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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인류학세미나] 겨울-사이 읽기 : ⟪모든 것의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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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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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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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 | 2025.12.08 | 5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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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게릴라/인류학세미나] ⟪모든 것의 새벽⟫ 읽기 2차시(3, 4장) 후기
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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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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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 | 2026.01.15 |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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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읽기] 세미나 공지
(3)
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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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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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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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 | 2026.01.12 | 1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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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겨울-사이 읽기 <모든 것의 새벽> 1차시 후기
(4)
뚜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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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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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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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버기 | 2026.01.10 | 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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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 읽기] 세미나 공지
(4)
달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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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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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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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 2026.01.10 | 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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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인류학세미나] ⟪모든 것의 새벽⟫ 읽기 2차시 - 질문과 메모를 올려주세요
(8)
곰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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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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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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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 | 2026.01.10 | 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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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인류학세미나] ⟪모든 것의 새벽⟫ 읽기 - 질문과 메모를 올려주세요
(8)
곰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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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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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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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 | 2026.01.03 | 1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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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세미나> 이야기와 주역 2회차 메모
(3)
관리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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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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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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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쟈 | 2025.12.12 | 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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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세미나] 신화학 3 마지막 시간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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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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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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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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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 2025.03.05 | 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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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세미나] 신화학3_마지막 시간 메모와 요약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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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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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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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 2025.02.27 | 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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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세미나] 신화학3_5차시 후기
르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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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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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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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꾸 | 2025.02.23 | 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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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세미나]신화학3_5차시 발제 및 메모
르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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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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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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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꾸 | 2025.02.14 | 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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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세미나] 5차시 신화학3:5부 심한 배고픔 후기
(2)
뚜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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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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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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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버기 | 2025.02.08 | 160 |

나랑
1장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인류 문명의 발달사, 즉 인류가 원래 평등한 수렵채집 사회였으나, 농경과 도시의 등장으로 인해서 위계질서와 불평등을 선택했다는 기존의 서사(농경 시작 → 잉여 생산 → 인구 증가 → 국가/계급 발생)를 비판하며 시작합니다.
p.27 “우리의 모든 행동이 저마다 마음에 드는 증거를 고르는 데 불과하다면”
p.28 “자신의 구미에 맞는 증거만 사용하며, 그런 증거를 우리의 ‘현대판 선조들’의 대표로, 즉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보여주는 모델로 내세우는 경향을 띠는 인류학적 사례 연구에 대해”에서처럼, 이 책에 대해 저자들 역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고고학적·인류학적 사례들(예: 북미 원주민의 비판적 사유)을 수집해 거대한 가설을 세운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레이버와 웬그로우가 이 의문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논리를 전개하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독자로서 어떤 태도로 이 책을 읽어야 할지에 대해 얘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2장에서는 유럽인과 아메리카 선주민(특히 웬다트족 등 북미 동부 수림지대 부족들)이 가졌던 '자유'와 '부'에 대한 개념 차이를 대비시킵니다.(p.64~67 p.74) 유럽인의 자유는 '지배받지 않을 권리'보다는 '재산을 가질 권리'에 가까웠던 반면, 선주민의 자유는 '누구도 나에게 명령할 수 없는 상태' 그 자체였습니다. 특히 선주민의 누구나 먹을 것과 잘 곳을 공동체로부터 보장받는다는 부분은 인상 깊었습니다.(p.14 “새로운 정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방대한 분량의 데이터를 쌓고 걸러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개념의 변화 또한 필요하다.”)
선주민들의 비판이 당시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전달되어 '계몽주의'라는 변화의 불씨가 되었다는 점도 인상 깊었습니다.
저자들은 전형화된 이야기로서 장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인용한 후 “농경은 곧 사유재산의 시작을 의미하지 않았고, 불평등을 향한 돌이킬 길 없는 전진의 표시도 아니었다”(13)고 반박하지만, 곧 “사회적 불평등의 기원에 관한 질문들에 새로운 답을 찾으려던 이 책의 원래 의도가 별로 좋은 접근법이 아님을 깨달았다.”(20) “이런 식의 문제 설정 방식은 사회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해 (중략) 어떤 진단이 내려져 있음을 시사한다.”(107), 대신 “우리가 해체하려는 것은 자유민들을 ‘어리석은 야만인’으로 전형화하는 것, 그 과정을 과학적으로 정당화하고 개념을 정교하게 다듬는 작업”(109)이며, “이 책은 불평등의 기원에 관한 책이 아니다. 다만 동일한 여러 질문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대답하는 것이 목적이다. (중략) 칸디아롱크 같은 선주민 비평가들의 안내를 받아 새로운 눈으로 접근해야 한다.”(113) 라며 2장을 마칩니다.
저자들은 무엇이 ‘평등’이고, ‘평등한 사회’는 어떤 사회인지 명확하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평등주의적’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끝없는 토론을 낳는다”(111)고요. '평등'의 개념에 대해 이리 조심스런 접근을 하는 이유가 “평등은 미리 정의되어 있는 기본 값이며, 문명의 모든 겉치레가 벗겨졌을 때 남게 되리라고 상상하는 인류의 원형질적인 내용물 같은 것을 가리킨다.”(111) “선사시대의 인간들은 자신들의 사회에서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관념들을 갖고 있었다. 그런 사회를 균일하게 ‘평등주의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112) 라는 인용문에서 일부 설명이 되긴 하는데요. 추가하여 “‘자유’에 관한 논의는 어떻게 ‘평등’에 관한 논의가 되었는가”(90)에 대해서도 조금 더 이야기 나눠보고 싶습니다.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분열생성’(이항대립하는 두 요소가 서로의 차이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는 경향) 개념이 새롭다. 그는 사람들이 서로를 반대함으로써 스스로를 규정하려는 성향을 설명했다. 87p. 사람들은 스스로를 이웃과 대립시켜 규정한다. 그래서 도시인들은 더욱 도시적이 되고, 야만인들은 더욱 야만적이 된다. …17세기에 북아메리카 동부해안을 따라 벌어지던 문명들 간의 역사적인 대면에서, 상충하는 두 절차를 예상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분열된 양측의 사람들이 서로에게서 배우고 상대방의 사상, 관습, 기술을 받아들이는 (아메리카인이 유럽식 머스킷 총을 쓰고, 유럽인 정착민들이 아동을 훈육할 때 더 관용적인 아메리카식 접근법을 쓰기 시작한 것처럼) 것이 예상된다. 동시에 그들은 거의 예외 없이 정반대 행동도 한다. 대조되는 지점들을 포착하고 그런 것을 과장하거나 이상화하여, 자신들의 새 이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려고 노력하기까지 한다. 칸디아롱크가 화폐의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 분열생성적 상황의 전형적인 예다. 오늘날까지 … 전 세계경제 속으로 통합된 선주민 사회들은 예외 없이, 마셜 살린스의 표현에 따르면, 백인들의 ‘돈에 입각한 삶의 방식’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자신들의 전통을 설정한다.
모든 것의 새벽 1차시 메모
(인간으로 만들어주는)자유를 재발견할 수 있는가?(인간종은) 자신을 재발명할 가능성이 있는가?(19p) 저자들은 이를 위해 <사유습관>의 전환!을 요청한다. 전환이 시급한 뼈때리는 몇몇 부분을 복기해본다!
-행복에 대한 사유습관 전환/ 아메리카 선주민은 빈곤 그 자체를 두려워하시보다 명백히 비참한 처지에 놓인 사람이 아무도 없는 사회의 삶이 행복하다고 느낀다. (35p)
-자유에 대한, 평등에 대한 사유습관의 전환. ‘평등은 자유의 표현‘(p69), 파이브네이션의 민주적 통치/ 퍼스트 네이션의 ‘투스피릿‘개념의 존재가 평등은 자유의 표현이라는 말을 보여주는 듯 *투스피릿: 퍼스트네이션 공동체에서 젠더비순응적 사람들을 설명하는 용어(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에서 )
-토론의 기원은 아메리카 선주민/ 자유, 상호 지원, 자유, 특히 공산주의에 대한 논의’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가져간다’(75p)
-선주민에게 개인의 자율성은 어떤 인간 존재가 다른 존재의 의지에 복종하는 일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운영하는 것!( 아나키즘과 연결됨) / 경제적 자유, ‘ 뭘 살것인가’ ’어떻게 벌 것인가?’의 자유만 내세우는 여기와는 180도 다른!
-어떻게 부가 권력이 되나?? / 선주민들을 당혹스럽게 한 바로 그 질문(98p)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분열생성’(86p)/
남편과 토론? 할때 이랬다. 지난번 <무진장> 포럼에서도 이런 경향이…
-선주민 비평이 유럽인에게 번역되면서 사라진 것!은 사회가 어떤 기초에 의해 세워질 수 있다는 전망에 대한 감각이다/ 재발견, 재발명의 감각이 없어진 바로 그 원인. ‘개인의 자유는 기본적 공산주의가 전제 조건’(99p)
인상적인 부분 메모합니다.
더 정확하고 더 희망적인 세계 역사의 그림을 향해 나아가는 첫걸음은 에덴동산을 완전히 포기하고 수십만 년 동안 사람들이 공유했던 이상적인 사회조직 형태라는 개념을 없애는 데서 시작할지도 모른다. (중략) 다른 형태의 사회조직을 시도할 능력 그 자체가 우리를 인간이 되게 하는 어떤 본질 아닌가? 자기 창조의 능력과 자유까지도 가진 존재 말이다. 물질적 자원(토지, 칼로리, 생산수단)이 확실히 중요하다고는 해도 인간의 역사에서 궁극적인 질문은 그런 것을 얻을 기회가 평등한지가 아니라 함께 살아갈 방법에 관한 결정에 도움을 줄 능력이 평등한가다. 물론 그 능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애당초 결정해야 할 뭔가 의미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 종의 미래가 이제 뭔가 다른 것(부가 제멋대로 권력으로 전환될 수 없는 시스템, 각자의 필요가 중요하지 않거나 그들의 삶에 원천적인 가치가 없다는 등의 말을 들을 일이 없는 사회 같은 것)을 창조할 우리의 능력에 달려 있다면,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를 애당초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자유를 재발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중략)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불러일으키고 싶은 정신이다. 인간은 집단적 자기 창조의 투사물이다. 인간의 역사에 그런 식으로 접근한다면 어떨까? (중랙) 자신을 재발명할 가능성을 상상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엄격한 개념적 족쇄에 우리가 어떻게 얽매이게 되었는지를 묻는다면 어떨까? (18~19쪽)
사회적 불평등의 기원에 대한 책이 아니라고 선언하면서 사회적 불평등의 기원에 대한 질문을 재사유하는 저자의 말 속에서 길을 잃기도 했다. 끈기있게 방향을 찾고자 노력하지 않았지만 인류의 문명, 사회적 불평등, 자유 등에 관한 익숙한 질문과 대답에 대해 의심해야 했다.
“사회적 불평등의 기원이 실제로 있다고 가정한다는 즉, 인간 존재가 평등했던 시기가 있었으며, 그 뒤에 이런 상황을 변화시킬 어떤 일이 발생했음을 당연시했다는 것이다(47).” 그렇다면, ‘평등’, ‘자유’라는 도덕적 개념들이 근대적 역사 인식 속에서 이상화된 결과일 수도 있겠다.
1. 새해 벽두부터 모든 것의 ‘새벽’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들을 맞닥뜨리게 돼 살짝 설레기도 하고 흥분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지점도 있어 흥미롭다. 나의 미심쩍음은 어쩌면 책을 읽을수록 해소가 될 수도 있거나 더 심화되거나 할 것이다.
2. 기원을 파고드는 것에 대한 약간의 거부와 함께 선사시대 혹은 고고학에 대한 지식과 관심이 전무한 내게 인류학자와 고고학자가 의기투합해 ‘새벽’을 다시 쓰고자 하는 목적의식이 1장에서 분명하게 제시된 점. ‘자연법’에 대한 논의, ‘어리석은 야만인 신화’가 구성되는 과정을 추적한 2장은 인상적이었다. 자유와 평등에 대한 유구한 서구의 정치사상사를 또 공부해야하나?라는 압박을 동시에 느끼며, 공부는 왜 이리도 끝이 없단말인가?! 힝.
3. 이글은 어쩌면 기존 지성사 논쟁에 개입해, 인류 역사를 재구성하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라고 할 때, 두 연구자가 기존의 어떤 태도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지? 경험적 증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류학자로서 이들이 증거(사료)를 다루는 방식은 무엇이 새로운지?를 함께 얘기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