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린사람들》- <맞수들> 후기-술중독자 Farrington으로 생각해 보는 마비 (paralysis)

토토로
2023-06-03 20:03
663

 

  1. 타락한 남자들

20세기 초반, 유럽에 속하지만 가장 소외된 나라, 영국의 오랜 식민지, 보수적인 카톨릭 국가 아일랜드의 더블린. 그 시절, 그 곳의 사람들은 대개 가난하고 타락했으며, 삶이 변변찮았다. 성공하려면 다른 나라로 떠나야했다. 그러지 못하고 남은 자들은 술과 폭력, 가난과 부도덕에 찌들어있었다.

 

 

에블린의 주정뱅이 아버지(Eveline), 마담 무니에게 폭력을 휘두른 남편(The boarding house), 여자들 등쳐먹고 사는 거리의  백수들(Two Gallants), 소심왕 리틀 챈들러(A Little Cloud), 소년들을 성추행한 사제(The sisters)와 부랑자(An Encounter) .....더블린 사람들에 등장하는 남자들의 면면이다. 이쯤되면 인간 말단에 속하는 부류는 거의 다 나온 듯 싶다.

 

이번에 읽은 단편 < Counterparts>의 주인공 Farrington 은 중독에 가까운 술꾼이다. 근무시간에도 하루에 몇 번씩이나 몰래 빠져나가 술을 마시고 올 정도로. 그가 머리 나쁜 사람 같지는 않다. 임기응변, 순발력, 처세술, 친화력이 좋다. 어울리는 친구들도 많다. 소심한 챈들러에 비하면 꽤 과감하고 능수능란한 남자라고나 할까. 체격도 좋고 키도 크다. 그래서 더, 아니 이렇게 멀쩡한 사람이 어쩌다 그리 한심한 술꾼이 되었는지 궁금해진다.

 

  1. 20세기 더블린이라는 시공간의 특수성, 그리고 Farrington의 삶
  • 이 소설이 쓰여진 20세기 전후 아일랜드는 시간적으론 근대이지만,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 많아 보인다. 아일랜드는 카톨릭 국가라서 굉장히 보수적이었다. 성적인 억압, 엄격한 결혼제도, 종교예식 등은 시대가 변했어도 여전히 일상을 지배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사람들을 더 타락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아일랜드는 몹시 가난했다. 1847~1852년 감자 대기근으로 국민의 1/4이 죽거나 떠났다. 대기근의 여파는 오래 지속되어서, 몇 십 년이 지난 20세기가 되었어도 사람들의 삶은 계속 궁핍했다. (대기근을 방치한 영국에 대한 원망은 굉장히 뿌리깊게 자리잡았을 것이다.)

 

  • 아일랜드는 몇백년 동안 영국의 굴욕적인 식민지배를 받았다. 대부분의 아일랜드인의 삶은 가난했지만 영국과 결탁한 자들은 그 와중에도 먹고 살만했다. 일제 식민지 시절 친일파가 막대한 부와 권력을 누린것처럼. 친영계열의 아일랜드 북부 지역은 나름 부유했다. 북부사람들과 그 외 지역 사람들간에 지역갈등과 계급갈등은 피할수 없는 것 이었다. 소설<Counterparts>의 북부 출신 사장 Mr. Alleyen과 북부 엑센트를 비아냥대는 주인공 Farrington 사이의 갈등도 이와 관련이 깊다.

 

  • 성장과정에서 Farrington은 가난한 부모 밑에서,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했을 것이고, 따뜻한 돌봄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주변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도 직업을 구했으니 운이 좋았다고 해야할까. 하지만 술에 찌들어 근무태만이 잦아진데다가, 사장에게 자꾸 뻔뻔스럽게 응수해댔다가는 결국 그도 언젠가는 해고될 것이고, 삶은 더 나락으로 떨이질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랬듯, 그의 아들도 그저 그런 별 볼일 없는 어른으로 자라날 것이다.

 

     그럼 Farrington은 어떻게 해야할까

 

제임스 조이스는 <더블린 사람들>을 통해 더블린의 도덕적 해이, 타락, 소심, 부도덕등으로 표현되는 마비(paralysis)를 파헤쳐보겠다고 했다. 아일랜드 사람들이 마비에서 깨어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랬을 것이다. 각성이 일어나야 자신의 문제를 바로보고, 다른 삶을 살아보려는 시도나 가능성이 생길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아일랜드인들의 마비에 끔찍한 환멸을 느껴 그저 적나라하게 쓰고 싶어  시작된 소설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Farrington이 정말 마비에서 깨어난다면? 그에게 희망이 있을까. 술을 끊을 수 있을까. 다정하고 성실한 가장이 될 수 있을까. 유능한 직원이 될 수 있을까. 어쩌면 현실을 바로 보지만 쉽게 달라지지 않는 현실이 더 비참하고 괴롭지 않을까...

각성(에피파니)만으로 삶이 행복해지진 않는다. 각성 이후 더 괴로울 수도 있다.  제임스 조이스는 어떤 마음으로  소설을 썼을까...그가 소설을 쓰면서 참 괴로웠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쯤에서 제임스 조이스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으며, 조이스처럼 중국인의 마비에 환멸을 느꼈던  중국 작가 루쉰의 글 (그가 소설을 쓰게 된 경위를 밝히는 글)을 소개해보면서 후기를 마무리한다. 

 

“가령 말일세, 쇠로 만든 방이 하나 있다고 하세. 창문이라곤 없고 절대 부술 수도 없어. 그 안엔 수많은 사람이 깊은 잠에 빠져 있어. 머지않아 숨이 막혀 죽겠지. 허나 혼수상태에서 죽는 것이니 죽음의 비애 같은 건 느끼지 못할거야. 그런데 지금 자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의식이 붙어있는 몇몇이라도 깨운다고 하세. 그러면 이 불행한 몇몇에게 가망 없는 임종의 고통을 주는 게 되는데, 자넨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겠나?”

 

“그래도 기왕 몇몇이라도 깨어났다면 철방을 부술 희망이 절대 없다고 할 수야 없겠지”

 

그렇다. 비록 내 나름의 확신은 있었지만, 희망을 말하는데야 차마 그걸 말할 수는 없었다. 희망은 미래 소관이고 절대 없다는 내 증명으로 있을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을 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나도 글이란 걸 한번 써보겠노라 대답했다.

 

-루쉰의 글 중에서

 

댓글 6
  • 2023-06-05 12:35

    아일랜드 당시 배경과 함께 루신의 글이 마비를 입체적으로 조망하게 되네요!

    ‘각성(에피파니)만으로 삶이 행복해지진 않는다. 각성 이후 더 괴로울 수도 있다’
    각성(에피파니)이후 필연적으로 더 괴로울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이제껏 믿었던 가치체계와 자신에 대한 환멸로 수치심을 느끼는 순간,
    그전에 평온하다 믿었던 삶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요.
    이때부터 이 불쾌함을 응시하겠죠. 내 삶이 규정된 가치체계로부터 얼마나 억압적으로 강요당하는지...
    여기서부터 시작인 거 같아요.
    과거 여성의 불문율이었던 삼종지도(三從之道)같은 악습들이 사라진 것도 이 불쾌함을 응시했던 힘 아닐까요?
    그 시대의 ‘미친년’이라 불렸던 마비에서 깨어난 여성들이 있었기에 이만큼이나마 자유를 보장받게 된 것처럼요.
    이 불쾌함을 지독히 응시하는 힘... 이것이 비범함이고 희망의 씨앗이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허나 혼수상태에서 죽는 것이니 죽음의 비애 같은 건 느끼지 못할거야...
    그래도 기왕 몇몇이라도 깨어났다면 철방을 부술 희망이 절대 없다고 할 수야 없겠지”

    루쉰과 조이스의 글에서 서러운 희망을 느낍니다.

  • 2023-06-06 11:28

    우리는 조이스의 소설을 읽고 있지만, 이런 마비의 삶은 20세기 전후와 아일랜드에 한정되는건 아니다.
    단지 우리는 이런 글을 읽고 지금 우리를 응시할 수 있는 것이다.
    '각성(에피파니)만으로 삶이 행복해지지 않는다'
    이제 학습되고 고착된 무기력과 마주하고 싸워야 하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을 뿐!

  • 2023-06-07 00:39

    Farrington이란 이름 대신 The man~으로, 그들의 친구들도 The men~으로 대부분 서술한 의도성을
    처음에는 인물의 개체성을 무시하고 있는 직장 환경을 강조하나 싶었는데
    그보다는 그들에게 내면화된 '남자다움'의 폭력성을 비판하는 것 같아요.
    적의를 품은 누군가를 조롱하고 굴욕감을 주었을 때 승리감에 취해 과시하고,
    팔씨름도 놀이로 못 즐기고 있어요. 이기면 남자답고 지면 남성성을 상실한 것처럼 절망하고선
    결국 그 분노를 가장 약한 아들에게 발산하는...

    Alleyen과 Weathers라는 이름이 영국 성이라고 해요.
    그래서 Weathers와 팔씨름할때 Farrington 친구들이 조국의 명예를 지켜 달라고 한거였구요.
    Alleyen과 Weathers 두 인물의 안색이 붉은 빛으로 바뀔 때
    Alleyen은 들장미색, Weathers는 작약색으로 묘사한 이유도 영국인을 상징한 거였더라구요.
    장미는 영국의 국화고, 작약도 영국이 중국에서 수입해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까지
    인기있었던 꽃으로 지금도 영국 정원의 대표적인 꽃이랍니다.

    • 2023-06-07 08:15

      이 이야기는 다음에시간에 나오는 거겠군요.(아직 안읽었어요ㅎ)
      프리다생이 조이스 소설을 읽어내는 걸 보면
      성실하고, (긍정적인 뜻으로)집요하고, 섬세한게 느켜져요. 작품속에 아주 깊이 들어간것 같아요.
      저는 덕분에.......♡♡

  • 2023-06-08 13:46

    책을 읽다보면 가끔 타임머신을 타고 더블린 술집으로 날아가고 싶다는 공상을 하곤해요. "미래에서 왔습니다!! 여러분들은 영국보다 잘사는 나라가 되어 있을거예요. 그러니 술좀 그만 마시고,, 자! 집으로 돌아갑시다!"

    비록 마비상태였을지언정 그 시공간을 함께 채워준, 서로에게전우같은 존재가 "더블린사람들" 은 아니었을까? 라고 오늘은 마비에 걸린 사람을 변호해 봅니다. ^^ 날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책이예요 정말.

  • 2023-06-08 14:19

    갈수록 불편해지는 책이예요.. 저는....

    에피파니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못해서였을까요? 전 에피파니 각성을 자각(스스로 깨우쳐 깨달음)이라고 이해했거든요.
    힘들고 불편한 현실에 마비된 채 살아가지만 에피파니가 일어나는 순간, 그들의 삶은 바뀔 수 있을거라는...
    왜냐하면 생각의 전환이 일어났고 마음이 깨우쳤다고 생각했기때문이죠.
    <죽은 이들>에서 가브리엘처럼, 에피파니가 일어나면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힘이 일어날거란 생각, 힘들게 잡고 있었던 것들에서 풀려나면서 마음이 편해질거라는 생각,
    그것이 에피파니 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계속 조이스의 소설을 읽어가다보면 마비된 삶을 사는 인물들에 불편함만 일어나네요.
    에피파니만으로 삶이 행복해지지 않고, 또다른 불편함으로 간다면 그 또한 마비에서 또다른 마비로 간 걸 아닐지요?
    그런데 이것이 사회적 문제로 연결되어 부분에서는 생각이 꽉 막힙니다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333
<더블린 사람들> A Painful Case 후기- Sinico의 이름으로 고독형에 처한다! (6)
프리다 | 2023.07.02 | 조회 1146
프리다 2023.07.02 1146
332
7월3일 중국어 단어 (2)
노라 | 2023.06.29 | 조회 241
노라 2023.06.29 241
331
<더블린 사람들> Clay 후기 (5)
윤슬 | 2023.06.25 | 조회 450
윤슬 2023.06.25 450
330
6/26 중국어 카페 (2)
노라 | 2023.06.23 | 조회 219
노라 2023.06.23 219
329
<더블린 사람들> Counterparts 후기 (8)
진공묘유 | 2023.06.18 | 조회 503
진공묘유 2023.06.18 503
328
6/19 단어 (2)
바람~ | 2023.06.15 | 조회 253
바람~ 2023.06.15 253
327
6/12 중국어 단어 (2)
노라 | 2023.06.06 | 조회 209
노라 2023.06.06 209
326
《더블린사람들》- <맞수들> 후기-술중독자 Farrington으로 생각해 보는 마비 (paralysis) (6)
토토로 | 2023.06.03 | 조회 663
토토로 2023.06.03 663
325
<더블린 사람들> A Little Cloud 후기- 이 불쾌한 경이로움! (6)
프리다 | 2023.05.28 | 조회 795
프리다 2023.05.28 795
324
<더블린 사람들> A Little Cloud 후기-2차 '작은 신호로 오는 큰 역사' (8)
사 마현 | 2023.05.17 | 조회 598
사 마현 2023.05.17 598
323
<더블린 사람들> A Little Cloud 후기 (9)
Hee | 2023.05.14 | 조회 581
Hee 2023.05.14 581
322
<더블린사람들> The Boarding House 후기 (8)
윤슬 | 2023.05.04 | 조회 568
윤슬 2023.05.04 568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