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개의 고원> 4장 네번째 시간 후기

2022-09-19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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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개의 고원> 4장 네 번째 시간 후기

 

이번 후기는 읽은 부분을 제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요약해 보는 것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IV.언어는 다수어나 표준어라는 조건하에서만 과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으리라.

(P195~213)

언어가 다변적인 실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언어학자들은 과학적 연구를 가능하게 하기위해 등질적인 체계를 다듬어내야겠다는 억지를 부린다. 그러면서 랑그를 대상을 연구하는 과학적 모델은 ‘랑그를 동질화하고 중앙집중화하고 표준화하고 다수적이거나 지배적인 권력의 언어가 되게 하는’ 정치적 모델, 바로 그것이다.

한 랑그의 통일성은 무엇보다 정치적이다. 모국어란 없으며 단지 권력을 장악한 지배언어가 있을 뿐이다.

두 종류의 언어, 고급어와 저급, 다수어와 소수어는 구분해야하는가?

고급어-다수어는 상수의 권력에 의해 정의되며. 저급어-소수어는 변주 역량에 의해 정의된다.

우리는 단순히 다수어의 통일성과 방언들의 다양성을 대립시킬 일이 아니라, 각각의 방언이 변천과 변주의 지대에 의해 변용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방언에 고유한 변주 지대에 의해 각각의 소수어가 변용되는 것이다. 사실 방언이라는 개념 자체는 불확실하며 어떤 다수어에 대해 성립하는지에 따라 상대적이게 된다, 예컨대 퀘벡어는 표준 불어에 대해서만 평가되는 것이 아니고 표준 영어에서도 별의별 음성학적 통사적 요소들을 차용하여 변주 한다. 다시 말해 방언 개념이 소수어 개념을 해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소수어가 방언을 방언 나름의 변주 가능성에 따라 정의 해주는 것이다.

다수어나 소수어는 서로에게 극복해야할 대상이 아니다. 하나의 언어가 다수어의 성격을 더 많이 가질수록 그 언어는 그 자신을 “소수어”로 변환시키는 연속적 변주의 영향을 더 많이 받게 된다. 만약, 영국 영어나 미국 영어 같은 언어가 세계적으로 다수어가 되면 그 언어는 반드시 세계의 모든 소수파의 영향을 받게 되며 매우 다양한 변주 절차를 겪게 될 것이다,

언어는 반드시 자기 내부에, 자기 내부에서 생겨난, 언어 내적인 소수파를 갖고 있다. 따라서 두 종류의 언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언어를 다루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사람들은 변수들을 다룰 때, 때로는 변수들에서 상수들과 상수적 관계들을 뽑아내기도 하고 때로는 변수들을 연속적 변주 상태로 만들기도 한다. 경제학에서든 언어학에서든 보편자란 있을 수 없다, 보편자는 항상 변수들에 기반한 보편자나 획일화로부터 귀결된다. 상수는 변수에 대립 되지 않는다. 상수는 변수를 연속적 변주로 다루는 방식과는 또 다르게 다루는 방식이다, 이른바 강제적 규칙이라는 것이 변수를 상수로 다루는 방식에 해당되는 반면 임의 선택적 규칙은 변주의 연속체를 구성하는 일에 관련된다. 선형적이고 절편적인 요소들의 특성이 비변별적 특질들로 하여금 랑그의 모든 요소들을 연속적 변주 상태 만들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식으로 음조는 음소에 작용하고 억양은 형태소에 작용하고 어조는 구문에 작용한다, 따라서 비변절적인 특징은 이차적인 특질이 아니라 언어를 다루는 또 다른 방식이며, 더 이상 기성의 범주들을 거치지 않는다.

“다수”와 “소수”는 두 개의 언어가 아니라 언어의 두 가지 사용 또는 두 가지 기능을 규정하는 방식이다.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체코어는 독일어에 비하면 당연히 소수어이다. 하지만 프라하의 독일어는 빈이나 베를린의 독일어에 비하면 이미 잠재적 소수어를 창조했다. 독일어로 글을 썼던 체코의 유대인 카프카는 독일어를 소수어로 창조했다. 문제는 다수어와 소수어를 구분하는 문제가 아니라 되기(=생성)의 문제다. 방언이나 사투리로 재영토화되는 것이 아니라 다수어를 탈영토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소수어는 다수어와 관련해 존재하는 것이며 각자는 소수어, 방언, 또는 나만의 말을 발견해야만 하며, 거기에서 출발해야 자기 자신의 다수어를 소수어로 만들 수 있다, 이것이 “소수파”라 불리우는 작가들의 힘이다. 자기자신의 언어를 반드시 정복하기, 말하자면 다수어 사용에서 반드시 절제에 도달하기, 그래서 언어를 연속적 변주상태로 만들기. 우리가 2개어 병용자나 다국어 병용자가 되는 것은 바로 자기자신의 언어 안에서이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소수어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다수어를 정복하기. 소수어를 사용해 다수어를 자아내기. 소수파 작가는 자기 자신의 언어 속에 있는 이방인이다.

사실 소수파라는 개념은 매우 복합적이다. 소수파는 음악, 문학, 언어학 뿐 아니라 법률, 정치도 참조한다.

소수파와 다수파는 단순히 양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평가하는 기준인, 표현이나 내용의 상수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상수적이고 등질적인 체계로서의 다수적인 것과 하위-체계로서의 소수파, 잠재적이고 창조되었고 창조적인 생성으로서의 소수적인 것을 구분해야만 한다, 새로운 상수를 수립하는 와중에서도 다수파를 획득하는 일은 문제가 아니며 다수파 되기란 없다, 다수파는 생성이 아니며 생성에는 오직 소수파 되기만이 있다. 여성은 그 수와는 관계없이 상태 또는 부분 집합으로 정의 될수 있는 소수파이다. 여성이 인간 전체에서 여성-되기를 창조할수 있는 것은 어떤 생성릏 가능케 할 때 뿐이다. 다시 말해 여성은 이 생성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이 생성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소수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소수어는 단순히 방언이나 개인어 같은 하위-언어가 아니라, 다수어의 모든 차원들과 요소들이 소수화 되게 하는 작인이다. 우리는 소수어들, 다수어, 다수어의 소수화-되기를 구분할 것이다, 물론 소수성은 객관적으로 정의 될 수 있는 상태이지만, 소수성이 가치 있는 생성의 씨앗, 생성의 결정체가 되는 것은 중간치나 다수성의 통제 불가능한 운동과 탈영토화를 열어 놓을 때 뿐이다. 소수 의식의 보편적 형상은 만인이 생성에 들어가는 것이며, 창조란 바로 이 생성이다. 그러나 이 생성은 우리가 다수파가 됨으로써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이 형상은 연속적 변주 인데, 그것은 넘치거나 모자람으로써 다수적 표준의 표상적 문턱을 끊임없이 넘나드는 진폭과 같다. 확실히 방언 같은 소수어를 사용하거나 게토나 지역주의를 만든다고 해서 우리가 혁명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소수적 요소들을 이용하고 연결접속시키고 결합함으로써 우리는 자율적이고 돌발적인 특수한 생성을 발명하게 된다.

다수파 양식(=長調)과 소수파 양식(=短調)은 언어를 다루는 두가지 방식인데, 전자는 언어에서 상수들을 뽑아내는 방식이고, 후자는 언어를 연속적 변주로 만드는 방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명령어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명령어는 언표행위의 변수로서 랑그의 조건에 영향을 미치며 요소들을 이렇게 저렇게 사용하는 방식을 규정하니, 명령어야말로 변수의 두가지 방향과 변수를 다루는 두가지 방식을 설명 할수 있는 유일한 “메타언어“인 것이다.

명령어는 사형선고이다. “이렇게 해라”, “그러지마” 라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내리는 명령은 아들이 자신의 인격의 한 지점에서 체험하는 작은 사형 선고와 분리 될 수 없다. 한편 명령어는 자신과 분리 할수 없는 어떤 다른 것이기도 하다. 그 것은 놀람의 외침이나 도주 신호 같은 것이다. 도주는 복합적 배치물속에 있는 명령어의 다른 얼굴, 명령어의 다른 성분으로서 명령어에 포함되어 있다. 명령어는 죽음과 도주, 두가지 음조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 양상, 언표의 표현된 것으로서의 죽음을 살펴보자. 죽음은 죽음의 언표행위 즉 선고에 용접시킨 순수행위요 순수변형이다. 죽음은 몸체들과 몸체들의 형식들과 상태들을 분리시키는 건널수 없는 관념적 경계로 존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의 주체가 형식 또는 상태를 바꾸기 위해 거쳐야하는 통과의례적이고 상징적인 조건으로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확고부동하고 엄숙한 <주인>에 기대는 체제이다. 이 체제는 매 순간 상수들을 통해 법을 제정하며, 변형을 금지하거나 엄격히 제한하고, 형상들에 안정되고 분명한 윤곽을 정해주며, 형식들을 둘씩 대립시키고, 한 형식에서 다른 형식으로 이행 할 때는 주체에게 죽음을 강요한다, 한 몸체가 다른 몸체와 분리되고 구별되는 것은 항상 어떤 비물체적인 것을 통해서이다. 형상이 한 몸체의 윤곽인 한 그것은 몸체를 제한하고 완성하는 비물체적 속성이다. 죽음이 그 <형상>이다. 비물체적 변형은 명령어의 표현된 것이지만 몸체의 속성이기도 하다.

명령어의 다른 측면, 즉 죽음이 아니라 도주를 고려하면 변수들은 이제 새로운 상태, 즉 연속적 변주 상태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극한으로의 이행은 이제 비물체적 변형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끊임없이 몸체들에 귀속된다, 이것은 죽음을 제거하지 않고 죽음을 축소시키거나 죽음 자체를 하나의 변주로 만드는 유일한 방식이다.

언어는 이 운동에 의해 자신의 고유한 극한으로 밀려간다, 한편 몸체들은 자신의 내용들을 변형시키는 운동을 겪는 가운데, 또는 자신의 형상들의 극한에 도달하거나 극한을 넘어서도록 모든 힘을 다 써버리는 가운데 포착된다.(힘들의 포착) 실체들은 변형되고 형체들은 와해된다. 그것이 극한으로 치닫는 형식이든 윤곽들의 도주든 말이다. 이 강렬한 물질의 비물체적 역량, 이 언어의 물질적 역량. 몸체들과 말들보다 더 직접적이고 더 유동적이며 타오르는 듯한 하나의 질료. 연속적 변주 안에서는 더 이상 표현의 형식과 내용의 형식을 구분할 여지 조차 없다. 연속적 변주 안에 있는 것은 상호 전제되어 있으며 분리 될 수조차 없는 두 개의 판이다. 이제 두 판의 구분은 고른판 위에서 완전히 상대적인 구분이 된다. 탈영토화가 절대적이 되고 배치물을 휩쓸어가는 고른판 위에서. 이 때 절대적인 것은 분화되지 않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무한히 작게”- (프루스트와 기호들 222쪽 참조) ......아마도 프루스트는 무한소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될 것이다, 알베르틴의 얼굴은, 아니 알베르틴의 얼굴들은 <무한히 작은 직선들의 편차> 때문에 차이가 난다....- 된 차이들은 하나의 동일한 물질 속에서 만들어진다. 이 물질은 비물체적 역량으로서의 표현뿐 아니라 제한 없는 물체성으로서의 내용을 위해서도 똑같이 사용되는 것이다. 내용의 변수들과 표현의 변수들은 더 이상 두 개의 형식을 가정하는 전제 관계속에 있지 않고, 연속적으로 변주되면 두 형식은 접근하고 양쪽의 탈영토화의 정점들은 접합접속된다. 그리고 접합접속이 있자마자 공통의 질료가 존재하게 되고, 바로 그 지점에서만 우리는 추상적인 기계, 또는 배치물의 도표에 이른다. 강렬함의 체계들의 당야성은 도주의 벡터들 또는 긴장들이 전체 배치물을 낳자마자 그 배치물에 결합되며 그 위에서 리좀화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한다. “어떻게 명령어가 감싸고 있는 사형 선고를 피할 것인가?”,“어떻게 명령어의 도주 역량을 펼쳐 나갈 것인가?”, “도주가 상상적인 것 안으로 빠져들거나 검은 구멍 안으로 떨어지는 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어떻게 명령어의 혁명적 잠재력을 유지하거나 뽑아낼 것인가?”라고.

사람들은 명령어에서 명령어를 끌어낸다. 명령어 속에서 삶은 죽음의 대답에만 응답해야만 한다. 도주함으로써가 아니라 도주가 작용하고 창조하게 만듦으로서. 명령어 아래에는 패스워드가 있다. 통과로 존재하는 말들, 통과의 성분들이 있다. 반면 명령어는 정지들, 지층화 되고 조직화된 구성물을 나타낸다. 하나의 사물. 하나의 말이라도 분명 이중의 본성이 있다. 하나에서 하나를 추출하라. 명령의 구성물을 통과의 성분으로 변형시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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