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프로젝트시즌2>주간실천과제 8주차

코스모스
2021-07-18 21:31
407

덥다덥다 하다가 저녁에 산책나가서 너무 멋진 풍경에 힐링하고 왔네요~~

 

댓글 10
  • 2021-07-20 09:50

    인간은 시끄러울 정도로 수다스럽게 상대방을 향해 말을 걸어왔습니다. 그러나 말하는 법, 질문하는 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상대방은 깊은 침묵을 유지한 채 응답을 보내오지 않는 겁니다.(207)

    페르스빌은 질문을 하지 않아 국토의 황폐화를 초래했습니다. 그런데 현대의 우리는 오히려 자연에 대해 ‘도발’과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라는 무리한 질문을 계속 퍼부어왔기 때문에, 이제는 자연이 응답을 중지해버린 것이 아닐까요? …… 우리는 그로 인해 발생되는 온갖 형태의 황폐함 속으로 내팽겨쳐진 상태입니다. 우리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풍요로운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황폐한 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셈이지요.(213)

    → 책의 주제와 무관하지만 사담 하나: 인간은 시끄럽고 수다스럽다에 급공감하며 한편으로 말하는 법이 잘못되었다에 급반성모드에 숙연해졌어요. 얘기하다 의도치않게 불쑥 내뱉어진 적절하지 못한 표현(단어)에 나도 움찔 놀랄 때가 가끔 있는데, 이럴 때 재빨리 수정하거나 재치있게 대응하지도 못하고 영락없이 이불킥을 하며 하염없이 자책하게 됩니다.(어제도 울력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ㅠㅠ여러분들 기억하지 마시길ㅋ) 뇌회로가 잘못된건지... 자기 수양의 문제인건지...아마 후자ㅎㅎㅎ

    책의 주제로 돌아와, 저자는 교환원리만을 경제라고 생각하는 것을 깨라고 말합니다, 등가 교환원리에 얼마나 단단히 종속되어 있는지 고민해보고 이 원리에 어떻게 틈을 만들것인지, 내가 맺고 있는 관계를 생각해봐야 겠어요. 어떻게 모든 관계를 선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신뢰와 사랑과 배려(214)가 오가는 관계^^

  • 2021-07-20 14:26

    P192.
    교환 원리의 압도적인 지배력이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증여 원리의 효과적인 작용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자본주의 꿈‘의 일부를 변형된 형태로 실현시킨 ’풍습‘하나를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축제, 바로 크리스마스 축제!

    '여성의 열락'과 '팔루스의 열락'에 관하여...

    우리부부는 ‘팔루스의 열락’과 ‘여성의 열락’을 서로 추구하고 있었던 것인가?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면서 나는 경제활동(직장)을 그만두고 육아와 살림만 하면서 전업주부로서의 역할을 나름 충실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남편은 직장을 다니며 매달 월급과 생계비를 벌어다 주며 본인의 역할을 다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고 나도 그 생각에 동의하고 받아들이며 살았다. 그래서 이런 역할분담이 확실해서인지 이런 일로 부부싸움을 해 본 적 없이 결혼생활을 유지했다.

    남편이 육아와 가사일을 도와주지 않아도 크게 불편함이나 서운함을 못 느끼며 살았던 건 남편은 뭐든지 계산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팔루스의 열락’을 추구하며 자신의 아이를 양육하고 집안일을 하며 생활의 불편함을 없애주는 댓가?(교환)로 월급을 주는 것이었을 거고

    나는 경제활동(돈벌이)를 하지 않고 나의 노동력과 시간을 육아와 가사일에 쓰며 자식과 남편에게 사랑과 정성을 기울이는 ‘여성의 열락’을 추구 했던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내가 사랑을 하게 되더라도 그에 화답하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남편의 경제활동을 돈(화폐)만 벌어다 주는 것이 나의 사랑에 대한 보상(댓가)라고 생각하며 그 사이에 화폐가 침입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 사랑의 유통이 정지하고 그럼으로써 사랑의 증여적인 본질이 교환 원리에 혼란스러워지고 스스로 소외당한다고 느끼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그런데 남편의 월급(화폐)는 가족을 위한 선물이었고 아내(나)는 남편과 자녀를 위해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며 가정을 돌보는 것이 남편과 자녀에게 선물을 한 것이라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공통체의 가장 작은 단위인 가족관계에서도 증여의 원리는 적용되는 것 같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역할과 특성을 인정하고 결혼생활의 삶을 선물하는 마음으로 관계를 유지하면 그 속에 함께하는 자녀는 안정된 정서로 성장할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기는 것이 순수증여가 일어나는 것이라 여겨진다.

  • 2021-07-20 16:02

    “ … ‘코르누코피아’가 자기 앞에 나타났을 때, 어떤 식의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인지가 문제로 등장합니다. … 마르크스는 근대의 산업사회가 교환의 원리와 그로부터 탄생하는 화폐에 근거한 관계성을 지나치게 발달시킨 결과, 인간과 인간 사이에 ‘사랑의 응답’이라는 커뮤니케이션(소통)의 형태가 성립되기가 무척 어려워졌다는 것을 원리적으로 확실하게 파악한 거의 최초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에 발생하게 될 증여적인 커뮤니케이션은 교환의 원리가 끼어들면 곧바로 단절되어 버린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교환 원리의 기초를 이루는 ‘부정성’이나 ‘분리성’에 의해, 자발적이고 긍정적인 힘의 움직임이 방해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 이 이야기를 마르크스 식으로 분석해보면, 인간의 내적 그리고 외적인 자연과의 사이에 열려 있어야 하는 커뮤니케이션의 통로는, 근대의 시민사회를 형성하는 근본적인 원동력이었던 교환적 ‘부정성’의 과도한 영향력에 의해 도처에서 방해를 받게 되었다는 식의 분석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201~207)”

     

    여성의 열락 & 팔루스의 열락 경험담 >

    나는 30대 초반부터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쳤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들이 그림을 좀 더 재밌게 그리도록 돕는 작업은 나에게 기쁨과 보람을 주었다. 특히 아이들이 자기 얘기를 자유롭게 한 후에, 그것을 자기 그림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겪는 즐거움을 같이 경험하는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 아마도 이것이 ‘여성의 열락’을 느끼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30대 후반에 방문미술 지사를 차려 사업을 시작하면서, 아이들과 그림을 그리는 즐거움이 점차 사라졌다. 매달 지사운영에 들어가는 비용, 본사와의 관계, 선생님들과의 어려움 등에 시달리다 보니 아이들과 그림을 그리는 시간들이 그저 시간을 보내기 위한 시간이 되어갔다. 아이들의 자기 표현을 유도하기 보다는 준비한 프로그램에 따라 그림을 완성하거나, 나의 기술을 전수해주는 것에 급급한 수업이 되어갔다. 그러면서 한 달 마다 들어오는 교습비를 받는 순간에 느끼는 짧은 기쁨! 이것이야말로 ‘팔루스의 열락’의 순간이었던 같다.

  • 2021-07-20 17:27

    여성의 열락과 팔루스의 열락 경험담

     

    여성의 열락(어제 있었던 일)

    전화가 온다. 민서다. 민서는 지난 2년간 내가 돌본 8살 짜리 꼬마아이다. 돌봄을 마무리한지 7개월이 지났지만 민서는 요즘도 종종 내게 전화를 한다.

    종알종알 꼬마의 일상사를 늘어놓는다. 나는 그 종알거림이 너무 너무 귀엽고 재밌다.  2년간 민서와 함께 하면서 이 아이의 특유의 변덕과 고집에 부글부글 열 받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는 애교스러움과 발랄함에 참 즐거웠다. 우린 많이 웃었고, 많이 돌아다니고, 많이도 조잘거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민서도 컸고,,,,, 나도 컸다. '나도 컸다'고 느끼는 지점이 바로 '여성의 열락'과 맥이 닿는다. 전화를 끊을무렵 민서가 말한다.

    "선생님! 선생님은 선생님이기도 하지만, 나한테는 두번째 엄마예요!"  두번째 엄마....이 말에 내 입꼬리가 올라간다. . 

     

    팔루스의 열락

    내가 (자본가처럼) 가치를 증식하면서 씨~익 웃어본 적이 있었던가? 돈 버는 재주도 없고, 딱히 관심도 없는 나는 그런 적이 없다. 그러니 팔루스의 열락이라고 말할만 게 뭐가 있을까 싶다. 그러나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서...

    이십대 초반에 배낭여행비 벌려고 방학때면 알바를 하곤 했다. 여러가지 해봤는데 그 중 후회되는 것이 있다. 그당시 지방자치제도가 처음 도입되어 지방 선거가 있었는데 나는 어떤 시의원 후보 홍보? 알바를 잠시 했다. 사무실에 앉아 두툼한 전화번호부 책을 갖다두고, 한표 찍어 달라며 일일이 모르는 사람들 집에 전화를 했다.(요즘이라면 말도 안될 일이지만 그땐 그게 통했다-.-;;;) 나는 내가 홍보하고 있는 후보가 어떤 사람인지, 심지어 무슨 당인지.. 관심도 없었다. 그냥 짭짤한 시급에 눈이 멀어 아무 생각없이 그 일을 했다. 생각하니 부끄럽다.  지금이라면 절대 그런일은 하지 않을텐데....

  • 2021-07-20 21:32

    여성의 열락- 팔루스의 열락

     

    첫번째 생각- 공동육아어린이집에서는  기본적으로 선생님들은 교육에 전념하고, 엄마들이  어린이집의 운영을 맡는다.

    그때, 엄마들은 일년동안 각각의 소위를 담당하는데,
    나는  여러 복잡한 상황속에서  운영소위, 교육소위를 맡았었다.
    의견을 듣고 모으고 적용하면서 힘든일도 많았지만,
    함께 일을 하고,  공부를 하고, 아이들을 돌보고,  일련의 계획들을 하나하나 넘어갈때 마다,우리는 우리안의 무언가가 뭉근하게 뜨거워지는 순간을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때의 경험을 통해 ,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한 살 더 먹었다. 뭉근히 뜨거워진 순간이 여성의 열락을 만나는 지점이였나 싶다.

     

    두번째 생각- 그림이 나를 통과해서 종이에 그려지는 순간순간,또는  여기까지 라는  정답없는 작업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
    그런 내 안을 차오르는 그 어떤 상태를 여성의 열락 이라고 할수 있다면, 전시를 위해 그 작업에 가격을 정하고  상품화하는  순간은 팔루스의 열락을 경험하는 지점일수 있을것 같다.
    내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내게 주어진 상황을 고려해,
    굉장히 밀도있는 시간과 작업량, 신속한 자아전환을 위한 에너지가 필요한데, 그 작업에 가치가 정해지고 상품이 될 때마다, 나는 조금씩 작아진다.
    그렇지만,  취미를 위한 작업이 아니기에, 나의 작업을 알리고 그림을 팔아야한다.
    나의 노동은  여성의 열락과 팔루스의 열락을  오고가는 건가...

     

     

     

     

     

  • 2021-07-20 22:12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에 발생하게 될 증여적인 커뮤니케이션은 교환의 원리가 끼어들면 곧바로 단절되어 버린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교환 원리의 기초를 이루는 ‘부정성’이나 ‘분리성’에 의해 자발적이고 긍정적인 힘의 움직임이 방해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내적, 그리고 외적인 자연과의 사이에 열려 있어야 하는 커뮤니케이션의 통로는, 근대의 시민사회를 형성하는 근본적인 원동력이었던 교환적 ‘부정성’의 과도한 영향력에 의해 도처에서 방해를 받게 되었다는 식의 분석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교환의 원리와 동일한 본질을 가진 ‘테크네’적인 근대기술을 발달시킴으로 해서, 인간은 “침묵하는 자연”을 직접 목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현대의 우리는 오히려 자연에 대해 ‘도발’과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라는 무리한 질문을 계속 퍼부어왔기 때문에, 이제는 자연이 응답을 중지해버린 것이 아닐까요?

    집을 짓고 있다. 물론 내가 짓는 건 아니고 돈만 내고 재료와 모양을 선택하는 일들을 하고 있다. 다행히 좋은 분들을 만나서 팔루스의 열락만 향락하지는 않고 있다. 여성의 열락은 존재들 사이에 섬세한 감정나눔이 있는가에 달려있는 것 같다. 집을 짓는 일에서도 집 짓는 과정에 관여하는 사람들 사이에 어떤 감정들이 오고가는지가 중요한 듯하다. 모든 일에서 그럴 것이지만 집짓기처럼 큰 돈이 드는 일은 교환의 원리의 기초가 되는 부정성과 분리성이 발휘될 가능성이 아주 크다. 운 좋게 믿을만한 사람들과 연결되어 커뮤니케이션의 통로가 열린 느낌이라 다행이다.

  • 2021-07-20 22:23

     

    p157 앞에서 소개한 <1844년 경제학 철학 초고>라는 텍스트의 다른 부분에서, 그는 근대산업이 노동과 그 대상과의 관계를 어떻게 바꾸어버렸는지를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대지를 경작하는 농민은 그 공간에서 결코 ‘이방인’이 아닙니다. 하지만 근대산업의 노동자의 경우는 사정이 다릅니다. 그들은 생활을 위해 일하지만, 그것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모든 환경에 대해 그들은 결코 진정으로 친밀감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즉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공장의 기계나, 그들이 만들어낸 제품, 그들의 신체를 움직이거나 사용하는 법, 그리고 대화법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이방인’처럼 느끼게 합니다.

    p201 신화나 옛날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이 자신에게 던져진 질문에 제대로 대답했다면 초자연적인 존재의 원조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제대로 대답을 못했거나 혹은 대답이 잘못되어 엄청난 고통을 겪는 처지가 되었다는 식의 구성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번 주에도 고마리님의 밭에 다녀왔다. 고마리님이 가져오시는 꾸러미의 스토리들도 더 알아가게 되고 함께 일하는 것도 좋아서 기회가 되면 또 갈 생각이다. 그런데 마음 한편에는 애매모호한 감정이 있다. 지난 번 우리조 토론에서 나왔던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나는 텃밭 일을 하겠다고 자동차에 몸을 싣고 오간다. 오가는데 두 시간정도가 걸리는 거리다. 농사일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조금씩 알아가는 것도 좋지만, 솔직히 받아 놓은 두 시간 일을 하고 오는 길은 갈 때보다 한결 마음이 편안하다(저질체력ㅠㅠ). 이런 나는 여전히 대지에게 있어서 ‘이방인’이 아닐까. 나의 발자국이 대지에게는 친밀감이 되기에는 너무 멀리서 온 낯선 걸음이 아닐지 모르겠다(점점 더 가까워지고 싶긴 하다). 매주 꾸러미를 받아서 잘 먹고 또 꾸러미를 기다리지만 여전히 소비의 범주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좋은 소비라며 안주하는 나의 모습. 어쩌면 도시에서 살면서 근본적인 생활의 변화는 덜 쓰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덜 쓰는 일도 쉽지가 않다. 날이 덥다. 우리집은 가족 3인 이상이 있을 때 에어컨을 켤 생각을 했는데 조금씩 타협하고 싶어진다. 에어컨을 켜면 끄는 일이 점점 쉽지 않게 되기에 생각이 많아진다. 더운 날씨와 타협해 에어컨을 켜는 대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농사일을 알아가는 것도 나름 의미있지만, 도시에서 사는 나는 매일 마주하는 핸드폰이나 자동차, 엘리베이터 등 내 주변 사물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조금 더 예민하게 질문해야겠다.

  • 2021-07-20 22:43

    p206

    인간은 그저 성배에 대해 질문을 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당신의 정체는 도대체 뭡니까?" 그런 질문을 받은 것만으로도 코르누코피아인 성배는 기꺼이 그때까지 닫혀 있던 물을 해방시켜, 자연으로부터 풍요로운 부가 샘솟듯이 콸콸 쏟아져 나오게끔 합니다. 

    >>성배에 대해 적절한 질문을 하는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걸지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p207

    페르스발이 이때 '부정성'을 발휘함으로 해서 질문은 나오지 않고 정체된 자연의 힘의 유동이 발생하지 않게 되어, 왕의 병은 악화되고, 국토는 점점 더 황폐해졌다는 겁니다. 

    > 부정성이라는것이 어떤의미인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것으로 인해 질문을 하지 않을때 자연의 힘이 정체되어 순수증여가 생산되지 않는다는 뜻인것 같다. 

    p207 

    이 이야기를 마르크스 식으로 분석해보면, 인간의 내적, 그리고 외적인 자연과의 사이에 열려 있어야 하는 커뮤니케이션의 통로는, 근대의 시민사회를 형성하는 근본적인 원동력이었던 교환적 '부정성'의 과도한 영향력에 이해 도처에서 방해를 받게 되었다는 식의 분석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교환적 '부정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가 잘되지 않아요. ㅜㅜ

     

    ★팔루스의 열락과 여성의 열락의 경험

     

    1. 팔루스의 열락과 여성의 열락이란, 작가가 이야기 했듯이 양립되어야 하는 것 같다.

    이 치열한 도시에서 내가 출산을 하고, 아이를 돌보며, 그리고 아이쿱생협에서 활동하며,

    나는 아이의 놀며 배우며 자라야 한다는 (내 기준에서의) 자연스러움을 바탕으로 지낼수 있었고, 외벌이 가정임에도 (내 기준에서의) 부유하지 않지만 부족함도 없는 가계에서 아이쿱에서 자원활동을 하며 내가 지지하는 협동조합의 가치와 환경활동을 하며 보람을 느꼈다. 하지만 내 소유의 집이 없는 나는 간간히 들려오는 부동산 투자나 투기로 큰 이익을 얻은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면, 내 여성의 열락이 무너지고 팔루스의 열락에 대한 열망이 강해지곤한다. 그리고 생계를 위해 치열한 팔루스의 열락 사이에 서있는 남편을 보면 내가 누리고 있는 여성의 열락에 대해 부채감이 든다. 일방적으로 뽑아내고 획득하는 팔루스의 열락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2. 인간으로서 살아가며 최대한 지구의 영향을 주지 않고 살고 싶다.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도록 운전을 해서 이동하고, 손쉽게 청소하기 위해 청소기를 쓰고, 내 몸의 쾌적함을 위해 에어컨도 튼다. 이러한 것들이 자연에서 뽑혀져 나온 것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나의 편안함을 위해 이런 것들을 사용하고 있다. 나는 인간으로서 이곳에서 살면서 팔루스의 열락에 발을 담그고 있다.

     

     

  • 2021-07-21 00:23

    하이데거의 ‘존재’라는 개념에는 우리의 순수증여라는 개념과 같이 자신의 내면에서 나와 스스로를 열어가려고 하는 힘이 숨겨져 있습니다. 지금은 아직 갇혀 있는 채 나타나지 않은 것을,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세계를 향해 모습을 드러나도록 유도해 가는 것, 이것이 바로 ‘존재’입니다. 그것은 순수증여의 근원에 존재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진리’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보통 ‘자연’이라 불리는 것은 자신에게 내장되어있는 힘과 형태에 대한 지성을 토대로,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포이에시스로서의 활동을 ‘자연’이라고 부른 거라고 할수 있을 겁니다. 포이에시스란 인간이 자연의 내부로부터 자연의 비밀을 끌어내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호출을 하면 그에 응해서 자연이 자발적으로 응답하는 경우에만 포이에시스 식의 ‘존재’의 출현과 발생이 가능해집니다.(210)

     

    --고마리 농장에 어설픈 노동력을 베풀고 다닌 지 두 달이 다 되어간다. 어찌 된 일인지 더 큰 선물을 받고 와 버린다. 흔하게 봐왔던 풀들과 채소들이 그곳에선 각별해진다. 씨와 모종을 직접 뿌리고 심으며 갈 때마다 놀라운 성장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그들이 자라는 과정을 함께하는 자체만으로 그 존재로 건너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온몸으로 그들을 느끼며 관찰하기 때문일까? 베르가못잎, 토마토, 깻잎을 딸 때마다 휘감는 아찔한 향기가, 잎들을 수확 할 때 손끝으로 느껴지는 싱그러운 감촉이, 마른 땅에 물을 주면서 그들의 환희가 함께 느껴질 때, 과거와는 다른 느낌으로 그들의 세계로 건너가는 큰 기쁨을 맛본다.

    페르스발은 질문을 하지 않아 국토의 황폐화를 초래했습니다. 그런데 현대의 우리는 오히려 자연에 대해 '도발'과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라는 무리한 질문을 계속 퍼부어왔기 때문에, 이제는 자연이 응답을 중지해버린 것이 아닐까요? 페르스발과 마찬가지로 현대인도 적절한 질문을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그로 인해 발생되는 온갖 형태의 황폐함 속으로 내팽겨쳐진 상태입니다.(213)

  • 2021-07-21 09:00

    새벽에 일어나 미처 못 읽은 세미나 책을 읽었습니다. 요즘 피곤에 쩔어 초저녁에 골아떨어지고 있습니다;;;<사랑과 경제의 로고스>>가 과연 어떻게 끝이 날까 무척 궁금했는데요. 끝까지 읽고 나니 아쉬운 점도 있고, 만족스런 지점도 있었습니다.

    아쉬웠던 지점은

    이 책의 결론이 모스가 말했던 *고귀한 소비(depense noble)*와 연결되는 이타심, 도덕성, 고귀함에 꽤 호소하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자본주의 구조 아래에서 인간의 고귀함에 호소한다는게 얼마나 유효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또한 신이치는 자연을 인간의 과학 기술(테크네)에 의애 까발림 당하는 존재, 어느정도는 소극적인 대상으로 묘사하는데 그쳤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이 과연 그렇게 침묵하는 소극적 존재일까요. 어느 정도까지는 침묵할지 모르지만 그 어느 정도를 넘어섰을때 자연은 무섭게 인간에게 보복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하루도 건너뛰는 법이 없는 기후 재난 뉴스를 접할때마다 자연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인간이란 얼마나 어리석고 미약한 존재인지 느끼고 있습니다.

    아쉬웠던 점이 조금 있긴 하지만 이 책은 제게 중요한 것을 남겼습니다. 바로 '제대로 질문'하는 법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질문은 물질만능 시대에서 황폐함과 고립감이 왜 오는지, 지금 어떤 행동이 필요한지,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아무 생각없이 살거나 가치의 증식을 바라는 팔루스의 열락만을 추구할때 인간은 파멸의 길로 가게 되겠지요.  

    몇주에 걸쳐 좋은 강의 해주신 뚜버기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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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들> 9-11장 후기 (1)
뚜버기 | 2023.07.19 | 조회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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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들> 12장 메모 올립니다 (5)
띠우 | 2023.07.18 | 조회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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