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여름 포스트휴먼] 2주차 질문 모음
정군
2024-07-08 11:58
781

이번 주 진도는 잘 읽고 계시나요? 저는 이제 막 진도 끝까지 읽었는데요. 지난 주에 비해서는 확실히 낫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2장을 더 흥미롭게 여길 수도 있겠다 싶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3장 종반부의 '포스트휴먼적 죽음 이론'이 몹시 좋았습니다. 해당 부분에서 (도저히 탈출하기 어려워 보였던, 더불어 네크로필리아처럼 보였던) 하이데거적 '죽음' 이론도 넘어서고, 수긍은 가지만 이게 어떤 식으로 가능한지 감을 잡기 어려웠던, 스피노자 이래로 지속되어 온 일원론적 죽음 이론의 결산을 보는 듯한 희열마저 느껴졌습니다. 🙂
그 외에 푸코의 '생명관리정치'를 '죽음정치'로 전환시키는 부분도 재미있었는데, 이건 제가 푸코를 잘 몰라서 간략하게 나마 공부를 좀 더 해야겠다 싶었는데요. 결국 브라이도티도 인용하는 렘케의 책을 구입하고 말았습니다.

알라딘: 생명정치란 무엇인가 (aladin.co.kr)
텍스트의 서술방식이나 구조가 여러 형태의 참고자료를 많이 요구하는데요. 할 수 있는 수준에서 최대한 많이 찾아가면서 읽으시면 좋을 듯 합니다.
자, 그럼 이번 주에도 당일 정오까지(일찍 올려주시면 더 좋습니다. 전날이라던가...ㅎㅎㅎ) 올려주시고요.
수요일 저녁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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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내용입니다.
탈인간주의적 관점은 모든 것을 자본으로 포섭시키면서 일원론을 펼친다. 이는 인간중심주의의 외부를 상상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하지만 브라이도티가 주장하는 포스트휴먼은 한 단계 더 나아가 각 종의 차이와 그 차이를 횡단하며 관계맺는 것을 강조한다. ‘동물-되기’는 인간과 비인간동물 모두 취약한 환경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지구-되기’는 자연-문화적 맥락에서(?), ‘기술-되기’는 이미 신체와 결합을 이루고 있는 기술-사이보그적- 맥락에서. 포스트휴먼적 주체는 이원론의 틀로 구성되지 않으며, 다수의 타자와 중요한 유대를 맺고 기술로 매개된 지구행성 환경과 융합하는 주체다.(121) 도티의 이론은 아주 흥미롭지만, 실제로 '포스트휴먼주체'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는 나로썬 상상하기 어렵다. 2장 마지막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도티는 포스트휴먼 이론이 자기긍적적이고 프로그램화되지 않은 돌연변이(136)들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개념과 변용태들 속에서 지구행성적 주체를 형성(136)할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우리가 이미 포스트휴먼적인 환경에 놓여져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포스트휴먼적 관점이 새로운 대안이 될 거라는 일종의 낙관인가?
2장에 비해 3장이 더 어렵고 이해도 잘 되지 않았지만 흥미로웠습니다. 그런데 '사정'과 '맥락'을 모르니 참 어렵네요^^
"예술적 대상의 비인간 속성에는 비기능주의와 흥겨운 성적 유혹이 결합되어 있다......한정된 정체성의 한계 너머로 우리를 변위시킴으로써 예술은 불가피하게 인간 아닌 것이라는 의미에서 비인간이 된다."(140)
"리오타르에게 비인간은 생산적인 윤리적 정치적 힘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포스트휴먼 윤리적 관계로 나아가는 길을 지시한다."(142)
3장은 비인간 : 죽음 너머 생명 인데 '비인간'의 의미에 대해서 얘기해보고 싶습니다. 인간이 기술, 기계와 맺는 관계를 표현할 때 쓰는 말일까요? '인간-아닌'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존재론적 비인간"(175)이라는 말도 나오는데요, 죽음과 연관된 비인간을 포함해서 비인간을 말하는 층위가 매우 다양한 것 같습니다.
131쪽 즉, 복잡성이라는 생산적인 개념이다. 시초에 지능 있는 육체와 체현된 정신이 부여된, 정서적으로 감응하고 상호작용하는 실체와의 관계가 언제나 이미 있다. 즉 존재론적 관계성이다. 포스트휴먼 차이들의 유물론적 정치학을 작동시키는 것은 실현되기를 요청하는 잠재적 되기들이다…
위 문장이 이해가 안됩니다. ‘지능 있는 육체’와 ‘체현된 정신’은 같은 말 아닌가요? 그리고 이런 ‘육체와 정신이 부여된 실체와의 관계가 언제나 이미 있다’라는 문장에 이어 ‘실현되기를 요청하는 잠재적 되기들’이 나오는데요. 존재론적 관계성이 잠재성으로 이미 있다라는 의미인가요?
176쪽 그것은 개인의 인격적인 죽음 너머의 우주의 거대한 동물-기계인 조에의 생성적 힘을 나타낸다. 이것이 세속적 담론임을 기억하자. 183쪽 또한 나는 이러한 작업틀 안에서 세속적이고, 비본질주의적, 생기적 유물론을 통해 그리고 포스트휴먼 죽음을 주체 안의 생성적인 비인간으로 긍정하는 이론을 통해 창조적인 대안을 제안하고자 한다.
제가 저번 주에 ‘세속성’을 질문했고 선생님들의 답변으로 이해한 바로는 위에 문장의 ‘세속적’은 ‘탈세속적’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잘못 이해했나요? 아니면 1장의 세속성과 3장의 세속성의 개념이 다른 건가요?
저도 3장이 재미있네요.
브라이도티는 푸코의 생명정치와 아감벤의 조에 개념을 더 확장시켜 나가는 것 같습니다.
자유주의적 개인에서 유전공학적 분할체로 변화해가는 시점에 생명정치적 통치성을 넘어 포스트휴먼 조에정치학으로.
저는 여기에서 브라이도티가 말하는 '조에' 개념을 좀 더 확실하게 짚고 넘어갔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생명'과 비교해서요.
169 죽음을 어떻게 보는가는 생명을 어떻게 가젇하는가에 따라 각자 다르다. 나의 생기론적 유물론 관점에서 '생명'은 우주적 에너지이며 텅 빈 카오스이면서 동시에 절대속도, 즉 운동이다. 그것은 괴물적이고 동물적인 근본적 타자성이라는 점에서 비인격적이고 비인간적이다. 그 모든 힘을 지닌 조에다.... 조에 즉 절대적 생기성인 생명...
171 나는 조에의 본성인 생산적인 차이화를 강조하고 싶으며, 이는 삶-죽음 연속체의 생산적인 측면을 의미한다. 끔찍한 현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치유와 공감의 생기적 힘을 주장하기 위해서 그것을 재작업하려는 시도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스피노자적 포스트휴먼 긍정 윤리의 핵심이다.
174 '생명' 즉 조에의 본질적 목적은 자기영속이며, 일단 그 목적이 충족되면 용해된다. 그러므로 조에인 생명은 우리가 '죽음'이락 부르는 것도 포괄한다고 할 수 있다.
181 조에권력이라는 주제는 윤리적으로 정치적으로 긴급한 문제들을 제기한다.... 출발점은 조에의 가차 없이 생성적이면서 파괴적인 힘과 포스트휴먼 윤리의 토대로 수립된 특정한 종-횡단 평등주의 유형이다.... 포스트모더니티나 선진 자본주의의 기술적으로 매개된 주체에 대한 조에중심적 전망은 내적인 모순으로 가득하다... 현재의 기술 변형들이 잠재적으로 담고 있는 조에중심적 평등주의는 주체에 대한 휴머니즘적 전망에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다른 말로 하면, 조에의 역량이 선진 자본주의의 착취적이고 죽음정치적인 중력을 교란시킨다.
'생명'에 대한 고전적 개념이 가질 수 있는 자명한 가치에 대한 반동을 우려하여 생명-죽음 연속체로서의 생명을 강조하는 개념으로 보면 될까요?
그래서 생명권력 대신 조에권력이라는 개념으로 바꾸는 것인가요?
1. 2장은 종 너머 생명으로 가는 것으로 동물-되기, 지구-되기, 기계-되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동물-되기와 지구-되기에서는 탈인간중심적 네오 휴머니즘이 탈인간중심주의적 관점을 갖지만 다시 보상적 휴머니즘의 위험을 초래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매우 예리한 지적이라고 생각하지만, 포스트휴머니즘의 기치 하에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동물권 운동과 생태주의 운동(기후위기 및 멸종저항운동)에 대한 지지와 비판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브라이도티의 탈인간중심주의적 포스트 휴먼의 관점에 선다면 동물권과 생태주의에서 어떤 대안적 운동이 가능할까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싶습니다.
2. 포스트휴머니즘 주체성과 관련해서는 기계-되기가 동물-되기와 지구-되기를 껴안고 밀고 나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종 너머 생명으로 가는 길에서 기계-되기는 동물-되기와 지구-되기보다 더 앞으로 나아간 급진적 사유와 실천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브라이도티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나는 이와 같은 기계-되기 실천들을 '근본적 신유물론' 혹은 '물질-실재론'이라고 지칭한다. 이러한 개념들은 물질의 개념적 구조에 대한 이해가 변화하면서 가능해졌고 둘은 서로 교차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유전공학적 정보기술의 영향으로 일어난 변화다. 일원론적 정치적 존재론으로의 스피노자적 선회는 과정들, 생기적 정치, 그리고 비결정론적 진화 이론들을 강조한다. 정치적으로는, 관계들의 미시정치학에 강조점이 주어진다. 이때 관계들의 미세정치학은 물질적이고 상징적인, 구체적이고 담론적인, 선들 혹은 힘들 사이의 횡단적 접속들을 추적하는 포스트휴머니즘적 윤리다. 여기서 핵심은 정서의 힘과 자율성, 그리고 그것을 현실화하는 실행계획이다.(마수미). 횡단성은 관계의 우선성, 상호의존성의 우선성에 기반을 둔 윤리를 실현하며, 이 윤리는 인간-아닌, 비인격적 생명에 가치를 부여한다. 나는 이것을 포스트휴먼 정치학이라고 부른다."
관계들의 횡단성을 핵심개념으로 하는 기계-되기의 집단적 강도실험들, 상식적 믿음이 아니라 현실에 근거한 공유된 실천, 정서의 힘과 자율성, 그리고 그것을 현실화하는 실행계획이 어떤 것인지 그림을 그려보고 싶군요.^^
3. 브라이도티는 푸코의 생명권력, 생명정치 개념에 의지하지만, 이미 우리 사회에서 작동되고 있는 생명정치/죽음정치의 현실은 푸코의 분석보다 더 앞서 나가고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그 실례로 드론과 같은 전투기계, 국지전의 변화된 양상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저는 가자지구에서 행해지고 있는 드론공격, 병원공격 등을 떠올렸습니다. 가자지구의 주민들이야말로 어떤 면에서 아감벤이 말한 호모사케르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죽음정치를 넘어서는 긍정의 정치학과 윤리학을 모색하기 위해 브라이도티는 포스트휴먼조건하에서의 죽음이론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유한성의 형이상학(하이데거)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인간의 필멸성을 강조하고, 미래의 시간성으로 죽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현재완료형으로 죽음을 두는 것이 그러한 관점의 전환에서 중요한 개념적 계기로 제시되는 것 같습니다. 브라이도티의 생기론적 유물론과 조에평등주의가 포스트휴먼 죽음이론에서 부각됩니다.
"생기론적 유물론 관점에서 생명은 우주적 에너지, 텅빈 카오스, 절대속도다. 그것은 괴물적이고 동물적인 근본적 타자성이라는 점에서 비인격적이고 비인간적이다. 그 모든 힘을 지닌 조에다."(169)
우리가 사는 세상에 만연한 죽음정치, 그리고 안락사, 존엄사 등의 등장, 트랜스 휴머니즘을 통한 영생불사를 추구하는 테크노 포스트 휴머니즘의 등장 등은 확실히 포스트휴먼의 죽음이론을 요구합니다. 문화-자연 연속체에 이어 생명-죽음 연속체의 생성적 능력을 중시하는 브라이도티는 죽음과 관련하여 지각불가능하게-되기를 제시합니다.
지각 불가능하게 되기는 경계지어진 자아들이 소거되거나 사라지고, 그것들이 환경, 중간계들, 지구 자체의 근본적 내재성과 그것의 우주적 공명 안으로 융합해 들어가는 지점을 나타낸다. 지각 불가능하게 되기는 재현됮 않는 사건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인화된 자아의 사라짐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177)
저는 브라이도티가 제안하는 포스트휴먼 죽음이론에 공감하는 편입니다만, 세속적 입장에서 이렇게 죽음에 대해 제안할 경우, 생명정치/죽음정치에 대한 어떤 대안이 가능할까. 여전히 막연하고 어렵게 느껴집니다. 가령 우리가 겪은 코로나와 같은 상황의 경우, 생명권력이 어떻게 인구관리를 행했나를 분석하는 것은 가능할 것 같은데, 생기론적 유물론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분석해야 하는 것일까요?(그냥 한 번 던져보는 질문입니다.^^)
106p 동물에게 도덕적 법적 평등성의 원칙을 확장하기 위해 그들을 의인화하는 것은 훌륭한 행위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두가지 점에서 내재적 결함이 있다. 첫째,... 인간/동물을 이분법적으로 확실하게 구분한다. 둘째, ... 동물들의 특수성은 완전히 부인된다. 내 생각에 포스트 휴먼 관계에서 요점은 인간/동물의 상호-관계가 인간과 동물 각각의 정체성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 상호관계는 각각의 '본성'을 혼종화하고 변화시키고 그들이 상호작용하는 중간지대를 전면에 드러내는 변형과 공생의 관계다. 이것이 인간/비인간 연속체의 환경이다. 그 상호관계는 소위 보편적 가치나 자질에 대해 미리 도덕적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열림 실험으로 탐구해야 한다.
정군님 말씀처럼 2장의 논의들이 처음엔 진부하다 싶었는데 나 자신의 경험과도 연결되니까 흥미로웠습니다. 그 중에 동물의 의인화 같은 건 저 역시 집에서 앵무새를 키웠던 경험 때문에 지금도 남아있는 버릇입니다. 애는 몇 살인가요? 이름이 뭐예요? 나도 모르게 다른 분들의 애완동물을 만나면 그 집 자식처럼 말하게 됩니다. 얼마전에는 애버랜드 푸바우가 중국으로 되돌아가기 전까지 전국민의 옆집 동생이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의 의인화란 이런 것인가요? 그런데 브라이도티가 말하는 열린 실험이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특히 되기의 강도 있는 공간들이 열려야 하며, 더 중요하게는 열린 상태가 유지되어야 한다... 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동물보호법 제정이나 새벽이 구출을 통한 축산동물에 대한 환기 등의 활동이 떠오릅니다만...
1. p.86의 그림2.1 스타벅스 커피 컵의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이것을 브라이도티는 “지구적 자본이 생성한 포스트휴먼 연계들의 저속한 속성을 반어적으로 포착”(85)한 것으로 설명하며 “나는 쇼핑한다 그래서 나는 존재한다!”로 해석하는데, 왜 이렇게 해석하는 것일까요? 그 맥락이 뭘까요?
2. p.92. 루이스 보르헤스의 동물을 3가지로 분류한다. “우리가 텔레비전을 같이 보는 동물, 우리가 먹는 동물, 그리고 우리가 무서워하는 동물”이 그것인데 “이렇게 예외적인 고도의 경험적 친밀함은 인간-동물 상호작용을 고전적 매개변수들 즉, 오이디푸스적 관계(너와 내가 같은 소파에 함께 있다), 도구적 관계(너는 궁극적으로 소비되리라), 그리고 환상적(fantasmatic) 관계(이국적이거나 멸종한 자극적인 인포테인먼트 대상들)에 국한시키는데” 브라이도티는 곧이어 “인간과 동물의 오이디푸스적 관계를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우리가 관계를 “오이디푸스적 관계”라고 할 때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무엇일까요? 브라이도티는 “투사, 금기, 환상으로 가득차 있는 신경증적” 요소라고 설명하는데 이러한 그의 설명이 불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오이디푸스적 관계라 함은 가장 기본 전제가 섹슈얼리티 아닌가요?
128쪽 "고전적 휴머니즘에서 범주적 경계를 나타냈던 성차화된, 인종화된, 자연화된 차이들은 이제 흐트러져 대안적인 횡단적 주체성의 양태들을 정교화시키는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 대안적인 주체성의 양태들은 젠더와 인정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인간/휴먼도 넘어선다. 내 생각에, 포스트휴먼 생태철학은, 과타리가 말하듯 현 시대 주체들이 자신들의 여러 생태계인 자연적인 것, 사회적인 것, 정신적인 것과 맺는 관계를 나타내는 정교한 상호관계의 망을 유물론적 방식으로 다시 생각하려는 시도다. 현재 논의를 위해 더 중요한 것은 생명정치 통치의 기둥이었던 성차화, 인종화, 자연화 과정들이 폐기되기 보다는 심하게 재구성된다는 사실이다."
- 그렇기 때문에 비-일자의 원리인 차이를 견디라고 촉구한다고 하면서, 관계의 우선성을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131쪽 "잠재적 되기들은 집단적으로 공유된 공동체에 기반을 둔 실천을 통해 수행되며, 실종된 종족을 생기론적이고 비단일적이지만 책임을 지는 방식으로 재조직하는 과정을 지원한다. 이것이 바로 탈-인간중심적으로 창조된 새로운 범인류가 환기하고 실현하는 그 '우리'다. ... 집단의 자기양식화를 시도하는 제스처다."
- 당연한 말인 것 같은데, 비단일적인데, 범인류, 우리와 같은 단어들이 서로 어울릴 수 있는지, '집단의 자기양식화'는 어떤 걸 의미하는 것인지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앗 벌써 질문들이...저도 동화샘과 같은 부분(176쪽)인데요, 브라이도티는 3장 죽음 너머 생명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담론은 생기론적 담론안에서 생성된 비판이론이다. 그러하기에 이는 세속적 담론이다 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는 탈세속적(종교적) 담론으로 읽힐 수도 있을 위험(?)에 선을 긋고 있는 걸까요?
p.98
“잘 수립되어 있는 이원론 대신 인간과 동물 사이에 있는 깊은 조에평등성을 인정한다. (중략)이러한 중요한 상호연계는 종차별주의를 벗어나서 신체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윤리적으로 인정해주는 쪽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관계의 질적 전환을 제시한다. 스피노자적 윤리학에 기반을 둔 힘의 행태학(ethology)이 인간-동물 상호작용을 변화시키기 위한 중요한 준거점으로 부상한다.”
스피노자의 ‘힘의 행태학’이 무엇인가요? 코나투스를 말하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어떻게 코나투스가 인간-동물의 상호작용을 변화시키기 위한 중요한 준거점이 되나요?
p.156
“아감벤에게 ‘벌거벗은 생명’은 생성적인 활력이 아니라 통치권이 죽일 수 있는 인간주체를 구성하는 취약성이다. 제한받지 않은 권력의 전제적 힘 안에서 신체를 쓰다 버릴 수 있는 물질로 만드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동물적 생명의 소멸에서 힘을 이끌어 내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연결되어 있다” 고 한다. 하이데거 존재론의 어떤 측면에서 인가요? 다음 문장에 힌트가 있는데, “유한성(finitude)이 주체성의 작업틀 안에서 구성적 요소로 도입되며, 이러한 상황이 주체의 핵심에 있는 상실과 멜랑콜리아의 정서적 정치경제에 연료를 제공한다” 혹시 하이데거 ‘현존재의 세계내 존재’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동물적 생명의 소멸에서 힘을 이끌어 내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이라는 것이 별도로 있나요?
94. 우리는 우리 시대의 인간-아닌 동물의 복잡성과 동물과 인간의 근접성에 어울리는 재현 체계를 고안해야 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새로운 관계 양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동물은 더 이상 인간의 자기 투사와 도덕적 열망을 지탱하는 의미화 체계가 아니다. 동물은 신-문자적 양태, 그들 자신의 코드 체계, 즉 '동물존재론'으로 접근해야 한다(wolfe,2003).
98. 탈 인간중심주의라는 의미에서 본 포스트휴먼은 변증법적 대립 도식을 축출하고, 잘 수립되어 있는 이원론 대신 인간과 동물 사이에 있는 깊은 조에평등성을 인정한다. (...) 이러한 중요한 상호연계는 종차별주의에서 벗어나서 신체들(인간의, 동물의, 다른 존재들의)이 할 수 있는 것을 윤리적으로 인정해주는 쪽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관계의 질적 전환을 제시한다.(...) 이러한 탈-인간중심적 접근은 우리의 재현들의 토대를 실생활의 조건과 긍정의 방식에 두기 위해 더 많은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106. 이 도전에 맞추어 살기 위해서 우리는 새로운 계보학이, 새로운 친족 체계를 나타낼 대안적인 이론적, 법적 재현들과 적절한 서사들이 필요하다.
>> 여기서 '동물과 인간의 근접성에 어울리는 재현 체계'와 '재현들의 토대'를 고안하고, 대안적인 '법적 재현과 서사'를 새롭게 상상하려는 브라이도티의 작업에서 '재현' 개념은 어떤 의미일까요? '비재현'이 아니라 '새로운 재현(신-문자적 양태? 동물존재론?)의 개념화'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1.
"살인 사업에 남성과 여성이 점점 더 똑같이 참여하는 방향으로 젠더 역할이 진화하는 것은 우리 시대 젠더 정치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한 측면이다. 보편적 인권을 주장하는 오월 광장의 어머니회의 입장이 체첸공화국 전쟁 미망인의 잔인한 개입, 임신한 여성 자살 폭탄 테러범들, '인도주의' 전쟁의 군사적 '휴머니즘'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증가하는 것 등이 이러한 문제의 측면을 요약적으로 잘 보여준다." (148)
이 문단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조금 어려웠다. 저자는 본디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살인 사업에 '보편적 인권', '젠더적 평등'의 이름으로 여성들이 진입하는 현실을 '문제'삼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현실을 말하며 저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 시대의 젠더 정치는 평등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다' 인가? '적어도 여성은 살인 사업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살인사업' 그 자체를 문제삼고자 하는 것인가?
2.
"죽음, 내면의 비인간인 죽음은 주체의 지각불가능하게-되기를 나타낸다. 이는 강렬한 변형/되기 과정의 가장 먼 최전선이다. 이것은 초월이 아니라 근본적인 경험의 내재성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을 되기의 카오스모스적인 울림방의 포효로 되돌리는 것이다." (176)
"죽음은 포스트휴먼 주체의 지각 불가능하게-되기'이며, 그로써 죽음은 되기의 순환들의 일부다. 하나의 힘을 다른 많은 힘들에 연결시키는 생기적 관계성인 상호접속성의 또 다른 형식이기도 하다." (178)
"잠재적 자살의 삶은 끊임없는 창조의 삶이다. 진부함으로 이끌어지는 무기력한 반복의 순환을 깨뜨리기 위해 살아진 삶이다. 자기애적 윅장으로 자신을 속이지 못하도록 우리는 견디기와 시간 안의 불멸성을, 즉 생명 안의 죽음을 함양해야 한다."(175)
저자는 생명과 죽음을 대치하는 개념이 아닌 연속체로 파악하며 죽음 또한 생성으로 보고자 하는 듯하다. 다만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저자가 '죽음은 실제로 이렇게 작동한다'고 말하는 동시에 '우리는 죽음을 이렇게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느낌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는 메커니즘으로서 죽음을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특정한 의지를 가지고 죽음을 생성으로 볼 것을 주문한다는 뜻이다. 어느 쪽이 저자의 본 의도에 더 가까울까?
생산하는 역량(포텐시아)가 나오는게 쉽지 않네요.^^
1. 2장에서 ‘종 너머 생명’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인간을 인간-아닌 생명에 연결시키는’(135쪽)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논하고 있습니다. 이때 복잡성과 복수성을 통해 프로그램화 되지 않는 돌연변이를 통한 변용태들을 통해 지구행성적 주체 형성들의 실현을 도울 수 있을거라(136) 말하며, ‘새로운 개념과 새로운 생산적인 윤리적 관계를 발명’(135)하는 ‘탈-인간중심적인 감수성’(135)을 가진 생기론적이고 횡단적인 관계의 주체라는 확장된 전망으로 나아가길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다음의 근거들을 말합니다.
1-1. 우리 시대의 인간-아닌 동물의 복잡성과 동물과 인간의 근접성에 어울리는 재현체계를 고안해야 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새로운 관계 양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동물은 더 이상 인간의 자기투사와 도덕적 열망을 지탱하는 의미화체계가 아니다.(94쪽)--> 애니미즘과 신화, 설화에서 동물은 인간의 욕망을 투사하는 존재이면서도, 자연 그 자체와 연결된 인간의 삶을 사유하게 합니다. 1장에서 포스트휴먼의 관점은 인간 너머의 것들과 어떻게 관계 맺고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동물-되기’는 기존의 신화적, 애니미즘적 사유와 어떻게 연결되고 더 나아가 어떤 관계를 형성하는 형태일까요? 들뢰즈의 ‘-되기’개념과 변신, 변위(트렌스포지션), 변형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아 고뇌중입니다.
1-2. 탈-인간중심적 사유는 모든 차원에서 돌연변이들을 생성하는 급변하는 기술문화 내부에 반오이디푸스적 동물성을 생산한다. 실체의 이상학과 이것의 필연적 결과인 타자성의 변증법을 뛰어넘기 위해 인간-동물의 상호작용을 어떻게 탈영토화, 즉 유목화시킬 것인가의 문제다. (95쪽)
나는 생명공학 기술로 매개된 타자를 생기론적 관점으로 보고자 주장한다. 기계의 생기성은(중략) 합목적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되기와 변형에 관한 것이다.(119) 우리시대의 기계들은 은유가 아니라, 힘과 에너지를 포착하고 처리하며 상호관계와 다양한 접속과 배치를 촉진하는 엔진이며 장치이다.(121) 인간과 기술의 결합은 새로운 횡단적 복합체, 새로운 생태지혜적 통일성을 발생시키는데,(중략) 융합이 아니라 근본적이고 횡단적인 관계들이며, 이 횡단적 관계들이 새로운 주체성 양식들을 발생시키고 힘의 행태학에 의해 통제된다.(121)
---> 요 문장들 역시 ‘되기와 변형’을 통해 새로운 주체적 양식들을 발생시키자고 하는데, 그 형태는 어떤 것일지 구체적으로 와 닿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1-3. 저자는 이러한 횡단적 연결고리를 만들어 가는 방법으로 ‘낯설게 하기를 실천하고 다르게 생각하기를 배울 필요가 있다’(122)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는 지금까지 창조적 사고를 위한 철학과 문학의 방법이었는데, 그 방법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3장의 죽어감의 방식들에 대한 통찰이 개인적으로 좋았습니다.
질문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