으로 개입이 필요하고 피해야 할 생물학적 결점으로 간주하는 의료모델로서 장애를 이해한다는 것이 문제라고 쓰면서, 다리에 금이 간 친구와의 여행에서 느낀 불편한 시선과 실제 이동 자체가 불편했던 경험을 얘기했다. 저자가 말하는 불구의 시간, 즉 실제로 가변적으로 우리 신체 형태와 함께 바뀌고 있는 시간감각이라는 것이 어떤 것일지, 삶을 사는 독창적인 방식은 어떤 것일지 질문했다. 그것은 아마 차이를 의식하는 자각이 수없이 많이, 많은 만남을 통해야 가능하지 않겠냐고. 

 

곰곰은 저자가 말하는 ‘장애는 이 세계와 소통하는 완전히 새로운 방법을 알려’준다는 것, ‘장애는 예술이다. 그것은 삶을 사는 독창적인 방식이다’라는 것에서 작년에 공부했던 존재론적 전회가 떠올랐다고 썼다. <부분적인 연결들>에서 스트래선은 퍼스펙티브가 신체성과 결부되고 그것은 마음 먹는다고 바꿀 수도 없고 관찰자가 재현할 수도 없는 관점이라 했다. “지도는 존재하지 않고 만화경같이 한없이 뒤바뀌는 치환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카스트루는 아마존의 형이상학에서 혼은 언제 어디서나 똑같으며 신체적 물질적 장치의 차이로 인해 그 역량이 다르게 구현된다고 인지한다고 했다. 즉, 다른 자연을 가지고 있기에 다른 문화를 가지는 것이다. 기존의 다’문화’주의는 각자 문화는 다르지만 자연은 하나라고 했는데, 그래서 자연을 파악하는 우리의 인식도 하나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것을 전복하는 것이 다’자연’주의다. 각자가 느끼는 자연이 종마다 다르고 자연은 각자 다른 것이다. 따라서 모든 장소가 특권적이고 모든 지점이 주체가 될 수 있다. 저자가 말하는 장애도 그러한 것 아닐까? 

 

느티샘은 장애를 불편하게 보는 자신의 시선이 불편했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라는 책을 소개해 주었다. ‘물거품이 일고 소용돌이 치고 굽이치다가 부딪히는 강물’의 흐름이 그러한 것처럼 언어장애를 가진 작가 자신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얘기하는 부분에서 많이 공감되었다고 했다. 

 

토토로샘은 장애인 아들을 둔 지인을 보며 느꼈던 안타까움의 감정이 싱어의 시각과 닮았음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처럼 인지적 능력의 유무가 삶의 가치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는데, 저자가 장애 때문에 삶의 질이 떨어질 것이라고,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덜 만족스럽고 덜 즐거울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묻는 부분에서 많이 반성하게 되었다고 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참샘은 어린시절엔 지독한 곱슬과 왼손잡이라는 이유 때문에 늘 교정되어야 할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통해 저자가 말하는 타인과 연결되는 통로로서의 억압과 고통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고 했다. 또한 “나는 내 형상 속에서 동물을 느낀다”는 부분에 동의하면서 신체를 정해진 용도가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할 때 동물 같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그로써 해방감을 느낀 솔직한 경험담을 나누어 주었다. 

 

메모는 꼭 제 시간에 올려야 함을 몸소 느끼며... 이상입니다!

댓글 1
  • 2024-04-24 00:43

    메모리뷰 좋네요.
    쭉 읽다보니 참 우리가 더 배움이 필요한 세상에 사는구나 하는 실감이 나는군요.
    획일적 시간 속에 살지 말자 해도 불구의 시간은 알지 못했고
    인간중심으로 살지말자고 해도 다른 신체성을 알지 못했고
    안이하게 요기까지만 상상하는 경계속 인물로 살았네요.
    이번 시즌 공부는 경계를 넘는다는게 어떤건지, 괴물이 되고 불구가 되는 게 어떤건지,
    조금이라도 알게 되어 다행인 공부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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