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린 사람들> Grace 후기- 신의 은총 VS 인간의 은총

프리다
2023-09-04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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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조이스는 갈수록 우리를 곤궁에 빠트리는지 모르겠다. <더블린 사람들> 단편 중 마지막 순서로 읽게 된 ‘Grace’!!

나름 조이스의 독법에 적응됐다 싶어 이번엔 좀 수월하게 읽힐까 내심 기대했건만 ‘Grace’의 떨어져 나간 노먼(gnomon) 조각은 너무도 크다. 조이스의 필살기인 인물의 심리묘사는 거의 없고 인물의 행동과 대화로 전개된다. 각 인물에 대한 서술은 그들이 나누는 대화와 일치하지도 않고, 어떤 상황이나 단어의 보편적 의미는 역설적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조이스가 숨겨 놓은 노먼(gnomon) 조각들을  얼마나 찾을 수 있을까?

 

  1. 1.등장인물

톰 커넌 Tom Kernan- 첫 장면, 술집 바닥에 무력한 상태로 쓰러져 있다. 그는 그의 친구들의 계획에 말려들어 마지못해 피정에 참석하게 된다. 그의 사무실 선반에 차(茶) 보관통들이 늘어서 있고 도자기 사발들, 차의 맛 판별을 위한 그의 독특한 행동들을 미루어 보아 커넌의 직업은 차(茶) 외판원이다.

커넌 부인 Mrs. Kernan- 결혼 3주 후 아내의 삶을 도저히 못 참게 되었을 때 ‘엄마’가 되어 갇혀 버린다. 25년간 현실에 순응하며 다섯 남매를 키웠다. 남편의 폭음문제로 남편 친구들의 피정 계획에 동의한다.

 

잭 파워 Jack Power- 노란색 얼스터코트를 입고 등장.(조이스 작품에서 yellow, gold는 부패 상징) 더블린의 아일랜드 왕립 경찰청에 근무하는 청년이다. 술집에서 취한 친구 커넌을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다준다. 파워는 커넌 부인에게 커넌을 새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하고 며칠 후 친구들을 데리고 와 커넌에게 카톨릭 교회의 피정을 권유한다.

 

마틴 커닝햄 Martin Cunningham- 가장 연장자이며 세익스피어를 닮은 인물. 주정뱅이 아내와 결혼한 불쌍한 마틴을 모두들 존경한다. 아는 것이 많은 권위자처럼 행동하지만, 대화 중 드러난 그의 지식은 부정확하다.

 

머코이씨 Mr. M'Coy- 한때 유명 가수였지만,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현재는 시 검사관 비서. 그가 파워에게 한 저급한 장난질로 인해 파워는 머코이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

 

하퍼드- 커넌과 함께 술을 마시다 사라져 버린 고리대금업자.

 

퍼든 신부 Father Purton- 피정을 주관하는 신부. 높은 단 위에서 설교하며 '구원'을 상징한다. 자신을 '영적 회계사'로 비유한다.

 

첫 장면부터 사건이 일어났다. 술집 계단 밑바닥으로 굴러떨어져 오물을 뒤집어쓴 채 피를 흘리며 쓰러진 커넌. 마치 종교적으로 타락한(fallen) 죄인의 모습이다. 커넌의 추락 사건을 계기로 그의 친구 파워가 그를 새사람으로 구원하기 위해 피정에 함께 참여할 계획을 도모하게 된다.

 

2. 마비된 우정

 

커넌과 친구들은 끈끈한 우정으로 서로를 아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대화를 관찰해보면 각자가 가진 무기로 미묘한 경쟁구도가 엿보인다. 그들을 묘사하는 단어에서 군사 용어들이 보인다.

커넌의 묘사를 보면, 계단에서 떨어진 fallen은 전사자란 뜻이 있고, 그의 끙끙대는 신음소리 grunting noise의 grunt는 졸병, 침실에서 친구를 맞이할 때 veteran’s pride를 가지고 우쭐한 태도로 쳐다본다. veteran은 고대 로마시대에 ‘다년간 복무한 직업군인’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전직군인’을 뜻하다가 1740년부터는 ‘어느 한 분야에서 경험이 많은 사람’을 가리키게 되었다.

커넌은 자신이 친구들 전략의 희생자 the victim of a plot 임을 전혀 알지 못했는데 the victim은 전사자, plot은 포격 목표를 뜻한다.

커닝햄의 지식도 마치 무기인 듯 ‘지식의 칼날 blade of human knowledge’, ‘철학의 바다에 담금질immersions in the waters of general philosophy’한 덕분에 가다듬어져 있다는 표현에서도 전쟁을 앞두고 칼날을 담금질하는 모습이다.

 

커넌 친구들은 자신의 지식들을 어려운 전문용어를 사용하며 서로 잘난 척하지만 부정확한 정보들이다.

그들의 친구 관계에서 직업적 성취, 지식들은 상대적 우월감을 과시하며 이기기 위한 무기일 뿐이다.

 

이들 친구 관계에서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커넌은 왜 자신이 떨어진 이유를 숨기는 걸까? 함께 술을 마셨던 두 남자는 왜 사라진 걸까?

동료들이 '무슨 신세를 졌길래'라고 수근거릴 정도로 파워는 커넌에게 호의를 베푼다. 무슨 이유가 있는 걸까?

커넌은 왜 순경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걸까?

 

 

3. Grace의 역설 (신의 은총 VS 인간의 은총)

 

사전적 의미의 Grace는 은총, 우아함, 외관, 지불유예(기간)이다. 라틴어 gratia 어원으로 호의, 배려, 감사에서 파생되었다.

종교적 의미의 Grace는 모든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으로, 죄의 용서와 구원의 은총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인간을 용서하고 구원과 영생을 주는 무상으로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초월한 사랑, 선물이라는 뜻으로 신약 전체를 요약하는 말이 <은총>이다.

 

신에게서만 받을 수 있다는 무상으로 무조건적인 초월한 사랑 Grace는 높은 단상 위에 서 있는 신부의 말씀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진정한 Grace는 커넌이 계단 밑바닥에 추락한 그 순간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Grace>의 첫 문장은 익명의 TWO GENTLEMEN~로 시작한다. 이 두 신사는 쓰러진 커넌을 발견하고 ‘ 그를 뒤집는 데 성공’ 하며 종업원과 함께 계단 위로 끌고 올라왔다. 사람들은 커넌을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어떤 사람이 ‘바람 좀 쏘여요, 기절했네’ 라 말하고, 잿빛 안색의 커넌을 보며 사람들이 그의 옷을 늦추고 넥타이를 풀렸다.

 

이와 반대로 지배인은 자신이 용의자로 몰릴까 두려워 쓰러진 사람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다. 이 사람이 누구냐, 친구는 어디갔냐는 질문만 반복한다. 커넌의 잿빛 얼굴을 보자 겁을 먹고 의사를 부른 것이 아니라 경찰을 부른다. 경찰 역시 피해자의 위급한 상황에 자기가 ‘속임수’에 말려든 것 아닐까 겁을 먹고 수첩을 꺼내며 이름과 주소를 묻고 있다.

 

이때  A young man in a cycling-suit 가 원을 뚫고 나타나 커넌 옆에 무릎을 꿇고 그의 입을 닦아내고 브랜디를 먹인다. 커넌이 의식을 차리자 사이클 복장의 청년이 이제 괜찮냐고 묻는다. 사람들이 도와서 그를 일으켜주었고, 처음 그를 발견했던 두 신사 중 한 명이 커넌의 모자를 씌워준다. 파워가 나타나 커넌에게 어찌된 일이냐고 묻자 사이클 복장의 청년이 혀를 다친 커넌을 대신해 계단에서 떨러졌다고 답해준다. 커넌을 마차에 태울 때까지 부축해 준 뒤 사라졌다.

 

TWO GENTLEMEN, 어떤 사람, 사람들, 사이클 복장의 청년... 익명의 사람들은 커넌이 오물을 뒤집어쓰고 추락한 가장 낮은 자리에서 무상으로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고 사라졌다.

 

<Grace>에서 사용된 'Grace' 는 대부분 남들에게 보여지는 외관의 의미로 쓰였다

"그의 품위있는 실크햇을 쓰고 각반을 차지 않고서는 시내를 돌아다니지 않았다. 이 두 가지 외관 Grace 만 갖추면 언제든 검열을 통과할 수 있었다. "

Grace 의 은총, 우아함의 의미가 역설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Grace 어원에서 보이듯이 다른 사람에 대한 호의, 배려에서 우아함이 나오는 것인데, 이 의미가 변질되어 다른 사람들 눈에 비춰질 자신의 그럴듯한 외관Grace을 우아함으로 여기고 있다.

조이스가 익명의 사람들을 통해 은총을 보여준 이유가  Grace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이지 않을까? 

 

파워가 커넌의 아내에게 피정을 계획하며 ‘우리가 커넌을 새사람으로 만들겠습니다’ We’ll make him turn over a new leaf 라는 표현! 잎을 뒤집는다것이 어떻게 새 사람으로 바뀐다는 의미로 변했을까? 어원을 찾아보니 16세기에는 책의 페이지를 leafs 라고 불렸다고 한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새로운 내용이 전개되듯이 이전의 내용은 덮고 새로운 사람으로 바뀐다는 의미로 쓰이게 된 것이다.  커넌이 차(茶) 외판원인 것도 의도한 것일까?

We’ll make him turn over a new leaf.의 문장이 맨 앞 문단의 They succeeded in turning him over.가 서로 묘하게  대비되며 비추고 있다. 익명의 두 신사가 추락해 엎어져 있는 커넌을 ‘그들은 뒤집는데 성공했다!!’  

파워가 말한 문장은 가정형이지만 두 신사의 행동은 완결형이다. 커넌의 구원의 은총은 인간의 사랑을 통해 현세에 이루어지는 것이지, 회계장부로 세속화된 신에 의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표현한 건 아닐까?

 

조이스의 이전 단편 대부분이 절망과 환멸로 채색되었다면 후반부로 갈수록 인간에 대한 희망의 빛이 조금씩 엿보인다.

 

 

 4. circle, cycle, cycling, ring, surround, medal...

 

이번 단편에서는 유독 원의 이미지가 담긴 단어가 반복되어 나온다.

circle :1.원형 2.빙빙 돌다 3.동그라미를 그리다

cycle : (사건·현상의) 순환, 반복, 한 바퀴 !!

 

조이스가 <Grace>를 에필로그로 고려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첫번째 단편 <Sisters>와 뭔가 연결돼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실제로 <Sisters>에서 언급된 paralysis, gnomon, simony가  <Grace>에  상징화되어 그대로 비추고 있다. 

커넌이 무력한 채 쓰러진 모습 - paralysis,

커넌의 잘려나간 혀의 끝부분 -  gnomon,

퍼든 신부의 세속화 된 모습 -  simony 로!

<Sisters>를 잠시 살펴봤는데 <Grace>와 서로가 서로를 비추고 있는 장면이 곳곳에 보인다.

<Grace>에서 다 찾지 못한 gnomon 조각들을 <Sisters>에서 찾을 수 있을지...

조이스의 은총(Grace)을 기대해 본다.

댓글 8
  • 2023-09-04 19:16

    정리 고마워요. 마지막 단편이라 쉽게 읽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길고 현란한데 비밀스럽기까지 한 문장을 따라 가려니 헉!헉! 입니다. 읽고 해석하기에 급급해서 이 작품의 의도를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프리다샘께서 이리 집어주시니 그래도 좀 이해가 되네요.

    관습이 되어버린 종교. 마비된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는 종교. 그것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인가봅니다.

    단편들을 빙~ 한바퀴 돌아 sisters를 다시 읽기로 한것. 좋아요.

  • 2023-09-04 21:59

    와.... 이번 후기는 출력을 해야겠습니다. 😌 꼼꼼하신 프리다님 성정이야 알고 있지만....이 정도로 써주시면 ...이건 ..어찌 앉아서 읽을수 있을까 싶습니다. 책의 해설서 수준입니다요. new leaf 와 tea의 연결성은 상상도 못했네요. 물론 많은 다른 부분도 생각도 못했구요.

    뭐랄까... 이번 챕터는 앞부분에서 계속 맴돌고 있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어요. 단단한 circle 로 벽을 만들어놓고 어디 틈이 있으면 찾아보라지!? 등장인물 파악도 힘들고, 왜 넘어진건지, 정말 피정을 간다는게 계획이 맞는지 도통 감을 못 잡겠더라구요.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의 힘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됩니다. 후기 감사합니다. 🙏

    • 2023-09-09 18:06

      ' 앞부분에서 계속 맴돌고 있는 느낌' 진공묘유샘 느낌이 맞네요.
      이번 챕터는 결론이 처음부터 나와 있는 특이한 구성으로 돼 있어요. 소설의 구성 단계인 발단, 전개, 위기... 뭐 이런 순서를 다 뒤엎는...
      조이스가 말하려는 진정한 'Grace'의 의미를 앞부분에 묘사했기 때문에 circle, cycle...로 앞부분으로 다시 소환하기 위한 장치일수도 있겠어요!!

  • 2023-09-04 23:38

    맥락없는 사건과 그를 둘러싼 많은 인물들로 당황스러웠는데요, 프리다님 후기를 읽으니 정리가 됩니다.

    저는 지난 시간에 익명으로 쓰여진 부분이 궁금했어요.
    익명으로 인물을 묘사하다가 본인이 혹은 누군가에 의해 이름이 밝혀지면 그 때부터는 이름으로 불려지더라구요.
    익명과 이름 사이엔 어떤 차이가 있는건지...
    프리다님 글을 보니 익명=사랑과 자비 같기도 한데,
    그렇다면 동일 인물의 익명과 이름은 어떻게 봐야할까요?

    • 2023-09-06 20:50

      정말 중요한 질문을 해 주셨어요!!
      Grace 이야기를 푸는 중요한 열쇠가 될거 같아요.
      익명성과 주체의 철학개념을풀어서 다시 보충해볼게요.

  • 2023-09-10 20:52

    "그는 자신이 굴러 떨어진 계단 아래에 웅크린 채 넘어져 있었다." 첫 장면이 강렬합니다. 의미심장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에서 우리 모두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죄인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교회를 통해 받아야 한다고 하지요.
    조이스는 교회의 구원을 비웃듯이 이름 없는 사람들이 그를 계단 위로 끌어 올리고, 옷깃을 풀고 피를 닦아주고 살려냅니다.
    circle은 어떤 집단,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프리다샘의 꼼꼼한 후기, 넘 좋아요.

    • 2023-09-21 07:24

      circle에 다양한 의미가 중첩돼 있네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죄인'. 우리는 신께 빚진 몸이라 헌금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논리! 신부가 고리대금업자인 셈이네요. '영적 회계사'란 이름으로 포장하지만요

  • 2023-09-13 07:45

    WOW !!!!!!!!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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