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 |
570 |
제 31절 해석 수정본
(6)
주자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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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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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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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일소 | 2015.10.28 | 337 |
569 |
p.279-280 단어
(5)
썰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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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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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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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매 | 2015.10.25 | 471 |
568 |
p.269 단어
(4)
썰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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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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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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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매 | 2015.10.18 | 441 |
567 |
<전원일기>#3~6 정리
(2)
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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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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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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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 2015.10.14 | 258 |
566 |
야영 1부 전체 교정본 1차
(25)
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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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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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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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 2015.10.11 | 421 |
565 |
제2부 르장드르 단어 올립니다
(6)
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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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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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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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 2015.10.11 | 758 |
564 |
북앤톡 초초초안
(11)
건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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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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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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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달바 | 2015.09.30 | 3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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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전복 10장
(2)
썰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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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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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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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매 | 2015.09.06 | 2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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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전복 5장
건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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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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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전복 제4장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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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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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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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 2015.08.30 | 396 |
560 |
해석교정본 <서문~30절> 묶음
(1)
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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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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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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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 2015.08.28 | 258 |
559 |
<교정>제28절 죽음, 죽음, 죽음-하이데거와 라캉, 죽음의 진리
뚜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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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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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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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버기 | 2015.08.26 | 312 |
p257 수정한 해석입니다.
그러나, 번거루운 것이 하나더 있다. 왜냐하면 거울상과 달리, 이 사체는 부패하기 때문이다. 차츰 변질되고, 변색되고, 액체가 스며나오고, 썩어간다. 그것은 곤란하다. 모든 문화에서, 이 썩어 짓무른 것에 대해 처치가 이루어졌다(주459). 그 대신에 놓인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표상」이다.
이탈리아의 역사학자 카를로 긴츠부르그는 『피노키오의 눈』 제 3장에서 근래의 표상문화론이라던가 하는 것에 가담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라고 그다운 여유있는 빈정거림을 풍기며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애초에 「표상」이란 무엇인가. 여기서부터 그는 연이어 박식을 드러낸다. 1690년에 출판된 퓌르티에르(Antoine Furetière)의 『대사전』에 따르면 「표상」이란 프랑스왕이나 영국왕의 장례식에서 「관을 안치하는 받침틀에 태워진 밀랍, 목재, 가죽제 인형」이고, 혹은 그보다 이전에 죽은 국왕을 표현하던, 「사망자용 시트에 덮여진 텅 빈 장의용 침대」이다. 또 1291년 국왕 알폰소 3세를 「표상하는」 관을 둘러싸고 있던 유대인이 아랍인에게 습격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영국에서는 1327년의 에드워드 2세의 붕어, 프랑스에서는 1422년 샤를르 6세의 붕어 때에 인형이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칸토로비치(Leonid Kantorovich)는, 이 인형이 국왕의 두 신체라는 법리론을 생생한 형태로 표현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긴츠부르그는 다음과 같은 등식을 보여준다. 「영원의 신체=인형=국체」, 「순간의 신체=유체」. 애초에, 라고 그는 말을 이어간다. 2세기와 3세기에 로마황제 장례식에 사용된 밀랍상이 천년 후의 같은 상황에서 전시된 영국과 프랑스왕의 밀랍, 목재, 피혁재의 상과 아주 많이 닮아있다고. 그리고 그는 방브니스트(Jacques Benveniste)를 인용해서 콜로서스=조각상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렇게 단정한다. 「이것이 언어의 진정한 의미이다. 장례식의 상, 의례의 대역, 부재의 것에 지상에서 계속 존재하는 대역,이다. 「이것에 『표상』이라고 덧붙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주459) 이 사체를 「처리하는」 것이 왜 장례에서 중요한가, 그리고 그것이 단지 「고기 처리적」인 처리는 아닌가에 대해서는, 발표한지 100년 가까이 되었음에도 낡았다고는 느껴지지 않는 로버트 헤르츠의 고전적 논문을 참조하라. Robert hertz, 《Contribution a une etude sur la representation collective de la mort》, Melanges de sociologie religieuse et folklore, Paris, F,Alcan,1928. 로베르 헤르츠 「죽음의 종교사회학- 죽음의 집합표상연구의 기여」 『오른손의 우월』 内藤莞爾 외 번역, 垣内出版, 1980년.
p.259~260 수정해석입니다.
p.259~260 수정 해석
몇 번이라도 말한다. 이렇게 괴로움을 호소하는 것은 유치하다. 그리고 다시 말하겠다, 인형의 삶, 그래서 좋은, 그렇기 때문에 좋다고. 이러한 인형의 삶을 알맹이가 없다든지 드러냈다든지 동물적이라든지 뭐라든지 결국 멸시하는 사람은, 요컨대 죽음을 향락하고, 죽음의 모습에 향락하고, 또 자신만은 사람의 생의 영위로부터 도망쳐서 그것을 「초월」하고 있다고 필사적으로 믿으려는 비참한 무리에 불과하다. 여기에는 니힐리즘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처음부터 그것은 그러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 인형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낳는 것이 가능하다. 인형으로 태어나, 인형으로 살고, 인형으로 죽는다. 그 사이에 틈새처럼 나타나는 「전체는 아닌」 순간의 창공이야말로, 「여성의 향락」의 장소가, 쓰고 묘사하고 낳는 장소가 있다. 즉 인형을 만들어내려는, 새로운 인형의 신체(코루푸스)를 만들어내려는, 새로운 세계, 공동체(코루푸스)를 만들어내려는 사랑의 기획이 있다. 거기에서 더 이상 죽음은 공포가 아니다. 우리는 신의 연인, 신의 인형이기 때문에. 「죽는 것이 두렵다」라고? 거기에 퍼지는 것은 「사랑」과 「투쟁」과 「시」와 「용기」이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말하지 않았는가.
자, 이 우리, 이 인형인 우리는 새로 인형을 만들 수 있다. 우리 인형은, 우리 인형의 세계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신과 사랑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연애편지를 쓰는 것도 가능하다. 인형은 표상이기 때문에, 그도 또 한 사람의 인형일 직인은 극진하게 섬세한 작업에 의해 만들어낼 수 있다. 그것을 깎아내려는, 그것에 색을 칠하려는, 그것에 말을 가르치려는, 쓰는 것을, 춤을 가르치려는──인형에는 아무것도 결여되어 있지 않다. 그 내재성의 세계에서는 죽음조차 공포가 아니기 때문에. 이 죽음의 인형의 세계가 「현실의」 역사의 세계, 그 투쟁의 세계이다.
자, 이 괄호에 의해 괴로움을 호소하고 비탄과 울적함과 아이러니에 가득 찬 정신분석의 밀실의 창문은 반쯤 열렸다. 게다가 이것을 열어젖히기 위해 행하려는, 인형직인의 세계로. 신화의 주방의 냄새 속으로. 피에르 르쟝드르 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