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절 수정해석본

건달바
2015-11-16 13:57
257

p.287 ~ 288


  그러나, ‘이것은 너다’라는 것을 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말하자면, 나르시스는 이 언명을 받지 않았던 자의 이름일 것이다. 거기에는 전달의 실패가 있다. 나르시스는 ‘이것이 너다’ ‘그러나 이것은 네가 아니다’라는 언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러한 주체의 성립에 관계하는 근원적인 메세지 전달의 실패 가능성을 완전히 소거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 ‘패배’에 관해서는 나중에 서술한다. 그러나 그것을 가까스로 벗어나기 위해서 <거울>은 구성되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와 이미지와 사물로부터 생긴 장치이다. 따라서 그것은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놀랄것은 아무것도 없다. 문제는 다음이다.


  통상의 이해로는 상상적인 소타자와 자기 사이에는 분출하는 애증, 때로는 단적인 살인까지 이르는 정치적인 것이기조차한 애증을 조정하여 ‘화약’을 맺는것이 상징적인 ‘제3자’이었다. 그것은 협정이고 법의 약속이었다. 상상계와 상징계가 절연과 구별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면, 즉 <거울>이 상상적이면서 상징적인 것이라면, 기묘한 것이 된다. 이 제3자도 이미지이다라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미 인용한것처럼 대타자는 ‘우리를 보는‘ 자이었다. 그렇다면 이 대타자를 보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가 없어진다. 소타자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보는 것이 가능한 것이 된다. 그렇다. 그것으로 좋다. 르장드르는 간결하게 말한다. ‘분할을 구성하는 제3자가, 이미지의 장소에도 없으면 효력을 갖지 않는다’. ‘제3자는 이미지이다’. 인용을 계속하자.         

댓글 4
  • 2015-11-21 20:35

    p.289 수정해석

  • 2015-11-23 16:14

    290쪽 수정해석

  • 2015-11-26 00:59

    p.294  수정해석



      즉, 장치로서의 <거울>은 ‘이것은 네가 아니다’라는 표상화은유화의 언명에 의해 거울의 자기 이미지와 주체 사이에 ‘소격’을 만들어 낸다. 주체를 분할하고 주체를 소외로 몰아넣어 주체에게 한계를 통고하는 이 ‘소격’에 의해서야말로, 이 이미지와의 광란의 일체화인 ‘나르시스적 광기’는 회피된다. 누가 자신의 모습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고 해서 안구를 거울에 꼭 붙이려 생각하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이 소격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에메는 칼을 치켜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이 소격이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에, 라캉파의 어중이떠중이들은 프로이트와 라캉에게 ‘광신적으로 열중하여’ 질투와 증오 끝에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이 소격이 소실되는 시공에서야말로 저 ‘총통의 모습’에 동일화하는 ‘하일 히틀러!’의 절규가 울려 퍼지고, 정치적 이맘들에 의해서 ‘파트와(종교 견해)’의 노호(怒號)가 분출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따라서 어떻게 하든 소격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구축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에 의해서? 우선은 금지에 의해서, 법에 의해서. 가로되,  ‘주체와 그 이미지는 금지의 관계에 있다’. 주체와 이미지의 융합과 애증을 금지하는 ‘법의 일격’인 금지야말로 소격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소격 없이는 ‘의미’가 없다. 따라서 ‘은유’도 없다. 고로 ‘주체’는 없다.


    *'가로되'로 해석한 이유는 사사키가 그 뒤의 말을 '경구'처럼 표현하고 싶어서 いわゆる보다는 いわく로 쓴것 같아요.

  • 2015-12-09 17:29

    p291 수정해석

     

     사회인 <거울>. ‘이것은 너다.’ 라고 말함으로써 그것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이미 개인적인 것이 아닌 ‘정치적 사랑’을 가능하게 한다. 그 동일화에 따라 표상으로서 주체는 생산된다. 그와 동시에 ‘이것은 네가 아니다.’ 라고 말함으로써 거기에 비친 애증의 모습에서 주체를 분리하고, 한계를 통지함으로써 ‘소격’을, ‘소외’를 생산한다. 이 두 가지 언명을 이미지의 힘으로 기능하게 하는 것, 이것이 <거울>의 사회적 기능이다. 그러므로 ‘이미지는 인간의 모태 = 내장’ 이고, 거기에서 생산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이미지이며 시니피앙이다. 따라서 ‘표상 = 사체의 인형’ 이다. 그러니까 르장드르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 사이에서 우리는 이미지이다.

     

     주체성이란 우선 우리가 어떤 관념성을 육화하기 위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주체의 법적 관념성이다. 그 주체성은 살아 있는 사본, 이미지의 특수한 종류를 재생산하는 가운데 있는, 이미지라는 우리들 자신의 관념성이다. 그 이미지는 텍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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