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첫 시간 후기

오영
2021-10-19 22:36
294

녹색평론 180호를 읽고 다음호가 나오기 전까지 <젠더>를 읽기로 했다. 그동안 인연이 닿지 않아 소문으로만 알고 있던, 직접 읽어본 적이 없어 궁금하던 책이었다. 발제를 맡아 1,2 장과 책 분량에 맞먹는 주석을 휘리릭 읽어보았다. 2장까지의 내용만으로는 출판 당시 일리치에게 쏟아졌다는 엄청난 혹평과 비판의 이유를 잘 모르겠다. 뒷부분을 마저 읽어봐야겠지만 오늘날의 상황에 비추어 보아도 의미 있는 부분들이 많았다. 개인적으로는 몇 년 전 페미니즘을 둘러싼 논쟁들 속에서 매우 혼란스러웠던 경험이 있는데 이번에 뭔가 입장 정리를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일리치는 늘 그러하듯이 우리가 익숙하고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에게 대해 다시 한 번 질문해 볼 기회를 준다. 학교와 병원이 그러했고 이번에 젠더와 성 역시 그러하다. 그동안 난 막연히 ‘젠더’와 ‘성’을 각각 주로 문화적 맥락과 생물학적 맥락에서 사용되는 용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일리치가 말하는 젠더와 성은 전혀 다른 용어였다.

물론 페미니스즘의 관점에서 보면 성 역시 사회적인 것이고 따라서 생물학적 성과 무관하게 사회적 남성성과 여성성을 구분하여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일리치가 말하는 ‘젠더’는 고유성이나 토착성, 구체성을 지닌다. 어느 지역에서 자라는 식물이 그 나무가 자라는 토양이나 기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듯이 젠더 역시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 장소와 문화,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그 모든 것을 모두 지운 채 균일하고 획일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남성과 여성의 역할은 없다. 그 지역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역사와 문화에 따라 지역마다 다른 남성의 역할과 여성의 역할이 있다. 그러므로 젠더 구분에 따른 여성과 남성의 다름이나 가부장적 억압을 근대의 남성과 여성의 차별과 겹쳐 버리면 일리치의 논지를 놓치게 된다.

반면에 성에는 젠더의 고유성과 구체성이 없다. 일리치에 따르면, 성의 출현은 ‘살림’이 경제로 바뀐 맥락과 맞닿아있다. 경제적 인간은 사람이 노동력이 되어 버린 순간 생물학적 구분 외에 모든 고유성을 지워버리고 만들어졌기에 실은 중성이다. 동일한 일을 하고 동일한 욕구를 가진 동일한 인간들의 무한 경쟁에서 남녀의 구분은 사실 의미가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이 경제적 인간으로부터 여성에 대한 경제적 차별이 초래되었다. 일정한 노동력이 가치로 환산되는 순간, 경쟁에서 밀려나는 대상은 노약자나 여성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리치는 이처럼 성차별을 본성으로 하는 ‘경제’는 그대로 둔 채 여성에 대한 경제적 차별 문제 해결을 위해 애쓴다 해도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오랜 시간 평등한 세상을 위해 노력해온 수많은 이들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지속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첫 시간에는 익숙한 개념으로부터 떠나 일리치가 말하고자 한 바를 포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다음 시간부터 젠더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가 진행될 터이니 첫 시간의 혼란을 넘어 새로운 관점에서 일리치의 논지를 잘 따라가기를 바란다.

댓글 3
  • 2021-10-20 08:33

    정리 깔끔하게 해주시네요^^

    감사 감사~♥

  • 2021-10-20 09:55

    일리치가 말하는 젠더를

    이해하는게 만만치가 않네요. 

    토박이 문화로 가면

    또 가부장제에 대한 이해에 걸리게 되고.

    다음 시간엔 조금은 더 나아가겠죠.^~^

  • 2021-10-20 23:16

    맞아요. 무엇이든 일리치 선생님을 거치면 완전히 새로워지는, 신비한 마법! 경제성장을 포기해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성차별을 중요하게 꼽아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저 역시 '젠더' 개념을 재발견하고 있습니다. (2주 연속) 좋은 후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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