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 제24절 신의 사랑 ─신비주의란 무엇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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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1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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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절 신의 사랑 ─신비주의란 무엇이었던가

 이제 됐다. 독자는 우선 『앙코르』의 표지(209쪽 참조)를 보기 바란다. 거기에 있는 것은 베르니니의 고명한 「성 테레사의 법열」 조각상이다. 라캉은 베긴 수도회의 여성신비가 하데비치의 이름을 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비적인 것(la mystique)이라 함은 정치가 아닌 모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뭔가 진지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우리들은 몇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대체로 여성들이 혹은 십자가의 성 요한 같이 은혜 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은 「전체는 아닌」 쪽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성들뿐만 아니라, 남성들도 있기 때문이죠. …… 그녀들과 그들은 희미하게 보았습니다, 그녀들과 그들은 느꼈습니다. 그 저편에 어떤 향락이 거기에 있을 터라는 관념을요. 이것이 신비가로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라캉은 「전체는 아닌」 여성 쪽에 있던 십자가의 성 요한과 달리, 자신의 눈과 신의 눈을 혼동한 남성 신비가 앙게루스 시레지우스는 팔루스적인 도착에 불과하다고 단정 지으며 물리친 후,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하데비치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마치 성 테레사가 그렇듯이 말입니다─ 로마에 가서 베르니니의 조각을 보는 것만으로 좋습니다, 바로 알 수 있죠, 그녀가 향락하고 있음을.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무엇을 향락하고 있을까요. 명백한 것은, 신비가들의 본질적인 증언은 바로 그녀들과 그들이 느낀 것을 말한 것이었습니다만, 그러나 그녀들과 그들은 그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 신비가들의 샘솟는 기도는 수다도 쓸데없는 말도 아닙니다. 그것은 요컨대 좀 더 주의 깊게 읽어야 합니다─ 페이지 완전히 끝, 주석에 이를 때까지죠─거기에 쟈크 라캉의 『에크리』를 더하고 싶은, 왜냐하면 그것은 같은 차원에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면, 당연히 여러분은 내가 신을 믿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네요. 나는 여성의 향락을 믿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 이상(en plus)」의 것인 한에서 여성의 향락을요.

 신비가, 신비주의라고. 신비주의야말로 우리 세계의 향락을 능가하는 「다른」「여성의」향락이라고 말한 것인가. 신비주의란 「형이상학」「종교」「컬트」「신학」과 함께 그냥 비난조로 변한 것은 아닌가. 라캉은 역시 동생이 카톨릭 추기경이었다는 말도 있고, 자신의 로마 강연에 교황의 왕림을 원했다는 소문도 있듯이, 그저 종교적인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는 속았다. 어쨌든 라캉은 신학적이다, 부정신학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듯이, 그것에 제대로 반론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처음부터 저 라캉파라는 자들은 본래 컬트였던 것은 아닌가. 그렇다. 20여 년 전 옴진리교가 출현하기 이전에 우리나라 정신분석학자인 도이 다케오는 라캉을 가리켜 「그는 구루(導師)다」라고 중얼거렸다는데, 역시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이런 겁에 질린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그러나 기다려 보라. 당신이 여기에서 외면한다면, 라캉이 말했듯 「그런 것은 『여자가 말하는 것(ditfemme)』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방하는 무리와 다르지 않게 된다. 즉 남근주의자이고 도착자인 무리, 자본주의의 향락에 젖어 부끄러움도 의심도 갖지 않는 무리로. 하지만 그것도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저 라캉 자신조차도 뭔가 맥없이 「이렇게 말하면 당연히 여러분은 내가 신을 믿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걱정까지 하기 때문에. 그러나 우리는 거리낌 없이 비난조로 신비화니 신비주의라고 말하지만, 역사상 신비주의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있는가. 그녀들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에 도전했는지 진실로 우리는 알고 있는가.

다른 향락, 여성의 향락, 대타자의 향락. 상상계의 제기로부터 멀리, 길게 이론의 과정을 더듬어 향락의 모든 분류를 다해본 끝에 그것을 이것이라고 말했을 뿐, 이미 라캉의 위대함은 명백하다. 그는 이제 이 이상의 것은 말하지 않고 죽는다. 『산토무』안에서도 대타자의 향락의 자리를 가리켜 「진정한 구멍은 여기에 있다」라고 말했지만, 이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그의 제자들도 여기서 두려워 발길을 돌린다. 당연하다. 여기에 발을 들여놓는 것은 정신분석의 임계점, 정신분석의 역사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러나 다시 한 번 우리 나가보자. 여성의 향락=대타자의 향락이 신비가의 그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떤 것이 되는가.

그러나 라캉만으로는 이미 논리가 끊기고 있다. 라틴어도 잘 못하는 내가 왜곡을 해가면서 역사적인 신비주의에 대해 논할 수도 없다. 도움을 빌려야 한다. 「조상(弔喪)의 작업으로서 역사 쓰기(에크리튀르)」에 침정하는 대역사가이고, 68년 혁명에 찬동하여 「민주주의적 저항」을 명백히 선언했던 사상가이며, 예수회의 수도사이자 라캉 세미나의 출석자인, 어쩌면 라캉이 여기에서 「몇몇 사람에게 여러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하는 그 「몇몇」의 한 사람이었을 그, 미셸 드 세르토의 도움을.

 우선 오해를 풀기 위해 매우 간단히 서론을 말해보겠다. 신비주의는 「체험」이 아니다. 신비주의는 「전통」을 가지지 않는다. 신비주의는 「언어」이다. 신비주의는 「역사적」이다. 신비주의는 「몽매주의」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그리고 신비주의는 죽음을 건 「저항운동」이다. 뒤에서 다룰 내용이지만, 그가 한 말을 미리 인용하겠다. 미셸 푸코는 분명히 말했다. 신비주의는 사목(司牧)권력에 대항하는 「반-인도」, 즉「저항운동」이었다고. 이것은 제 7장 84절 및 94절에서 다시 언급한다.

차례를 따라가자. 우선 「신비주의(mysticism)」란 말은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이 말의 프랑스어 첫 등장은 1804년이다. 그래서 하데비치나 아비라의 성테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이 자신과 자신이 이룬 것을, 이 말이 지칭하는 그런 의미로 「신비주의」라고 생각한 것은 있을 수 없다. 이 신비주의란 말은 16~17세기에 전성기를 맞은 신비가들의 운동을 모델로 「날조」된 말이므로, 거기에서 거슬러 올라가 그 이전 시대에도 「신비주의」가 발견되고, 신비주의는 바로크시대, 중세초기, 교부(敎父)시대에도 그 이전에도 있었다는 것이 되고, 「신비주의의 전통」이 「창출」되어간 것이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전통의 창출」이 신비주의에서도 일어났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신비주의」 개념은 16세기와 17세기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운동이 갖고 있던 「스타일」을 사상(捨象)했던 개념이 되고, 지리적으로도 거슬러 올라가 「적용」되어 간다. 그리고 동방정교회뿐 아니라 이슬람이나 불교에도, 힌두교에도 세계에 있다는 모든 종교에 「신비주의」는 존재한다고 말하게 된다. 신비주의와 신비주의의 「체험」은 이렇게 보편화된 것이다.

 여기에서 강조해야 할 점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신비주의는 본래 「근대」의, 적어도 「근세」의 시대현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 시점에서만, 서구 16~17세기라는 특정의 역사적 시공에서만 존재했다. 그것은 「근대성의 문턱에 있었던」 「역사적 형상」이다. 역사적으로 조금만 더 시대를 넓혀도 고작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여서, 그 시공 이외 어떤 것은 본래 의미로는 신비주의(미스티크)라고는 부를 수 없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소급되고 지리적으로 확대 적용된 「날조」와 「보편화」 작업에서 기묘한 관념이 번성하기 시작하고, 그 관념은 널리 퍼져서 우리 시대에도 사람들의 상식 같은 고정관념이 되어가고 있다. 그 기묘한 관념이란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온갖 「신비한 체험」, 「특수한 체험」을 한 사람은 모두 「똑같은」 것을 느끼고 「똑같은」 체험을 했다는 것, 체험이 있나 없나의 문제이지, 그 문화의 차이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스페인 신비주의 연구가 츠루오카 요시오는 이런 태도를 「체험주의」라고 부르며 엄격하게 멀리한다. 그런 보편적인 「체험」따위 있을 리 없다. 어떤 역사적 시공의 어떤 특수한 체험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말하는 방식이, 그것을 둘러싼 서술방식과 생활방식의 「문체(스타일)」가 문제이다. 만약 그런 「보편적」인 체험이 존재하고 그것을 얻기만 해도 신비에 도달할 수 있다는 통속적인 사고방식이 버젓이 통용된다면, 그 「체험」은 뇌내(腦內) 물질이 만들어낸 조화이고 격렬한 신체운동을 동반하는 「수행」이나 마약을 사용하면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헛소리를 여기저기 퍼트리는 것이다. 20세기에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16세기-17세기 신비가들로 회귀하려한 조르주 바타이유는 이런 내용을 알 리가 없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외재적인 모든 수단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단언하고, 강한 어조로 요가나 신체기법에 빠져드는 사람들을 조롱하며, 자신이 체험을 했을 때는 맨 얼굴이었다, 술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고 반복했던 것은 그의 날카로운 형안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으리라. 이런 신체기법이나 약물에 의지하는 것은 신비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잉여향락에 불과하다. 이런 잉여향락을 중심에 두고 그것을 미끼로 하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다. 그런 무리들이야말로 바로 원리주의적 컬트라고 불러 마땅하다. 라캉이 말하지 않았는가, 이것은 「그 이상의 것」이라고, 물론 그녀들도 금욕이나 고행 같은 것을 행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만약 신비주의가 이런 약물이나 신체기법에 의한 작용으로 환원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약물을 자유롭게 처방할 수 있는 의사 국가자격을 가지고 정신병원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라캉이, 즉 의지만 있다면 강한 마취나 수면제, 신경안정제를, 마약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까지 자유롭게 투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그가, 왜 이제 와서 신비주의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신비가인「그녀들」의 체험이란 어떤 것인가. 그 체험은 우리가 가진 편견과 같이 「아찔한 빛으로 가득 찬 강렬한 체험」「작렬」만은 아니다. 현실계와의 조우는「작은 어떤 소리」라고, 라캉도 말하지 않았던가. 스스로도 체험해보았던 저 겸양한 사람, 세르토는 이렇게 말했다.「작은 새의 노래가 자신의 천명을 알린다. 단어 하나가 마음을 꿰뚫는다. 어떤 광경이 삶을 전환시킨다......『그것은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떠들썩하게 이야기해 퍼뜨리고, 자기 체험을 특권시하고, 자기의 절대화를 거기에서 도출하려는 사람은 신비가가 아니다.「신비가의 부끄러움」. 체스 애호가라면, 체스의 수호성인이기도 한 아비라의 성 테레사가 훌륭하게 체스에 빗대어 설교했던 것을 기억하리라. 거기에 기운이 넘쳐흐르는 왕, 즉 신까지도 청초한 언행으로 농락하는 여왕말에 비유한「부끄러움」「겸양」을 금방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들은 자기의 체험을「상대화」해보이려고도 한다. 세르토는 말한다. 제도에 적합한 확신이든, 예외적인 확신이든, 확신을 상대화하는 것에 따라서야말로, 그녀들은 완전한 신비가 전통의 정결함을 갖게 된다」. 십자가의 성 요한과 아비라의 성 테레사, 스페인 신비주의를 대표하는 「그녀들」은 이구동성으로 반복한다.「신비적 체험의 특징은 터무니없이 놀랄만한 것은 아닙니다.」「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 순간 하나하나를 다른 순간 하나하나와 계속해서 맺어주는 것, 마치 어떤 말(語)이 다른 말(語)과 관계를 가지려고 그러는 것, 그 관계(rapport)인 것입니다」라고. 저 순간을 천천히 이 순간과 서로 이야기시키는 것, 이 작은 새의 노래와 저 바다에 가라앉는 태양빛을. 이 겨울 황혼이 물든 하늘에 뻗은 섬광과. 저 여름 햇빛의 눈부심 속 불온한 고요함을. 숲길 속에서 수차례 나지막하게 울린 저 소리와, 왜인지도 모르고 갑자기 흐르는 이 눈물을. 그것들을 서로 연결시키고, 조용히 엉키게 하는, 이 길고 긴 행위. 그것은 어떤 종의 시공 안에 있고, 역사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다양한 타자와의 공동성 안, 흘러가는 사계 속에 있고, 구체적인 사람들, 타인과 교류하는 삶의 행위 안에 있다. 체험은 한순간의 것이 아니다. 그 체험은 수도원이나 교회만이 아니라 그것까지 초월한 사람들과 매일매일 주고받는 말, 그리고 거기에 둘러싸인 어떤 나날 속에 있다. 체험 후 삶은 변한다. 그리고 다음 체험을 애타게 기다리기도 한다. 거기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고, 쓴다. 시를 쓴다. 체험은 오지 않는다. 길고 무서운 불모의 감각이 덮치고, 그러나 그것을 동료와 함께 견디어 간다, 그런 어떤 깊이와 길이를 가진 시간과 공동성 안에서, 삶을 변혁하고 그 방향을 바꾸는 체험은 조용히 번져가는 것이다. 저 삐걱거림, 저 소리, 저 작은 소리. 그것은 조용히 확산하고, 생을 덮어간다. 자신의 삶만이 아니라 이 구체적인 타자들의 삶까지도. 「삶의 문체」가 거기에서 부상해 간다.

 그러나 이 신비주의, 16-17세기 신비주의는 어떤 특수한 체험에 반응한다. 그 체험은 신의 방문이다. 우아한 노래에 있듯이, 그는 머리카락을 비에 흠뻑 적신 채로 「누이여, 이 문을 열어주오」라고 속삭인다. 그 속삭임을 알아듣는 것. 「작은 소리」. 그렇다. 이 신비주의는 사랑이다. 「신의 신체의 에로틱」이다. 13세기부터 궁정 사랑으로 잘 다듬어져온 매우 세련된 사랑의 어휘나 이미지가 여기에 계승되어 간다. 단 반전된 모습으로. 절대적인 저편에 있어 도달 불능한 것은 귀부인이 아니다. 「사선을 그은」대타자이고, 에코 같은 신이다. 그래서 당연히 그 방문을 받아들이는 자는 「전체가 아닌」여성이다. 「내가-전체가 아닌-여성이-되는」사건. 이른바 「혼인 신비주의」라고 역사학상 불리는 이 신비주의는 신과 사랑을 한다. 츠루오카의 논문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시 한 소절을 인용하자. 「거기에는 바위 구멍이 몇 개나 있는가. 거기에 함께 가보자. / 그 곳은 누구에게나 숨겨진 장소. / 그렇기에 거기로 둘이 들어가 보자. / 그리고 석류주를 함께 마시자.」생물학적으로 십자가의 성 요한이 남성이라는 것은 어쨌든 아무래도 좋다. 그는 여기서 「전체가 아닌」하나의 여성이다. 신과 사랑하는 한 명의 여성이다. 라캉도 그의 이름을 거론했을 때, 고지식하게 그러나 다소 장난스러운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그의 팔루스 따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작정입니다.」그리고 물론 「그녀들」은 신과 이부자리를 함께 하기도 한다. 이것은 사랑이다, 어떤 신비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라고 독자는 생각할 지도 모른다. 신과 사랑을 한다 —여기에 기묘한 무신론 관념이 있지는 않은가, 라고. 신이 「신랑」이고, 신비가는 「신부」이고, 서로 손을 맞잡고 숲 속에서 밀회를 즐기며, 석류 미주를 마시거나 하는 —그것이 신인가. 그렇다. 라캉도 같은 세미나에서 말했던, 「재미있는 것은, 명백하게 무신론이라는 것은 성직자에 의해서만 떠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불쌍한 볼테르」라고. 여기에 무언가 놀랄만한 것이 있지는 않은가. 쥘 들뢰즈마저 말하지 않았나. 「무신론은 결코 종교 외부에 있었던 선례가 없습니다. 무신론, 이야말로 종교에 작용하는 예술가의 가능태=힘(puissance artiste)인 것입니다. 신과 함께 있기 때문에 전부는 용서받는 것입니다」라고. 그렇다. 여기에는 기묘하게 평온한 무신론이 있다. 저 자본주의 향락의 평온함이 아니라, 무한히 불온한 신과의 사랑, 무한히 이상한 평온함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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