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절 수정해석
띠우
2015-12-22 10:31
265
318 해석 띠우
게다가 사회의 수준과 주체의 수준이 구별된 그 경계선상에서. 르장드르는 이 보이는 작용을 정확하게 ‘보이는 권력’이라고 부른다. ‘이 나타내는 권력은 규범 시스템을 다양한 형식으로, <정치>를 <미학>으로, 문화가 이룬 상징적인 질서를 그 궁극의 근거에 연결하는데 존립하고’ 있고, ‘이 점, 사회와 주체가 분절된다는 점에 있어서야말로 보이는 권력은 의미를 지니고, 서양의 역사 시스템 속에서 <절대적 거울. 혹은 ,정초하는 이미지>──즉 <신의 닮은 모습>의 언설로 조직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입론의 전개는 연극적 원리와 신화에 따라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유를, 원인을, 증거를, 근거를, ‘왜’에 응하게 ‘보이는’ 것. 질문을 두는 것, 묻는 것을 할 수 있는 시공을 두는 것. 게다가 이미지로도, 텍스트로도. 이것이 주체의 생사를 제약하는 것은 이미 분명하다. 사회로써의 <거울>은 표상으로서의 주체를 생산하는 장치였다. 그리고 이 <거울>이 휘두르는 권력이야말로 보이는 권력이었다. 그리고 이 <거울>은 이미지로서의 제3자였다. 즉 여기서는 ‘<제3자>는 <근거율.에 실질을 부여하는 것이라는 것이 된다. 즉 전체 사회는 논리에 대해서, 즉 표상이나 인과성의 언설에 대해 집요하게 호소하지만, 그것은 삶을 살고 재생산할 수 있는 것처럼 되기 위해서이다.’ 제3자는 근거율에 실질을 부여하는 것이고, 그것은 삶에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 사회는 근거를 보여주어야 한다. <절대적 준거>를, <성스러운 거울>을 상연해야만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주체를 생산하기 위해서. 그 사람 형상들이 가까스로 살 수 있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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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근거율과 인과율에는 근거가 없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합리적으로 그것을 설치할 수는 없다. 그것은 반복에 따라 미적 = 감성적인 반복에 따라, 즉 ‘도그마틱하게’ 설치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말해보자. 근거율은 예술이고, 근거는 미적 · 감성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즉 우리의 논리로 말하면, 시니피앙이기도 이미지이기도 한 무언가에 의해. 텍스트이기도 이미지이기도 엠블럼이기도 한 무언가에 의해. 예를 들면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인 ‘근거’를, 즉 자기 존재의 ‘증거’를 보이려면 제3자가 보증하는 범위에서 자기의 이름과 이미지를 ‘엠블럼틱하게’ 제시할 수밖에 없다. 왜 우리는 자신이 자신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 저 작은 손거울 같은 I.D 카드를 필요로 할까? 나는 나로서 여기에 존재한다고 하는데 검문소나 관공서나 세관 등에서는 그것보다 이 작은 손거울이 ─ 거기에는 말과 이미지가 물질적으로 심어져 있다 ─ 자기 자체의 존재보다 우선시 된다. 그리고 ‘준거’하는 것으로밖에 우리는 자신이 자신인 것조차도 증명할 수 없다. 내가 나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 검문소에 수십 명의 친구를 데려와도 소용없다. 저 사람이 ‘확실히 이 사람은 아무개다’ 라고 증명을 했다 해도, 그럼 그 ‘어떤 사람’이 정말 ‘그 사람’인지 어떤지를 증명해줄 사람은 다시 데려오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그럼 또 한 사람 데려와도 그 사람이 진짜 그 사람인가 ─ 이상한 일이다. 이하 무한히 계속된다. 확실히 이런 예는 우스꽝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