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분적인 연결들> 4차시 후기

2023-10-05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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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에코2 부분적인 연결들 4회차 후기

 

점점 잼있다, 계속 어렵다, 이 작가가 대단하다, 더 미궁속으로 등등

여기저기서 각각의 반응들이 속출하고 있는 

에코2 세미나, 메릴린 스트래선의 <부분적인 연결들> 문화들 편으로 가보자.

이쯤 되니, 책의 구성방식 자체도 스트래선의  논의방식과 같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래서 환기할 겸 이 책의 ‘차례’ 다음 쪽에 제시된 ‘시놉시스’를 보여주는 도표를 한번 체크하고 가볼까 한다.

스트래선이 이 책의 구성기법을 이렇게나^^ 친절하게 보여주니까.

 

 

  도표 아래쪽 역자의 설명을 봐두자.

  *시놉시스로서 칸토어의 먼지는 이 책의 구성기법이다. 이 책은 전체적인 내러티브를 좇지 않으며, 끊임없이 자기복제되며 파생-성장 하는 칸토어의 지시를 따른다.

 

저번 시간까지 우리는 스트래선이 제시하는 ‘인류학을 쓴다’는 개념과 형식을 살펴보았다.

저자는 인류학자라는 형식을 타일러의 여행자에서 해러웨이의 사이보그로 대체하면서, <인류학자의 글쓰기>는 서로의 확장으로 작동하는 부분들 사이에서 일종의 집적회로를 형성하고, 그것은 고대의 한 사회에서 다른 사회로, 사회생활의 한 측면에서 다른 측면으로 사고를 도약시키는 효과를 상상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 회로는 인류학자의 인지수단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며 ‘인류학을 쓴다’의 쟁점들을 열어두며 나온다. 이번 시간에는 스트래선이 제시하는 <부분적인 연결들-문화들>의 사례들을 읽으며, 문화의 행위자들인 파푸아뉴기니와 멜라네시아사람들이 어떻게 ‘연결’을 다루는지 살펴본다.

먼저, <문화들-부분1>에서는 수직과 수평으로, 지역이나 공간적 차이를 넘어 자기 복제되고 파생되는 나무와 사람의 끝없는 연결들에 집중한다.

완토아트 사람들은 나무를 이용한 확장물(피규어)을 통해 자신을 수직적으로 확대한다. 그때 피규어는 정령이 되기도 하고 생성을 품은 나무가 되기도 한다. 마심군도로 시선을 옮기면 사람들로 가득 찬 나무(카누)를 만난다. 카누는 사람들을 싣고 여행을 통해 관계를 맺고 중심에서 주변으로 확장되며 되돌아오길 반복한다. 카누는 내부에서 본다면 잠재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인격들로 채워진-복수이지만, 외부의 시선에서는 단일한 인격이 되기도 한다.’ 가와 사람들에게 카누는 아이의 형상을 만드는 모체, 즉 어머니다. 카누(곧 어머니)라는 하나의 형식은 자체 내 수많은 형식을 담고 있다. 그들의 밭(여자의 신체) 또한 마찬가지여서 땅은 무거워져야 한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 부풀어 오른 밭이라는 외적인 형식-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는 밀접한 연결이 있다. 그래서 밭에서 자라는 채소들을 지각!하는 것만으로 포만감을 느낄 수 있다!고 여긴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그들에게 출계 집단의 각 성원은(신체의 구성이라는 측면에서) 하나의 집단임과 동시에 확장과 연결을 만들어 내는 방사성으로 뻗어가는 관계의 매트릭스. 이들에게 나무는 인격들의 용기임과 동시에 인격이다. 그리고 나무의 이중성은 여행을 통해 정교하게 반복-복제되며 주문과 주술을 통해 움직인다.

이렇듯 스트래선은 무작위적인 사회적, 역사적 상황들로부터 사례를 한정하지 않고 연결하는데, 이때 이것들을 잇는 ‘연상’작용에 대해 짚고 넘어가길 권하며 물음을 건넨다.

‘이 연결은 어떤 종류의 형식으로 인식되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문화들-부분2>의 논의를 이어간다. 저자는 완토아트의 피규어 장식에서 눈, 코, 입의 얼굴 이미지를 연상하는데, 이런 흔한 유사성에 기대어 뻔한 도상들을 유추해낸 자신의 단순함을 들추며, 비슷한 것끼리의 비교 연상으로 연결들이 대상물의 속성이나 의미에 갇히게 될 수도 있음- 이미지의 막다름-을 지적한다. 그리고 구어레이의 경우, 블로러와 갈라진 북, 성스런 피리를 가지고 비교를 위한 비교를 시도했음을 꼬집는다. 대나무에서 쩍!!하는 소리를 내며 인간이 나온다는 신화를 기억한다면, 카누도 피리도 나무도 만들어진 기명악기가 아닌가. 피리는 기명악기면서 동시에 혼과 아기를 내보내는 기구다. 인류학자가 할 일은 유비유추의 한계를 정할 것이 아니라, 행위자들이 그리는 유비유추를 기록하는 것이라고 스트래선은 말한다. 그런데, 기층을 이룰만한 의미의 조합도 없고 좌표축으로 사용할만한 맥락이나 수준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환기할 수 있을까? 있는 그대로 말해 연결은 부분적이다. 연결이 부분적인 이유는 (피리를 사용하는 방식에서) 유비유추의 일관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인류학자가 정한 맥락과 수준이 그것을 통해 규명하려는 현상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일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확장물의 속성을 전부 다 헤아리고 가늠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저자는 모든 사례를 아우를 수 있는 맥락이나 수준의 조합을 추상화할 수 없다면, 우리(인류학자)가 어떤 환기를 탐색할 수 있는지 물어온다.

 

-나무와 피리는 서구인의 눈에 인격과 분리된 사물이다. 그러나 멜라네시아사람들에게 그것들은 (안에서 보든 밖에서 보든) 인격에 속함과 동시에 인격을 넘어선다. 그것들은 인격을 만드는 관계에서 없어서는 안될 확장물이며, 관계들(기구들)은 신체에 본래 갖춰진 것으로 눈과 입처럼 신체상의 특질이다. 우리가 다뤄야 할 논점은 인류학자가 유비유추를 어떻게 조절하고 통제하는가가 아니라, 행위자들이 그것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다.-

 

<문화들-부분2 중심과 주변>으로 넘어가 보자. 스트래선은 앞선 부분의 문제들(도대체 어떤 환기를 탐색할 수 있겠냐는)이 지금껏 인류학이 선취한 연결들과 관계들- 즉, 예기-제거의 방식이나 구조주의적 분석-을 자신이 깡그리 무시했기 때문에 그것들에서 얻을 수 있는 가능성 마저 간과했음을 밝힌다. 그러므로 이제껏 다루었던 사례들 속에서 다시 한번, 파푸아누기니 사람들과 그 외 멜라네시아 사람들이 연결을 어떻게 다루는지 어느 정도 알기 위해 사례들간의 대응 관계 위치를 재설정해보자고 제안한다.

멜라네시아 사람들의 여행은 특이성이 있다. 그들은 코즈모폴리탄이 아니며 쿨라교역자들처럼 문화적인 의도를 가지고 여행을 떠난다. 완토아트 사람들은 거대한 대나무 조형물로 확장된 댄서의 움직임에서 정령을 보고 있다. 그들에게는 모두 특정한 상황에서 상대에게 특정한 응답을, 그리고 관중에게는 특정한 인식을 끌어내려는 분명한 의도가 있다. 한 이미지가 만들어낸 효과는 다음의 이미지로 연쇄되며, 우리가 이러한 연행 혹은 의례를 사회적 맥락으로 인식하는 것 또한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피규어들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이런 의도된 응답들은 예정된 환기, 다시 말해 예정된 목적지로 향하는 것이다. 예기-제거의 방식처럼 사건들의 흐름은 비유와 다른 비유로 대체되거나 치환되고 시간적 공간적 시퀸스를 반복-복제한다.

그런데, 저자가 짚고 넘어가자고 했던 연상의 문제는 이와 대조적으로 예기치 못한 환기를 실행해본 것이다. 이때 유사성에 기반한 비교 분석의 연결들이 인위적으로 보이는 것은 문화의 행위자들(멜라네시아나 파푸아뉴기니 사람들)이 사물들 간의 관계는 당연히 여기지만, 그 연결들로 내러티브를 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사성을 배경에 깔아두는 “인간 행위의 도덕적 기반”은 그들에게 차이를 만드는 구별짓기가 된다.’

스트래선은 예정된 환기와 예기치 못한 환기의 사례를 들어 다시금, 유비유추를 드러내는 것, 즉 유사성과 차이 간의 내적 관계를 드러내는 것으로 인류학자들 스스로가 자신의 분석을 완성할 수 있을 거라는 기만적인 생각을 또다시 파생시킬 수 있다고 주의를 준다. 그녀는 다시 앞부분의 논의에서처럼 한걸음 물러선 위치에서, 그렇게 후퇴한 헤이스(피리비교연구)의 위치에서 우리가 어떻게 그런 통찰을 전개할 수 있으며, 단일문화에 대한 일종의 배타적인 관심을 우리가 어떻게 피할 수 있을지 묻는다.

 

멜라네시아 사람들은 인격간의 움직임을 통해 그들 자신의 세계를 더 작게 분해한다.

시퀸스라는 개념은 분석자의 발견 여행에 적절한 이미지다. 우메다의 이다축제에서 펼쳐지는 사건의 시퀸스를 통해 우리는 완토아트 조형물들과 그닥 다르지 않은 형식을 마주한다. 확장되고 거대한 구조물에 휩싸인 피규어 말이다. 워브너는 여기서 가면이라는 형식에 주목하는데, 남자들은 가면의 교환행위를 통해 공간을 이동하고, 가면을 쓰고 축제기간 동안 마을에 집합했다 흩어지는 움직임을 자신의 한계를 규정함으로 간주한다. 또한 워브너는 우메다와 그 외 가까운 공동체의 지도를 그리면서 재미난 지점을 발견한다. 각각의 공동체는 자신을 공동체들로 이루어진 우주의 중심으로 보는데, 남자들은 자신의 중심에 자신을 놓지 않고 다른 남자들의 중심과 마주하는 곳에 놓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푼다 마을은 우메다의 퍼스펙티브에서 보면 우메다의 일종의 거울본이며, 각각은 다른 쪽에게 ‘또 다른 남자의 중심’이 된다. 그런데, 푼다는 중심의 축을 점하고 있으므로 우메다의 거울본이지만 한편으로는 고유의 특징을 가지므로 복사본은 아니다. 두 공동체가 동일한 기대효과를 위해 의례를 연행한다 할지라도, 딸과 어머니의 퍼스펙티브가 다르듯, 공동체는 각각 재중심화하고 반복- 복제 할 수 없다.

 

-사람들은 세계가 다른 사람들의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러한 세계를 바라보는 그들의 중심을 창출한다. 그렇게 저 중심들을 바라보는 시야는 보존된다. 공동체는 상호소통하지만 자신의 퍼스펙티브를 타자의 퍼스펙티브에 강요하지 않는다.... 커뮤니케이션은 효과적이며 회로는 작동한다고 볼수 있지만 메세지는 오직 부분적으로만 전달된다.-

 

엉성하게나마 우리들이 세미나에서 나누었던 쟁점들로 스트래선의 이야기를 다시 엮어보았다. 역시나 아직 나의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대부분이지만, 파생-반복-성장하는 글의 구조나 책의 형식을 따라가면서 그녀의 논의가 조금씩 조금씩 형태를 드러내는 것 같다. 바로 위에서 본 우메다나 푼다의 퍼스펙티브에 관한 부분은 지금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다. 책의 남은 부분을 마저 읽으면 책과 나의 부분적인 연결이 가능해질지 사뭇 궁금해진다.

모레 이 시간에는 보고푼 자누리샘과 물방울샘까지 모두 만날께요^^ 

 

 

 

 

댓글 8
  • 2023-10-05 21:10

    절단 자체가 창조성의 함의를 갖는 멜라네시아에서는 파편들을 이어 붙여서 만들어 내는 일종의 전체성 혹은 재조립되는 생명이라고까지 상상할 필요가 없다.

    멜라네시아인들은 문자 그대로 나무를 뿌리째 뽑아 물구나무를 세워 나무줄기가 항상 뿌리에 의해 지탱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절단해서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은 이미지 그 자체다,

    성장, 반전, 절단은 모두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를 대체하는 멜라네시아적 은유다. 결과적으로 다른 이미지에 끌려나온 한 이미지는 앞선 이미지를 대체하는데, 이 방식은 한 신체가 자신 속에 포함된 다른 신체들을 드러내기 위해 열리는 방식과 같다.

    끊어내는 행위는 분리된 것을 연결시킨다. 절개함으로써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서 가치재를 움직이게 할 수 있다.

    절단이 관계를 출현시키고, 응답을 이끌어내고..절단이 창조적인 행위인 곳에서, 절단은 인격의 내적인 역량과 관계의 외적인 힘을 진열한다.

    절단이라는 창조적인 행위는 더욱 중요해진다. 정보의 파열은 한 인격을 다른 인격의 확장된 부분으로 가시화한다. 절단/확장은 똑같이 효과적이며, 피규어들은 실질적으로 서로 동등하다.
    -부분적인 연결들 중에서-

    --->10/5 참과 토토로의 밥당번.
    절단과 확장의 볼레로(춤), 혹은 사이보그 같은 요리.

    봄날샘이 코다리 조림을 선물로 주고 주고 가셨다. 허걱. 오늘의 밥상 손님은 대략 20명! 코다리 양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 자체만으로 맛있겠지만 양이 부족하니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한다.

    밥당번 참/토는 여기에 시레기와 감자, 무우를 넣어 코다리조림을 코다리찜으로, 양은 세배로 확장시켰다.

    절단과 확장, 부분과 부분의 만남으로 인한 새로운 피규어가 만들어졌다.

    생각해보면 절단된다는 것은 상실이 아니다. 절단으로 만들어지는 공백은 우리에게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 즉 우리의 인공장치를 위한 공간을 제공해준다.
    우리는 흔히 완전함을 추구하기에 새 것, 결함이 없는 것, 매끄러운 것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저자의 말대로 절단과 공백, 깨짐과 부러짐, 망가짐, 부족함이 있을 때 다른 부분과의 결합과 연결이 필요해진다. 그럴 때 관계는 확장되고 또 사라진다.
    서로 다른 부분들은 각각 다른 퍼스펙티브, 각각 다른 성격를 가졌지만 연결될 수 있다.

    부족했던, 혹은 미흡했던 부분들, 절단된 부분들이 만나 새로운 코다리찜으로 변신했던 것처럼.

    그리고 <분해의 철학>에서 나폴리 사람들. 고장난 기계, 고장난 자동차의 부분들을 수리하면서 사물과 관계를 맺는다는 나폴리인들도 떠오른다. 그들이 수리한 자동차는 분명 후즐근 해 보이고 성능이 아주 뛰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부분적으로 고쳐지면서(나뭇가지가 삽입되거나, 다른 것에서 떼어 낸 부품들이 결합되면서) 새로운 인격을 부여받고, 새로운 피규어가 될것이다. 그것들을 나폴리의 사이보그라고 말할 수도 있을것이다.

    이렇게 갖다 붙여도 되나...

  • 2023-10-05 23:06

    올립니다

  • 2023-10-06 00:28

    일단 모르는 것이 어마무시하게 많지만
    마지막 페이지의 (p. 277)
    인격은 동일한 소재 혹은 실체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피규어와 그 확장물은 수학상의 '잔여'의 관념과 가까워진다.
    잔여는 공백의 가능성....
    스트래선이 남긴 잔여, 내 옆의 친구들이 남긴 잔여의 무한한 가능성?
    토토로쌤이 남긴 메모처럼 생각도 들고
    스트래선이 우리에게 알아서 무한한것을 생성하라는 짐을 던져준 것 같은 불친철한 느낌도 듭니다.
    여튼 잔여의 가능성에 대해 여러가지로 이야기해보았으면 합니다

  • 2023-10-06 01:32

    233. 나는 바스의 생성모델을 오크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실천에 대해 사고할 때 분명히 표현되는 부재와 상실의 생산성을 명시하는 것으로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유산이란 각각의 세대가 자기 앞 세대들에서 사라진 것들로부터 창출되었다는 것을 안다는 ‘지식’이다.

    235-237. 어쩌면 그들은 자신의 활동을 무지라는 거대한 배경에 마치 여기저기 박힌 수많은 먼지 입자로 간주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노력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 이 무지란 … 레퍼토리에서 떨어져 나간 것, 곧 지금의 남겨진 공백을 한때 완전히 메웠던 입자에 대한 무지다. 다수성과 균형잡힌 확장성의 감각을 보유하기 위해 그들은 남아있는 ‘작은’ 단위를 ‘더 작은’ 단위들로 쪼개야 한다. 그와 동시에 각기 다른 공동체에 속하는 선임 전문가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란 그들이 항상 그들 자신의 레퍼토리를 어딘가에서 가져와 보충할 수 있는 선택지를 갖고 있음을 뜻한다. 중요한 것은 공백이 보존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놓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이 아는 것을 다시 만들고 있다고 스스로 여긴다. 마치 그들은 그러한 부재를 강조함으로써 그들만의 창의력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 같다.
    그렇다면 이것은 예시화의 개념에 주석을 추가한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것 - 사회성, 가치, 관계성 - 은 제자리에 있다. 그러나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다시 만들어지고 또 새롭게 발명되어야 하는 것은 저 모든 것이 나타나기 위한 형식이다. (예. 생식력 - 신생아, 얌 창고, 사냥, 영적인 조형물을 짊어질 수 있는 강인함으로 나타날 수 있다) … ‘다수의’ 가능성들이 더이상 부재할 때, ‘하나의’ 형식은 그것이 입사식의 한 시퀀스든지 무엇이든지 간에 다수의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많은 것이 기록되고 저장된다. 오히려 공백으로 보존하는 것이 어려워 보인다. 부재와 상실이 점차 없어지면서, 그로부터 생기는 생산성, 창조성은 기대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닐지… 파편화가 그러한 것처럼 부재와 상실을 두려워하는 것 역시 서구적 불안이다. 부재가, 상실이 부정적으로 여겨지고 그로 인해 사회 전체에 문제가 생기고 말 것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난다면, 상상력을 되찾을 수 있을까.

  • 2023-10-06 07:47

    발제문이요

  • 2023-10-06 08:58

    민족지의 본질적인 허구는 사회적인 전체가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라고 손턴은 주장한다. 수많은 이론적인 논증에서 그 안의 부분들은 인격이든 제도든 상징이든 그 밖의 무엇이든지 간에 부분-전체의 관계들의 어휘로 표현된다. 여기에 그는 복잡성을 더한다. 즉 전체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전체가 갖는 본래의 의미에) 들어맞는 메레올로지적인 것이다. 마치 가지가 나무의 일부이듯이, 동일한 관계성이 각 부분에 성립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체에 대해서도 성립된다. 다른 하나는 집합포함의 법칙이다. 이 법칙하에서 분석적 범주가 집합의 요소들을 구성하게 된다. 그가 제시한 바로 이 두 가지는 수사학적 일관성을 위해 그리고 그에 따라 "전체에 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종종 융합된다. 신체와 나무 등의 이미지는 이 융합을 돕는다. 이것들은 집합포함의 법칙에 사실상 의거하는 분석적 구조에 자연스러움과 전체성 둘 다를 전달하기에 좋은 메레올로지적 은유다.텍스트의 부분들이 사회의 부분들과 혼동되는 것이다. ~~~~(중략)
    그러나 이 둘의 어떠한 경우에도 '부분'은 상상된 하나의 포괄적인 전체로부터 요소들을 '잘라낸다'는 바로 그 관념 속에서 창출된다. 첨언하면 잘라냄의 이미지는 개별의 부분들이 독립적으로 간주될 수 있는 한에서 그 개별의 부분들에 통일성 혹은 전체성이라는 상호연관의 감각을 덧붙이기도 한다. ~~~~~~ 절단이라는 현대적인 은유는 파멸이라는 더 깊은 암시에서 힘을 얻고 있다. 사실 파멸은 그 자체로 해체적, 인습타파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 내가 멜라네시아 사람들을 염두에 두는 것은 ~ 잘라냄의 이미지를 완전히 다른 비유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계는 인격들을 상호 분리함으로써 창출된다. 절단 자체가 창조성의 함의를 갖는 멜라네시아에서는 파편들을 이어 붙여서 만들어내는 일종의 전체성 혹은 재조립되는 생명아고라까지 상상할 필요가 없다. ~~~ 사회적인 인격으로서 그들이 분리되지 않았다면 (우선은) 상호단절되어야 한다. 교환이 일어나기 전에, 그들 각각 퍼스펙티브 간의 유비유추가 창조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기 전에, 단지 그을이 차지한 입장들에 의해 차이화되는 동종의 인격들로 보이기 전에 그들은 정말로 관계를 끊어야 한다. (p256~261)

    부분과 전체를 설명하는 중요한 부분인 것 같다. 하지만 해석이 잘 안된다. 맥락 찾기가 어렵습니다. 이 뿐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부분을 이해하면 부분과 전체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올려봅니다.

  • 2023-10-06 09:26

    부분적인 연결들 마지막 메모

    254. 더한 공백의 가능성이 무한한 잔여를 생성- 놀라운 발견!!
    -왜냐하면 그 개수는 세계를 볼 수 있는 위치에서보이는 사물의 개수 혹은 보고자 하는 목적들의 개수 더하기 일 과 같기 때문이다. 즉 퍼스펙티브를 통해 세계를 본다는 것 자체에서 생겨나는 퍼스펙티브가 고정적으로 그 퍼스펙티브에 부가된 다. 얼마나 많은 퍼스펙티브가 모아진다 해도 그것들 모두는 (잔여인 또 하나의) 퍼스펙티브를 창출한다. 이 형식적 산물이 무한성이다.-
    255. 역시 비교는 작위적!
    인류학연구에서 비교가 작위적 구축물임을 입증하고, 멜라네시아연구를 통해 극히 일부를 드러내는 방식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즉 작위적 통제방식으로도 책의 기술을 통제 하지 못하고, 잔여현상도 뜻대로 얻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피력.
    260. 접붙이기
    문화와 정체성은 수분과 이식을 통해 유지될수 있다- 영화 <애프터양>에서 안드로이드 오빠 양이 여동생에게 ‘접붙이기를 통해’ 입양을 은유적으로 설명하고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여동생과 대화하는 대목이 나온다.
    270~275
    불안을 야기하는 <과잉, 부족, 불균형, 연결의 부분적이라는 >감각들이 오히려 지각자체를 확장시킬수 있다는 부분은 ‘불안이나 상실의 만질수 없는 감각’을 인식할때 ‘무언가를 만질수 있는 감각’으로 구현하고자하는 창조 행위를 설명하기에 적합한듯하다. 존버거는 ‘그리는 행위’를 ‘보이지 않는 것의 복원’이라고 말한다. 공백이 인공기관장치를 위한 공간을 제공하고, ()감각들이 지각자체를 확장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면, 내가 ’상실이나 사라짐에 대한 애틋함의 감각‘을 실현시키고자 ’손의 구체적 감각‘을 이용하는 것과도 이어진다. 완토아트 피규어가 인격을 확장시키듯, 손(붓, 연필, 종이, 아이패드…) 의 이용으로 구체화된 사물들은 나의 확장물이 되고, 그것이 이동은 그들의 장소-장치와 같은 효과, 즉 관계를 통한 힘의 이동이나 확장이 될수 있겠다. -확장물의 선물이나 판매, 전시 - 도구의 재사용이 역량을 새롭게 실현시킨다는 의미도 파지의 다양한 손들의 실천물들( 소창 생산물, 비누등 )은 , 곧 인공기관적 확장을 만들고 그것을 취하는 관계로 행위자들이 행동할수 있게 만드는 지점이 되는것을 설명할수 있다. 이것도 다양한 피규어나 요소로 이뤄진 하나의 회로로 작용할수 있지 않나?

  • 2023-10-06 09:46

    뚜버기
    <노매드 랜드>에서 캠핑용으로 개조한 밴으로 광대한 미대륙을 유랑하고 살아가는 주인공은 왜 정착하기를 거부(두려워) 하는 것일까. 스트래선에 따르면 서구의 사고에서는 장소는 고정되어 있고 사람들이 이동하면서 장소의 정체성을 실어나른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역시 비슷한 것 같다. 밀양출신, 서울사람…등등. 그렇기에 장소에서 이동하는 것이 퍼스펙티브를 바꾸는 것이라 생각한다. 많은 현대인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노매드>의 삶을 산다. 그결과 현대인들에게는 인격과 문화가 파편화된다는 감각이 따라붙는다.
    멜라네시아에서는 사물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걸어다니는 하나의 장소가 되어 사람들을 실어나른다고 생각한다. 조개목걸이는 구체적인 물질적 형식으로서 사람의 인격을 운반하고 확장시켜준다고 여긴다. 가치재들은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정체성을 흐르게 만드는 회로 역할을 하는 사이보그들이다.
    “멜라네시아의 사이보그와 해러웨이의 반인간/반기계 장치 간의 차이는 멜라네시아의 사이보그 요소들이 같은 소재에서 개념적으로 ‘잘려나간다’는 점에 있다.”

    “절단이라는 현대적인 은유는 파멸이라는 더 깊은 암시에서 힘을 얻고 있다. 사실 파열은 그 자체로 해체적 인습타파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에서 창조성이란 원래 처소에서 비정하게 잘려나간 부분을 재조합하는 일을 의미한다. 문화의 정체성은 조상의 땅에 뿌리내릴 필요 없이 수분과 이식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멜라네시아의 사유는 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전통의 뿌리는 절단되었다가 다시 이어지고, 집합적 상징는 외부의 영향을 받아 전유된다”
    차이는 절단 자체가 창조성을 함의하는 것으로 전체를 상정하여 재조립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절단은 결코 파멸적이지 않으며 상호성과 주체성에 의한 생성이 탄생할 열린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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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 | 2023.11.06 | 조회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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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3> '루쉰, 혁명의 문학’ 에세이 발표 후기 (3)
블랙커피 | 2023.11.03 | 조회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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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8
세계 끝의 버섯 -1차 메모 (4)
낮달 | 2023.11.03 | 조회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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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7
<인디오의 변덕스러운 혼> 3차시 후기
뚜버기 | 2023.11.02 | 조회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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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오의 변덕스러운 혼> 3차시 메모 (5)
띠우 | 2023.10.27 | 조회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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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5
시즌3 <루쉰, 혁명의 문학> 에세이에 초대합니다 (7)
반장 | 2023.10.26 | 조회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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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오의 변덕스런 혼 두 번째 시간 후기
달팽이 | 2023.10.26 | 조회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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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읽기, 들풀 후반부 후기 (11)
봉옥이 | 2023.10.21 | 조회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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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오의 변덕스러운 혼> 2회차 질문들 (5)
작은물방울 | 2023.10.20 | 조회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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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2 <인디오의 변덕스러운 혼> 1회차 후기
작은물방울 | 2023.10.19 | 조회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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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적 연결들] 마지막 후기-연결되는 부분들 (2)
관리쟈 | 2023.10.16 | 조회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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