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界 : 이 인륜의 나락에서>

겨울
2024-04-04 22:45
227

<世界> 2024년 1월호 특집1

 
이 인륜의 나락에서
가자의 제노사이드
 
오카 마리 (와세다 대학 문학학술원 교수)
 
 

     1

 

  지금 가자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유엔 인권고등판무관 사무소의 크레이그 모키버를 비롯한 전문가들이 '교과서에 실리는 전형적인 예’라고 한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제노사이드임에 틀림없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알려준 것은 21세기에 이르러서 제노사이드가 일어난다는 것만이 아니다. 오늘의 그것은 과거와 같이 국제사회의 감시의 눈을 피해 외딴 곳의 강제수용소에서 실행되고 마침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주시하는 가운데 실행될 뿐만 아니라 주모자는 제노사이드의 의도를 숨기려고도 하지 않고 (제노사이드가 인정되기 어려운 것은 의도의 증명이라고 함), 정부고관이 차례차례 그것을 공언하면서도 여전히 수행 가능하며, 국제사회를 영도하는, 민주주의를 자칭하는 “서방" 세계의 정부들이 그 무법행위를 비난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이를 지지하고 응원하기까지 한다는 사실이다.

  공격 53일째인 23년 11월 28일까지 가자지구의 사망자는 1만 5000명 이상, 그 중 어린이가 6150명 (가자지구 보건부 발표. 14세 이하의 어린이가 총인구의 40퍼센트를 차지하는 가자지구에서 무차별 폭격을 하면, 어린이가 필연적으로 사상자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 2014년 여름 51일간의 전쟁에서 사망자는 2310명이었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이번 공격의 격렬함을 알 수 있다. 라이프 라인 공급이 끊기면서,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은 사람들도 있다. 11월 24일에 시작된 휴전 기간 동안 물과 식량이 공급되겠지만 그 후 또 무차별 공격이 재개된다면, 그러한 공급은 단지 사형 집행 유예에 불과하다. 그것이 인도주의라면, 그런 인도주의란 제노사이드의 공범자일 뿐이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말한 것처럼 이것은 더 이상 인도적 위기가 아니다. 휴머니티 자체의 위기이다.

  워싱턴DC에서 11월 4일 토요일, 즉각적인 정전을 호소하는 시위가 개최되어 미국 전역에서 달려온 30만 명이 팔레스타인국기를 들고 수도의 큰길을 행진했다. 집회에서는 래퍼 맥클모어가 등단해서 “복잡한 문제니까 모르는 녀석은 잠자코 있으라는 말을 듣...지만, 나도 이것만은 알 수 있다. 이건 제노사이드다!"라며 “휴머니티에는 적도 아군도 없다(There is no side in humanity)”라고 호소하여 만장의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이슬람의 선지자를 모욕하고 무슬림이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신앙을 모독하는 것을 '표현의 자유'라고 옹호해마지않는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의 공격을‘제노사이드’라고 이름 붙이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즉각적인 휴전과 팔레스타인의 자유를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야말로 테러선동이며 반유대주의라 규탄한다.

  미국에서는 팔레스타인과의 연대를 주장하는 것은 사상적 탄압의 대상이다. 독일 연방의회에는 외국인이 국적을 취득할 때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지지한다”라는 조항을 더하는 법안이 제출됐다. 이스라엘에서는 팔레스타인계 시민들이 SNS에 글을 올리는 것을 감시하고, ‘테러 선동’ 용의로 속속 체포하고 있다. 가자에 대한 첫 공격(2008~9년) 때 공격 개시로부터 1주일 만에 텔아비브에서 12,000명이 참가하는 반전 데모가 조직되었는데, 지금은 모두 박해가 두려워서 유대계 시민들도 침묵하고 있다.

  『만들어진 유대인』의 저자 슐로모 산드는 2010년 일본 방문 때의 강연에서 나치가 유대인을 자신들과는 다른 인종(샘 인종)으로 생각한 것이 당시 반유대주의로 비판받았었는데, 지금은 (시오니스트인) 유대인 자신이 히틀러와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면서, “결국 승리한 것은 히틀러가 아닌가?”라고 청중에게 물었다. 희생자가 가해자와 같은 주장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실로 78년 전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나치가 아닌가 하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독일이 나치즘에 봉사하는 파시즘국가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파시즘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던 자유와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미국과 유럽 나라들이 21세기인 지금에 와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스스로 내던지고 파시즘국가로 변하여 시오니즘에 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21세기의 반(反)샘주의이다(샘 인종이란 것이 만일 존재한다면 아랍인도 ‘샘 인종’이다). 80년 전, 그 반샘주의에 따라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량학살에 소극적 혹은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미국과 유럽 나라들은, 지금 또 팔레스타인인(이라는 샘인)에 대한 제노사이드에(미합중국의 경우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78년간, 이들 나라들이 대표하는 ‘국제사회’란 것이 내건 인권과 국제법과 평화 등등이 모두 자기잇속 차리기에 불과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시민이 대피한 학교와 병원을 폭격한다면, 혹은 중국이 신장위구르자치구를 봉쇄하고 물과 식량과 연료를 끊는다면 '국제사회'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국제형사재판소는 곧장 현지에 들어가 조사를 개시하고 푸틴과 시진핑을 전쟁범죄자라고 선언할 것이다.

  가자의 제노사이드가 언제, 어떻게 결말이 날지는 전혀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1948년의 나크바(팔레스타인에서의 '유대국가' 창설을 실현하기 위해 실행된 시오니즘에 의한 인종청소 폭력)로 팔레스타인인 75만 명이 집에서, 고향에서,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나 난민이 되고, 그중 19만 명이 당시 인구 8만의 가자지구로 와서 가자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난민캠프로 되었다는 것이며, 그 가자지구가 2007년에 시작된 완전봉쇄에 의해 '세계 최대의 야외감옥'으로 화했고, 그리고 지금, 이 대량살육 공격에 의해 '21세기의 멸종수용소', 나아가서는 하나의 거대한 집단 묘지, 특히 아이들의 집단 묘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파괴된 가자의 대지에는서양의 근대가 내걸었던 '보편주의'의 잔해가 나뒹굴고 있다.

 

The remains of Al-Shifa hospital in Gaza after an Israeli offensive, seen on April 1, 2024 - AFP

이스라엘군의 대규모 공습으로 가자 지구 최대규모 알시파 병원 주변은 그 자체가 ‘무덤’으로 변했다. April 1, 2024 - AFP

 

     2

 

  20년 전, 제2차 인티파다의 한가운데에 있던 팔레스타인에서는 서안지구와 가자지구 가릴 것 없이 날마다 이스라엘점령군의 공격에 의해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사람에 의한 이스라엘 영내에서의 자살공격도 빈발했다. 당시, 그것을 전하는 일본의 주류언론의 보도는 판에 박은 듯이 '테러와 보복의 연쇄가 이어지고 있다'라든가 "폭력의 연쇄가 이어지고 있다'라는 정형구로 시작됐었다. '테러와 보복의 연쇄'의 '테러'가 의미하는 것은 항상 팔레스타인 측의 공격이며, 이스라엘의 공격은 그에 대한 '보복'이었다. '테러'에 앞서서 점령군에 의한 공격이 있다는 것과 점령하의 팔레스타인인이 죽임당하고 있다는 현실은 보도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거듭된 공격으로 가족과 친구와 동포가 죽임당하는 것을 참다 참다 견딜 수 없게 된 청년이 자신의 몸에 다이너마이트를 휘감고 이스라엘 시가지에서 시민을 끌어들여 자폭을 하면, 사진과 함께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인 자폭테러'라는 헤드라인이 일면에 크게 뜨고, 자폭을 기다렸다는 듯이 이스라엘군의 전차가 자치구로 침공하여 청년의 집뿐만 아니라 거주 지역 일대를 포격했다(국제법으로 금지된 집단징벌이다).

  미래가 있을 20대의 청년이 자신의 생명을 내던지며 결행하는 최소한의 폭력은, 최신예 무기로 무장한 세계 최강의 군대 중 하나가 펼치는 압도적으로 비대칭적인 폭력과 동일시된다.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는 폭력의 악순환에서 늘 팔레스타인인에 의한 '테러'가 그 악순환의 원인처럼 매도된다, 팔레스타인 청년의 '테러'는 도대체 왜 생기는가 하는 질문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사안의 본질, 문제의 근원을 은폐하는 것은 그 자체가 언어의 폭력이다.

  왜 팔레스타인인의 '테러'는 일어날까. 대답은 단순하다. 점령이다. 이스라엘에 의한 점령 폭력이 있기 때문에 점령에 대항하는 절망적인 저항으로 자폭하는 청년들이 있다. 점령이 없으면 자폭도 없다.

  가자지구에 대한 보도도 마찬가지다. 2023년 10월 7일 훨씬 이전부터 상업 언론이 가자지구를 언급할 때는 반드시 늘 그렇듯이 “이슬람 원리주의 조직 하마스가 실효 지배하는 팔레스타인 자치구 가자”라고 시작한다. 하마스란 무엇이며, 이스라엘은 원래 어떤 국가인가 하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을 둘러싼 문제의 근간을 전하는 대신 이러한 정형구를 반복함으로써 10월 7일 이후 이스라엘이 하마스를 IS(이슬람 국가)에 빗대어, 그들의 공격이 이러한 무법자 집단에 대항하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레토릭을 일본 시민들이 받아들이는 사고의 토양을 일구어 왔다.

  주류 언론의 보도는 이스라엘이 유대인을 대표한다고 하고, 그 다음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의 희생자인 유대인의 나라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시오니스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말에 불과하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시오니즘이 탄생했을 때부터 시오니즘은 유대교를 부정한다 하여 정통파 유대교도로부터 비판받아 왔다. 미국에서는 정통파 유대교도와 '평화를 위한 유대인의 목소리' 등 많은 반(反)시오니스트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시오니즘의 자원으로 이용하는 이스라엘 시오니스트들의 행태에 대해 전심전력으로 항의하고 있다. 언론이 '유대인'에 대해 보도할 때, 그것이 말하고 있는 것은 '유대인'이 아니라 '시오니즘'의 견해이다.

  마찬가지로, 하마스는 IS와 같은 테러 집단이고, 따라서 이스라엘의 공격은 '자위(自衛)전쟁'이라고 하는 것도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원래부터 팔레스타인에서 살던 팔레스타인인의 70% 이상을 인종청소라는 폭력으로 몰아내고 건국된 것이 이스라엘이었으며, 그 인종청소 폭력을 오늘날까지도 지속하고 있고, 지금은 그 의도를 숨기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75년 전에 완수하지 못한 인종청소를 완수하겠다고 벌이고 있는 것이 바로 지금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제노사이드다. 그들이 이러한 레토릭으로 숨기고자 하는 것은 하마스를 비롯한 가자지구 전투원들의 기습공격이, 이 역사적으로 부정한 시오니즘의 폭력에 대한, 저항폭력이라는 역사적 사실이다(일본의 언론은 최근 6년, 하마스에 관해서 앞서 언급한 정형구를 계속해서 즐겨 사용하였으며, 지금은 이스라엘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 놓음으로써 가자지구 제노사이드의 정당화에 기여하고 있다. 요한 갈퉁이 말하는 '문화적 폭력'이다).

 

 

     3

 

  ‘저항의 폭력’은 ‘대항폭력’이다. 대항폭력에는 그것을 발생시키는 선행 폭력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갑자기 대항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독립 전쟁하의 알제(Alger 알제리의 수도) 거리의 카페에서 FLN(국민해방전선)에 의한 폭탄테러가 일어나는 것은, 백여 년에 이르는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지 지배라는 폭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1919년 3.1운동이 한창일 때 조선 제암리에서 조선 민중이 관헌을 습격했던 것은 청일전쟁 이후 일본에 의한 조선 지배와 집단 학살이라는 압도적인 폭력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 이번 호의 고마고메 다케시(駒込武)의 논문(<식민지주의자는 누구인가>)에서 상술하듯이, 1930년, 대만의 선주민인 시디그(Seediq 고산족)가 일본 관헌과 민간인을 습격, 학살한 것은 30년이 넘는 일본의 대만 식민지지배의 폭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에 의한 식민지지배라는 선행 폭력이 없었다면, 제암리나 우서(霧社)사건(1930년 대만 우서에서 일어난 고산족의 항일 봉기)의 폭력도 없었다. 이것은 우리가 ‘역사’에서 배워야 할 진리다. 이스라엘에 의한 75년간의 멈추지 않는 인종청소 폭력이 없었다면, 점령이 없었다면, 아파르트헤이트가 없었다면, 하마스도, ‘10월 7일’도 없다.

  또 하나 우리가 기억에 새겨야 할 역사적 진리가 있다. 피식민지의 저항폭력은 식민지 국가에 의한 도를 넘는 처참한 폭력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식민지 지배라는 인종차별에 기초한 폭력에 대항하는 저항폭력을 식민지 국가는 문명사회에 대한 야만스러운 원주민의 테러라고 번역하고, 거기에 피식민자에 대한 인종차별까지 맞물려, 처참한 보복을 ‘정의의 징벌’이라는 이름으로 피식민자들에게 가한다. 근대 일본이 반복해서 식민지에서 자행했던 일이다.

  하마스 주도로 가자지구 전투원들이 10월 7일 월경(越境) 기습공격을 한 것을, 그것이 일어난 역사적 맥락—팔레스타인에서의 ‘유대 국가’ 건설이 정착민(식민지개척을 하러 온 사람들) 식민주의에 의한 침략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생략하고 단지 ‘하마스 테러’라고 한마디로 요약한다. 그래서 시민들 안에 아직껏 남아 있는 IS의 만행에 대한 기억을 이용해서, ‘하마스’는 이스라엘 섬멸을 내건 이슬람주의 테러 조직이고, 거기에 대해 이스라엘이 자위전쟁을 개시했다는 이스라엘의 주장을 그대로 옮긴다. 일본인 국제정치학자나 뉴스 앵커가 텔레비전에서 그런 말을 반복하고, 일본 시민들이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이스라엘의 제노사이드를 시인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국 범죄의 역사 망각이라는 점에서도 범죄다(‘망각’하려면 일단은 그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데, 과연 우리는 한 번이라도, 일본이 저질렀던 범죄를 확실히 기억한 적이 있었던가).

  ‘하마스’로 통칭되는 그들, 그날 몇 시간 후에 맞이할 죽음을 각오하고 16년에 걸쳐서 갇혀 있던 가자지구의 담장을 돌파하여, 75년 전 조부모 혹은 증조부모들이 집단 학살과 강간 같은 폭력에 의해 추방되었던 땅을 향해 진군했던 가자지구의 3000명의 전사들은, 하마스의 전투원만이 아니다. 이슬람 성전과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내건 PFLP(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의 전투원들도 있었다. 이들은 요르단 서안지구의 제닌(Jenin)이나 나블루스(Nablus)에서 무장 궐기한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점령으로부터의 민족해방, 독립을 요구하며 총을 든 수만 명의 젊은이들 중 일부이다.

  이것은 그냥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이 아니다. 이것은, 주민을 인종청소해서 만든 정착민의 식민지 국가와, 그 지배의 멍에로부터의 해방과 독립을 목표로 하는 인간들의 전쟁이다.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 모두가 ‘하마스’는 아니라며 이스라엘의 무차별 공격을 비판하는 식자(識者)도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며 그 섬멸을 기도하는 ‘하마스’란, 단지 하나의 정치 당파가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식민지 국가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로부터 독립을 희망하는 모든 팔레스타인인을 말한다(식민지 조선에서 친일파 조선인 이외는 모든 ‘불령선인’ 예비군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에게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팔레스타인인은 모두 유대인 지상주의의 아파르트헤이트 해체를 바란다는 점에서 ‘테러리스트’다. 앞서 서술한 51일간 전쟁에서, 아옐레트 샤케드(Ayelet Shaked) 이스라엘 법무장관은 팔레스타인 여성들은 ‘그 뱃속에 살무사를 키우고 있다’라며 여성과 아이들의 살육을 정당화했다). 식민지 국가 일본이 식민지 지배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가차 없이 공격해 섬멸한 것과 마찬가지로, 식민지 권력이 식민지 국가 유지를 위해 드러냈던 폭력이 지금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다(서안에서는 이 사이에 226명이 살해되었고, 이스라엘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팔레스타인 수인(囚人)들도, 무서운 학대에 노출되어 있다).

  만약 언론이 가자지구를 언급할 때마다 “75년 전에 '유대 국가' 건국에 의해 고향에서 폭력적으로 쫓겨난 팔레스타인 난민이 주민의 70프로를 차지하는 가자지구에서”라든가 “이스라엘의 위법적인 봉쇄로 주민이 16년 이상 갇혀 있던 가자지구에서”라든가 “이스라엘의 봉쇄에 의해 산업기반이 파괴되고 230만 명의 주민 중 과반수가 빈곤선 이하의 생활로 허덕이는 가자지구에서”라고 항상 말했더라면.

  이스라엘의 지배하에 있는 팔레스타인의 영토가 실은 유대인 지상주의 아파르트헤이트나 다름없다는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 HRW)나 국제 앰네스티나 유엔 전문가들의 고발을 일찍 보도했더라면(남아프리카 아파르트헤이트와 투쟁한 아프리카민족회의 의장은 이스라엘의 점령이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보다 훨씬 가혹하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 아파르트헤이트 아래에서, 이스라엘 영내의 팔레스타인계 시민이 얼마나 박해받고 있으며 팔레스타인 자치구란 실은 이름뿐이고 자치정부가 이스라엘의 어용기관이 되어 어떻게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주민들을 이스라엘을 대신해 탄압하고 있는지, 그리고 서안지구에서 유대인 정착민이 군대의 보호를 받으면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에 대해 어떤 폭력행위와 범죄행위를 일삼고 있는지, 또한 가자지구에서 지난 16년간 봉쇄로 인해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질식 상태에 놓여 왔는지, 2012년에 유엔이 가자지구는 2020년에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게 될 것이라고 발표한 그 가자지구의 봉쇄 폭력의 실태가 어떠한가(2014년 무렵부터 자살을 최대의 금기로 여기는 이슬람 사회인 가자지구에서 자살자가 급증하고 있다). 그러한 일을 날마다 보도하고 국제앰네스티 사무총장이 세계에는 이스라엘의 아파르트헤이트를 폐지하여 없앨 의무가 있다고 호소하는 그 의무를, 저널리즘으로서 완수하려고 노력했다면.

  대규모 군사 공격에 의한 대량 파괴나 살상이 발생했을 때에만 가자에 주목하고 정전(停戰)이 되면 잊어버리는 대신, 이스라엘의 인종청소, 점령, 봉쇄 그리고 아파르트헤이트라는 폭력의 여러 면면을 평상시에 상세하게 보도했더라면 (봉쇄하의 가자지구에서 혹은 점령하의 예루살렘이나 서안지구에서, 현재진행형의 인종청소—일란 파페가 말하는 ‘점진적인 제노사이드’의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평상시’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리고 하마스란 그러한 이스라엘 점령의 압제로부터의 해방과 독립을 요구하는 민족해방운동이라고 보도했더라면, 10월 7일의 월경 기습공격이 이스라엘 군기지 습격만이 아니라, 사실 그러했듯이 민간인 살상과 납치라는 국제법 위반을 수반하는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AP통신의 팩트 체크는 가자 전투원에 의한 3건의 민간인 살해를 확인하고 있다), 시민의 인식 방식은 지금과 상당히 달랐을 것이다(사건으로부터 50일 후인 현재 판명된 것은, 1400명에서 1200명으로 하향 수정된 이스라엘 측의 사망자에는 이스라엘 치안부대에 의해 살해된 자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는 것, 팔레스타인 측에 의한 강간이 있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하마스가 집단학살을 전과(戰果)로 과시하는 동영상은 이스라엘 측이 작성하여 확산시켰다는 것 등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의한 군사 공격이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저항인 이상, 민간인 집단 살육이나 강간 등 적극적으로 국제 인도법을 침범하고 더군다나 세상에 그것을 과시하는 것은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들 자신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다).

  지금, 가자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그것은 식민지 지배라는 역사적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하는 피식민자들의 저항과, 그것에 대해 식민지 국가가 그 본성을 숨기려 하지도 않고 기어코 섬멸하겠다고 대응하는 노골적인 폭력 사이의 식민지 전쟁이다. 이 폭력의 기점은 2023년 10월 7일도, 완전봉쇄가 시작된 2007년 7월도 아니고, 가자 점령이 시작된 1967년 6월도, 나크바가 일어난 1948년도 아니다. 우리는 이를 근대 500년 서양 제국(帝國)에 의한 식민지 지배라는 역사적 관점에서 고찰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왜 미국이, 글로벌 노스의 ‘서방’ 나라들이, 그리고 일본이 이스라엘을 응원하고 있는지, 왜 일본의 상업언론이 팔레스타인 점령의 실태를 보도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 '국제사회(International community)’란, 단 한 번도 식민주의를 반성한 적 없고 사상적으로도 탈식민지화를 완수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국가의 저류로서 식민주의와 인종주의를 지속하는 이들 식민지 국가들의 카르텔이며, 그것이 중동의 동료들을 지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제사회에 있어서의 인권이나 국제법의 이중기준을 비판하는 것조차 순진해 보인다. 이들 식민지 국가들은 입으로는 보편적 인권과 자유와 문명을 내세우지만 근대 역사 속에서 실천해온 것은 애초에 그러한 보편적 이념과는 정반대인 폭력—보편적 인권은 서양만의 것으로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이중기준—이었으므로.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식민지 전쟁이다. 식민주의는 끝나지 않았다. 가자지구의 어린이 사망자 6,150명(2023년 11월 28일 현재)이라는 수에 말문이 막히면서, 우리는 맹세해야 한다. 이것을 끝내겠다고.

 

 

오카 마리(岡 真理)

와세다대학 문학학술원 교수. 전문 분야는 현대아랍문학・팔레스타인 문제이다. 저서에는 『아랍, 기도로서의 문학』, 『가자에 지하철이 달리는 날』 외. 역서로 타하르 벤 젤룬의 『불에 의하여』가 있다.

댓글 1
  • 2024-04-09 14:47

    <세계>에는 이런 글이 실리는군요! 번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은 제노사이드다.. 식민주의는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이것을 끝내겠다고 맹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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