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오브 죽음 5회] 아빠의 아빠가 됐다

권경덕
2022-10-16 21:04
540

시민으로서의 돌봄

-아빠의 아빠가 됐다』(조기현 외, 이매진, 2019년)

 

 

 

나는 이 책을 세 번 읽었다. 출간 되자마자 한 번, 독서 모임에서 한 번, 그리고 이번에 글을 쓰기 위해 또 한 번. 출간된 지 3년이 지난 책을 다시 읽으니 그 당시의 내가 떠오르고, 그 때와 달라진 지금의 내가 낯설어진다.

 

조기현은 나의 동료였다. 우리는 서울시청년활동지원센터에서 주관하는 어슬렁 반상회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그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자취영화>라는 스마트폰 단편영화 제작 모임을, 나는 <아무튼, 책읽기>라는 독서 모임을 진행했다. 그는 학교 밖에서 철학과 비평을 공부하는 독립 연구자였고, 영화와 글쓰기로 자신의 생각과 이야기를 표현하는 창작자였다. 그리고 치매 아버지를 돌보는 시민이자 영케어러(만성적인 질병이나 장애, 정신적인 문제나 알코올·약물 의존을 가진 가족을 돌보는 18살 미만 아동 또는 젊은 사람을 일컫는 말)였다.

 

그는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말이 많은 사람이었고, 내가 책 모임을 진행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읽고 쓰는 사람이라서, 또 내가 자신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는다는 이유로 종종 말을 걸어왔다. 어느 날 강사 뒷풀이 자리에서 그는 책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거의 쓰긴 했는데 힘들어 죽겠다며, 글쓰기의 어려움과 마감 스트레스를 호소했다. 몇 달 후에 책이 출간되었고, 제목은 <아빠의 아빠가 됐다>였다.

 

“아버지가 바로 죽지 않았다는 것, 아버지를 짊어졌다는 것, 그게 내게 커다란 뭔가가 됐다.” (89쪽)

 

이 책은 한 청년이 자신을 압도하는 보호자로서의 삶과 현실을 느닷없이 마주했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조기현은 자신의 이야기가 자식으로서 마땅히 짊어져야 할 역할(효도)을 수행하는 기특한 청년의 서사가 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아버지와 부모-자식 관계가 아니라 시민과 시민으로 새롭게 관계 맺으려 했고, 자신이 아버지를 돌보는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가 사회적, 신체적 약자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민으로서의 돌봄 속에서 아버지를 다르게 성찰했고, 모든 세대가 돌봄을 이야기하고 고민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고 싶어 했다.

 

어슬렁 반상회 사업이 종료되고 우리는 각자의 길을 걸으며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이번에 책을 다시 읽으며 그의 소식을 찾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시민으로서의 돌봄을 사유하고 실천하며 다양한 주체들과 연대하고 있었다. 한겨레신문에 <조기현의 '몫'>이란 칼럼을 연재하고 있고, 최근에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영케어러들과 만나 나눈 이야기를 모아 두 번째 책을 냈다. 제목은 <새파란 돌봄>이다.

 

지금 나의 처지를 생각해본다. 작년부터 나는 다시 부모님 집에 얹혀살고 있고, 1인분의 삶도 온전히 책임지지 못한다는 생각에 종종 무기력했다. 동시에 집 밖을 유랑하듯 여기 저기 쏘다니고 가족주의 바깥의 다양한 현장에 참여하며 활기를 되찾으려 하고 있다.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에서 공부하며 마을 단위의 여러 활동과 실험을 목격하고, 홈리스행동에서 야학 교사로 활동하며 학생들과 홈리스 주거권을 고민한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새벽이 생추어리에 가서 공장식 축산 농장에서 구조된 돼지 새벽이의 밥과 물을 챙겨준다. 이런 부분적이고 산만하고 돈이 안 되는 나의 활동은 시민으로서의 돌봄과 얼마나 맞닿아 있을까?

 

‘자식이 아니라 창의적인 연결망 안에서 친척을 만들자’( 『트러블과 함께하기』, 마농지, 2021)는 해러웨이의 선언은 내가 종종 되뇌이는 말이다. 나의 휴대폰 메모장에는 ‘차이를 횡단하여 연대를 달성하자’는 출처 모를 말이 적혀있다. 지금 나의 연결망은 창의적이기 보다는 충동적인 것 같고, 나의 횡단은 연대를 달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희소식이 있다면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인간이라는 관념을 믿지 않게 된 것이고, 누구든 누구에게 의존할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그럼, 나의 무기력과 불안을 치유하기 위해 이렇게 생각하기로 하자. 나는 얹혀산다기 보다는, 더 큰 연결망 속에서의 상호의존성을 내면화하고 더 나은 시민으로서의 삶을 구성하기 위해 부모님 집의 방 한 칸을 잠시 점거한 것이다. 나는 산만하게 쏘다닌다기 보다는, 창의적인 연결망 안에서 더 많은 친척을 만들고 연대하기 위해 집 밖을 나서고 있는 것이다.

생각한 대로 일이 잘 풀린다면 조기현을 포함한 영케어러들과도 어딘가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시민으로서의 돌봄 역시 이 연결망과 무관하지 않다면 말이다.

 

 

댓글 6
  • 2022-10-17 08:58

     연대 속에 ‘돌봄’을 더 확장시켜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2022-10-18 01:18

      확장된 돌봄! 계속 고민해보겠습니다~:)

  • 2022-10-17 09:37

    먼저 ,누구든 누구에게 의존할수 있다는 믿음에 

    의존하고 싶어요. 

    시민으로서의 돌봄이 촘촘해진다면,

    좀 더 가벼이 서로의 손을 잡을 수 있겠지요? 

    경덕님 글 감사합니다.

     

     

    • 2022-10-18 01:21

      촘촘한 돌봄이란 말이 와닿아요. 가벼이 손 내밀고 손 잡기!

  • 2022-10-17 13:39

    창의적인 연결망 안에서 상호의존하는 삶!!! 기억해야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2022-10-18 01:24

      지금 제 상황을 돌아보고 돌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어요! 감사합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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