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우리가 함께 읽을 책은
[퀴어 이론 산책하기] 입니다.
아래는 이 책의 저자, 전혜은님이 <한국 성소수자/ 퀴어 학회>로 부터 “한국에서 퀴어 이론을 한다는 것, 성소수자/퀴어 의제와 관련한 번역 작업을 한다는 것”의 의미에 관한 글을 요청받고 쓴 글 중에서 제가 임의로 가져온 세 단락입니다.
글이 너무 좋아서 ( 저처럼 처음 보신다면 )전체를 모두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 이런 맥락에서 내가 퀴어 이론과 번역에 천착하게 된 데에는 퀴어이자 아픈 사람으로서의 경험이 얽혀 있고, 아픈 퀴어로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사회에 기여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얽혀 있다. 다른 사회적 소수자 운동들에서 나온 이론들과 마찬가지로 퀴어 이론은 사회 부정의에 맞서 현재의 세상 모습을 유지하는 지배적 가치체계와 인식틀을 해체하는 매우 저돌적인 담론적 저항 실천으로서 발전해 왔다. 내가 퀴어 이론을 통해 세상을 읽어내고 부정의에 대항하고 다른 세상을 꿈꾸는 방법을 배웠다면, 이는 또한 아프고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사회에 참여하는 한 가지 방법과도 맞닿아 있다. ‘침대에서 운동하기’의 계보는 수많은 아프고 장애가 있는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이어져 내려온 중요한 장애 운동 유산 중 하나다. 내가 밖에서 왕성하게 관계 맺으며 활동할 수 없는 사람이니만큼, 내 현실 그리고 다른 소외된 이들의 현실을 뒷받침할 이론을 공부하고 소개하고 언어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언어를 제공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 내가 사회에 연결되고 조금이라도 사회에 기여할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
다른 한편 내가 퀴어 이론과 번역에 천착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려면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구축하는 지배적인 이분법 틀 안팎과 사이를 방황하며 언어를 주워 담고 그때그때 입수 가능한 언어로 나-타자-세계에 대한 설명을 재구성해 온 퀴어 여행자로서의 경험이 큰 지분을 차지한다. 「‘아픈 사람’ 정체성」 에서 내비쳤듯 아픈 사람으로서의 내 삶이 컨디션이 정적이지 않고 어떤 하나의 범주로 깔끔하게 설명하기 어려워 계속 의심받고 자책하며 굴러왔듯이, 퀴어로서의 나도 그런 경계성(liminality)으로 얼기설기 바느질되어 있다.
(…)
나는 이 이해 불가능성을 차별과 배제로의 귀결이 아니라 각기 다른 현실을 인정하는 열린 결말로 안내해 줄 언어를, 불투명한 것을 불투명한 대로 설명할 언어를, 내가 도무지 맞출수 없는 틀을 전제 조건이 아닌 심문 대상으로 탐구할 이론을, 그래서 이렇게 늘 어딘가 사이에 끼어 있어서 ‘나는 레즈비언이다’ 같은 멋진 커밍아웃은 하지 못하고 그렇게 확신에찬 단단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꿔 나가는 운동에 합류하기 어려운 그런 체현들이 있을 자리도 마련해 주는 이론을 찾고 읽다가 여기까지 왔을 뿐이다. 시스젠더 이성애 규범적이고 가부장적인 지배적 문화 각본은 물론 퀴어 문화의 주류 담론―남성/여성, 남성적/여성적, 동성애/이성애의 이분법이 아직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고 유성애 중심적인―에서도 자주 ‘비현실’의 자리로 밀려나는 다른 현실들에 언어를 제공하는 일을 하고 싶을 뿐이다. ”
https://queerstudies.kr/lastissue/?bmode=view&idx=165429207

퀴어이론 입문서로서는 당연히 훌륭하지만,
르꾸샘덕분에 우리는
[마이너 필링스]에서 [자기 이론]으로 건너가기 위해 소중한 징검 텍스트를 만납니다.
서문에서 소개했듯이 (19)
이번에 읽을 1장에서는 “퀴어 이론이란 무엇인가?”보다 “무엇이 퀴어 이론을 ‘퀴어’이론이게 만드는가?”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춥니다. 저자와의 산책을 통해 퀴어 이론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계보를 그리는 작업을 따라가봅니다.
퀴어 이론의 역사에서
누구들이, 어떤 이야기들이 도드라졌고 어떤 이야기들이, 누구들이 배제되었는지 살피며 ‘무엇이 퀴어하게 만드는 것인가’ 의 질문을 놓지 않고
퀴어 이론의 의미와 의의, 그리고 그 방향성을 더듬더듬 같이 알아가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에 발제와 메모를 올려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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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킬조이] 6차시_퀴어이론 산책하기_첫번째 메모와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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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킬조이] 5차시 <마이너 필링스>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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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킬조이]5차시 <마이너 필링스>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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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킬조이]4차시 <우울:공적감정> 2부 3장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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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킬조이] 시즌2 3차시 <우울: 공적 감정> 2부 1,2장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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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킬조이]2차시 <우울: 공적 감정> 2부 3장 메모와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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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킬조이] 시즌2 3차시 <우울: 공적 감정> 2부 1,2장 메모와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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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킬조이]2차시 <우울; 공적 감정>1부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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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킬조이]시즌2_2차시<우울:공적감정>1부 메모와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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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킬조이] 시즌2 1차시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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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킬조이] 시즌2 1차시 <우울: 공적 감정> 서론 메모와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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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킬조이] 시즌2 세미나 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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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퀴어성을 내 이야기에서 어떻게 다룰지에 대한 의식의 흐름글:
퀴어 캐릭터를 많이 만들어왔지만 퀴어성을 전면으로 다룬 경우는 잘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주로 중심 사건이 있고, 그 흐름 속에서 문득문듯 퀴어성이 드러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한다. 사건에 초첨을 맞추면서도 그들의 위치, 처한 현실, 소수적 감정(마이너 필링스)를 지우지 않는 방식으로.
퀴어성을 전면에 다룬 이야기를 한 번쯤 만들어 봐도 좋겠다, 싶다가도... 나는 역시 비퀴어와 별다를 바 없는 사람으로서 그려내고 싶은 거 같다. 근데 이 글 쓰면서 또 드는 생각이, 이게 곧 소수자성을 나름대로 적극적으로 다루는 방식이 아닐까? 소수자성을 다루겠답시고 비극적인 감정에만 초점 맞춰 다루는 것도 좀 아닌 거 같다... 내가 퀴어성을 다루는 방식에는 '본질'이 있다고 멋대로 상상하고 있었나?
그럼에도 여전히 내 이야기의 중심 사건은 퀴어성과는 무관하고, 다 읽은 독자들의 머릿속에 남는 건 퀴어성이 아닐 거 같다. 그렇지만 캐릭터가 퀴어인지 아닌지 생각해보지 못했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독자들의 의식에 녹아들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면 그것도 좋지 않을까? 아니면 이미 너무 많이 지워져왔던 퀴어는 정상성 속에 녹아들어가기보다는 퀴어임을 더 드러내야 하는걸까?
퀴어를 다루는 방식이 이 정도면 충분할까?
나의 욕심이 있다면, 퀴어를 욕망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무성적일 거라는 기대를 받는 장애인을 관능적(Sensual)으로 표현하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도착적이지는 않은 방식으로. 그리고 관능이라는 게 꼭 섹스(Sexual)일 필요는 없다.
구체적으로는 이런 거다. 청각장애인인 베이시스트가 있는데, 그는 무대 위에서 자신을 상실할 정도로 음악에 열중한다. 그런 모습에는 매력과 일종의 관능성이 있다고 본다.
퀴어성 그 자체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기 보다는 그 사람이 정말 매력적인 사람이라 독자들이 매력을 느꼈으면 좋겠다. 그리고 물론, 그 매력은 독립적인 게 아니라 그의 퀴어성과도 복잡하게 얽혀있으리라 본다.
2.
세미나를 하면서 존중받고 있고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세미나원들의 태도가 이런 이론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걸까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는 ''퀴어'라는 이름이 재현/대표하고자 하는 이들'을 완벽하게 포괄하고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101p)
'페미니스트'도 여기서 말하는 '퀴어'와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거 같다.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반드시 스스로를 The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으로 견고하게 규정해야 하는 것도, 탈코를 해야하는 것도, 분노를 기반으로 한 강렬한 정치적 주장을 해야하는 것도 아니다.(이건 세미나를 하긴 전까지의 페미니스트에 대한 내 편견이기는 했다. 내 페미니즘은 2018년쯤에 머물러 있었나 보다..)
스스로 전형적인 페미니스트상(그런게 있나)이 아니라 생각하고, 애초에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을 갖다 붙일 수조차 있는 사람인가라는 의문을 가진 사람이 '페미니즘' 세미나에 들어가는 게 안 맞는 옷을 입는 거 같기도 하고 그랬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나는 배제되지 않는 존재라는 점이 안심됐던 거 같다.
그동안의 철학 세미나에서는 논박을 통해 옳음?에 접근해나가는 방법이 자연스러웠는데, 여기서는 그런 게 잘 없어서(사람들이 내가 뭔말을 해도 반박을 안한다ㅋㅋ 야호!) 감각이 뭔가 다르구나 싶었다. 물론 퀴어 이론에서도 끊임없는 자기심문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안전하다는 면에서는 되게 마음이 편하고, 동시에 새롭게 알게 되는 것들로 인해 마음이 불편해지는(그게 싫진 않지만) 그런 세미나인 것 같다.
"퀴어는 관계적이고, 낯설다"(58)라는 세즈윅의 정리와 "용어의 우연성 긍정" "인식론적 겸손의 정치" "확신을 단념할 것을 각오하는 윤리적 노력"(101~103)이라는 버틀러의 정리가 오늘 아침을 깨우네요. 퀴어 이론은 래디컬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토대와 정상성을 의심하고, 탐문하고, 권력관계를 파악하는 일을 놓치지 않으며, 무지를 인정하고 무지가 들어올 자리를 이론에 마련한다는 것이..... 의심하고, 질문하고, 성찰하며, 이걸 계속하는 것이란 점에서 퀴어 이론은 윤리학이라고 정리해봅니다.
사람은 젠더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욕망과 억압을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 문화에서 젠더는 성적 실천 및 성적 정체성과 불가분의 관계로 관련되어 있다. 그다음, 앞의 모든 내용이, 언어와 재현의 특수한 실천들을 경유해야만 인간에게 의미를 갖게 되고, 여기엔 훨씬 더 복잡한 얽힘이 추가된다. 이 영역 중 그 어느 것도-정치, 욕망, 젠더, 섹슈얼리티, 재현-나머지 것들보다 더 우선하고 더 결정적이지 않다. 그것들이 예측 불가능하다는 점이 그 자체로 퀴어 이론가들에게 이런 주체들의 매력과 중요성을 창출한다. 그러나 적어도 퀴어 이론가들이 보기에 확실한 건, 이 영역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이 영역 중 어떤 것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76)
"이해하지 못하면.....이해하지 못한다"는 문구가 머리에 콕 박혀 적어봅니다. 외워야 될 것 같아요. 외워야 할 것들이 늘어나는데, 늘어난다는 느낌만 있고 외워지지는 않네요.
다른 한편 내가 퀴어 이론과 번역에 천착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려면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구축하는 지배적인 이분법 틀 안팎과 사이를 방황하며 언어를 주워 담고 그때그때 입수 가능한 언어로 나-타자-세계에 대한 설명을 재구성해 온 퀴어 여행자로서의 경험이 큰 지분을 차지한다. 「‘아픈 사람’ 정체성」 에서 내비쳤듯 아픈 사람으로서의 내 삶이 컨디션이 정적이지 않고 어떤 하나의 범주로 깔끔하게 설명하기 어려워 계속 의심받고 자책하며 굴러왔듯이, 퀴어로서의 나도 그런 경계성(liminality)으로 얼기설기 바느질되어 있다.(…)나는 이 이해 불가능성을 차별과 배제로의 귀결이 아니라 각기 다른 현실을 인정하는 열린 결말로 안내해 줄 언어를, 불투명한 것을 불투명한 대로 설명할 언어를, 내가 도무지 맞출 수 없는 틀을 전제 조건이 아닌 심문 대상으로 탐구할 이론을, 그래서 이렇게 늘 어딘가 사이에 끼어 있어서 ‘나는 레즈비언이다’ 같은 멋진 커밍아웃은 하지 못하고 그렇게 확신에 찬 단단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꿔 나가는 운동에 합류하기 어려운 그런 체현들이 있을 자리도 마련해 주는 이론을 찾고 읽다가 여기까지 왔을 뿐이다. 시스젠더 이성애 규범적이고 가부장적인 지배적 문화 각본은 물론 퀴어 문화의 주류 담론―남성/여성, 남성적/여성적, 동성애/이성애의 이분법이 아직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고 유성애 중심적인―에서도 자주 ‘비현실’의 자리로 밀려나는 다른 현실들에 언어를 제공하는 일을 하고 싶을 뿐이다.
-전혜은님이 <한국 성소수자/ 퀴어 학회>로 부터 “한국에서 퀴어 이론을 한다는 것, 성소수자/퀴어 의제와 관련한 번역 작업을 한다는 것”의 의미에 관한 글을 요청받고 쓴 글 중-
-사라아메드가 지적했듯이 (67)이성애는 규범과 이상뿐 아니라 몸과 세계를 형성하는 감정을 통해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거의 모든 공간의 “이성애화”가 공기처럼 되어버린 세계에서 퀴어는 이중의 불편함을 느낀다. 방향을 잃은, 소외감과 몸으로 하는 일의 통제로 인해 퀴어 삶 전체가 불편하게 된다. 모여자대학에서 벌어진 트랜스여성의 입학 반대에 대해 저자는 여성들이 남성 일반에게 느끼는 공포를 인정하면서도 해당행위가 남성 우월적 성차별주의 뿐 아니라 시스젠더중심주의가 작동했다고 지적한다.
오래전에 본 영화 [로렌스 애니웨이]자비에 돌란감독. 2013. 가 떠올랐다. 30년동안 남자의 몸으로 살아온 문학교사 로렌스가 여자친구에게 이젠 여자의 몸으로 살고 싶다며 이렇게 말한다.
"(프레드) 왜 미리 말 안 했어?
날 남자로 생각했어?"
"(로렌스) 난 호모가 아니라고."
" (프레드) 사람 그만 갖고 놀아, 씨X.
넌 동성애자, 게이야. 인정해도 세상 안 끝나."
"(로렌스)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야.
성별을 잘못 갖고 태어났을 뿐이야.
35년을 이렇게 산 건 죄악이나 다름없어, 한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훔친 거라고."
"(프레드) 누구를 말하는 거야?"
"(로렌스)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 말이야."
로렌스는 여전히 프레드를 사랑하지만
이젠 더이상 젠더규범을 수행할 수 없다고 표현하면서 여성/남성의 경계를 허문다. 그리고 동시에 어머니와의 불화, 이성애 연인과의 이별, 직장 해고, 사회적 차별과 폭력이 시작된다. 나는 당시 로렌스가 겪는 상황들을 지켜보며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 이렇게나 험난하구나 여겼다. 이성애 규범성의 바깥을 영화적으로 체험한 것이다. 흥미로왔던 부분은 로렌스의 트랜지션 이후 프레드와의 사랑이 기존의 이성애 중심적 틀안에서 어떻게 굴절되고 해체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들이였다. 로렌스는 젠더와 섹스를 가로지르고, 이성애 규범성을 가로지른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완벽하게 이행하여 완결된 '트랜스여성'의 완벽한 전형을 보여주기보다, 끊임없이 흔들리고 저항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로렌스 ‘애니웨이‘라는 명명은 퀴어적이다.
분명 한계도 존재한다. 로렌스를 연기하는 배우가 시스젠더 남성이였다는 점, 트랜지션 과정의 어려움이 시각판타지적으로 그려진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로렌스의 작가로서의 성공서사도 그렇고.
그러나 anyway, 이 책을 읽으며 당시에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지점들( 예를 들면 왜 트랜지션 이후에도 여성을 사랑하지? 왜 로렌스는 드랙퀸같이 과장된 외모를 하고 싶지? )에 대해 다시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저자의 말처럼 무지가 들어올 자리를 마련한다는 것은 타자가 들어올 자리를 마련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103)
“그리고 여러 학자들이 지적하듯 퀴어라는 개념의 가장 큰 미덕이 엄밀히 말하자면 정의할 수 없”고 개념을 전개할 때의 결과와 함의를 미리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라면, 퀴어를 그러한 것으로 유지하는 일이 퀴어 이론의 정치적 • 윤리적 약속일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퀴어 이론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확실히 알지 못한 채 미래를 현재로 끌어오는 유토피아적인 실천이 될 것이다. 무지를 받아들여 생산적인 위험을 무릅쓰는 이 노동은 성소수자의 발언에 "나중에 를 연호하는 사람들에 맞서, 나중이 아니라 현재 여기에 퀴어가 살고 있음을 보여주고 퀴어라고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지금 여기서 만들고자 노력하는 운동이자, 우리 앞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지만 아직 도래하지 않은 다른 세상을 꿈꾸며 더듬더듬 길을 만들어나감으로써 세상을 조금씩 더 퀴어 하게 만드는 미래지향적인 노동일 것이다.”(104)
오늘도 나는 곁에 두고 싶은 이야기를 또 하나 얻는다. 이런게 무지의 기쁨이지. ㅎ
(67) “사라 아메드는 이성애가 “규범과 이상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몸과 세계를 형성하는 감정을 통해”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지적한다…그렇게 사는 게 편안하다는 감각… 편안하다는 것은 “몸과 대상이 딱 맞아떨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내게 편안한 의자가 다른 모습을 지닌 누군가에겐 불편할 수도 있다. 이성애 규범성이 당신에게 편안함을 가져온다면, 당신이 하나의 ‘구성된’ 세계에 들어와 있다는 것 자체를 알아차릴 수 없는 상태라는 뜻이다.”
1.저자는 <퀴어 이론 산책하기>라는 제목을 단 이유에 대해 반려견 산책 일화를 소개하면서 산책’이 가볍지만 만만하지만은 않은 활동이라고 설명한다. 이번 텍스트는 딱 저자가 말한대로였다. 반복되는 설명이 지겨워질 때쯤 만만치않은 주제들이 튀어 나왔다.
2.저자는 퀴어 이론의 방법론에 영향을 준 철학적 방법론으로 푸코의 계보학과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분석 방식을 소개하며 퀴어 이론에서 ‘퀴어’가 사용되는 방식 또한 유사하다고 강조한다. 퀴어 이론은 범주의 타당성을 질문하고 범주에 맞지 않는 존재들을 위한 언어를 개발하고 범주 자체를 전복시킬 방법을 모색해나가는 이론적 방향성을 갖고 있다. ‘퀴어’라는 개념이 지닌 끊임없는 유동성과 변화가능성이라는 조건과 퀴어링이라는 방법틀은 장점이기도 하지만, 복잡한 난제 또한 남아 있다.
3.퀴어 이론과 게이 레즈비언 정치의 갈등, 게이 레즈비언 운동의 주류화 전략과 ‘퀴어’ 급진성의 대립 같은 곤경 말이다. <몸의 일기>의 공동저자 코요테는 북토크에서 2015년 미 동성 결혼 합법화 후 동성 결혼을 했고 안정을 찾았지만, 문득 나 잘 살고 있는 건가? 급진성은 어디로 간 거지? 하며 현타가 왔었던 경험을 토로했던 예와 ‘트랜스’의 존재를 퀴어 이론의 첨병으로서만 소비하고 ‘트랜스’를, ‘트랜스’의 젠더 규범 순응 욕망과 섹슈얼리티 실천을 이분법적으로 재단하려는 것은 아닌지 하는 모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금 앉아 있는 의자가 편안하다면 끊임없이 의심해보아야 한다는 것. 내가 편안해지기 위해서 누군가는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최선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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