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문학 시즌1 일곱번째 후기 <블랙 스완>

청량리
2021-04-22 06:12
623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길다

| 영화 <블랙 스완>(2010) 

 

 

 그렇다. 이번 후기는 몸에 대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본인이 평소엔 절대로 보기 힘든 부위, 그 놈의 등근육으로 시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건 주인공 ‘니나’가 자신의 등을 긁다가 흑조의 깃털을 뽑는 쌉싸름한 장면 때문만은 아니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 혹은 보고 싶은데 시간이 없는 사람들, 이미 다 본 사람들에게 BTS의 <블랙 스완>을 들어보길 추천한다. 단, 반드시 ‘아트버전’으로 감상하길 바란다. 몸으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데 탁월한 사람들을 늘 동경한다. 그들의 신체를 반의반이라도 따라갈 수만 있었다면 아마 난 건축을 때려 치웠을지도 모른다.

 

 

 

 넷플릭스의 <스위트홈>(2020)에 등장한 이시영의 ‘등근육’이 한때 회자됐었다. 어마무시하게 벌크업 된 그녀의 등은 CG를 의심케 했다. 하지만 영화 <블랙 스완>(2010)에서 나탈리 포트만은 ‘등’만으로도 심리적 표현이 가능함을 보여줬다. 슬피 우는 그녀의 등은 점점 말라가고, 강박에 시달릴 때마다 오른쪽 어깨죽지의 상처는 심해졌다. 그럼에도 발레에 문외한인 난 그것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다. 영화의 절반은 놓친 셈인지도 모른다. 다행히 나탈리 포트만의 대표 필모그래피에 들어갈 만한 연기 덕분에 절반은 건진 셈이다.

 

   

 

 

 영화 <레옹>(1994)에서 제발 문 좀 열어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던 12살 소녀 마틸다, 아니 나탈리 포트만. 그녀가 영화 <블랙 스완>에서는 제발 문 좀 열어보라고 문 뒤에서 화를 내는 엄마를 벗어나고픈 애절한 발레리나 ‘니나’역을 맡았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화는 발레 ‘백조의 호수’의 무대를 배경으로 한다. 니나는 새롭게 선보이는 백조의 호수에서 프리마돈나 ‘스완 퀸’이 되고자 한다. 완벽을 추구하는 니나의 백조는 훌륭했으나 단장(뱅상 카셀)은 그녀에게 흑조의 도발적인 몸짓을 요구한다. 그때 니나의 눈에 들어온 건 발레단에 새로 들어온 릴리(밀라 쿠니스)였다. 언제나 엄마의 ‘스윗 걸’로 자라온 니나에게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릴리는 부러움의 대상이지만, 그 때문에 스완 퀸의 역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존재이기도 하다.

 

 

 

 영화 <블랙 스완>은 군-밤의 영화인문학 시즌1의 에세이 공통과제다. 같은 영화로 세 편의 다른 글을 만나는 것에 기대된다. 지금까지 매주 한 편의 영화를 봤고, 에세이로 본 오늘 영화까지 모두 7편이다. 무르나우의 <마지막 웃음>(1924)를 시작으로 버스터 키튼의 <제너럴>(1926), 브라이언 드 팔마의 <언터쳐블>(1987),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2007),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1950), 베리 젠킨스의 <문라이트>(2017) 그리고 나탈리 포트만의 <블랙 스완>(2010)이다. 토요일 낮시간에서 금요일 밤시간으로 옮긴 군-밤의 영화인문학에는 이상한 시간이 흐른다.

 

세미나가 오늘밤을 넘기지는 않도록 하기 위해 짧은 영화를 본다거나 일찍 영화를 본다 해도 늘 밤12시가 넘어서야 끝난다. 아, 오늘밤도 재하군의 아버지는 차 안에서 웅크리고 계시나요? 차라리 같이 영화 한 편 어떠세요? 그렇다. 문탁에는 매주 1박2일하는 세미나가 있다. 아닌 밤중에 영화사운드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에도 민원 한 번 없이 넘어가 주시는 위층 주민들에게도 감사드릴 수밖에 없다.

 

발레 ‘백조의 호수’의 마지막 피날레이자 영화의 엔딩씬, 니나는 높은 곳에서 서서 아름다운 백조의 날개짓을 한다. 그리고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화면 밖에서는 관객들의 환호성이 들리고 군무를 담당했던 릴리와 동료들은 박수를 보낸다. 단장도 무대로 뛰어오고 ‘마이 리틀 프린세스’를 연발하며 키스를 보낸다. 그러다가 니나의 배에서 번지고 있는 검붉은 피를 보며 놀라는 단장. 화면은 니나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는다. ‘나는 완벽했어요.’ 그건 단장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에게 보내는 칭찬의 위로였다.

 

 

 

 니나는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고 베스 다음으로 발레계에서 영원한 스완 퀸이 되었을까? 아니면 관객 중에 나이트 비번인 간호사가 뛰어와서 지혈하고 때마침 구급차가 도착해서 응급실에서 살아났을까? 재밌는 건 영화는 언제나 과거에 벌어진 일만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뻥이 심한 마블영화도 시점이 미래일 뿐 이미 지나간 일을 스크린으로 옮긴다. 영화관을 나서서 앞으로 걸어가야 하는 건 관객의 몫이다. 비어있는 스크린을 각본과 배우들의 연기로 채우기 위해선 많은 상상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서 그 영화를 해석하고 잘라내고 자신의 삶으로 가져오는 데는 더 많은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함께 본다. 그것도 오밤중에, 군-밤의 영화인문학에서. 

 

댓글 3
  • 2021-04-22 07:23

    접두사 - 쓸데없는 무언가 앞에 들러붙는 말이다. 군것질, 군살 . 허나 군밤은 구운 밤을 뜻하기에 우리들의 -밤은 쓸데없이 영화나 보며 남아있는 늦은 밤을 가리킨다.

    • 2021-04-22 08:22

      ㅋㅋ..
      무용지용의 시간, 가장 아름다운 시간?!
      부럽^^

  • 2021-04-23 11:02

    벌써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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