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 제49절 매니지먼트 원리주의와 국가의 종언─‘무엇도 끝나지 않는다’(수정함)

건달바
2016-07-31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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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9절 매니지먼트 원리주의와 국가의 종언─‘무엇도 끝나지 않는다’

  그렇다. 우리의 논리로 되돌아가자. 르장드르가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벤슬라마의 도움을 빌린 지금 우리에게 생생하게 다가 온다. 우리는 무엇을 묻고 있었던 것일까. 국가의 명운과 매니지먼트의 실패에 대하여, 즉 자식을 낳고 키우는 엠블렘적인 근거율의 미래에 대해서였다.

  광고와 마케팅이라는 무기를 지닌 관리경영, 매니지먼트는 근본적으로 <해석자혁명>의 후계자이다. 말하자면 부모를 닮지 않은 못된 아이이다. 그들은 <해석자 혁명>이 일으킨 텍스트의 정보화에 충실한 광신자로서, <국가>도 <법>조차도 떠밀어버리려 한다. 그것들은 자신이 법학자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법학자이고(주305), 그러므로 법 없이 ‘통치술’의 재편만으로 일을 끝낼수 있다고 믿는다. 이미 말했듯이 그것은 계보원리를 ‘국가’에 통째로 맡기고, 배후에서 이미지나 시적인 ‘은유’를 조작한다. 자신이 도그마에 관련된 자인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손실보전’ 없이 도박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우리는 법학자는 아니다. 우리는 편협한 내셔널리스트는 아니다. 우리는 종교 따위 관여하지 않으며, ‘육아’는 중요한 문제이지만 그것은 심리학의 문제일 뿐이다. 그렇더라도 ‘가정의 붕괴’나 ‘소년범죄’, 게다가 ‘이민 범죄’는 곤란한 것이다. ‘자유’와 양립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안전’이 좀 더 중시되지 않는다면 곤란하다─따위로 그들은 큰소리친다. 그러나 그 소리는 겁에 질려 떨리고, 숨가빠한다. 그렇다. 그 유래에서부터 그들은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것이다. 그렇게 말하자. 그들은 그렇게 말해지는 것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하므로. 그렇다. 우선 이미지에 관한 기술인 이상 ‘광고 마케팅은, 그 리더의 지와 미를 극구 칭찬하는 내셔널리스트나 혁명가들의 선언 같이 원리적으로 종교적이다’. 그리고 ‘산업은 종교와 똑같은 위대한 수단을 사용한다. 즉 전례라는 수단, 텍스트의 콜라주라는 실천을’. 그렇다. 그들은 오래된 종교가, <살아있는 문서>가, <법학자의 국가>의 몽타주가 그랬듯이 그들도 미적인 것을, 도그마적인 것을, 시를 필요로 한다. 시대의 검열아래 그리고 내내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객관화·자료화·정보화되어 있을라치면 텍스트는 텍스트로 계속 있기 때문이다. 즉 텍스트 = 이미지 =엔블렘으로 계속 존재한다. 이미지이면서 시니피앙으로 계속 존재한다. 즉 ‘서양의 <합리주의>의 의례적 측면’은 어쩔수 없이 거기에 계속 있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의 서류, 데이터, 텍스트파일은 ‘광기의 대상으로서의 문서’인 것을 면할 수 없다.아무리 ‘탈의례화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단언’해도 소용없다. ‘텍스트는 그 신화라는 본성에서부터 의례적으로 밖에 기능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이미 인용한 부분이다. 우리가 쓸 때, 서류를 서식에 맞게 쓸때, 단말기를 향해 문자열을 입력하고 검색할 때, 폰트를 선택할 때, 거기에서 기능하고 있는 것은 의례이고 의례 이외의 무엇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우리 자신이 야만이라는 것을’. 우리의 텍스트를 둘러싼 행동거지는 해석자혁명에서 온 하나의 야만의 버젼일 뿐이다. 그것을 보지 않는 것에 의해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자. 예술은 정치에서 분리되는 것에 의해 질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오래동안 보아 온 것처럼 그래도 <이미지=텍스트>는, 은유는, ‘시의 섬광’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말하자면, ‘매니지먼트는 시를 거부하는 동시에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은유’와 ‘이미지’를 조종하지 않는 규범시스템 따위 존재하지 않는 이상, 그들도 ‘문화=숭배를 동원하고 구축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화=숭배 그 자체이다. ......종교적인 야만의 의미에서’. 그렇다. 매니지먼트도 실은 시를, 문학을, 픽션을, 이미지를 조종하고 있다. 배후에서. 우리의 일상도, 온갖 엠블럼, 이미지, 영상, 뱃지, 로고, 폰트, 포스터에 둘러싸여 있는 것 아닐까. 마치 액상화된 <거울>이 안개처럼 산포되어 있듯이. 그 ‘야만의’ 애증작용을 부정할 수 있을까. 그렇다. 그 이외의 방책은 없고 그렇지않은 것은 할 수 없는, 권력은 단어의 진정한 의미에서 ‘도그마적’으로만 작용하기 때문에. 그러나 그 ‘관리경영문학’은 어떤 것이었을까. 르장드르가 예로 들고 있는 것은 ‘<매니지먼트>에 적용된 <십계>의 유사품’으로서 ‘F. 부이규의 『12의 규칙』이고, ‘기업에 적용된 <윤리>’로서 ‘1991년에 미합중국에서 3000명의 프로페셔널들을 조사한 『비즈니스 윤리』’이다. 그리고 르장드르는 ‘매니지먼트 문학은 위대한 미의 단편을 제공해준다. 단지 위작으로서’라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경영서·자기계발서·성공철학·수첩정리술이 우리시대의 신화이고, 정초하는 시의 섬광이고, 주체를 구축하는 댄스이고, 정치적인 극장을 담당하는 시이고, 성전인 ‘텍스트’이다. 복음서나 아가서(雅歌書), 쿠란이나 대장경, 논어 대신에 스티븐 R 코비의 『일곱 가지 습관』이 있고, 『맥베스』,『돈키호테』,『파우스트』,『악령』이나『8월의 빛』대신에 나폴레옹 힐의 『사고는 현실화한다』가 있고, 휄덜린, 블레이크, 릴케, 랭보, 첼란의 시 대신에 데일 카네기의『사람을 움직인다』가 있고, 홉스, 로크, 몽테스키외, 칸트, 헤겔 대신에 드러커나 버나드가 있다는 것이다. 훌륭하다. 우리는 야만을 벗어났다. 포스트모던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을 가리켜─아이러니컬하든 그렇지 않든 마찬가지다─긍정하는 식자의 말도 끊이지 않는다. 한마디만 해둔다. 이런 것은 비극도 희극도 아니다. 그저 딱하다.

  이렇게 그들은 ‘다른 귀결보다도 더 법시스템이 근거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끝낼 수 있다는 환상, 결국은 그것이 단순한 테크놀로지가 되든가, 혹은 현재의 관리 경영적 언어로 말하면 조정의 테크닉이 된다는 환상’에 완전히 젖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말한다. 종교와 국가 따위 끝이고, 재판이든 전쟁이든 민영화할 수 있다고. ‘민영화’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르장드르를 따라 우리는 그것을 ‘재봉건화’라고 부르자. 그렇다. 그것이 ‘주인’과 ‘종’의 계약에 기초한 사적인 관계와 어떻게 다르다고 말하는가. ‘경영자’와 ‘상사’와 ‘부하’의 계약에 기초한 사적인 관계인 이상. 말하자면 ‘우리는 새로운 원리주의의 결과인 합법성이라는 유럽적 시스템의 재봉건화에 입회한 것이 아닐까. 즉〈매니지먼트>가 초래한 산업적 시스템의 재봉건화로.’ 봉건제라도 별로 상관없다. 상하관계와 계약관계가 있는 한, 그것은 그렇게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봉건제와 똑같은 짓을 하고 있음을 기분 좋게 잊어버린 그들이 행하고 있는 것이 <국가>보다 더 참사를 부르지 않을 보증 따위 어디에도 없다. 봉건제에 밀려들어가는 자기 모습을 가리켜 자유의 사자 등이라고, 그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국가의 역사적 한계를 철저하게 다 지적해 보인 다음, 르장드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보편적인 <매니지먼트> 쪽으로 향할수 밖에 없는 것인가. 이러한 것은 <금지>와 자식의 재생산을 보증하는 것으로서의 <국가>도 파괴하려고 하는 것인데도. 생각해보자. 요령이 좋아서 미디어 평판이 매우 좋은 이론이 말하는 것처럼,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국가>는 이미 계보권력에 무관심한 공허한 빈 껍질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즉 지구규모의 산업에 의한 중개를 행하는 전문기관으로서, 게다가 많든 적든 간에 마피아적인 협동조합으로서만. 이러한 것이 좋은 것처럼 된 것이다. 그런데 마피아 그 자체를 이렇게 분석할 수 있다. 그것은 봉건적인 조직형태이고, 따라서 그것은 결과로서 규범질서의 민영화를 초래한다고. 서양의 모든 사회는 <국가원리>에 저항하는 재봉건화 추세로 끌려가고 있는 것인가.

  마피아적인 매니지먼트 원리주의자는 법을 멸시한다. 그들이 의지하려는 것은 ‘사회 조정의 테크닉’이고 ‘관리경영’이고 ‘윤리’이고 ‘로비 활동’이다. 그러나 법이 없는 통치는 가능할까. 애초에 관료적인 ‘통치성’이란 무엇이었을까. 계속해서 그의 말을 인용하자. 

  주의해두자. <매니지먼트>의 이데올로그인 전문가들은 학문이 있는 비평가라기보다 개념을 먹이로 하고 있는 생명체이고, 이런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관리경영에 의한 해방이 아무리 주체에 대한 지배권을 넘기라는 요구로 모두를 황홀하게 했다고 해도, 우리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과격주의가 노리는 것은 ‘관리=행정(administration)’을 강조하는 것이다. <매니지먼트>는 <왕인 주체>를 관리한다(gere). 그러나 법-신학의 오랜 용어에서 ‘관리하고 통치한다(administrer)’라고 불리는 것의 중요성을 모르고 있다. 이 말이 명예 회복된 것은 18세기의 국가재정학에 의해서였다. [원주 ‘관리하고 통치한다’는 것은 정초하는 권력의 장소──<준거>의 장소──로서 승인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관리=행정>은 그 자체, 이 장소와는 구별된, 이 장소에 의거한 심급으로서 승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킬레스건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여기 있다. 왜냐하면 관리경영자들은 모든 장소를 ‘합법적으로 점유하는 자’다 라고 자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그들은 이미지를 조작하고, 마찬가지로 규범원리를 조작하고 있다. 이러한 실천은 지금의 문화에 있어서 상징질서의 중대한 도착이라고 말하자. 이러한 ‘위(僞)규범성’을  따르는 자에게는 파괴적인 결과가 초래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간단한 것이다. 관리경영, 행정은 합법적 질서 안에서만 살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보아온 ‘윤리’ ‘도덕’ ‘상식’과 마찬가지로, 법에 대한 직접준거를 방해하는 ‘준-준거’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그것은 법의 옆에, 그러나 법과는 ‘다른 장소’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기에 행정조직인 관료제의 장소는, 법과의 관련하에서만 필연성을 갖는 것이 되고 그쪽으로 향하게 된 저런 증오에도 불구하고 계속 존재해온 것이다. 르장드르가 그 방대한 근대관료제 연구 안에서 꺼내 보인 것은 바로 관료제의 기원은 ‘교황청’ ‘주교좌’에 있다는 것이었다. <살아있는 문서>와 『교령집』의 커플로부터 <국가>와 <법>의 커플로의 추이 안에서 성직자 위계제=관료제가 끝없이 계속해서 증오에 노출되어온 것은, 그들이 ‘상상적인 것’을 조종하기 때문이 틀림없다.(주322) 그것은 증오받을 운명인 것이다, 도덕과 마찬가지로. (주323) 그러나 매니지먼트 원리주의자들은 증오받을 운명을 피하려고 하고 스스로가 ‘절대주의적인’ 야만성을 몸에 감고 여전히 종교적인 것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법과 국가를 모멸하려고 한다. 즉 ‘질문의 제도’를 파멸시키려 한다. 

   

  실제, 우리들이 보고 있는 것은 <제3자>의 원리를 제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그런 일은 불가능하다──질문 그 자체를 내쫓으려고 하는, 결국은 주체에 관련된 결의론의 끊임없는 활성화를 취소해버리려고 하는 반복해온 시도인 것이다. 이것에 대한 과학적인 해결의 탐구나 법의 공허를 끝내려고 하는 포교활동은 필요하다면 로비 활동의 방법론을 <윤리>에 적용하여 사용해보이지만 이런 것의 이면에는 매니지먼트 원리주의가 확실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대중을 조작하는 것이 그 본성인듯한 이 원리주의는 아직 우리들의 사회에서 그 정치적 한계에 부딪힌 것은 아니다. 오늘날 발전을 이루고 있지만, 결국 그 이름에 걸맞는 비판적 연구가 되고 있지 않은 <서양매니지먼트>는 우리들을 태우고 어떤 통치의 양식으로 데리고 가지만, 그 통치양식은 고전적인 타입의 결의론에 어떠한 여지도 남기지 않는다. 좀더 확실히 말하면, 지금이라고 하는 역사적 문맥에서 <매니지먼트>가 알리는 것은 질문 제도의 폐지이다. 그렇게 되면 주체의 활동에, 삶에, 자식의 재생산에 필요불가결한 사회 레벨의 계보의 조작은 어떻게 될 것인가?.

  <국가>에 기한이 온것은 정말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도 반복해왔다. <국가>는 당연히 없어질 것이다. 그것은 그럴만하다. 우리도 때로는 흔쾌히 동의한다. 하지만 매니지먼트 원리주의자들은 그 ‘이유’를 잘못보고 있다. <국가>는 없어져도 좋다. 그러나 <근거율>이, <거울>이, <소격>이──‘왜’와 ‘사랑’과 ‘이유’가 없어져도 좋을 리가 없다. 질문하고 사랑하고 권위를 웃어 넘기는 이 인형의 행위가 왜 없어져도 좋다고 생각할수 있을까. 시대의 검열 하에 우리는 맹목에 익숙해져서 자신의 맹목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눈을 뜨자. 용기를 내서 눈을 뜨지 않으면 안된다. 거기에는 용기만이 필요하기 때문에. ‘인간은 관리경영 속에서는 살 수 없지만 위기 한가운데서 시련에 노출되어도 살수 있기’ 때문에. 반복해 보자. <국가>의 본질이란 무엇이었는가.

  <서양>의 제도적 세계 중 도처에 <국민국가>가 있는 곳의 전통(관습법이든 성문법의 전통이든)이 어떻든 <국가>는 제각기 어떤 열쇠가 되는 장소를 차지하고 있다. 그 장소는 종의 재생산 구조에 대고 자물쇠를 걸어 잠그는 ‘절대적인 장소’이고, 고전적으로 법학자들이 ‘주권의 장소’로 제시하는 장소인 것이다. 그러나 그 <국가>가 어떤 자격으로 그 장소를 차지하고 있는가 하면, 그것은 ‘자식의 재생산의 보증’ (어떤 성과 이성의 자식이라고 다시 말해둘 필요가 있을까)이라는 자격, 그 자격밖에는 없는 것이다. 


  <국가>의 역사적 한계를 지적하고 그 쇠망을 예언하는 르장드르의 모습에서 독자는 안도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저 「이슬람의 회귀」를 60년대에 예언했던 그 본인이기 때문에. 그러나 끊임없이 그는 말한다. ‘“<국가>라고 하는 관념이 여전히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일까.” 경제적으로, 금융적으로, 혹은 군사적으로는, 즉 세계 규모의 테크노 산업적인 제국의 관점에서 생각한 권력과 사회 조직의 관계에서 보면, 아마도 ‘그렇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재생산에 필요불가결한 제도적 몽타쥬의 논리로부터 보면 문제는 일변한다. 이렇다. “<국가>는 수명이 끊어진 것일까?”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게 된다. 자식──한 사람과 그의 이성의 자식──의 재생산을 정초하는 권력은 국가의 여러 가지 관할의 중추를 이루는 것으로부터 도망가고 있는 것일까? 그리하여 다른 도그마적인 수준으로 고쳐 세워진다면 그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몇번이라도 말하자. ‘<국가>는 자신의 역사의 끝에서 죽어가고 있다.’ 이 문언을 다시 여기에 두자.──여기에서 쾌재를 부르며, 자유다, 포스트모던이다 따위를 떠드는 사람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무엇도. 골수까지 「테크노 산업적인 제국」의 프로파간다에 완전히 빠져 있을 뿐이다. 반대인 것이다. 이 문언은 우리를 터무니없는 곤란 속으로 밀어 떨어뜨린다. 벤슬라마가 가리키는 고난의 길, 제3의 길의 한복판에, 우리도 정처없이 망연자실하게 계속 서 있는 것이라고, 이 문구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는 멸망해도 좋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식의 번식」을 정초하는 <거울>과 <근거율>이 없어져서 좋을 리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 새로운 버전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게다가 우리는 세속화가, 종교가, 국가가 역사적인 산물에 지나지 않은 「전략병기」라는 것조차 드러내왔으므로 우리는 일체의 ‘끝’을 빼앗긴다. 어떠한 위로도 없고 어떠한 안도도 없다. 무엇도 결말이 나는 것은 없다. 무엇도 끝나지 않는다. 무엇도. ‘우리는 역사의 끝이니, 커뮤니케이션의 시대니 등등 어떠한 변전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피에르 르장드르는 무엇도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결말이 난 것 따위 없다고 말한다. 지금 무엇인가가 끝나려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 중세다. 근대가 끝난 것이 아니라, 중세가—라고 몹시 고집불통인 어조로 말하기도 한다. 반세기에 걸쳐 이와 같은 문언을 계속 중얼거려 온 이 남자는 그래서 일까 반동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무리도 아니다. 그는 그 한마디 한마기를 일일이 사람의 신경을 건드리려는 듯 그것을 말해 왔으므로. 이른바 관료제는 끝나지 않는다. 이른바 봉건제는 끝나지 않는다. 이른바 법은 끝나지 않는다. 이른바 의례는 끝나지 않는다. 이른바 우리가 야만에서 벗어나는 것 따위 없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종교가 끝난다고? 종교가 없어지는 일은 없다. 근대화는 만능이 아니다.’(주331)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망설이는 경향도 많으리라. 당연하다. 우리는 야만으로부터, 종교로부터, 법으로부터, 의례로부터 벗어날 일은 앞으로도 영원히 없고, 어떤 종언도 없고, 해방도 없는 잿빛의 공간에 누군가의 자식이고, 자식을 낳아서 유배를 살아가는 무의식의 착란의 도박장이라는 공간에, 어떤 휴식도 허용되지 않는 투쟁의 장소에 영구히 던져지게 되므로. 이 망설임은 오랫동안 필자의 것이기도 했음을 말해두고 싶다. 그러나 그 망설임을 극복함으로써, 귀중하다고 말해도 지장이 없는 인식을 확실하게 얻을 수 있다. 3개를 지적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자. 1. 제3자의 지위에 대하여  2. 안트로포스와 후마니타스에 대하여  3. 혁명에 대하여

 

주305) ‘이 법률주의를 섬기는 신세대 법학자들은 심리나 사회, 관리경영 따위의 호칭 때문에 법학자인 것이 알수 없게 된다.’ EV, 149.

주322) 관료제의 기원으로서의 교황청에 대해서는 AC, 243. ‘상상적인 부분을 야만적이고 원시적인 스타일로 포섭하여 작용시키는’ 관료제의 ‘애증’을 도발하는 특질에 대해서는 JP, 174, 185, 239. 관료란 애국적으로 밖에 있을 수 없지만, 이른바 ‘애국자’로부터는 증오받는다는 기묘한 입장 그 자체이다.

주323) ‘도덕’이란 회개의 법과 도덕신학에 의해 분담되어왔던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규범 공간의 ‘준-준거’로서 예를 들면 ‘고해’의 실천 등으로 힘을 휘둘러왔다. 따라서 그것은 ‘증오’받는 것이 된 것이다. ET, 151ff, 물론 ‘윤리’라는 유행의 개념은 ‘<도덕>의 불확실한 미봉책’이다. ET,,231. 역으로 말하면 윤리학자는 스스로의 윤리의 법적 실천에 대해서 도그마적인 질문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윤리학은 법철학이고 따라서 증오 대상이 되는 것을 각오하고난 후에, 구체적인 비판의 결의론 안에서 ‘준-준거’로서, 즉 ‘비장의 카드’로서 역할을 하는 문언을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귀결은 피하기 어렵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주 331)  주의하자. 그의 사고의 특징 하나를 극명하게 확인해 두어야 한다. 그가 쓴 책에 빈번하게 나오는 동사의 하나로 ‘뇌관을 벗기다(desamorcer)’가 있다. 그는 그 뇌관을 벗기기 위해서는 그것이 지금 현실에 존재함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관료제, 봉건제, 종교, 의례, 야만. 이것을 지금 여기에 ‘없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으로부터 자신이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 생각해버리면, 결국 의식 바깥에서 기능하여 갑작스럽게 폭발하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을 단순하게 경멸하고 멸시하는 태도를 고집한다면, 혹은 그저 사회 주변에서 겨우 연명하는 것이 허락된 ‘관광객용 민속학’으로 취급된다면, 그것을 섬세한 손놀림으로 조작할 일을 스스로 희희낙락하며 손을 떼는 것이 된다. 이보다 더한 웃기는 익살극이 있을까. 따라서 그것이 아무리 ‘자신은 극복했다’는 자의식에 있어 상처가 되더라도 굴욕이 되더라도 그것이 거기에 계속 있음을 먼저 무슨 일이 있어도 인정해야 한다.—이것이 이 르장드르라는 남자가 계속 말해 온 것이다.

댓글 2
  • 2016-08-07 12:39

    한글 파일로 작업해서 첨부해요.

    ms로 작업한 것이라 많이 깨지더라구요.

    특히 진하게 된 부분이 전부 없어져서 다시 찾아서 보긴 했는데, 한 번 확인해 보세요.

    메모도 붙였고, 고친 부분은 빨간색으로 표시했어요.

    되도록이면 수정본은 한글파일로 작업해서 올려주셨으면 해요.

  • 2016-08-21 20:19

    최종 올립니다.

    (메모는 보시고 지워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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