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절 수정해석

건달바
2016-03-02 21:41
255

p.364-365 / 건달바

 

  어떤 여성이 아들과 함께 살고 싶어서 만취한 아들에게 그 몸을 드러냈다. 그녀는 그 성과로 임신해 딸을 낳았다. 그녀는 아들에게 진실을 고하지 않고 그 딸을 가족의 일원이 아닌 것으로 하여 혼기가 되자 아들과 결혼시켰다. 아들은 근친상간에 의한 자신의 딸인 줄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이 딸과의 결혼이 끝내 이루어져 딸이 어머니가 된 후, 이 어머니는 회개하여 자신의 아들에게 아내의 출생의 비밀을 알리고 자신이 저지른 일을 모두 고백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이 판례가 연 공간에는 ‘왜’냐고 절규하는 복수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들의 ‘왜’, 실은 그 딸인 아내의 ‘왜’, 그리고 그 두 사람이 낳은 아이의 ‘왜’가. ‘함께 살고 싶었기 때문에.’ 그것은 의미가 없다. 이 울려 퍼지는 복수의 ‘왜’에 답해야할 근거율은 새롭게 이 물음에 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이것에 답하지 않고서는 근거율일 수 없다. 법의 해석자인 개개의 판례를 법에  준거하여 해결하는 결의론(決疑論)자인 재판관은 이 근거율을 대리하여 ‘답’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어머니의, 이 아들의, 이 딸의, 이 아이의 생사가 걸린 이 ‘왜’를 맡아 해결 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근거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법을 정초하는 언설의 이름으로 결의론에 근거를 주는 것’에 의해서 바로 ‘왜가 없는’ 근친상간에조차  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어머니의 광기를 만들어 내고 말았던 것에서 이 사회는  모르는 사이에 도박에 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 도박,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라는 도박에는 어떻게든 이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적어도 지면 안 되는 것이다. 근친상간의 절대적 향락이라고 운운하며 즐거워하는 듯한 사람들의 수준을 우리는 이미 평온하게 초월하고 있다. 그런 것은 이미 일절 문제가 아니다.

댓글 6
  • 2016-03-11 21:44

    p.370-371 / 건달바

    따라서 어떻게든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을? 소격을. 우리와 전능 사이의 소격, 즉 근거율을, 법을, 텍스트를. <거울>을. 그러나 성가신 것은 그것만으로는 소용없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는 도박에 이길 수 없다. 르장드르는 냉철하게 말한다. ‘이렇게 씌어 있다’는 ‘원리주의적 논증’이기도 하다 라고. 법으로의 경직된 직접준거는 자기준거와 조금도 다를 것은 없다. 따라서 살인의 준거와. ‘이렇게 씌어 있다, 그러니까 죽여.’ 원리주의는 모든 텍스트의 원리주의이다. 원리주의는 텍스트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자유자재로 무시할 수 조차 있는 것이다. 소격이 거기에 없는 이상, 원리주의자는 텍스트와 자신의 구별이 되지 않으니까. 텍스트와, 이미지와 엠블렘과 자신의, 예컨데 국기와 자신의 구별이 안 되는 사람들. 그것들이 ‘몽타주’에 의한 효과에 자나지 않다고 하는 것이 뇌리에서 증발해버리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정확하게 ‘원리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원리주의적인 세계. 우리가 살고있는 <매니지먼트>가 지배하는 세계조차도 르장드르는 ‘원리주의’라고 부른다. 이른바 ‘<매니지먼트>란 행동주의적 도그마를 정치적이면서 사회적으로 작동시키는 것이고, 극단으로 달리지 않기 위한 제동장치가 되는 것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원리주의의 언설이고, 폭력적인 귀결을 초래할 것이며, <군사국가>에 의지하지 않으면 확대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금지> 구조에 대한 눈먼 상황하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서양>은 이 근본적인 문제에서 비켜서 있는 것이다.’


  • 2016-03-12 12:35

    366-367

     

     근친상간의 금지는 근본적이고 공허한 형식이다. 그것은 금지가 역사적, 사회적으로 다양한 내용을 가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본성적 논리는 어떻게 해도 손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항상 자기와 타자에 관련된 논리적인 구별을 통달하는 것이고, 즉 ‘어떻게 자기와 타자의 경계선을 표상하게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근친상간의 금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소격의 설정’이다. 그래서 근친상간을 범하는 것, 그것은 소격을 해소하는 것이고, ‘자기와 타자의 경계선’을 말소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자기와 타자의 구별 없이, 그러므로 자기와 세계의 구별 없이, 따라서 한계가 없이 ─ 라고 반복할 필요가 과연 있을까. 나르시스적 광기에 사로잡힌 근친상간은 ‘전능을 요구한다.’ 이것을 금지하는 것은 한계를, 소격을, 경계선을 통달하는 것이다. 즉 카테고리 아래 종속되는 것을 강요한다. 그것은 논리적, 또 카테고리상의 문제이고 근친상간의 금지 없이는 카테고리는 없다. 그러므로 인과성이 없고 근거가 없다.

  • 2016-03-13 17:22

    p.367~368 수정해석 

    왜냐하면 근친상간의 금지는 이미 말한 것처럼 논리적 차원의 금지와 같기 때문이다. 아르=완샤리시의 판례로 돌아가자. 어떤 어머니가 만취한 아들과 성교하여 딸을 낳았다. 이 첫 번째 단계에서 이미 복잡하게 뒤얽힌 것은 명백하다. 그 딸은 나는 아버지의 딸이고 어머니의 딸이고 게다가 아버지의 여동생이고 어머니의 손녀이다. 할머니의 딸이고 또 할머니의 손녀이다. 내 아버지의 형 즉 삼촌의 여동생이고 조카딸이고.....’라는 뒤섞여 어지러운 지위를 자신의 동일성의 언명으로 해야만 하기 때문에. 이것은 동물이라는 카테고리를 개체와 같은 수준에서 한 마리라고 세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문화에서 비유 없이 정색하고서 나는 후추임과 동시에 노타이 셔츠이고, 제임스 브라운이고 전기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쳐 있다.’ 요컨대 논리에 반하고 있다.’ 카테고리가 붕괴하고 있다. ‘자기와 타자와 관계된 논리적인 구별자기와 타자의 경계선이 무너지고 있다.

    따라서 이렇게 된다. 근친상간의 금지에 이유 따위는 없다. 그것 자체에는 근거는 없다. 반대다. 그 금지에 의해서만 카테고리가, 이유가, 이성이 즉 근거율=인과율이 가능하게 된다. 근친상간의 금지는 그 문화의 분류조직에, 논리형식에 <이성=근거>, 근거율의 구축에, 직접적으로 접속한다. 그러므로 근친상간의 과제는 가족의 전매특허가 아니근친상간의 과제는 어디에서도, 따라서 가족의 밖에 있어서도 행해진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유연하고, 다채로운 형식이다라고 르장드르는 말한다. 역으로 말하면 근친상간이 전능을 요구한다는 이 문언의 의미도 명백해진다. 즉 이것은 근친상간을 범하는 자가 자신이 근거율이다라는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근거율 자체에 왜는 없다. 따라서 그것은 만능이고 무법이다. 이것은 <거울>이고, <>이고, <> 그 자체이려고 하는 것과 같다. 거기에는 자신과 <거울> 사이의 소격이 없어진다. 그러므로 자기와 타자의 경계선도 없어진다. 자기 아들의 아내와 자기 딸과 자기 손녀딸과 자기의 구별이 없어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전능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르장드르는 말할 수 있었다.

    소격의 소실. 그것은 실로 한 번 미는 것으로 출현한다. 인용하자

  • 2016-03-14 20:30

    p.372~375 수정해석 

    주자일소, 토용 같이 있습니다.

  • 2016-03-17 15:05

    어젯밤에 제가 맡은 42절 수정해석 올려놓고 

    오늘은 오랜만에 집청소하고, 구하기 힘든 책찾아서 인터넷서핑을 하는 등,

    망중한을 즐기며 룰루랄라 하고 있었군요.^^

    43절의 363쪽과 370쪽 수정해석 올립니다

  • 2016-03-19 09:18

    p365,371.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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