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프로젝트2022>거대한 전환 2회차 과제

토토로
2022-04-05 13:42
256

-"인류의 수를 조절하는 것은 식량의 양이다."

-"무릇 빈민들에게 일하고 싶은 맘이 들도록 자극하고 부추길 수 있는 것은 굶주림 뿐이다. 굶주림은 평화롭고 조용하면서도 끊임없이 작용을 가해 가난한 이들이 일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압력일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온몸을 바쳐 전력투구하도록 만든다."

-타운센드는 인간이 실제로 짐승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의 정부만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멜서스는 '인구법칙'과 '수확 체감의 법칙'을 내놓았고, 이를 리카도가 다시 손질하여 인간의 다산성과 토지의 비옥성을 구성요소로 삼아 이 새로운 왕국의 작동을 설명했다. '경제적 사회(economic society)'가 이미 나타난 것이다.

 

국가가 나서서 온갖 임금들을 산정하고 평가할 필요도 없고, 몸이 성한 실업자들에게 구호해줄 필요도 없으며, 최저임금도 필요가 없고, 생존의 권리를 수호한다며 난리법석을 피울 이유도 없다. ...10장 중에서

 

=>빈민과 임금의 문제, 인구의 문제 등등이 자연법칙에 따라 스스로 조정된다는 사고방식이 자리잡게 된 과정과 고전파 경제학의 냉혹한 면을 낱낱이 살펴보았다. 몸서리가 쳐지게 끔찍했다. 

그러나 또 한편 생각해보자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세상에서도 여전히 비슷한 논리가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원리로 교육받았고, 경쟁했고. 차가운 잣대로 낙오자를 판단하지 않았던가...

(이제라도 이런 책을 읽으며, 정신을 조금이라도 차리고, 몸서리도 치게되어 다행이다.)

김누리 교수가 한국을 '야수 자본주의 사회'라고 불렀던 말이 머릿속에서 자꾸 맴돈다.

댓글 12
  • 2022-04-05 16:44

    그(로버트 오언)는 비록 당시의 문제가 일차적으로 경제적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본질은 사회적 문제라는 사실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다. 경제적 차원에서 보아도 노동자가 착취당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노동자는 마땅히 그가 얻어야 할 것을 얻지 못하고 있으니까. ...경제적으로 착취당한다고 해도 어쩌면 그는 금전적으로는 그 전보다 더 잘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인의 행복과 전체의 행복에 대해 대단히 해로운 원리가 작동하여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적 환경, 그의 이웃 동네, 또 공동체 내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 그의 직업적 기술 등을 무차별하게 때려부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진정한 문제는 예전에 그의 경제적 존재가 묻어들어 있었던 자연과 인간과의 여러 관계들이 완전히 황폐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산업혁명은 거대한 규모의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고 있으며,  빈곤 문제란 이 거대한  사태의 경제적 측면에 불과하다.

    ===> 경제는 사회의 작은 부분일뿐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될 것 같다. 그런데, 자꾸만 잊어버린다. 이 사실을 자꾸만 환기하고, 실제로 경험할 방식을 만들어내야만 하는데 그게 참 쉽지않다.

  • 2022-04-05 22:05

    대니얼 디포는 출판된 한 팸플릿에 '시혜를 베푸는 것은 사랑이 아니며,빈민들을 고용하는것은 온 나라의 민폐가 된다'고 말한다. 만약 빈민들이 구호를 받게 된다면 임금을 얻기 위해 노동하지 않으려 들것이며, 이들은 이런저런 공공 기관에 투입하여 공산품을 생산하는 데에 쓸경우엔 민간 제조업 부문에서 더 많은 실업이 생겨날 뿐이라고 주장했다.

    디포의 팸플릿은 새롭게 태어날 학문인 정치경제학의 기본적 요소들을 적확하게 잡아내고 있다.(9장-p333)

    >>대니얼 디포의 이야기를 보면  빈민들을 조직해 이윤을 창출하다는건 불가능하다는것이고 결국 빈민들은 굶어 죽게 내버려 두어야된다는 결론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빈민들은 나라가 가난해져 생겨난것이 아니라 근대산업혁명 이후 기계제자본주의라는 물질적 풍요의 결과물로 생겨난 자들이다.

  • 2022-04-05 22:18

    노동자의 경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길은 오로지 하나뿐이었으니, 그것은 그 자신을 새로이 나타난 계급의 일원으로서 자리매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스스로의 노동으로 생계를 벌 수 없는 이들과 한 묶음으로 엮여 이제 노동자가 아니라 모조리 구호 대상 극빈자로 여겨졌다는 것에 있다. 노동자를 이렇게 작위적인 방식으로 그런 상태로 전락시킨다는 것이야말로 스피넘랜드 법의 으뜸가도록 혐오스러운  점이었다. 이 애매한 박애주의적 법안으로 인해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하나의 경제적 계급으로 재구성한다는 전망을 빼앗기게 되었고, 따라서 그들을 인간의 형상을 빼앗긴 존재로 갈아버리는 경제적 맷돌 앞에서 그 운명을 모면할 수 있는 유일의 수단까지 빼앗긴 것이다. 314쪽

    ㄴ 스피넘랜드 법을 읽으면서 지금의 실업급여, 최저임금제 같은 정책이 떠올랐다. 스피넘랜드 법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칼 폴라니는 현재 정책들을 보면 대해 어떤 말을 했을까? 

  • 2022-04-05 22:30

    “… 1817년 오언은 서구의 인류가 어떤 과정에 들어서게 되었는지를 기술했단 바, 그의 말 하나하나가 다가오는 새 세기가 어떤 문제에 부닥칠 것인가를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다. 그는 우선 공장제 생산으로 인해 생겨날 엄청날 결과들을 지적하고 있다. “만약 자연적 진보에 그대로 맡겨두면 공장제 생산이 온 나라에 속속들이 퍼지게 되고 또 거기서 사는 사람들을 전혀 새로운 성격의 인간들로 다시 만들어낼 것이다. … 사회 전체를 이득과 이윤의 원리에 따라 새롭게 조직하게 되면 그 결과는 한이 없도록 멀리 미치게 되어 있다. … 새로운 제도적 시스템이 가져온 가장 명백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일정한 지역에 정착하여 살아온 사람들은 대대로 무려 내려온 성격이 파괴당하고 새로운 종류의 인간으로 변이를 일으키고 있으니, 유목민처럼 떠돌아다니며 자긍심도 없고 자신에 대해 엄격한 기율을 들일 줄도 모르는 뜨내기로 바뀌고 있으며, 그러한 거칠고 무표정한 존재들의 산 예가 바로 지구의 자본가들과 노동자들이라는 것이다. … 이렇게 인간이 저절로 타락하는 으뜸가는 이유를 그를 다시 한 번 올바로 지적하고 있으니, 그것은 공장에다 아주 기초적인 생계 수단까지 의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비록 당시의 문제가 일차적으로 경제적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본질은 사회적 문제라는 사실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다. (368~369)”

    토지, 화폐에서 이어 마지막으로 창출된 노동시장.

    이 노동시장의 창출을 마지막까지 막은 스피넘랜드법은 민중을 타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재난이 되었고, 이 문제를  ‘자연법칙’으로 해석하는 아이디어가 득세하는 가운데 노동시장은 끝내 만들어졌다.

    폴라니는 7장 서두에서 “자유 노동시장이 가져다준 경제적 이점은 노동 시장으로 인해 생겨난 사회의 파괴를 메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250)”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10장 마지막 부분에서 오언의 얘기로 그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풀고 있다. 그리고 폴라니는 다음과 같은 결론은 내린다. 

    “진정한 문제는 예전에 그의 경제적 존재가 묻어들어 있었던 자연과 인간과의 여러 관계들이 완전히 황폐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산업 혁명은 거대한 규모의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고 있으며, 빈곤문제란 이 거대한 사태의 경제적 측면에 불과하다.(369)”

    19세기뿐만 아니라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경제 문제를 제일 중~~~한 문제로 본다.

    그러나 폴라니와 오언은 빈곤문제까지도 경제를 중심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이 핵심으로 보았던 사회!!!

    그런데 나는 그것이 왜이리 희미하게 느껴지는지 ㅠ ㅠ

  • 2022-04-05 23:05

    P347

    상업세계에서 작동하는 여러 법칙들이란 자연의 법칙들이며 따라서 결과적으로 신께서 정하신 법칙들이다. 그러니 이렇게 구빈법을 없애고 노동자들울 시장의 상품으로 만드는 것이야 말로 스피넘랜드 법 행정을 맡은 나약한 치안 판사의 권위대신 그와 견줄 바 못 되는 전지전능한 굶주림의 고통이라는 강력한 권위에 호소하는, 즉 하급 법원에서 상급 법원으로 항소하는 것과 같은 올바른 방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스스로 해결되리라. 

     

    저는 얼마전에 지원한 성남시 도시농업전문가 양성과정에 선정되어서 한번 열심히 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첫 수업에 다녀왔어요

  • 2022-04-05 23:17

    p 327 "빈민들의 노동이야말로 부가 창출되는 금광이라면," 빈민들이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그 부를 이용함으로써 자신을 부양하고, 심지어 얼마간의 잉여까지 남기는 것이 왜 불가능하겠는가?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오로지 그들을 하나의 협회 또는 법인으로 조직하여 자신들의 노력과 노동을 하나로 합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뿐이다.
    p 333 디포는 만약 빈민들이 구호를 받게 된다면 임금을 얻기 위해 노동하지 않으려 들것이며, 이들을 이런저런 공공 기관에 투입하여 공산품을 생산하는 데에 쓸 경우엔 민간 제조업 부문에서 더 많은 실업이 생겨날 뿐이라고 주장했다. 
    성자인 존 밸러스와  냉소주의자인 대니얼 디포의 극빈자 문제에 대한 상반되는 주장이다. 
    지금 우리 사회도 이런 비슷한 시선이 존재하는 것 같다. **단체, **조합 등을 만들어서 자력구제를 애쓰나, 현실은 정부보조금을 받지 못하면 이윤을 내지 못하고  저소득층은 일하지 않고 지원금 받기에만 혈안이라는 주장이다. 어느 것도 쉽게 동의할 수 없고 현실은 복잡하기만 하고...
    그래서 아직 이해는 잘 못했지만, 10장 끝부분의 로버트 오언의 등장이  반갑다.

  • 2022-04-05 23:57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나 전장에는 무시무시한 일들과 맞부닥뜨릴 수밖에 없으니 이러한 곳에는 인민들 중 하층 계급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세상에 그들을 이런 곳으로 몰고 나갈 만한 지배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곤궁과 빈곤 말고 또 무엇이 있단  말인가? - 타운센드(349쪽)

    이 세상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반드시 노동을 해야 하는 법이다. 따라서 그들을 가엾게 여기는 감정에 빠져든다면 이는 인류 실존의 조건을 우습게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 에드먼드 버크(350쪽)

    ---19세기는 경제학자들이 이런 말을 이렇게 당당하게 말했던 시절이었다면, 지금은 다수의 경제학자들, 경제 관료들이 겉으로는 절대 이렇게 말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이 비슷한 생각들을 하고 있을 것 같다. 

     

    저는 올 한 해 한 달에 두 번 서대문구 '애란원' 옥상 정원을 돌보러 가려고 합니다.

    집 마당의 두 평쯤되는 공간에는 상추, 치커리, 무순 씨를 뿌렸어요~ 

    '애란원'은 미혼모들이 자립하는 것을 돕는 복지시설입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려는 10대에서 40대까지의 여성들이 입주해 있어요.

  • 2022-04-06 00:13

    공동체에 끼치는 해악을 피하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개입이라면 얼마든지 국가에 기대했지만, 사회를 조직하는 일 자체를 국가에 기대하는 법은 결코 없었다. 국가라는 정치적 메커니즘도, 또 기계라는 기술적 도구도 가장 핵심적인 현상이 무엇인지를 꿰뚫어보는 그의 혜안을 가리지는 못했다. 그 핵심적인 현상이란 바로 사회라는 것이다(p366).

    오언은 기독교가 인간 성격 형성의 책임을 오로지 그 개인 자신에게만 뒤집어씌우는 ‘개인화’를 저지르고 있다고 비난했다. 오언이 보기에 그러한 ‘개인화’는 개인의 성격형성에서 사회 실재의 현실이 끼치는 전능한 영향력을 완전히 부인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p367).

    그의 사회주의란 사회 실재의 현실을 인식함으로써 인간의식을 개혁하는 것에 기초를 두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p367)

    그는 그의 동네 공동체들로부터 ‘사회의 핵심’을 발견했으니, 지금 즉시 사회를 그것으로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p367).

     

    -오언은 시장경제제도로 마주하는 사회악의 본질이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라고 말한다. 그는 “인간은 그가 새로이 획득한 권능의 도움을 빌려 먼저 사회를 최대한 변형시켜야 할 것이며, 인간의 자유는 그 이후에야 비로소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했다(p368). 이어지는 문장의 의미는 ‘사회의 핵심’으로 사회를 변형시키면 성숙한 정신을 갖추게 되어 인간스스로 자유의 경계선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으로 읽히는데, 그렇다면 ‘사회의 핵심’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 2022-04-06 00:48

    P369

    그는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소득으로 몇 푼 받는가가 아니라 사람이 비참상태에 떨어질수록 저질인간으로 타락하고 있다는 사실임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그는 비록 당시 문제가 일차적으로 경제적인 문제처럼 보이지만 그 본질은 사회적 문제라는 사실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다.[…]
    한마디로 진정한 문제는 예전에 그의 경제적 존재가 묻어들어 있던 자연과 인간과의 여러 관계들이 완전히 황폐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생명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따라 이렇게 다르게 생각할수 있는건가? 공리주의자들이 말하는 노동자나 대중에 자기자신을  한 번이라도대입했다면, 그런 환상을 뻔뻔하게 주장할수 있었을까?자기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여긴거라고 밖에…존엄이 사라진 사상… 그 시대의 틀로 이해하기 힘든 두려운 대변혁의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 끝없는 오류를 만들어내면서도 이해하고 있다고 자기체면을 들이대는 인간의 지독한 면을 들여다보고 있는것 같다. 

  • 2022-04-06 01:31

    362-363p

    맬서스의 인구법칙이란 인간의 생식능력과 토양의 번식능력 사이의 관계를 반영한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성이라는 동물적 본능, 토양에서의 식물 성장이라는 자연의 힘들이 작동한다. 타운센드의 염소떼/개떼의 경우도 동일한 것이니, 인류의 번식에는 넘지 못할 자연적 한계가 존재하며 그 한계를 정하는 것은 식량공급을 얼마나 얻을 수 있는 것인가인 것이다. ... 맬서스가 보기에 이러한 제한을 가하는 압력이란 세상에 있어야 할 수 이상의 표본들은 가차없이 파괴해버리는 자연의 무정한 힘에 있었다. 전쟁, 돌림병, 악덕 같은 것도 자연에서 우러나오는 파괴적인 힘들과 동일한 것으로 놓였다. ... 경제적 사회란 그 본질에서 자연이 정해놓은 무자비한 여러 현실들에 기초하고 있다. ... 빈곤이란 고통스러운 문제는 이제 그 진정한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났다. 경제적 사회를 지배하는 법칙들은 인간의 법칙이 아니다. ... 자연과 인간이라는 이분법이 나타났으니 이것이 바로 19세기 인간들이 가졌던 독특한 의식의 탄생을 보여주는 이정표였다. 그 시대 이후로 인간에 대한 과학적 연구에는 자연주의라는 유령이 끊임없이 떠돌아다녔으며 사회를 어떻게 다시금 인간 영역으로 재통합시킬 것인가라는 문제는 이후 사회사상의 진화과정에 집요하게 탐구되는 질문이 되었다. 

    자연과 인간이라는 이분법이라는 잘못된 관계 설정이 고전파 경제학파들의 어이없는(?) 인구법칙, 염소떼/개떼의 사례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습니다. 이것으로부터 자연은 파괴적이고 무정한 것으로, 인간에게 제한과 압력을 가하는 힘으로서 작용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니요.... 참... 

     

  • 2022-04-06 05:10

    명예혁명(1688)이후 퀘이커의 철학은 존 벨러스라는 걸출한 인물을 나았는데, 그는 진정 먼 미래에나 나타날 사회사상의 흐름을 미리 예견했던 선각자였다......존 펠러스의 '근면협회' 설립제안은......'직업알선소'가 아니라 노동을 서로 교환한다는 전혀 다른 원리였다. "빈민들의 노동이야말로 부가 창출되는 금광이라면" 빈민들이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그 부를 이용함으로써 자신을 부양하고, 심지어는 얼마간의 잉여까지 남기는 것이 왜 불가능 하겠는가?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오로지 그들을 하나의 협회  또는  법인으로 조직하여 자신들의 노력과 노동을 하나로 합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뿐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훗날 빈곤 문제에 대한 모든 종류의 사회주의 사상의 심장을 이루는 생각이다. (327쪽)

    -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라는 오언과  푸리에의 여러 아이디어들이 벨러스의 책에 담겨 있었다고 하니 갑자기 퀘이커 교도와 존 벨러스에게 급 호감이 든다.  너무나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세 사람 벨러스(퀘이커교도)- 오언(무신론자)- 벤담(공리주의자)이 제시한 계획들이 같았다는 점은 구호대상 극빈자의 성격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아직 초보적 단계에 머물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 2022-04-06 09:04

    상상력의 천재 오언

     "사회에 해악을 줄이는 데에는 일정한 필연적 한계가 정해져 있으며, 따라서 인간의 자유를 제거하는 데에도 한계선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인간은 그가 새로이 획득한 권능의 도움을 빌려 사회를 최대한 변형시켜야 할 것이며, 인간의 자유는 그 이후에야 비로소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라는 게 오언의 직감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인간은 성숙한 정신으로서 그 경계선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것이며, 그러한 성숙한 정신은 결코 어린애 같은 불평 따위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칼 폴라니는 오언을 '그 시대의 지도적 정신 가운데 산업에 대한 실제적 지식을 세세히 알고 있으면서 또 영성적인 비전을 볼 수 있게 열린 유일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유분방한 상상력의 천재'라고 했다. 영성적인 비전을 볼 수 있는 자유분방한 상상력의 천재라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인간형이다. 아니 우리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고 해야할까? 

      예전에 읽은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의 서두에서  그레이버가 지적한 우리는 국가가 없는 사회를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우리가 그것을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많은 것들을 시작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읽혔다. 하지만 그보다 나 자신이 국가 없는 사회를, 상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상상을 못한다는 것을 실감했고 이토록 철저하게 '국민'이 되어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었다. <녹색평론>을 읽을 때도 그랬다. 실재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아니 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회의가 쌓이면서 현실이 더 답답해졌다. 요즘들어 '영성적인 비전을 볼 수 있는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더욱 절실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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