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절 해석 수정

바람~
2015-03-15 00:36
522

야영해석 187~188(바람~)


그래서 그것은 신체에서 배출되는 것 전부일수 있다. 확실히 정신병의 환청과 소위 주찰망상(항상 누군가 보고 있다는, 감시당하고 있다는 망상)과의 관계에서 소리눈빛이 강조되어, 어머니에게 있어서 시원적대상과의 관계에서 유방, 그리고 아이에게 있어서 어머니에게 최초로 받을 수 있는 것으로서 정신분석에서는 금전과 거의 같은 의미로 여겨지는 분변()이 강조되고 있다 해도, 일반적으로 신체에서, 몸의 구멍이나 터진 곳에서 배출되는 다양한 것은 모두 이것이 아니다」 「현실성 안에 출현했던 대상a일 수 있다. 실제 라캉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대상a라고 부른 대상은 유일한 것과 같은 대상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침, 오줌, , , 잘린 머리카락이나 손톱, 정액 등의 온갖 체액일수 있을 것이고, 잘려나간 맹장이나 갈비뼈일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의사가 다소 엄숙한 얼굴로 환자 같은 우리에게 수술에서 절제된 우리 갈비뼈나 입원 중 몇 개월이나 발의 관절을 고정시키고 있던 볼트 등을 전달하는 그런 일을 하겠는가. 왜 전쟁에 나가는 사람은 가족에게 머리카락이나 손톱을 남기고 가려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을 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 물론 여성에게 있어서는 스스로 낳은 아이조차도 이 대상a현실화일수 있다. 혹은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태반.

확실히 거기에 있는 이 주체의 진리. 쓰레기, 남은 것, . 하지만 그것은 에게 결여되어 있다. 거기에 아무리 생생하게 생존하고 있어도 그것은 저것은 아니다. 대상a는 주체가 주체로 되는 순간 결여된 것이고, 그것을 대리해서 오는 무언가이다. 대리해서 온 것은 항상 그것은 아니다이므로, 대상a는 역설적으로 그것의 구멍이 있는 것을 보여주고 만다. 그래서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대상a는 실재계에 속하고, 리얼이다. 그리고 라캉은 말한다, 대상a가 결여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이 세계의 리얼리티(현실)를 만들어낸다라고. 이 세계의 평온한 현실성과 복자 마리 아라코쿠의 삼키는 목구멍의, 그 희미하게 오르내리는 목구멍 표면의 리얼(현실)과 동시에 관계하는 것, 그것이 이 대상a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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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3-15 12:41

    p190~192 수정 해석 띠우

     

    그러면, 대상 a의 향락인 잉여향락이란 무엇이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향락의 조절기인가. 서론으로서, 이미 인용했던 문언을 조금만 길게 가져온다. 이러하다.

     

    이 나머지, 주체를 정초하는 경계선이 정해진 순간밖에 나타나지 않는 것의 나머지야말로 대상a라고 불려지는 것입니다. 그것에서야말로, 일격에 쾌감원칙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이 아닌 향락이 정착한 것입니다.

     

    쾌감원칙으로 회수되지 않는, 현실계의 향락이 정착한 대상a. 그것은 어떻게 향락되는 것일까. 라캉은 대타자로부터 소타자에게의 세미나에서, 마르크스의 잉여가치설과 프로이드의 기지의 개념을 중첩하는것에 의해서, 잉여향락의 개념을 제안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노동자의 노동을 등가 교환하는 것이 아닌 미지불노동이라고 하는 착취에 의해서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생산과정으로부터 어느 틈엔가 이윤을 낳는 자본가의 웃음의 기지와 향락에 관해 말하고, 더욱더 거기에서 착취된 노동자의 괴로운 처지를 헤겔의 주인에 대한 노예의 사취의 괴로운 처지를 중첩하는 등을 말했던 그다운 요설이 보여지고 그것은 그것으로 재미있지 않은 것은 아닌가. 그러나 여기에서도 우리들은 일의 핵심만을 보자. 요컨대, 대상a의 잉여쾌락은 무엇인가. 우선 라캉이 1130일의 세미나에서 확실히 몇 번이고 확인한 것은, 생산노동에 종사한다고 하는 것은, 향락을 단념한다는 것이다. 헤겔이 말하는 주인은 마음껏 생산물을 향락하지만, 노예는 자신의 향락을 착취당하고, 하루하루의 노동에 몸을 소모시키지 않은면 안된다. 이것은 이미 기술했다. 그리고 라캉은 말한다. 여기에 새로운 것, 그것은 이 단념을 분절하는 언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나타나는 것은...... 내가 잉여향락의 기능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라고. 향락의 단념에 의한 향락, 잉여향락. 잉여향락의 주변에서, 본질적인 하나의 대상의 생산이 이루어집니다. 이제 이 대상의 기능을 정의해봅시다. , 그것은 대상a입니다」 「잉여향락, 그것은 대상a의 기능을 부각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 2015-03-17 21:32

    p193~194  수정된 해석 건달바




    출정하여 전사한 남편이 남겨논 머리카락에 뺨을 대고 우는 부인의 향락의 모습을, 부인의 돌연한 죽음을 자택에서 통보받은(알게된) 남자가 남겨진 의복에서 희미한 그 체취를 맡으려하는 향락의 모습을, 누가 도착적이다라고 웃을수 있을까? 왜 의사는, 절제된 장기의 일부를 그대로 버리지 않고 보여주려고 하는 것일까. 왜 빠진 이는 돌려받고, 자신의 늑골은 잘 버릴 수 없는 것일까? 죽은 친구의 서재를 훑어보고, 무심코 수일전까지 저녀석은 여기서 내가 빌려준 저 책을 읽고 있었다고 하는 생각에 빠지면서, 애용했던 만년필을 유품으로 받았던 때에, 돌아오는 길의 쓰레기통에 그것을 던져버리고 어떤 것도 느끼지 않은 자가 얼마나 있을 것인가.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가,「결국 종이조각에 지나지 않는」고문서의 기묘한 매혹에 대해 언급하며,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삼소절을 들은 것만으로 마음을 셀레지 않을 수 없는 사람 」이 바흐 자신이 직접 서명한 악보를 손에 넣었을 때 느낄 전율을 예로 들때에 누가 이것을 부정할수 있을 것인가. 물론, 대상a는 유방이기도하므로, 여성의 유방에 편집적인 집착을 보이는 남자의 향락도 이 잉여향락이다. 일은 마르크스로부터 시작한 향락이고, 정신분석의 「상징적 등식」에 의하면 분변은 금전이기도 하므로, 이것은 수전노의 향락, 일엔이라도 많이 모으려고 하는 향락이기도 하고, 투기대상을 골라 자산을 잘 늘리려고 매일 계획하는 남자가, 예금통장의 액수를 보고 별로 아름답다라고는 빈말이라도 할 수 없는 미소를 그 얼굴에 띄우면서 느끼는 향락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이라도 자신이 한 기억이 없는 사람은 드물것이다.  즉, 결론은 같다. 잉여향락은, 합법적인 향락이다. 굳이 말한다면 반(半)-합법적인 향락이라고 말할수 있을 지도 모른다.「누구나가 하고 있는」, 밤의 경범죄이고, 약한 도착행위이다. 그것은  지루하고, 뿌리 깊지만 때문에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향락에 불과하다. 그리고 여러번 말한다. 그것으로 좋다. 그것이야말로 좋다, 고. 이러한 것은, 우리가 매일매일 하는 일 속에 있다. 그것이 돈이「전부」다 라고 거리낌없이 단언하는 자의 향락일지라도, 그것도 또한 우리의 세계 안의 일상이다. 실제, 사람을 놀라게 하는 화려한 슈트나 넥타이를 몸에 걸치는 것을 좋아했던 멋쟁이었던 라캉이, 그 세미나의 연단에서 청중의 시선을 온몸에 모으면서, 옷을 입는다 것 자체에 남장이라든가 여장이라든가의 의장도착의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팔루스의 결여를 감추려고 하는 것이고, 따라서 대상의 결여를 감추려고 하는 것입니다 등이라고 뻔뻔하게 말할 때, 유머와 함께「대상a의 잉여향락」을 여기에서 느낄 수 없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 2015-03-17 21:53

    p195~196 인디언님~ 요요님 해석부분입니다

     

    23절 향락의 조절기, 그 너머에

     

    반복한다. 잉여향락도, 평온한 하루하루의 약간의 향신료일 뿐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흔들지 않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으로 좋다. 대상a와 잉여향락이 향락을 흡수하고 조절하고 있는 한, 세계는 대부분평화이다. 그것이 아무리 전쟁이나 부정, 착취로 칠해진 세계였더라도. 라캉 이론에 정통했던 사회학자들은 말한다, 자본주의는, 성적관계는 없다라는 불가능한 구멍을 중심으로, 영구하게 충동을 계속 회전시켜가는 것이다,라고. 그렇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 세계의 향락을 긍정하는 것이다. 권력을 추구하는 것도 좋다. 돈을 구하는 것도 좋다. 이성에, 혹은 동성에 미치는 것도 좋다. 질 좋은 의복으로 몸을 감싸고, 도박이나 주식에 매우 즐거워하는 것도 좋다. 간혹 마약을 흡수해도 좋고, 약간의 사디즘과 마조히즘에 몸을 적셔도 좋은 것이다. 그것은 무척 즐거운 것이다. 더욱더, 그것은 자본주의를, 이 사회를 흔드는 것 따위가 아닌 안전한 향락이기 때문에. 팔루스와 대상a, 향락의 조절기이다. 우리들의 향락은 여기에 흡수되어지고, 기분 좋게 절대적 향락으로부터 분리된다. 절대적 향락은 거기에서 삭제된다. 그리고 이것을 거부하고, 절대적 향락을 직접 구하고 살해하고 범해도 보람없는 불모(不毛)인 것이다. 그것은 이미 기술했다. 조절기에 걸린 향락이, 살인과 근친상간의 절대적 향락인가. 그렇다면 전자(前者)밖에 선택의 여지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기분 좋게 후자(後者)를 잊게 해주는 것조차 하기 때문이다. 그 나머지의 향락에, 그 향락을 얻는 장소 자체를 확보하기위해 인간은 살해될지도 모른다는 것조차, 그것은 망각시켜준다.

    • 2015-03-18 17:05

      22절 이지요?  이어서 196-197

      그렇다. 이 세계의 일은 팔루스의 향락과 대상a의 잉여향락으로 전부 설명할 수 있다.

      희희낙락하며 설명할 수 있다.

      라캉을 칭찬하려고해도 비판하려고 해도, 많은 라캉론과 라캉이론의 해설서가 여기에 논지를 멈추고 있다.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팔루스, 대상a.

      자본주의의 평화. 자본주의의 <시큐리티>. 평온하고 평화로운대로 유지하는.

      멋지고 온후하게 안전한, 그리고 자극적인 향락이다.

      향락의 레률레이터(조절기), 팔루스와 대상a.

      이것은 끊임없는 주체들의, 노예들의 착취행위,

      그리고 그 노예가 자기자신을 노예라고 생각하지 않게 하는 정밀하고 오묘한 기계일 뿐이다.

      사람들은 희희낙락하면서 착취되고 그것에 만족한다. 이러한 것에 어떤 불만이 있다라고 할 것이다.

      불만이 있다. 있게 되어 있다. 라캉은 말한다. 향락은 이것만은 아니다.

      그 향락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부정할 수도 없다.

      다만 다른, 이것과는 다른 향락이 존재한다.

      향락의 조절기에 말려든 자본주의의 피로 얼룩진 평화 안에 안주하는 것도 아니고,

      살인이나 유아학대라는 불모도 초래하지 않는 향락이 존재한다.

      또 하나, 다른, 제3의 향락이.

      가장 곤란하고 가장 난해한, 편견투성이가 된 <보통의 사람>으로서

      가장 놀라게 하는 향락이.

      말 그대로의 의미로 <반시대적인> 향락이.

      그리고 이것이, 이것만이 라캉에게서 진실로 읽어야만 할 부분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향하자. 다른 향락에로. 여성의 향락. 대타자의 향락.

      사회가 창출되어가는 향락으로.

  • 2015-03-18 17:06

    21절 제가 했던 부분, 185-186 은 제가 못 나간 날입니다.

    올려놓은 해석을 그날 참석하신 분께서 좀 고쳐주시와요 ^^

  • 2015-03-20 20:53

    181-182

    제 21절 대상 a의 잉여향락―향락의 레귤레이터

     벌써 이미, 우리는 오래 논해 왔다. 거세에 대해, 외과수술에 대해, 정형외과적인 무언가에 대해, 거울상에「꿰어 맞춘」이미지에 대해, 그리고 시니피앙 연쇄 안에서 「빠지는」무언가에 대해, 실재계에 「박힌」트레 유네르에 대해. 그렇다, 주체는 깎여나갔다. 대상 a는 그 나머지이다. 거기서 누락되고 빠지는 무언가, 깎인 부스러기이고, 사방에 흩어지는 체액이다. 주체를 「1」로 센 순간에, 거기에서 누출되는 「무언가」이다. 주체가 주체로 될 때, 거기서 상실되는「무언가」이다. 거꾸로 말하면, 주체가 주체로 될 때 저항하고 도망치는 「무언가」이다. 거울에 비치는 모습에 「무언가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해버리는 「무언가」이다. 시니피앙 연쇄를 더듬어 찾아가도 「무언가가 다르다,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생각해버리는 그「무언가」이다. 팔루스의 향락을 무언가 비참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무언가」이다. 문득 깨달으면, 문득 「분별력이 생기」면, 벌써 이미 거기에는 결정적으로 없어지고 있는 「무언가」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욕망을 도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무언가」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항상 대상 a에 대해 말해왔다고 해도 된다. 이 「욕망의 원인」으로 정의되는 대상 a에 대해. 우리는 라캉 개념의 불균진성과 혼성성에 대해 말해왔다. 그 최초 개념 자체가 불균질성이었다는데 그것들 전부에서 누락된 대상 a는 그보다, 아니 더욱 「뭐든 있는」말하자면 무엇이든 넣어놓는 휴지통적인 개념이 되어 끝나버렸다. 그래서 대상 a에 대해 끝없이 설명을 펼쳐나갈 수 있고, 또 대상 a를 사용하면 무엇이든 설명해 보일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러한 건 우리와는 관계없다.

     

    192-193

     

      대상 a의 향락, ‘잉여향락’은 ‘향락을 단념하는 것에서 획득되는 향락’이다. 이 plus-de-jouir는 ‘이제는 향락하지 않는 것’이나 ‘좀 더 향락하는 것’ 이중으로 읽을 수 있다. 대상 a의 향락은 이런 단념에 입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스러기로, 찌꺼기로, 변으로의 향락이니까. 팔루스의 빛나고 건립된 상은 이미 없다. 내가 참으로 향락하고 싶은 ‘진짜’ ‘그것은’ 이미 거기에는 없다. 그것이 남은 흔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하다못해 이 찌꺼기를 향락할 것이다. 좀 더, 좀 더. 그래서 대상 a의 향락은, 절대적인 향락이나 팔루스적 향락의 단념의 향락이고, 그것과는 다른 곳에서 향락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딘가 도착적인 향락이다. 대변을 먹고, 소변을 마시고, 피와 정액을 다 마시는 향락이니까. 우리는 이미 그러한 예를 들어왔다. 그것이 향락이 아니라면 왜 가난한 자의 대변을, 미녀의 분뇨를, 럭비팀 포워드의 정액을 사람은 희희낙락하며 다 마시려는 걸까. 아니면 대상 a는 시선이기도 하니까, 그 향락은 훔쳐보는 사람의 관음의 향락이 되는 것일까. 혹은 노출광의. 이것은 도착자들 그들 그녀들만의 향락인걸까. 그렇지는 않다. 라캉도 분명히 이 대상 a의 향락을 ‘도착자만의 것은 아닙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입맞춤 할 때, 연인의 침을 달게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멀리 있는 연인의 휴대전화 넘어 지직거리는 소리를 듣는 향락에, 사랑하는 자식이 손가락을 베여 울기 시작한 때 엉겁결에 상처에 입을 꽉 눌러 느끼는 피맛의 향락에,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 찌는 듯한 더운 날씨에 벗어 던진 의복에서 풍기는 어렴풋한 땀 냄새의 향락에, 그리고 눈빛을 받고, 눈길을 주는 그 시선의 순간 교착되는 향락에, 짚이는 바가 없는 사람 따위 있을까.

        -192-193은 제가 수업을 못 들어 수정이 불완전합니다. 한 번 확인해 주세요^^

     

  • 2015-03-21 16:31

    p.189-190

         그리고 상상적 팔루스와 상징적 팔루스가 중첩되어 번져 들어가는 순간까지, 우리는 논했던 것이다. 그러자 상징적인 팔루스의 거세는 실은 상징적인 팔루스가 출현한 순간에도 이미 행해지는 것으로, 그리고 그것은 극명한 두 개의 단계를 새기는 것이 아닌, 불의에 번져버리는 것이 된다. 상상적인 팔루스에서 이미 무엇인가 누락된 것이 빼앗긴 것이 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이미 논했었다. 상징계에서 자기 이미지가 「왠지 이상하다」「무엇인가가 죽었다.」「죽음의 필촉」에 의한 「죽음의 이미지」라고, 라캉과 함께 우리는 말해오지 않았던가. 그렇다. 상상적 팔루스에도 무엇인가가 빠져 있어 거울의 자기 이미지가 보이는 순간에도 그것에는 무엇인가 누락되어 있다. 라캉은 그것이 대상 a라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 대상 a는 처음부터 주체가「전체상」로 주어진 순간부터「나머지」「찌꺼기」로 새어 나오는 것이었다. 따라서 전체상 속에는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대상a는 결정적으로 불균질한 개념이고,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이다. 보이는 순간 「그렇지 않은 것이 」된다.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욕망의 원인인 잠재성으로「작용」한다. 그것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다. 이미 우리는 논해 왔던 터이다. 대상a는 리얼한 것인 동시에 그 상실로는「리얼」이 아닌 「현실성」을 확보한다고. 그러나 대상a는 애당초「상실 된」대상이었던 것이므로, 그것은 있지만 없는, 없지만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리얼인 것과 동시에 리얼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대상a가 시니피앙 연쇄 속에「있어」마땅한 것으로 욕망의 구동원이 되어,「그렇지 않은」것에 의하여 연쇄의 반복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을 봐 오지 않았던가. 따라서 대상a는 시니피앙인 동시에 시니피앙이 아닌, 결국 말할 수 있지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대상a는 현실성 속에 나타난 순간 「그렇지 않은」것이 된다. 따라서「있지」만 「없는」, 없지만 있다.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리얼이지만 리얼이 아닌 말할 있지만 말할 수 없다. 그 순간에 그것은 도주한다. 대상a는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다. 따라서 대상a는 본질을 갖지 않고, 「역설적」인 것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대상a는 우리의 「거울」에도 비춰지지 않는 그「거울」효과로서 산출돼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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